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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지정 중요 문화재 도록
4. 회회청과 피당청 유품
서론
1, 回回靑{蘇麻离靑]의 色相과 特徵
2, 陂塘靑의 色相과 特徵
유품감상
3, 回回靑[蘇麻离靑]의 유품과 문양
1) 白磁靑畵 梅竹文 甁 (15세기 중엽)
2) 白磁靑畵 雙龍如意珠雲文筆筒(15세기 중엽)
3) 白磁靑畵 忍冬草喜字文畵甁(15세기 중엽)
4) 明 靑畵雲龍大扁壺(宣德窯)(1426∼1435) 재위 10년간
朝·中 回回靑 顔料의 色相과 特徵 比較
4, 陂塘靑顔料의 遺品
1) 興寧府大夫人墓誌銘 誌石(세조2년,1456년)
2) 白磁靑畵詩名 전 접시 (15세기후반)
3) 白磁靑畵 「成化年製」銘 忍冬草喜字文畵甁(15세기후반)
4) 白磁靑畵 忍冬草喜字文 壺(15세기후반)
5) 靑畵白磁 唐草文文字入リ壺(淸 後代)
6) 明 靑畵花鳥杯(成化窯)(1465∼1487)在位 22年間
朝·中 遺品 顔料의 色相과 特徵 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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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양해 말씀을 드립니다. 본인의 블로그에서 『청화백자 연구Ⅰ』권을 읽으신 분께서는 혼란한 점이 있으실 것입니다. 『청화백자 연구Ⅰ』권은 1987년에 썼으니 24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는 청화안료가 밀수입된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후『백자청화연구Ⅱ』권을 연구하면서 창화안료가 밀수입된 사실을 발견하였으니, 인용 사료와 서술에 변화는 불가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본지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난 20여 년간 새롭게 발굴된 사료도 있고 도자사 연구에 국제적 환경도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은 국용자기에 밀수입된 안료를 쓰지 않고 하엽록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도자사 연구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가야 할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백자청화 초기의 안료는 회회청과 피당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회회청 유품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고, 피당청의 경우는 기년명 유품이 있습니다. 안료 연구의 심도가 깊었다면 회회청 유품 그 자체가 입증 자료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明 靑畵에서 回回靑을 使用하던 期間은 宣德年間(1426~1435년)初부터 成化年間(1465~1487년)의 初期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유물에 채화된 안료는 이 연구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제조 연월이 분명하게 각명된 興寧府大夫人墓誌銘의 유품은 景泰7년 (세조2년,<1456>)입니다. 그러니 중국에서 피당청을 개발했다는 성화 연간 보다 9년이나 앞선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임이 피당청으로 채화된 유품이 있으니 중국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중국의 안료 연구를 조선왕조의 연표와 대조하면 회회청은 세종 7년부터 세조 말년까지가 해당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료가 밀수입되었으니 분명히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조선 도자사 전반이 그러하듯 백자청화사의 연구도 일제 강점기 침략자(일인)들에 의하여 연구가 시작되었으니 당시의 실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백자청화의 시원을 처음 연구 발표한 사람은 小田省吾였습니다. 그는 조선 도자사의 학문적 기초를 위하여 『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서(史書)를 탐독하고 도자사 문헌 사료를 집성한 공로가 인정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발굴한 사료의 인용 방법을 예시나 하듯 成俔의 저술인 『慵齋叢話』를 인용하여 백자청화사 연구의 효시(嚆矢)로 남겼습니다. 즉
“世宗朝御器專用白磁至世祖朝雜用彩磁라 云云하였다. 이에 따르면 李朝 第四代 世宗때의 宮中에서는 오직 白磁를 쓰다가 第七代世祖의 대에 이르러 彩磁도 함께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문)“李朝燒.....世宗朝御器專用白磁 至世祖朝雜用彩磁 云云とある。之に依ると 李朝第四代世宗の頃 宮中の器用は專ら白磁を用ひ, 第七代世祖の頃から彩磁を交へ用ふるに至た事が判る.” 小田省吾 著,『朝鮮陶磁史文獻考』(東京: 學藝書院,1936), 21쪽.
