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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化의 선각자 김옥균 沃川출생 |
전 순 표
머리말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 선생은 조선 말기의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만민평등, 부국강병의 국가를 만들려 하였던 근대화의 선각자 이다.
그의 출생지에 대하여 공주 광정리, 대전 이사동 기존 출생설 등이 분분한 가운데 옥천 옥천출생 이라는 새로운 민간사료가 나왔다.
옥주유고(沃洲遺稿)는 갑신정변 전후 개화당과 가까웠던 옥주 정납(鄭납) 선생의 유고시집으로 후손이 쓴 발문에서 “김옥균은 옥천출생 이다”라고 밝혀 김옥균이 옥천 출생이라는 신빙성을 더하는 단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그리고 김옥균의 옥천 출생설에 대하여 옛날부터 옥천지역에서 광범위하게 구전되어 오는 옥천 주민들의 구술자료를 모아 이글에서 소개하여 김옥균 선생의 옥천 출생설을 가늠해 본다.
또 그의 선대 묘소에 대한 위치와 관련하여 옥천 걸포, 가산지역 등 구전되는 곳이 많은데 거론되는 지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고우 선생의 가계및 생애와 개혁정책을 소개한다.
끝으로 김옥균 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가 갑신정변 직후 옥천에서 10년간 피신생활과 구출 등에 대해서 일본공사관 기록을 통해 알아본다.
Ⅰ. 김옥균 옥천 걸포 마을 출생설
1. 정납의 「옥주유고」
-『김옥균 옥천출생』 이라 밝혀
「옥주유고」는 조선후기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에서 태어난 옥주(沃洲) 정납 선생의 필사본 시집으로 연일정씨 소문중에서 1982년에 출판하였으며 이 유고시집 발문에서 후손 정구충은 문중 선조들의 행장과 대소사를 약술하였다.
그는「옥주유고」발문에서 정납이 가족에게 구술하길 “김옥균이 옥천출신 이다”라고 밝혔으며 갑신정변 당시 “정변이 성공하면 정납에게 일본관계 외교담당 전권을 주는 것으로 내정될 정도로” 김옥균 개화당 측과 가까웠던 일을 내비쳤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옥주 정납은 자신에게 “화근이 미칠 것을 우려하여 멀리 함경도 지방으로 피신여행을 했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후기의 중앙과 옥천지방의 역사를 알 수 있는「옥주유고」는 개화당과 김옥균을 연구하는데 민간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2. 이웃 마을에 태어난 김옥균과 정납
-갑신정변 때, 대일본외교 책임자로 내정
정납 선생은 조선말엽인 1833년(순조 33년)에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에서 돈녕부 도정을 한 정시준(鄭時浚)과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외아들로 자는 공선(公善) 이며 호는 금농(錦農), 옥주(沃洲)로 음직으로 부사과를 살고 1901년에 생을 마쳤다
그는 청년기에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한 이후 그 당시 세력가 집에서 기숙하며 한양의 양반층 상류 자제들과 교류하면서 시를 잘 짓기로 소문난 문인 이었으며 또 그는 흥인군 이최응의 아들 이재긍, 안동김씨 세도가들과 교분을 쌓았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개화당으로부터 대일본 외교 책임자로 내락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납이 살던 금강가인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 안말에서 김옥균의 선대 조상묘가 있다고 전해지는 부리기재 산능선과는 불과 오리 남짓한 지척지간 이며 김옥균 출생하였다고 구전되는 인포리 걸포는 10리 이내에 위치한다.
한양에서 낙향한 정납이 말년에 그가 태어나 쭉 살아오던 군북면 소정리에서 동쪽으로 접하며 1km 정도 떨어진 금강의 상류지역인 군북면 장계리 진모래 마을로 새집을 지어 이사갔다.
장계리 진모래 마을에서 바로 강 건너(현 대청댐)가 부리기재 이며 인포리 김옥균의 출생설의 진원지인 걸포까지는 불과 500m 안팎의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원래 진모래 마을은 금강물이 감아 도는 곶에 위치한 강마을로 건너편 산지는 북향으로 높은 용문산 웃성골 산에 가로막혀 있다.
