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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궁금한 것이 생겨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좋은 질문을 해주셨네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에 대해서는 마침 기공연구가 강헌 선생이 기공적 관점에서 정리해놓은 글이 있어서,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에 그 글을 올려 드립니다. 내용은 다소 길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잘 지적하고 있으니, 읽어보시면 방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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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언
다음은 신약성서 <로마서>에 있는 방언에 관한 바울의 언급들이다.
Ο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Ο 방언하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
Ο 내가 방언을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신자들에게 전해 주지 못한다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Ο 방언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 알겠는가?
Ο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얻으려고 기도하라
Ο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방언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만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방언으로 열 마디 말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고 싶다.
Ο방언은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증표이다
Ο만일 교회에서 방언을 하고 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본다면, 그들은 여러분들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Ο방언을 할 때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한다.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나님하고만 말하라
Ο내가 만일 방언만으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뿐이고, 내 이성은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은 방언에 대해 최초로 상세하게 언급한 성경의 내용이다. 주의 깊게 읽어보면, 기독교의 사실상 설립자이며 당시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바울조차 방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헷갈리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사임을 100% 확신하지 못하고, 일말의 의심을 짙게 가지고 있다는 내면의 심리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바울은 아마도 광인의 넋두리 같이 보이는 방언이 과연 하나님께 정상적으로 바치는 축복인가에 대해서도 깊은 고심을 한 듯하다.
요새도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신앙을 가지기 위해, 처음 교회에 갔다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하는 방언기도 모습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내빼버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방언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들이 건전한 종교가 아니라, 사이비 저질종교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울의 기록을 읽어보면, 2천여 년 전 초대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느낌이 들게 된다. 아마도 2천년에 걸친 길고도 긴 방언에 관한 논쟁의 단초는 초대교회의 설립자인 바울이 제공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방언에 관한 2천년 논쟁의 요체는, 한 쪽에서는 방언이 하나님 그 중에도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사탄의 역사라고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건해야 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들려오는 정체모를 괴성(그것도 부들부들 떨면서)이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에 적극적인 오순절파(복음주의자들)에서는 방언이 ‘천국언어’라고까지 주장을 펴고 있다.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일까?
방언은 복음제일주의 등 열광적인 예배를 위주로 하는 교파에서 성행하다가 지금은 거의 모든 교회에 일반화된 듯이 보인다. 그리고 방언문제를 그토록 심각하게 고려한 바울의 언급을 통해, 초대교회 또한 오늘날의 부흥회처럼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방언은 조용하게 보는 예배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지금도 방언을 무당의 푸닥거리로 일축해 버리는 보수파 목사님들이 꽤 있는데, 이는 분명 성경과는 모순되어 보인다. 방언기도가 초대교회 이래, 전통적인 예배의 한 형태임은 로마서에 명백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울은 ‘방언자를 말리지 말라’고 까지 분명한 지시를 신도들에게 내리기도 했다.
바울이 방언에 관해서 최초로 언급한 이래 일부 기독교에서는 방언을 성령의 은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필자는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혹시 반발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먼저 필자의 설명을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방언도 ‘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향해 온갖 열정을 다해 기도를 올리다 보니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격한 감정의 몰입이 이루어졌고, 이것은 체내 기류의 극심한 편중 및 이동을 초래하게 된다. 기가 요동치는 과정에서 내기의 일부가 성대를 울리면서 외부로 표출되는 현상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방언도 진동현상(주; 전문용어로는 자발공 현상이라고 함)의 하나이다.
‘몸떨림’ 이라고 일컬어지는 진동현상이 몸 전체에 일어나는 것임에 비해, 방언은 기가 목과 혀로 집중되어 혀가 독자적으로 진동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광적인 분위기의 열렬한 종교집회에서 울부짖는 일부의 신자들은 필연적으로 한쪽으로 과도한 감정몰입이 나타나게 된다. 정신이 이처럼 혼란스러우면, 체내의 기도 이를 저지, 보충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요동치게 되는데, 이 소란 중에 방언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노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경건하고 열광적인 기도 중에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성령의 은사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겉으로 관찰되는 바로는 정신질환자의 발작처럼 보이지만, 방언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배하는 집회모임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 점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기독교의 창시자 바울은 이런 이유로 해서, 방언이 하나님께 드리는 알 수 없는 언어라고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방언=성령’의 은사라는 기독교의 오랜 주장에 대해, 필자가 제동을 거는 이유는 기수련자들 중에도 방언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싶을 정도로 많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말에 의심이 간다면, 아무 기수련도장에든 들어가서 문의해 보기 바란다. 기수련을 통한 방언 체험자의 대다수는 비기독교 신자이다. 기수련자들은 대부분 기독교 취향과 맞지가 않는다고 말하며, 방언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선입관도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아예 방언이란 것이 있는지, 그 용어조차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방언을 하는 양상은 기독교에서 일어나는 방언과 똑같다. 다만 기독교에서 만큼 많지는 않다.