“靑華磁器의 自國製造...李朝의 시작부터 5·6十年이 經過한 第7代 世祖의 시대에는 靑華磁器의 原料인 回回靑, 卽吳須(코발트의 일본식 명칭)를 중국에서 輸入하여 자국에서 製造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慵齋叢話』에 기록이 명백하다. 世宗朝御器專用白磁至世祖朝雜用彩磁。求回回靑於中國 畵樽罍盃觴與中國無異(後略)”
(원문)“靑華磁器の自國製造...李朝の初から5·6十年を經過した第7代世祖王の頃になると,靑華磁器の原料なる回回靑,卽ち吳須は支那から輸入して自國に於て製造してゐる。之は『慵齋叢話』の左の記事が明かである。世宗朝御器專用白磁至世祖朝雜用彩磁 。求回回靑於中國 畵樽罍盃觴與中國無異(後略)” 小田省吾 著, 『朝鮮陶磁史文獻考』(東京: 學藝書院,1936), 22,24쪽.
이 밖에도 일인 연구자들은 많으나 모두가 小田省吾의 주장을 따랐거나 그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笠井周一郞만은 『慵齋叢話』중「與中國無異」를 사료로 들어 成化에 걸쳐 正德, 嘉靖, 萬曆대의 회회청을 많이 썼다는 주장이다.
笠井周一郞의 주장
“李朝 靑花의 처음에는 宣德 靑花를 憧憬하였으나 實際 그 技術을 廣州의 官窯에 드려 와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世祖代이다. 이때는 벌써 宣德代는 지난 지 20年餘, 景泰末에서 天順, 成化에 걸쳐진 시기이니, 드려온 顔料는 그 試作時代의 倣造品을 除하면 벌써 宣德의 蘇泥勃靑은 아니고, 成化에서 正德, 嘉靖, 萬曆의 回回靑을 많이 쓴 것으로 想像할 수가 있다.
(원문)“李朝の染付は,その最初には宣德の染付に憧憬してゐたのにもかかはらず, 實際に,その技を廣州の官窯に移し入れて,染付を燔き始めたのは,世祖の朝で,そのときは旣に宣德を降ること20年餘, 景泰末から,天順,成化にかかてゐたので,明から取り寄せた顔料は,その試作時代の倣造品を除けば, ,宣德の蘇泥勃靑ではなく…成化から正德,嘉靖,萬曆の回回靑が多く用ひられたというふうに想像されるのである.”笠井周一郞,『李朝染付』(東京: 寶雲舍, 1942), 108~109쪽
“「中國과 다름없다는 것에 相當하는 明風의 破片을 包含하고 있기 때문이다. (中略)청화는 明의 陶技를 받아들여 모방한 것뿐이다. 소위 模倣期의 것과 그 시기를 지나서 朝鮮化가 완성된 시기의 破片까지도 중국을 모방하였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문)“「中國と異なるなしというものに相當する明風の破片を包含しでいるからで」(中略)染付では明の陶技を取り入れたばかりのもの, いわゆる 模倣期の 古染と それが 旣に 朝鮮の 個性に 同化しで 李朝染付としで 全く完成しだ 頃の 破片まで, 殆ど李朝期に於けるやものの大部分の種類を網羅してゐるといっても差支 ないと思 ふ。”笠井周一郞 著,『李朝染付』「廣州官窯」道馬里窯 (東京:.寶雲社刊,1942) 156-157쪽.
일인들의 연구에 이어진 우리의 연구를 살펴보기로 한다.
鄭良謨의 주장
“『세종실록』에도 보면 청화안료를 중국에서 들여오는 것을 엄금했으며, 중국의 『大明律』에도 청화안료가 외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엄한 금령으로 다스리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벌써 세종 때부터 수입회회청으로 청화백자를 소량이지만 번조한 것 같고....」 鄭良謨 著.『韓國의 陶磁器』「廣州分院窯址에 對한 編年的 考察」(서울: 韓國美術 叢書, 文藝出版社. 1991, 452쪽
“「우리나라는 새조 때부터 중국에서 수입한 회회청으로 청화백자를 번조하였으며....」韓國美術 叢書, 文藝鄭良謨 著,『韓國의 陶磁器』「廣州分院 窯址에 對한 編年的 考察」(서울: 出版 社. 1991), 446쪽.