동쪽은 웃성골 산에서 내려온 부리기재 능선으로 깍아 지른 절벽이 연이어 지며 달돋이산이 위치한 남향으로 내달려서 장계교 앞, 금강과 안내천이 합수되는 지점에서 멈추는데 이 달돋이산 능선에 김옥균 선대 묘소가 있다고 구전되는 장소이다.
3. 옥주유고 발문에서
- 정납이 김옥균, 개화당 언급
(1) 옥주 정납과 개화당
더구나 김옥균(金玉均) 선생은 옥천 출생으로 옥천사정을 잘 알고 있으며 옥주공 정납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하고 있고 이재긍과 가까워 옴으로,
김옥균 등 개화당(開化黨) 사람들과 연락이 있었고 왜학(日本語)를 배우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개화당이 세력을 잡게 되면 일본과의 교섭에는 옥주공을 선택하겠다고 내선고로부터 들었다,
조카에게 옥주공 자신이 애기하신 모양이다.
어떻든 이재긍씨 주변에 있던 분들은 대개 개화당에 관계했던 것 같다. 민영익도 처음에는 김옥균의 의사에 동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책에서 이재긍이 세상을 떠난 1881년에 개화당 간부들이 크게 낙담 하였다는 애기가 있음을 읽은 적이 있다.
(2) 정납 갑신정변 실패 후 멀리 피신
갑신정변 때 함경도로 피신하였다는 정납은 실제로 정변 때 무슨 큰 역할을 한 것도 아니므로 걱정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애매하게 연루자로 희생된 사람이 그 시대에 많았다 하므로 조심하시기 위해서 였으리라.
그대 옥주공의 52세 였는데 어떻든 불우하신 분 이었다.
상경하시어 김씨세도에 가까이 되자, 대원군이 집권이 되고 대원군 집권 때에는 대원군 자신이 탕평책을 쓰고자 남인을 많이 등용하시었다.
그리하여 옥주공이 흥인군과 이재긍과 가까이 되자 모두 불행하게 되고 개화당의 집권이 불과 3일간 이다
Ⅱ. 김옥균 관련 옥천지방 구전자료
1. 김옥균 옥천출생 구전
<전설> 겨드랑이 비늘 난 애기장수 한 서린 걸포 갈마실
. 구술자 : 조복신 ,성별 : 여, 나이 : 90세, 학력 : 무학, 직업 : 농업
. 구술일 : 2010년 10월17일
. 주소지 :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 169-9, 걸포 (신주소 : 안내면 인포길 4l)
(내용) 갈마(매)실은 마을 남쪽 아주 큰 바위들이 있는 저 높은 산등성이에서 동네로 내려온 바위가 있는 중턱 골짜긴데.
원래 갈마실이 옛날에 말이 칡넝쿨을 뜯어 먹는 꼴짜기로 거기 사는 여자가 애기를 낳았데 막 애를 낳고서 오줌이 매려워서,
변소에 갔다 오니, 방금 난 애 겨드랑이 날개 쭉지에 아 글쎄 비늘이 낭겨, 이런 일이 벌어지자,
애기엄마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아기를 바로 활활 타는 불속에 태워 죽인겨, 애를 태워 죽이니,
칡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말이 갈마실 너머 함정에 빠져 죽었데요.
<구전 기사> 옥천신문
조선시대 개화운동가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이 태어난 곳 이라고 전해지는 걸포 마을~
2. 김옥균 옥천 선대묘소 구술자료
(1) 안내 걸포리 선황봉 산제당 :
♢구술자 : 조복신(90세)
현재 걸포 입구에 바로 접한 북편에 위치한 산으로 걸포 동네뒷산에 해당되며 옛날에 마을 사람들이 매년 산제를 지내던 산 이다.
걸포마을에서 전해오는 애기는 선황봉에 김옥균의 선대 묘가 있다고 전해오며 이 산제당 부근의 커다란 아람드리 소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몇 년 전에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 한다.
선황봉 제당에서 지내는 마을 산제는 주과포와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여 마을 사람들이 정월 초이튿날 제사를 지냈다.