그 이유는 기 수련계의 경우, 방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기독교에서는 방언을 고도의 신앙체험 중의 하나로 생각하지만, 기 수련자들은 그저 초보과정 중에 일정기간 방언을 하다가 본인이 방언을 하는 줄도 모르고 넘어가 버린다. 같은 방언인데, 기 수련계에서는 있는 듯 마는 듯 조용히 지나가고, 기독교에서는 크나큰 이슈가 되고 끊임없이 방언자가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 신자들은 방언이 가벼운 기(氣)적 현상의 하나인줄 모르고 있으므로, 이를 크게 의식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게 된다. 하나님과 직접 연관된 일인 만큼 결코 소홀히 다를 수 없는 소재인 것이다. 그래서 방언자가 폭발적으로 자꾸만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방언자가 생기면 유사 방언자가 수십 수백 명이 생겨난다. 이는 기의 전파와 공명에 의한 것이다. 기는 과도한 감정몰입과 혼합이 되면 급속히 퍼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 기독교에서는 한 번 방언을 하기 시작하면 늙어 줄을 때까지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성령의 은사로 인한 것이라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타나야 정상이다. 그러나 방언도 진동현상과 동일하게, 방언이 처음 터진 날만 제어가 불가능하고 둘째 번 방언부터는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하다. 체내에 있는 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므로 아주 쉽게 통제가 되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긴 시간을 할 수도 있고, 중단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중단할 수가 있다. 이것이 무슨 신의 은총이란 말인가? 그저 단순한 생리작용의 하나 일 뿐이지.
기 수련자들이 방언을 잠시 하다가 마는 것은, 수련과정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람들이 방언을 물고 늘어진다면, 평생 동안 방언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며 그 강도도 기독교의 경우보다 훨씬 강하다. 방언은 기(氣)적인 현상의 하나이며, 이쪽은 기에 관한 한 전문 수련자들이기 때문이다. 기수련의 방언 체험자들은 방언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심하게 방언을 하면서도 ‘참 괴상한 소리가 절로 나오네’하고 무심히 지나가 버린다. 기수련을 하게 되면, 심신의 변화가 무쌍하므로, 이것보다 이상한 일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에 방언현상 정도는 지극히 미미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심각하게 고려해 볼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련과정에서 방언은 거의 의미가 없다. 몸이 아프면 원하지 않더라도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처럼 미미한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필자는 한 때 방언을 심하게 했던 기 수련자에게 방언의 효과를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길 “목소리에 탁기가 없어졌고, 아무리 큰 소리를 질러도, 성대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정도의 대답을 했다. 이처럼 사소한 문제가 세계 최대 종교인 기독교에서는 이천년이나 논쟁을 해 왔던 최대 논란거리중 하나이다.
논란의 요체는 기독교의 주특기인 예의 그 흑백논쟁, 이것이 성령의 은사냐 사탄의 역사냐 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선(성령)도 악(사탄)도 아닌 단순한 비인격체인 ‘기(氣)’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천년 아니라 2만년을 논쟁한다고 해도, 기의 정체를 모르는 한 결코 그들은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교회도 방언문제에 대해 보수 기독교인들과 오순절, 순복음교회 등에서 상반된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30년 전 필자가 20대 초반이었던 시절은 당시 방언, 신유 등 부흥회 위주의 집회로 교세를 확장해 가는 순복음교회가 급속도로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때 한 저명한 목사님과 우연히 합석을 하게 되어 방언문제와 순복음교회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순복음교회가 교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만 해도 신흥종교의 하나로 무섭게 확장해가는 성장세에 대해 기존 기독교계에서는 거세게 제동을 걸던 때였다.
“그게 무슨 놈의 예배야 무당의 푸닥거리지. ”
이 분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이렇게 일축해 버리고는 필자에게 순복음 같은 사이비 교회(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목사님의 표현이었음)에 나가지 말고 강원룡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에 다니라고 추천까지 해 주었다. 이 분 말고도 기독교 목회자, 신학교수 같은 분들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해보았는데 대체로 다음 4가지 의견으로 압축 되었다.