위에서 본바와 같이 鄭良謨의 주장에는 문맥에 통일성을 상실하여 혼란을 준다. 즉 세종대에 조선에서는 청화안료의 수입을 금하였고 중국에서도 유출을 엄히 단속하였는데도 백자청화를 만들었다고 하여 청화안료의 밀수입을 암시하더니, 세조대에는 공공연히 수입안료로 백자청화가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 두 주장은 서로 상치될 뿐만이 아니라 주장에 근거 사료나 유품 제시가 없으니 모두 근거 없는 주장이니 가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姜敬淑의 주장
“조선의 백자청화는 분원에서 만들었고 분원이 설치된 시기는 1469년으로 보았다. 백자청화의 안료는 공무역으로 조달 되었다
고 하였다. 姜敬淑 著, 『美術史學硏究』통권 237(서울: 韓國美術史學會, 2003), 95-96쪽: 姜敬淑 著, 美術史學硏究』통권 237 (서울: 韓國美術史學會, 2003), 99쪽.
尹龍二의 주장
“「청화백자 전 접시편, 가는 모래받침의 순백자들이 갑벌 편과 함께 발견되었다. 특히 天地玄黃 명의 요지군은 그 제작시기가 1470년대에서 1550년대까지로...」그 하한 년을 1470년으로 보았다. 尹龍二 著,『韓國陶瓷史硏究』,「朝鮮陶瓷의 變遷」(서울:文藝出版,1993), 335-9쪽.
金英媛의 주장
“司饔房을 司饔院으로 고치고 정식으로 녹관(祿官)을 둔 세조 13년 (1467)경이라는 견해를 견지하는 바이다. 金英媛 論「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한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 36쪽
청화안료를 중국에서 공무역으로 수입하여 어기(御器)를 만드는데 정성을 다했다고 하였다. 金英媛 著,『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한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5)
이상에서연구사를 살펴보았다. 일인 연구자들은 『慵齋叢話』에 기술된 求回回靑於中國이라는 기록을 인용하였으나 중국에서 구해온 回回靑의 수입 방법 (공무역과 밀무역)에 대하여는 연구가 없었다. (중국의 무역정책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국제관계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하다.)
일인들은 청화안료의 수입 방법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 일제의 연구를 추종하던 김영원이 청화안료를 중국에서 공무역으로 수입하였다는 근거도 없는 글을 썼으나 이 글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은 없었다.
김영원의 주장처럼 청화안료를 중국에서 공무역으로 수입하였다면, 그 기록만으로도 조선 백자청화의 시원은 분명하게 밝힐수 있다. 그러나 청화안료는 명나라의 사정(무역정책<수출금단 품목>)에 의하여 공무역으로 수입되지 못하고 밀수입 되었으니 안료 수입에 관한 기록은 역사서 어디에도 없다.
지금의 도자사는 청화안료를 중국에서 공무역으로 수입하였음을 전제로 연구되었으니 밀수입된 환경에서의 연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조선 청화는 중국 안료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중국 청화안료의 변천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안료가 들어왔을 것이나, 여기에서 대상이 되는 안료는 回回靑[蘇麻离靑]과 陂塘靑이니 이 두 종류를 살펴보기로 한다.
元末 明初 西域(페르시아 등지)에서 수입된 코발트를 중국에서는 蘇麻离靑 ·蘇勃泥靑 ·蘇泥渤靑 등의 명칭으로 통용하고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回回靑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화안료의 성분이나 명칭에 대하여 확실한 정보가 없었던 듯하다. 그 증거로『용재총화』의 기록에 중국에서 쓰고 있는 안료가 무슨 안료인지를 몰라서 중국에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고서야 土靑임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용재총화』의 한 문장에 回回靑과 回靑, 두 가지 안료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정보에 어두웠던 증거이다.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 笠井周一郞도 正德, 嘉靖, 萬曆의 回回靑을 많이 쓴 것으로 想像할 수가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실상은 回回靑이 아니고 回靑과 石子靑이 사용되던 시대이다.)