선황봉은 성황봉에서 발음하기 쉽게 음운변화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2) 김옥균 선대 묘는 부리기재 산능선 어딘가에 있다.
-옥천읍 장야리 주민 구전
옥천-안내-보은으로 가는 37번 국도 상에 놓인 장계교 북쪽 안내천과 금강이 합수되는 웃성골 산에서 부리기재로 연이어 지는 남쪽 반도처럼 길게 내린 능선에 있다고 구전된다.
(3) 인포리 출신 정정우 구술자료 (구전일 : 2010.10.)
(4) 김길평(金吉平) 구술자료
. 구술일 : 2010년 11월 25일, 대담자 : 전순표, 대담장소 ; 옥천읍 교동리
. 구술자 : 김길평(金吉平) , 나이 : 71세, 학력 : 중학졸업, 직업 : 상업(전)
. 주소지 :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1가 186-105호
. 출생지 : 옥천군 안내면 장계리 진모래 마을(장사리, 현 장계국민관광지 자리)
(내용)
(질문1) 김옥균 선생의 조상묘가 인포리 어디에 있다던데요?
(구술)
장사리(장계리 진모래) 동네에서 강건너 산을 달이 뜨는 산이라 하여 달돋이 산이라 불러. 그곳 고개를 달돋이 고개라 하는데 이 달돋이산에 김옥균 묘가 강 건너에 여러 개가 있는데 묘지가 보통 큰게 아녀, 묘도 여러 개여.
김옥균은 원래 oo 김씨인데, oo 김씨로 옮겼어, 벼슬을 못한다 하여 바꿨어.
➡※필자 해석 : 바로 위에서 한 구술은 김옥균 선생의 어릴 때 세도있는 김병기 부사에게 양자간 일이 본관이 바뀐 것으로 와전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전에 장사리에 살 때 1965년까지 달돋이 산에 가서 금초도 해주는 등 일을 도와주었던 기억이 나.
그전에 김일동씨가 금초도 해주고 관리했었는데 그 아들이 세무서 다니다 농협조합장을 했던가, 영동 순양리 김덕현 이야, 그 삶에게 물어 보면 잘 알거야.
지금 산 관리는 인포리 사람이 하지.
(질문2) 달돋이산 묘지에는 상석이나 망주석은 있습니까?
(구술) 아, 떡판이~ 아니 상석이 있어, 묘지가 아주 크고 묘가 많어!
부리기재는 동네서 바라보면 앞산 왼편이 부리기재 이고 우측이 달돋이산 이지. 달돋이산에 가려면 절로(현리 신촌)루 가려면 나무가 쩔어서 가지도 못해 옛날 부리기재 가는 길이 다 없어 졌을거야?
어부들 배타고 장계다리에서 바로 건너가서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되는데 아마 이 건너서 보는 것 보다는 나무가 많아 좀 어려움이 있어.
정구철씨가 고기잡는 어부인데, 장계교에서 뿌리깊은 나무 가는 입구쪽 산기슭에 살아 찾아가 상의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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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동네 강건너 부리기재나 달돋이 산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습니까?
(구술)막지(군북면)서 창말(안내 현리) 장에 가려면 갱변 길을 죽 따라와서 동네 앞 열두 구비 부리기재를 올라 넘어서 다녔는데 사람이 고개를 지켜 못다니게 했다는 거야!
왜냐하면 부리기재를 밟고 넘어 다니면 산줄기 남쪽에 있는 김옥균 묘 주령을 끊는다 해서 김옥균 부하들이 못다니게 했다지.
(5) 옥천신문 기사
걸포 마을에는 김옥균 선생의 선대묘가 모셔져 있다는 애기가 전해지고 인포리에 서는 유일하게 선황봉 자락에서 산제를 지내는 곳이다.
(6) 「옥천의 마을 유래」 안내면 인포, 도율리 편
• 인포리 : “조선시대 개화운동가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이 태어난 곳이라고 전해지는 걸포 마을에는 김옥균의 선조가 모셔져 있다는 애기가 전해진다”고 주민의 구술한 것을 기록하였다.