. A목사
“방언은 명백하게 신의 은총이다. 이는 성서에 분명히 기록된 행위로써 기독교 특유의 것이며, 믿음의 징표이다. 나는 방언이 앞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된 천국의 언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진실한 기독교인들이며,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 B목사
“이는 미신행위이며, 무당의 푸닥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유행처럼 번지는 방언으로 인해, 고등종교인 기독교가 미신적인 저질종교로 추락하고 있다.”
. C교수(신학박사)
“성서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그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기독교를 전 세계로 전파하는 과정에서, 언어불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외국어를 특별히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한다.”
. D목사
“외국어의 소통이 초대교회에서는 전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그 필요성이 없어졌다. 각 외국어에 대해 학문이나 기술, 특기 등의 목적으로 현지인의 수준만큼 외국어 실력을 갖춘 기독교 신자들이 주변에 흔히 있으므로, 구태여 방언의 은사 즉 외국어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은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 방언을 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탄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이상은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목사님들의 요지를 가능한 한 그분들의 표현방식 대로, 들은 바 그대로 옮겨본 것이다. 방언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A목사가 당회장으로 있는 교회는 수시로 부흥회를 열고 있다.
부흥회는 방언뿐 아니라 귀신 쫓기, 안수기도 등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이 된다. 이 덕분에 A교회의 신도는 짧은 시간 내에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A목사는 일부 목사들이 자신의 집회 방식을 미신이라고 비난해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방언을 하고 예수님이 귀신 쫓는 이야기는 성서에 수십 차례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목사들이 이를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관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방언을 단지 외국어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일 뿐이라고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는 목사들은 매우 합리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전혀 성경에 근거한 해석은 아닌 것 같다. 외국어는 누구나 잘 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 노력에 비례해서 능숙해지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도 안하는 사람, 혹은 조금만 노력한 사람에게 갑자기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서 외국어가 유창해진다는 것은 형평의 논리에 맞지 않는 얘기일 것이다.
방언의 양상
○ 조용히 예배를 보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방언 하는 사람
이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서 “우루루루...” 하는 소리를 낸다.
○ 간질병 환자의 발작처럼 누워서 “다다다...” 하며 따발총 쏘는 소리와 비슷한 음을
내면서 방언하는 사람
이는 평소에 간질병이 있는 환자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이나 기도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사람이다.
○ 울고불고, 콧물눈물 범벅이 된 상태에서 혼자 궁시렁 거리며 방언하는 사람
○ 비교적 조용한 태도로 경을 읽듯이 방언하는 사람
○ 악기 소리 비슷한 사람, 경쾌한 새소리 비슷한 방언을 하는 사람
○ 청각장애자(반벙어리)가 말하듯이 방언을 하는 사람
이는 어린 아기가 처음 말을 배울 때 하는 비정상적인 발음이 특징이다.
○ 외국어 방언을 하는 사람으로 대체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의 세 종류가 있다.
이는 외국어 비슷한 소리를 내는 방언이다. 혹자는 이를 보고 하나님께서 외국어 습득의 은사를 내렸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실제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외국어를 능숙하게 습득하는 일은 다년간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야 되는 일인데, 방언기도만 열심히 하면 자동으로 외국어 마스터가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다만 듣기에 외국어 비슷한 감만 주고 있을 뿐이다. 평소에 영어, 중국어, 일어를 자주 듣고 접하게 되는 것도 유사 외국어 방언을 하는데 일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 외에 아프리카 토인들이나 사용함직한 괴상한 방언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다.
필자가 가끔 이용하는 등산 코스 중간에는 제법 규모가 큰 개신교의 기도원이 있다. 산길을 걷는 중에 필자는 본의 아니게 야외에서 산중기도를 올리는 열성신자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주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는데, 방언을 하는 양상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등산할 때 보았는데 하산할 때까지도 방언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하루 종일 방언을 해도 지치지 않는 이유는 방언이 신체의 자발 기능에 의한 자연발성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소리를 내서 하고자 한다면 아마 한두 시간도 못되어 목이 쉬고 말 것이다.
방언 중에도 정신이 멀쩡한 것이 보통이지만, 방언만 시작하면 반은 까무라치는 사람도 있고, 감정의 몰입이 선행되어서야 방언이 터지는 사람, 마음만 먹으면 감정몰입 없이도, 즉시 방언이 터지는 사람 등 매우 다양하다. 맨 마지막의 경우는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
필자는 몇 년 전 27세의 청년에게 기 수련을 시켜 보았다. 신장 165cm에 체중이 52kg 정도로 왜소하고 약한 체질의 청년이었다. 장소는 경기도 송추에 있는 한 절이었고, 청년은 몸이 너무 약해서 요양을 위해 그 절에 머물고 있었다. 필자는 3일 정도 머물 예정이었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약골 청년이 안돼 보여서 3일 동안이나마 기수련을 시켜보기로 했다.