지금의 백자청화 시원년 연구는 직접 사료가 없으니 방계사료를 찾아 연구자 나름으로 구구각각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중에 자리를 굳어가는 설이 세조 원년설이다. (중궁의 금잔을 화자기로 대신하라는 왕명과, 흥녕부대부인묘지명의 유품을 결합한 이론이 세조 원년설이다.
흥녕부대부인묘지명의 유품은 피당청의 특징을 가진 안료이다. 이 피당청 보다 한 시대 앞선 안료인 회회청 유품이 있다. 그러니 회회청 유품이 조선청화 시작 최초의 유품일 것이다. 그러나 이 유품에는 제조시기를 담보할 사료나 기년명 유품이 없다. 실물은 있으나 시대를 입증할 자료가 없다고 회회청 안료의 유품을 초기 청화에서 배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은 시대를 입증할 기년명의 유품이 없으니 회의적인 눈으로 볼지 모르나, 이를 입증할 방법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은 두 가지로 가정해 봅니다.
첫째, 회회청 시대에 만든 왕실의 묘지에는 반드시 회회청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그 중에도 世宗이나 文宗의 묘지는 반드시 회회청 안료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이렇게 추고하는 이유는 국용자기는 중국 사신의 눈을 피할 수 없어 하엽록을 썼으나 지석은 땅속에 매장하는 것이니 사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릉 발굴은 기대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둘째,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이 안료의 성분을 분석할 수 있을 때가 묘지의 발굴보다 앞설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은 기년명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回回靑[蘇麻离靑]안료의 특성을 부인할 수 없는 유품이 있으니 장차를 위하여 회회청 유품도 함께 초기유품으로 검토해 둡니다.
1. 회회청(回回靑)[蘇麻离靑]의 색상과 특징
회회청의 색상은 심청남색(深靑籃色)이고 특성은 산휘현상(散暈現狀)으로 선의 윤곽이 선명하지 못하고 해무리처럼 퍼지고 윤기(潤氣)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선덕청화에 많이 쓰였다. 호암미술관 연구실 저『조선백자전 Ⅱ』「청화안료에 대하여」(서울: 재단법인 삼성문화재단, 1985) : 汪慶正 著, 「靑花料考」『文物』(臺灣, 中華文物學會, 1982. 8, )
2. 피당청(陂塘靑)의 색상과 특징
피당청의 색상은 (청공청색)天空靑色이다. 회회청 색상보다는 묽고 엷은 당청남색(淡靑籃色)이며 윤곽선(輪廓線)이 회회청처럼 퍼지지 않고 필선(筆線)이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호암미술관 연구실 저『조선백자전 Ⅱ』「청화안료에 대하여」(서울: 재단법인 삼성문화재단, 1985) : 汪慶正 著 「靑花料考」『文物』(臺灣, 中華文物學會, 1982. 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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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감상
3. 회회청[回回靑]의 유품과 문양
1) 백자청화 매죽문 병(白磁靑畵 梅竹文 甁)
高 19,1㎝,구경4,8㎝, 低徑6,5㎝(16세기 전반)
參考圖 中國의 甁
“靑花四季花卉玉壺春甁”(永樂窯) 당시 중국의 꽃 문양은 사계화가 대부분이다. (사계화는 하나의 줄기에 사계절의 꽃이 피는 것을 말한다.)
參考圖, 中國의 梅·松·竹 文
“靑花三友圓洗(宣德 窯)圖58, 중국에서는 梅·松 竹·을 三友라고 하는 것 같다, 매 송 죽 문양이 도식화되어 우리 문야인 작품성의 그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출처, 『조선백자전 Ⅱ』의 색도 12호의 유품. 이 책에 회회청 안료의 유품으로는 유일하다. 따라서 시대 추정도 해설문에는 15세기 되어있다.
안료, 심청남색이고 기름으로 닥은 듯 윤기가 많고, 청화는 퍼져서 윤곽이 선명치 못하고 필선도 분명치 못하다. 이 안료는 회회청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수입 안료에 이와 같은 특징의 안료는 회회청 밖에 없다.
