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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포럼 인문의 숲 스물여섯 번째 만남
15분 스피치 : 윤혜경 대표
늘 조용한 성품으로 말도 소녀처럼 소곤소곤 얘기하는 윤대표님. 15분 스피치도 마다하겠다 손사래를 쳤지만 궁금한 게 많은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억지로 앞에 나서 조곤조곤 필리핀 세부에 지었던 리조트 얘기를 풀어낸다. 사업을 벌이자 IMF 한파로 진행이 쉽지 않았으나 시아버님의 강단과 뚝심으로 세상 급할 일 하나 없는 현지인들을 얼르고 달래며 이뤄낸 얘기. 필리핀이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이 안 되다 보니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하는 일이 심히 불안했는데 그 곳에서의 사업은 정리하게 되어 좀 편안해졌단다. 얼마 전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마침 잘 아는 조선족 친구랑 연계해 시작한 생리대 사업으로 중국 진출이 시작되었단다. 더 큰 일들을 펼치게 되면 다시 많은 얘기를 풀겠노라 얼른 말씀을 거둔다.
최부자 아카데미에 참가하러 가는 KTX 안에서 함께 짝꿍이 되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시집을 읽으며 ‘아,재밌다. 이런 재미로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면서도 책을 가지고 다니는구나.’ 내내 경탄을 하는 모습이 역시 소녀 같다. 호텔리어로 일하던 딸이 출판사 계통의 일을 하고 싶다고 사직서를 써 버렸단다. 예전 같으면 아마 펄쩍 뛰고 용납을 안 했을 텐데 이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단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존중하고 싶어졌다고 이 역시 인문학을 하면서 변화된 생각이 아닐지? 수요숲 멤버 이건주 변호사와 신호용 대표님과 더불어 주역 공부도 함께 하고 있다는 윤대표님. 분명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겠노라 마음을 낸 게 틀림없는 듯하다. 워크샵에서 스스럼없이 동생들과 어울리고 유쾌하게 어우러져서 모두들 윤대표 님과 격의 없이 가까워졌다. 서로 이렇게 젖어 들고 배어들고 스며드는 일. 인문학이 이뤄내는 결이기도 하다.
司馬遷, 史記 5강 : 사마천의 길,인간의 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길)- 김영수 교수
<사기>의 등장인물들에게서 일관적으로 흐르는 애민 애국 사상이 곧 중국 관리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이다. 초 평왕이 간신 비무기의 전횡으로 백성을 못 살게 굴고 충신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초나라의 충신들이 국외로 도망가서 오나라의 대부나 장수가 되었다. 오자서 역시 초 평왕에 대한 원한이 사무치던 바, 오나라의 합려왕 휘하에 있던 오자서가 오나라의 영도를 점령하게 되었다. 반드시 초나라를 엎으러 오겠다고 이를 갈았던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로 사무친 원할을 풀었다. 친구 사이였던 신포서가 오자서에게 서신을 보내 어찌 초나라 신하였던 그대가 이럴 수 있느냐니까 “막도원 오고도행이역시지(막도원 오고도행이역시지: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백성을 힘들게 했던 폭군에 대한 응징 역시 애민 애국이라 생각했다. 이에 신포서는 나는 초나라 백성을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진(진)나라로 달려가 칠일칠야 통곡으로 구원병을 요청했다. 진정곡사에 감동한 진 애공이 결국 군대를 빌려줬으니 이 역시 애민 애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에서 그 둘의 우정을 깊이 다루고 있으나 정작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관중이 죽게 되었을 때 관중 덕에 먹고 놀던 제 환공이 관중에게 ‘큰 아버지’라까지 극존칭하며 관중의 후계자 자리를 상의한다. 관중은 황제께서 더 잘 아시지 않느냐면서 습붕을 추천한다. 제 환공이 놀라서 포숙은?하고 되묻는다. 제 환공이 보기에도 포숙아는 인품이 훌륭하고 관중과도 절친한 사이가 아닌가 하는 인지상정을 느꼈음이다. 관중은 망설이지 않고 “포숙아는 너무 군자라서 모든 일을 두리뭉실 처리해야 하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습붕이 나을 겁니다.”라고 간했다. 이 말을 들은 포숙아의 측근이 당장 달려가 이간질했으나 포숙아는 오히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다.’며 일축했다. 공사를 살벌하고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알았던 그들은 모든 초점이 애국 애민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맞춰져 있었다. 정말 리더가 어떠해야 하는지 귀감이 되는 일이다.