필자는 기수련에 대해 어느 정도 소견을 갖고 있지만, 직접 도장을 운영해 보거나 한 적은 없다. 이렇게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 중에 인연이 있으면 건강차원에서 잠깐씩 소개를 해 주곤 한다. 수련의 효과는 이 책의 주제와 무관하므로 제외하기로 하고 그 청년에게 기 수련을 시킨 이후의 일만 간략하게 소개한다.
3일 동안 총 수련 시간은 6시간 남짓이었으며, 그가 한 수련의 특징은 위에 명기한 방언들(학질방언, 악기 소리 방언, 외국어 방언, 등)의 거의 모든 모습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했다는 것이다. 이 청년은 불교도로 방언이나 진동에 대한 개념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다. 불교도인 이 청년을 만약 개신교 기도원에 데려다 놓았다면, 주위에서 모두들 은혜를 받았다고 칭송했을 것이다.
방언도 습관이 된다
방언이 처음 나타나는 날, 최소한 그 날만은 스스로 통제가 안 된다. ‘나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역사하신데 대해 무한히 감사를 드린다’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 또한 통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둘째 날부터는 이미 유경험자이므로 자율조절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횟수가 거듭되면 이력이 난다고 표현해야 할까, 어째든 일종의 습관이 되어 버린다. 필자의 주변에는 방언 잘하기로 소문난 K집사(여, 43세)가 있다.
그녀는 서울 근교 기도원에 자주 다니는데, 방언을 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기분 여하에 달려있다고 한다. 기분이 아주 좋거나 아니면 아예 울적할 때는 방언이 잘 된다고 하며, 방언의 형태나 강도도 얼마든지 조절이 된다고 한다. 때로 그녀는 일부러 심하게 방언을 해 보기도 하고, 약하게 해보기도 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저 날아갈 듯한 기분에 방언이 저절로 잘되고, 울적할 때는 울적한대로 실컷 방언을 하면 속이 후련해진다는 것이다. 심하게 할 때는 주위 사람들이 예배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방언을 심하게 하지만,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방언하기가 싫어진다고 한다. 억지로 방언을 할 수도 있지만, 기분이 영 내키지 않으니, 방언기도는 시원치 않을 수밖에 없다. 방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사람의 감정상태에 상관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는 이렇듯 방언자의 기분에 크게 좌우되고 있으며, 강약 조절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실례를 볼 때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온 것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일부의 주장대로 방언이 ‘천국의 언어’라고 한다면, 언어로서 일정한 체계와 형식을 갖추고 발음, 단어 등도 어느 정도는 통일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모르는 제3자들도 인정을 하려 할 것이다. 현실에서 방언이 10인 10색 100인 100색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기(氣)작용에 반응하는 체질, 성격, 연령, 기질 등이 사람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방언이 사탄으로부터 온다고 확신하는 서양의 어느 목사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니다, 사탄의 역사다.” 라는 논쟁은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가히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그 양상은 한국교회의 현실과 대동소이하다. 성령은사(방언, 신유, 제령, 등)는 무조건 사탄의 교활한 술수로 확신하고 있는 캐나다 목사들이 있었다. 필자는 이 자료를 최근 (2004년) 인터넷에서 확인했다. 이들은 성령운동이 성령을 가장한 사탄의 역사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방언기도 현장을 찾았다. 어느 부흥회에서 열렬히 방언하는 여인에게 갑자기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열심히 기도 하는 당신, 지금의 방언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물론 성령님에게서 왔지!”
“성령이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온 것 같은데..”
“너는 사탄이지!”
“...맞아, 나는 사탄이야, 어떻게 알아냈어. 히히”
이러한 대화를 나눈 후, 반 방언파의 이 목사들은 모든 방언이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예전보다 더욱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현장 확인까지 끝낸 이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이들의 살아생전에는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고, 짧은 글만 읽고 말았지만, 이러한 케이스의 전후 상황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 바이다.