문양, 기존의 백자청화 연구에 초기 문양은 중국의 문양을 닮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선 백자청화초기의 문양은 중국 무양을 닮지 않고, 매화와 대나무를 그렸다. 이 시대의 중국 도자기에 매죽을 소재(素材)로 한 그림은 보지를 못했다. 우리의 사군자는 매·란 ·국·죽이지만 주국에서는 매·송·죽을 삼우로 표현하고 대부분의 경우 매·송·죽의 삼우도를 그리고 있다.
2) 백자청화 쌍룡여의주운문필통(15세기 중엽) 白磁靑畵 雙龍如意珠雲文筆筒(15世紀 中葉)
高13,5㎝, 口徑16,3㎝, 低徑 13,5㎝, 前後兩面文樣(15세기)
參考圖, 中國의 龍紋樣
“靑花龍紋大盤”(宣德窯) 圖 67 : 중국의 용 그림은 대부분 저채(全彩)하고 황제의 상징 문양이기에 발톱을 오조를 그린예가 많다,
출처, 개인소장
안료, 색조는 도⑴의 매죽문보다 진하게 보이는 심청남색이고 윤기가 많고, 먹물이 배지에 배인 듯 피(번짐)었다. 즉 선덕 청료의 특유현상으로 나타나는 산휘현상인 해무리의 가장자리와 같이 필선의 윤곽이 선명하지 못하고 진(농)한 곳에는 몽어리가 생기는 회회청의 특징이 그래도 나타나는 청료이다.
문양, 하늘 가운데 떠있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삼 방면에서 약화된 구름이 떠있다. 여의주를 향하여 양쪽에서 두 마리의 용이 희롱하고 있는 문양이다. 용의 비늘 그림은 쌍구법으로 선을 그리고 채화는 아지 않았으나 채화한 중국그림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이는 고가품인 청화 안료를 절약하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조선의 용과 중국의 용 그림과의 구별은 비늘의 채화에도 있지만 용의 눈이 다르다.
조선 용의 눈 그림은 사람의 눈이거나 귀면(鬼面)이나 맹수의 눈을 그렸다. 그러나 중국의 용문양은 황실 전용의 문양이기 때문에 역대 용의 눈 그림이 어안(魚眼) 즉 잉어의 눈, 즉 동그란 눈으로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3) 백자청화 인동초희자문화병 (15세기 중엽)(白磁靑畵 忍冬草喜字文畵甁 (15世紀 中葉)
高37㎝ 口徑 18,3㎝ 低徑 13,5㎝( 15世紀 中葉)
參考圖,中國의 甁
“靑花靈芝尊” (宣德窯) 圖 41: 당시 중국의 도자기는 세계시장에 수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국의 요구에 따라 문양과 기형이 세계화 하고 있었다. 이밖에 문양으로는 범어를 문양화한 것과 서역의 문양을 도안화 한 것들이 허다하다.
參考圖, 신라토기의 화병
위의 화병은 안앞지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이 토기가 고려(고려 유품은 없다)를 거쳐 발전하여 제시자료로 발달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중국기형은 이와 류사한 기형 자체가 없다. 그러니 우리의 기형은 전래의 기형을 발전시킨 것이지 중국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출처, 개인소장
안료, 제시 유품 1)의 매죽문호와 동일한 청료로서 심청람색의 회회청안료이며 윤기가 많은 최상급 안료이다. 이 병의 안료는 회회청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선덕 청료와의 정색비교(呈色比較)에서 회회청 안료임을 확인할 수 있는 안료이다
.
문양, 이 화병의 문양은 우리 역대의 문양, 즉 고려 시대의 청동기의 은입사 문양을 이어받은 문양이다.
주 문양으로 꽃 과 쌍희(희자 두자를 합한)자를 그리고 그 사이를 조화롭게 역대의 문양을 원용하여 그림을 완성 한 것이다. 꽃은 제비꽃이다, 이 꽃을 선택한 것은 청화안료의 빛을 닮은 청색 꽃인 제비꽃을 그렸다고 보면 우리 조상들의 정직성도 함께 보인다.