열전’에는 이런 바람직한 공직자들이 부지기수다. 전국시대 노나라의 공의휴(공의휴)는 자신의 직분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절대 잊지 않았으며 법과 정도를 따랐던 인물이다. 어느 날 밥을 먹는데 나물이 기가 막히도록 맛있자 어디서 사 온 거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가꾼 작물이라는 답변을 듣게 된다. 그는 당장 밭을 갈아 엎어 작물을 기르지 못하게 했다. 재상 집의 나물이 이리 맛있으면 백성들이 무엇으로 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고운 비단을 보고도 집의 베틀을 불태워 버려 언제나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 했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재상 석사(석사)는 살인죄를 지은 아버지를 도주하게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대의멸친(대의멸친)한 사람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사법관 이리(이리)는 법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자신이 잘못 내린 판결로 무고한 사람이 죽게 되자 그 책임을 지고 칼로 자결하려 했다. 주변에서 그런 실수도 있을 수 있다고 말리자 “고관대작으로 지내며 월급을 많이 받아 나눠준 적도 없고 승진을 앞두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적도 없는 위인이 그저 잘하는 것이라고는 판결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판결마저 잘못했으니 참으로 부끄럽다.”며 기어이 자결해 버렸다.
춘추시대 초나라 재상이었던 손숙오는 또 어떠했던가? 손숙오는 춘추시대 인물로 원래 초야에 은거하던 처사였다. 재상 우구의 추천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세 달만에 재상이 된 인물이다. <열자>에 나온 일화 중에 호구장인이라는 사람과 나오는 대화가 일품이다. 호구장인이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고 녹봉이 많은 사람에게 보통 사람들은 시기,혐오,원망이라는 원한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떠본다. 자신은 적어도 그 세가지는 피하고 있다고 했다. 과연 그는 세 번 재상에 임명되었다가 세 번 파면되었어도 한결같이 누구를 원망하는 등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재상의 자리를 자신의 재능으로 얻었으니 달리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었고,스스로 떳떳하여 자신이 과실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파면 당한 바를 원망할 필요도 없었다.
<골계전>에서 손숙오는 왕에게조차 아주 통쾌한 조롱을 서슴지 않는다. 초나라 장왕이 아끼던 말이 죽자 관을 짜서 장례를 치르라는 엄명을 내린다. 궁중 악사 우맹이 장왕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주청을 드리자 장왕은 화를 내며 인상을 써댔다. 손숙오가 나서서 “대왕의 말에게 돌로 관을 하고 장식하여 이웃나라에 부고장까지 돌려 성대하게 치르십시오. 그래서 온 천하에 우리 왕께서는 사람보다 말을 더욱 아낀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여 장왕을 일깨운다. 또 수레를 크게 만들고 싶어하는 장왕에게 무조건 크게 하면 백성들에게 눈치가 보이니 우선 문턱부터 높이라고 조언한다. 성문 턱을 높이면 작은 바퀴로는 밑이 긁혀 턱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백성 스스로 큰 수레를 원하게 될 것이라고 해서 모든 정책도 백성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대로 쓰라고 보여주라는 깨우침을 전한다.
손숙오가 생전에 잘 돌봐주었던 악사 우맹 역시 멋지게 왕을 조롱하며 깨치게 한다. 우맹은 손숙오가 죽고 난 후 손숙오의 가족을 찾고 보니 아들이 나물을 팔며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청렴결백했던 손숙오의 사후를 책임져주지 않았던 왕에게 서운했던 우맹은 그날로 바로 손숙오의 복장을 하고 다닌다. 왕이 분장이 감쪽같아 벼슬을 주려고 하자 우맹은 이틀 후에 답하겠노라 뜸을 들인다. 이틀 후 마누라가 거절하라고 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너스레를 떤다. 마누라 왈 손숙오가 재상을 지내고도 저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벼슬 자리 나섰다가 굶어 죽을 일 있느냐며 손사래를 쳤다는 거다. 그제야 손숙오 집안의 상태를 알게 된 왕이 그 가족을 잘 우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젊은 날 쌍두사를 보고 다른 사람들을 못 보게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쌍두사를 죽였으니 이제 어머님을 못 모시는 불효를 범하게 되었다고 통곡하던 손숙오. 좋은 일을 한 너에게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달랬던 그 어머니의 말씀처럼 올곧게 살아온 그의 일생은 만세에 깊이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뜨거워진 열기를 식힐 겸,사마천을 사랑한 우리 문인들의 시들이 조수미의 ‘나 가거든’을 배경으로 올라간다. 80 평생을 사랑했던 남자 사마천, 고 박경리 문인의 통영 문학관에는 사마천을 기리는 시비가 두 개나 있다. 박경리 문인의 마지막 시편 ‘옛날의 그 집’에서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문정희 시인의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를 읽자니 뜨거운 불덩이가 확 꽂힌다. 기둥으로는 끌 수 없는/ 제 눈속의 불/천년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과연 과장이 아니어서 사마천은 육신은 죽었으되 죽은 게 아니다. 가장 강력한 지성집단에조차도 통렬한 풍자와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사내다움이 오천년 후의 여인들을 잠 못 들게 하고 지금도 숱한 문인들의 영감을 자극하고 있다.