필자가 보기에 심문을 당할 당시 방언하던 여인을 정상적인 심신상태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현재의식이 거의 없는 탈혼 상태(심신무기력 상태)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방언기도를 끝내고 깨어났을 때는 자신이 목사들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이 여신도는 평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겠지만 불시에 질문을 당하는 때만은 심신미약 상태에 있으므로, 상대방이 유도하는 대로 끌려가게 마련이다. 최면상태 혹은 반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은 최면사가 원하는 대로 유도질문에 답하게 되는데, 이 현상과 거의 흡사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질문자인 목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를 보내,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내고는, 사탄으로부터 직접 답을 들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이는 기의 전파현상을 전혀 모르는데 서 오는 무지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은 불쌍한 한 여신도의 정신을 아주 망가뜨려 놓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방언의 통역
바울은 로마서에서 방언에 대해서 얘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해석(통역)에 대해서도, 방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원칙상 가능하다. 방언을 제대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기의 상호감응 현상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일종의 텔레파시(정신감응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단, 해석은 전체의 의미를 전달해 줄 수는 있으나, 방언이 정식언어는 아니므로, 단어 하나하나 어구 하나하나 동시통역 해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무당, 점술사, 주술사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한 눈에 읽는다. 방언을 통역하는 일도 이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체에서는 심파(心波; 마음기운)가 발산된다. 심파는 곧 기(氣)와 동의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선도(仙道) 격언에 ‘기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기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의미이다. 점장이는 심파(기)의 접수 능력이 뛰어나므로,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점술사, 무속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능력이라고 말을 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것이 성령의 은사, 부처님의 가피, 상제님, 천존 등 초월적 존재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심파(기)의 접수능력이 뛰어난 강한 신기의 소유자라는 무속인, 점술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성령을 강조하는 기독교에도 대단히 많다. 필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전체인구의 20%는 무속인 기질이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기 접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교회에도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교회는 심령문제를 다루는 전문단체가 아닌가.
예를 든다면, 한 신자가‘우리 교회가 좁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 하는 주제로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중에 방언이 터져 나왔을 때, 평소 신기가 강한 어느 신자가 이 방언자의 이러한 의중을 정확하게 감지하여 온 교회신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하자. 여기서 마음 전달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히 ‘기’라는 존재이다.
어떤 효녀가 갑자기 죽을병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울고불고 기도하며 하던 중에, 방언이 터져 나와 방언기도를 하는데 통역하는 사람이
“성도 여러분, 여기 자매님이 죽을병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힘을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 합시다.”
라고 통역을 해준다면, 그 정확성에 방언 기도자와 일반 신도들 및 통역한 사람들까지 놀라게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예언까지 하여 환자의 병이 실제로 낫기라도 한다면,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를 확신하게 될 것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모두 감읍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역시 기의 감응현상 내지 기의 전파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기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제 현상을 보고 ‘이것은 기적(奇蹟), 신의 위력’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방언과 그 정확한 해석은 일단 방언자와 통역자간의 ‘기의 교류’가 원만히 이루어 질 때에만 가능하다. 필자가 방언의 통역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방언은 무조건 엉터리, 따라서 그 통역도 더 엉터리’ 라고 하며 아예 방언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가능한 이치를 설명하고자 함이다.
물론 서로 다른 인격체가 열광적인 집회 중에 기의 싸이클이 일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따라서 제대로 된 통역을 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는 원리상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니, 불가능하다고 무조건 부정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방언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무(巫)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방언 체험자들 중에는 기구한 운명을 산 사람들이 많다. 또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도 주요한 특징이다. 이혼한 사람, 자식을 잃은 사람, 사기당해서 쫄딱 망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등 인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정신의 상당부분이 일그러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쉽게 말해서 이들은 한이 많은 사람들이다. 한이 많다보니, 다른 사람보다 쉽게 감정몰입이 된다. 심적 고통을 위로 받기 위해 절대자 하나님에게 죽자 사자 매달리는 일이 보통사람들보다 많기 때문이다. 감정의 과도한 몰입은 인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격한 감정의 격랑들은 몸속에 기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그 여파는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는 방언을 통해 외부로 표출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기구한 삶에서 오는 한이 많다는 것, 여성이 압도적이라는 것 등은 현실적으로 무속인들의 특징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사실 방언자들은 교회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은 무속인들과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들은 틀림없이 무속인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무속인에 비유한다고 기분 나빠할 사람들도 있지만, 결코 무속인들을 비하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무속인은 다양한 여러 인생의 유형 중에 비교적 독특한 행동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뿐, 기본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무속과 기독교가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은 어제오늘 지적되는 일이 아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이는 초기 기독교부터의 일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기독교의 모태가 무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의 기성종교들은 모두 그 출발점이 무속이었다. 그러나 세계종교로서의 틀을 갖춘 제도권의 종교들은 그 어머니격인 무속을 사이비, 저질, 사탄의 무리로 무조건 공격을 하고 있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출처; 강헌, <기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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