세선(細線)으로 그림을 완성한 것으로 보아 청화안료가 고가품이었고 구하기가 어려웠던 사정을 함께 전해준다. 이 문양은 피당청 유품(3,4,5,)의 채[모본]가 된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4). 명 청화운룡대편호 (선덕요) (明 靑畵雲龍大扁壺(宣德窯)
高 45公分口徑 8公分 足長徑 14.5公分 足短徑 10公分 深 43.9公分
출처, 明瓷名品圖錄, 洪武 永樂 宣德編 圖 33
안료, 선덕청화 유품이다 조선에서 사용된 회회청과 색상 대조용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문양, 중국 관요 유품의 문양은 대다수가 용화(龍畵)이다.
朝·中 회회청 안료의 색상과 특징 比較
시각적으로 색상의 농담에 차이가 있으나 중국 유품에는 색의 조정을 위하여 토청을 가미하였고 조선은 단순사용(토청을 첨가하지 않고)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색상은 다르게 비쳐도 특성은 다르지 않다.
4, 피당청 안료(陂塘靑 顔料)의 유품과 특징
1) 흥녕부대부인묘지명 지석(세조2년) (興寧府大夫人墓誌銘 誌石)(世祖2年)
白磁靑畵誌石 4장 製造年月 景泰七年丙子冬十月(世祖二年 <1456.>)
출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안료, 본 유품은 조선 땅에서 번조된 백자청화 (현재까지) 즉 백자청화의 시원년을 확실히 알려주는 확고한 자료이다. 따라서 유
품에 사용된 안료가 중국에서 연구된 자료로 보면 회회청이어야 하나 유품에 채화된 안료는 회회청의 특성보다는 피당청의 특성
이다. 본 화면에는 사진을 스캔으로 전사하였더니 흐려져 안료의 실체를 확인이 안 되지만 실물을 밀착 대조하면 누구나 피당청임을 인정할 수 있는 유품이다. 이 자료는 학교를 방문하여 실물을 확인하시면 수긍이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양, 지석에 쓰인 글씨로는 안료의 색상을 읽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으나 안료의 특징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회회청이라면 필선(筆線) 이렇게 선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白磁靑畵詩名 전접시 (15세기 중엽)
高19,1㎝, 口徑 4,8㎝, 低徑6,5㎝
출처,『조선백자전 Ⅱ』색도 8
안료, 이 유품의 색상은 표준 유품인 묘지의 색상보다는 밝다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바탕 백색의 영향일 뿐 피당청의 특징은 분명하다.
이 안료의 색상은 담청남색이고 맑은 백색에 잘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색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유품이다.
문양, 문양은 詩로 쓰였다. 시의 초서를 해서로 고쳐 쓰면 다음과 같은 칠언 절구가 된다.
“竹溪月冷陶令醉/花市風香李白眠/到頭世事情如夢/人間無飮似樽前(죽계월령도영취/화시풍향이백면/도두세사정여몽/인간무음사준전.)
<대나무 시내 차가운 달빛에 도연명은 취하였고/ 꽃 저자 바람 향기에 이태백은 조는데/머리속의 세상 일 정은 꿈같은데 /사람 사이에 술 없으니 빈 두루미 앞 같구나.>
이 시를 누가 썼을까 상상해본다. 사옹원 관원이 도포입고 삿 쓰고 도자기를 감조(監造)할 화원을 다리고 요장에 도착하여 아름답게 구위진 접시에 감탄한 나머지 시정(詩情)이 동하여 “여봐라 나도 시 한 수 써련다. 갓 벗고 도포 벗어 하종(下從)에게 들리고 팔소매 걷어 부치고 허리춤 쌈지에서 세필 붓 한 자루 꺼내들고 초벌구이 접시를 응시하며 청료(靑料)에 붓을 적셔 일필휘지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게 쓴 정서라면 내용이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된다.
누구 보다도 도공들의 실정을 잘 아는 사옹원의 관리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도공의 고충
살아서 희망 없고 /죽어도 이름 없는/ 도공 일 삼십 년에 /
내 지문(指紋) 어디 갔나/초벌구이 장작불/육체를 불살랐고/재벌구이 화염속/ 영혼을 태웠 것만 / 잘했다 아름답다/칭찬이 그립구나.