김영수 교수가 가장 존경하는 <사기> 속 인물이 정자산(鄭子産)이다. 정자산이 생존했을 당시의 정나라의 상황과 우리 한반도와 많이 닮아있어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정씨의 뿌리이기도 한 정주는 당시 중국의 가장 중심지였다. 중원이라는 명칭이 원래는 하남성을 뜻하는 것으로 중원을 누가 손에 넣느냐가 중국 영토의 권력장악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하남 하북 산동 산서로 확장한 개념을 쓰기도 했지만 가장 중심이었던 정나라의 국정을 담당하는 핵심 세력으로서 후손에까지 존경을 받는다는 건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랄 수 있는 이 인물은 명문 귀족 정나라 11대 국군 목공의 손자다. 기원 전 582년 무렵 태어났으며 공손교(공손교)라는 별칭이 있다. 19대 희공,20대 간공,21대 정공 때 국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특히 진 초 진 제의 쟁패 와중에 정자산이 집권하기까지 오죽하면 ‘조진모초’라는 말까지 돌았을까? 진초의 쟁탈지로 시달림을 받던 시기를 헤쳐갔다.
기원 전 571년 12세때 희공이 즉위했을 때 아버지 자국이 사마가 되어 군대를 통솔했다. 기원 전 566년 자사가 희공을 시해하고 간공을 세우며 여러 공자들을 죽이자 자산은 아버지 자국에게 책임을 따지며 정나라에 대한 정세를 분석해주기 시작한다. 그가 20세가 되던 때,자사와 아버지 자국이 피살 당하고 자산이 난리를 수습하게 된다. 자산이 예견대로 정계의 총아로 부상하며 29세에 경에 오른다. 기원 전 549년 34세때 다시 제와 진이 패주를 주고받으며 오랑캐 초를 물리쳐 준다는 명목으로 주변 국가들에게 국방비와 곡물을 갈취해가자 정자산은 하루종일 패주들을 설득하여 공물의 양을 줄이도록 했다.과연 오계찰이 예언한대로 기원 전 544년 39세의 나이로 정자산은 집권을 하게 된다. 자산은 토지개혁을 통해 개혁정치를 실행하며 집권 1년만에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진에 사신으로 가서 객관의 담장을 허물고 향교 폐지에 반대하고 여론을 수렴했다. 조세 제도를 반대하는 무리들을 강경하게 대처하고 형서를 주조하여 공표한다. 국정 동반자였던 자치가 기워전 529년 죽고 나서 7년 후 자산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자산은 ‘정치는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너그러움이고,하나는 엄격함이다. 덕망이 높고 큰 사람만이 관대한 정치로 백성들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불이 활활 타오르면 백성들을 겁을 먹고 불에 타 죽지 않으려 한다. 물은 성질이 부드럽기에 겁을 내지 않다가 죽는 사람이 많이 생긴다며 그래서 관대한 통치술을 물과 같아 효과를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며 그래서 엄격한 정치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고 봤다. 공자의 정자산에 대한 논평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정자산의 관맹상제(寬猛相制)은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관대하면 백성들이 게을려져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격한 법으로 다스리면 상처를 면키 어려워 다시 관대로 돌아간다. 따라서 강경과 온건을 함께 구사하여 서로 보완작용을 하도록 해야만 정책이 통하고 인화를 이룰 수 있다.’ 고 했다.정자산은 덕망이 있으면서 기계적 절충주의로 잘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정자산은 여론의 본질과 중요성을 통찰했던 사람이다. 향교를 없애려는 무리들에게 조만간 향교에 모여 권력을 쥔 사람들의 장단점을 논의하는 장이 될 테고. 그들이 칭찬하는 점은 계속 유지하고 비판하는 점은 고치면 될 터, 그 곳이 곧 바로 우리의 스승이 될 것이다. 충성스럽게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도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 가지고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비난을 받으면 그것을 하루 짤리 제지하려 한나 이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로 인한 피해는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여 어찌 해 볼 수 가 없다. 제방을 터서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느니만 못하니 향교를 남겨두어 사람들의 논의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정자산이 개혁한 후,1년 만에 더벅머리 아이들이 버릇없이 까부는 일이 없어지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어린 아이들이 중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2년 째가 되자 시장에서 물건값을 에누리하는 일이 없어졌으며 3년이 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았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 갈던 농기구를 놓아둔 채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5년이 지나자 군대를 동원할 일이 없어지고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해서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들 입게 되었다.