이런 뜻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지만 당시 양반들의 신분 질서는 인간의 정이 어린 감정표현은 금물이었을 것이다. 천민인 도공들과 맞자구를 쳤다면 그것만으로도 수모에 가까운 비판을 받아야 했을 것이니, 한 바닥 시를 남기고 싶던 충동은 양반의 체면으로 억제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 시문은 누가 썼을 까? 감조(監造)의 사명을 띠고 갔던 화원의 글씨라고 볼 수밖에 없다.
환쟁이 주재에 무슨 시문까지? 글을 모르는 화원이 있었기에 그림 따로, 글 따로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15세기의 화원들 중에는 安堅과 崔涇같은 화원도 있었으니 모를 일이다.
3) 청화백자 「성화년제」명 인동초희자문화병 (15세기 중엽) (靑畵白磁「成化年製」銘 忍冬草喜字文畵甁 (15世紀 中葉)
高 39㎝口徑 21.6㎝ 低徑 14㎝ (15世紀) 成化年製
출처,개인소장
안료, 사용 안료는 세선(細線)으로 그린 넝쿨과 꽃술까지도 선명하다. 깔끔하게 그려진 담청남색은 피당청 안료의 특징이다.
문양, 이 유품도 피당청 유품 도 2)의 문양과 같이 구륵법(鉤勒法)으로 그리고 전채(全彩)를 하지 않은 조선의 기법이다. 그림은 인동초 넝쿨에 쌍희(雙喜)자의 문양과 재비 꽃으로 장식되었다. 중국 도자기에 그러진 꽃그림은 사계화(四季花)를 그리고 화법도 가지 끝에 꽃이 피지만, 이 그림에는 꽃에서 가지가 자라나 중국 그림과 구상 자체가 다르다.
이 문양은 회회청 유품 도 3)의 문양과 구조를 계승발전시킨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4) 청화백자 인동초희자문 호(15세기 중엽) (靑畵白磁 忍冬草喜字文 壺) (15世紀 中葉)
高17,5㎝口徑 7㎝ 低徑13,5㎝ 뚜껑 高2,5㎝ 內徑 8,8㎝ 外徑11,2㎝
출처, 개인소장
안료, 앞의 자료 3) 靑畵白磁 「成化年製」銘 忍冬草喜字文畵甁과 같은 피당청 안료의 유품이고. 제작 솜씨도 같은 사람의 솜씨로 보이는 유품이다. (이 유품의 뚜껑 형식에 대하여는 필자의 블로그에 상세히 설명 되어 있습니다)
문양, 문양도 앞의 3)과 같고 만든 사람의 솜씨도 같은 사람이라고 할 만큼 닮았다.
특기사항, 이 유품의 기벽(器壁)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이다. 매입 당시 피당청 안료의 유물이면 매장(埋藏) 유물로 보아야 하는데 육안으로 산화현상이 보이지 않았다. 매장 장소에 때라 산화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안료의 특징이 분명하고 기존에 같은 문양의 유품이 있기에 단안을 내리고. 깨끗이 씻어서 말리는 과정에 기벽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외부의 구멍은 바늘구멍인데 내부는 상당히 넓은 면적의 살이 떨어져 나갔다.
사기(도자기)에 산화가 없었다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산화되지 않은 사기라면 구멍을 뚫고자 충격을 가하면 깨어지지 이렇게 구멍이 뜰이지 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이 산화의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이 구멍을 과학 기기로 분석하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산화가 보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5) 청화백자 당초문 문자입 호 (靑畵白磁唐草文文字入リ壺)
染付唐草文文字入り壺(淸 後期)
출처, 常石英明 著, 『中國陶磁の 鑑定と鑑賞』(東京:金園社),15쪽
안료, 이 유품은 앞의 피당청 안료와 동일시되는 안료이다. 이 유품을 일본인 常石英明은 중국 유품이고 시대는 청 후기라고 밝혔다. 따라서 필자의 연구에 많은 지장을 주었던 자료이다.
이 유품의 연구자는 淸 後期라고만 하였을 뿐 연구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1987년 필자가 『靑畵白磁硏究 Ⅰ』권을 상제하였을 때 초록을 일어로 번역하여 常石英明 에게 보내면서 “이 유품을 본인은 한국 국적이고 조선 초기의 유품으로 연구하였는데 귀하는 청 후기라고 하였으니 본인의 연구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함께 토론하자”는 내용의 서신을 책에 동봉하여 발송하고 회신을 기다렸다. 그러고 2개월이 지나도록 회신이 없어 단념할 즘에 다음의 회신이 왔다.
편지요약 “일 년 이상 입원 하였다가 퇴원 하였고 지금은 연구나 집필활동을 못하나 9월 경(두 달 뒤)에는 상세한 답을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소식이 없기에 안부를 물으니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몸이 부편한 사람에게 자극을 준 것이 항상 미안한 생각이다.
6) 명 청화화조배(성화요) (明 靑畵花鳥杯 (成化窯)
高 4,7公分 深4,4公分 口徑 6,1公分 足徑 2,2公分
출처, 明瓷名品圖錄, 成化 弘治 正德窯編
안료, 성화 초 이후는 피당청을 썼다는 것이 중국청화안료의 연구이지만 이 유품에 채화된 색상은 수입청이 상당히 가미된 듯하다.
문양, 우리 도자기의 문양이 중국 문양을 닮았다는 주장이 기존의 연구이나 이 잔의 문양은 무슨 나무인지 우리의 문양과는 다르다. 이 시대의 우리 그림이라면 매죽을 그렸을 것이다.
*朝·中 遺品 顔料의 色相과 特徵 比較
비교의 대상으로 明 靑花 成化年代의 청화배<靑花杯>)를 선정하였으나 조선의 피당청 안료보다 색상이 어둡습니다. 중국은 수입청을 많이 가미하였고 조선에서는 피당청을 단순 사용한 대서 오는 차이일 것입니다. 이 글의 사진은 전사를 거듭하였으니 생상의 비교는 어려우나 피당청의 특징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추신
필자가 비 지정 중요문화재 도록을 발표하는 것이 문화재 연구의 정도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이렇게나마 할 수밖에 없었던 계기는 있습니다.
미술사 연구를 제이 인생의 목표로 정할 당시는 한국미술사학회에 종신회원으로 등록하고 한동안 열심히 부산에서 서울을 왕래하면서 도자사 발표에는 빠짐이 없을 만큼 경청하였습니다. 아무리 들어봐도 잘 못 가고 있다는 생각에 몇 번 투고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정당한 이유 없이 묵살되는 수모를 받기도 하였고, 마지막으로 거절을 받은 때는 하엽록(荷葉綠)은 도용(陶用)안료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을 받았습니다.
물론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회지의 구미에 맞도록 쓴 글이 아니고 비판으로 짜인 글이니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드라도 한국을 대표하는 학회지가 세계를 상대로 회원을 모집하고 정부의 진원으로 운영하는 학회지이니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것이 학회지 본래의 취지일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기존의 주장에 동조하는 글만을 (근거도 없는 주장) 싣는다면 동인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필자의 이 주장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학회지 창설 이래 비판의 글이 한편이라도 실렸고 그를 토론한 사실이 있었는가? 살펴보시면 됩니다.
필자는 美術史學硏究 2010년 6월, 266호에 발표된 논문「銘文資料를 通해본 廣州 牛山里 窯址群의 性格」과 「朝鮮時代 官窯 靑磁 硏究」를 비판하여 필자의 블로그에 실었더니 지금은 한국미술사학회에서 운용하는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백부흠의 글은 올리지 못하도록 비열한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조치란 홈페이지 게시판을 항상 열어놓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필요 시는 열었다가 비판의 글은 못 싣도록 닫아 놓는 것입니다.
학회에서는 특정인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본인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국미술사교육학화의 홈페이지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는 학회지의 게시판을 닫아놓는 곧니 있습니까. 필자의 글이 학문적으로 도움이 안 되더라도 반면교사의 역할은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학회지의 발전을 위해서는 비판의 글도 수용해야만 학회가 발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조선시대의 신문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운영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학회지는 동인지의 성격을 유지 하더라도 홈페이지만큼은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셔야만 연구자들이 다양한 정보를 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회지의 지금의 행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도자사가 발전하도록 운영할 때 학회지가 필요하고 국민들의 신망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필자가 비 지정 중요문화재 도록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고 동기입니다. 이상
(사진은 본인의 daum블로그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