정자산은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하기도 했는데 법을 공표해서 백성들이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진 숙향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서자 “나는 재주가 없어서 그렇게 멀리까지는 내다보지 못 한다. 그저 이 세상의 이치를 돌이켜 보고자 할 뿐이다.,세상 이치라는 게 뭐냐? 바로 내가 제정한 성문법이다!”라고 반박했다. 부당하게 부와 권세를 누리던 귀족들의 권리를 끌어내리고 일반 백성들의 적극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법이 필요하다고 봤던 것이다. 처음엔 반대했던 다른 모든 나라들조차도 50년이 채 안되어 따르게 되었으니 구세하고 싶다고 한 그의 뜻이 그대로 통했다. 시대를 선도했던 그를 백성들이 구세주라 불렀던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
자산이 경이 되기까지 70년의 시간동안 33차례의 공격을 받으며 살아왔던 나라이고 보니 백성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고 이에 미신의 악습이 끊이지 않았다. 사마천은 三欺(삼기)로써 정치 스타일을 정립했다. 不能欺(불능기),不敢欺(불감기),不忍欺(불인기). 아예 속일 수 없는 사람과 감히 속이지 않는 사람, 차마 속이지 못하는 사람,어느 쪽의 경지가 높은가?라며 정자산은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가장 높이 평가했다. 정자산이 현령으로 부임했을 때 그 곳에서는 처녀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바다에 빠트려 하백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악습이 있었다. 정자산이 참석한다는 것을 알고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 거창하게 제사를 준비했다. 정자산은 당일 쳐녀를 보고 난 후 무당과 관리들에게 처녀가 못 생겼으니 내년에 뽑자며 내년에 두 명을 바치자며 설득을 했다. 모두들 안 된다고 하니까 새끼 무당에게 하백 신에게 가서 말을 잘해서 보고하라고 하면서 물에 빠트렸다. 다음 무당을 또 빠트려도 돌아오지 않자 어미 무당까지 물에 빠트려 보내버렸다. 무당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이번에는 관리들에게 들어가보라고 했다. 기겁을 한 관리들이 정신을 바짝 차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약소국의 생존 전략은 외교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은 정자산은 不可近,不可遠(불가근,불가원)으로 줄타기 외교를 하며 확실한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주변 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파악을 위해 공부를 많이 했으며 양다리 외교를 충실히 했다. 내부 안정이 외교의 관건임도 잊지 않았다. 또한 實事求是(실사구시) 정신으로 헛된 명예와 미신을 배척하면서 실용적 정치를 펼쳐 나갔다. “코끼리는 상아 때문에 죽는다. 상아가 귀한 보물이기 때문이다.”라며 실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근대 중국의 韜光洋灰(도광양회)의 전형적 스타일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만하다.
정자산에 대한 역대 평가를 보면 왕대륜은 춘추시대 제 1인이라고까지 칭송을 했다. <좌전>의 전반부는 관중,후반부는 자산이 주인공이기까지 하다. 공자는 향교 페지에 반대한 자산을 고인의 유풍을 이어받아 백성을 사랑했다고 표현했지만 이는 정자산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경향이 있다. 자산은 법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오계찰은 정나라의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산 혼자 밖에 없다고까지 했다. 자피는 예를 갖춘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환란은 없다고 했고 진나라 평공은 자산을 일러‘박물군자’라고까지 칭했다. 자산이 죽었을 때 정나라 백성들은 통곡을 하며 이제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르면서 산단 말인가라고 했다니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정자산이 남긴 어록에서 백성들에게 원성을 듣지 않으려면 정치가는 어떠해야 하는지 또 관직을 맡을 사람들의 자질에 대해서 아주 뚜렷한 가치관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성을 대할 때는 위엄과 사나움만 가져서도 안 되며 법이 너무 가혹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또 높은 자리와 큰 봉읍은 자신을 비호하는 수단이 되므로 이런 걸 미리 배운 다음에야 관직을 맡을 수 있지 관직을 맡은 다음에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생사를 그 일과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듣기에 좋은 일을 하려면 그 법도 함께 해야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형정의 제정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 “天道遠,人道近(천도원,인도근)”이라고 해서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깝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다.비조가 천도를 어찌 안단 말인가? 말이 많다보면 어쩌다 적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싸우는 것은 용이 보지 못하는데 용이 싸우는 것을 왜 우리가 봐야 한단 말인가?우리가 용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으면 용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라며 천도니 뭐니 하는 미신을 믿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얘기하자고 했다.
정자산이 기원 전 524년 대화재를 당한 적이 있었다. 정자산은 위기에 대처하는 법도 남달라서 마치 매뉴얼을 만들어 둔 듯 착착 진행했다. 불이 날 즈음 이석이 죽고 장례를 치르기 전이었는데 인부 30명을 보내 관부터 옮기게 하고 불이 나자 진 공자와 공손들을 동문으로 내보내고 외국손님들도 피신시켰다.사법 담당 사구를 시켜 새로 온 손님을 나가게 하고 전부터 있던 손님은 숙소에서 못 나오게 단속을 했다. 자관 자상에게 사당과 종묘를 순시하게 하고 공손 등에게 점복용 거북 껍데기를 옮기게 했다. 갑골문 거북 껍데기는 나라의 길흉사를 점치는 도구였기에 귀히 여겨 조치했다. 축사에게는 역대 군주의 신위를 주 왕실 사당으로 이관케 하였으며 궁중 창고 무기고 담당에게는 맡은 곳의 관리르 더욱 철저하게 했다., 상성공에게 궁을 잘 지키게 하고 나이 든 궁인은 불이 이르지 않을 곳으로 피신시키고 사구와 사마에게는 불길이 지나는 길목을 지켜 불길을 잡게 하였다. 성 아래 사람을 성 위로 올라오게 해서 성을 지키고 징발된 사람들을 잘 지키게 하였다. 화재가 진압된 후에는 교외 사람들을 축사를 도와 수도 북쪽을 청소하게 하고 사방 신에게 화재다 그치도록 기도 드리게 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화재로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세금을 줄이고 목재를 제공하고 3일 동안 곡하고 시장을 폐쇄하였다. 주변 제후국에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고 토지신 사당을 세워 재발방지를 위한 제사를 드려 화재의 액을 털어내었다. 일목요연한 매뉴얼을 보면 세월호 사고 때 우리 관군이 보여준 행태와 비교해보면 부끄러움이 인다.
과연 정자산은 죽어서도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장례 치를 비용조차 없어서 시신을 광주리에 넣어 그냥 산에 묻었다. 백성들이 돈이며 패물을 가지고 왔으나 그의 자손들도 단박에 거절했다. 이에 백성들이 자산 봉지의 시내에다 패물을 던져 추모하자 시내물이 오색으로 빛나고 금색의 파도를 일으켜서 金水河(금수하)라는 전설을 남기게 되었다. 정자산은 33년 동안 정치의 중심에서 개혁을 주도했으며 약소국의 생존관건이 내정 개혁과 외교에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외교는 기다림의 정치력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 인내심으로 몇 날 며칠을 설득하며 자신의 뜻을 이뤄내었다. 상대를 기다려야 하고 상대의 수를 기다려야 하고,상대의 반응을 기다려야 하고,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나의 수조차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해서 정치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했다. 고슴도치 정치가라고 자산을 표현한 전국시대 학자인 공후국의 표현이 제대로이다. 작지만 단단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했고 무덤조차 찾을 수 없는 청렴결백함과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은 시사하는 바가 정말 많다. 중국인들의 느긋한 만만디 정신 속에는 정자산의 피가 분명 흐르고 있다. 실용주의 노선을 걸으며 철저하게 인민을 위한다는 그들의 밑바탕에는 축적되어 온 내공이 있는 듯……중국이 두려운 이유이다.
정리 : 인문의 숲 제5기 육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