• 도율리 : 도가실은 본래 청주한씨의 집성촌 이었으며 밤티는 밀양박씨가 세거하고 서남쪽 산줄기 끝에 김옥균이의 조상묘가 있다는 용문산이 있다.
(7) 옥천읍 금구리, 전용한 구술자료
김옥균의 조상묘가 장계교 다리 건너편 산에 있다고 주민들이 말한다.
(8) 안내면, 옥천 구읍지역 주민
김옥균 조상묘가 옥천군 북부지역인 안내면 용촌, 답양 가산과 군북면 막지리에 걸쳐 있는 연이은 산맥 어디인가에 묘소가 있다.
4. 청풍정 명월암 김옥균 전설
김옥균과 기생 명월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대청댐 청풍정 바위절벽에 명월암 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5. 사면상소 올린 증약 허직 찰방
옥천 증약 찰방을 한 허직(許稷) 등은 1886년 김병기 부사의 죄를 풀어달라는 상소를 대각(臺閣)에 올렸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일로 보아 허직 찰방은 김옥균 아버지 김병기와 친분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Ⅲ. 김옥균의 가계와 생애 및 대경장 정책 등
1. 신안동김씨 계보와 배출인물
신안동김씨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세도가문으로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안동김씨 하며 이 신안동김씨를 생각한다.
이 성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으로 신라말 고창군 성주로 고려 태조에 솔선 귀부함으로써 개국공신 대광태사가 되었다.
명문가로 발전하는 계기는 14세 김대효의 아들 15세 김상헌(金尙憲)이 인조반정 이후 청서파의 영수로 대제학을 거쳐 좌의정, 문정공의 시호를 받고 청백리 이었다.
그의 후손에서만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등 정승과 왕비 3명을 비롯하여 수십명의 판서를 배출하였다. 생부는 김극효(金克孝)는 상용, 상관, 상건, 상헌을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으나 넷째 아들 김상헌을 백형 김대효에게 양자 보냈다.
17세 김광찬(金光찬)은 동지중추부사, 17세 김수항(金수항) 대제학, 영의정을, 18세 김창집(金昌集)은 영의정, 19세 김제겸(金濟謙) 승지, 20세 김성행(金省行), 21세 김이장(金履長), 22세 김이순(金頤淳) 목사를 하였다.
특히 세도의 기반을 닦은 이는 김조순(金祖淳)인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대비 김씨 수렴첨정으로 그의 딸이 왕비에 간택하게 하여 김익(金익), 이도(履도), 달순(達淳), 문순(汶淳), 의순(義淳), 희근(羲根), 등이 이 시기에 우의정, 형조, 이조,예조 판서를 두루 지내며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의 기틀을 마련했다.
어린 헌종이 죽위하니 호위대장 김조근(金祖根) 딸이 왕비로 책봉되어 조정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였다.
김창협의 5대 손이 김문근(金汶根)의 딸이 왕비로 다시 발탁되어 김대비의 친정동생 김좌근, 김영근, 김보근(金輔根) 등이 각 판서직을 돌아가며 맡았고 그 다음 항렬인 김병학(金炳學)을 대제학, 김병국을 훈련대장, 김병이는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김병주, 병덕(炳德), 병교(炳喬) 등이 각각 판서를 하는 등 10촌 내의 일가끼리 요직을 돌아가며 맡았다.
2. 김옥균의 선조와 가계
시조는 김선평(金宣平)으로 고창(옛지명 안동) 성주였으며 고려 태조 때 아부공신에 올랐다.
이후 상계는 실전(失傳)하여 전해온다.
위와같이 상계가 실전되어서 <신>안동김씨 1세를 김습돈(金習敦) 공수부정으로 하고 2세 김여기는 호장, 3세 김남수(金南秀) 호장정위, 4세 김희(金熙)는 전농정, 5세 김자는 주부동정을 살았다.
6세 김근중(金斤重)은 판예빈시사, 7세 김득우(金得雨) 전농정, 8세 김혁(金革) 봉예랑, 9세 김삼근(金三近) 비인현감 지냈으며 아들로 계권과 계행을 형제를 두어 10세 김계권은 한성부 판관으로 아들이 다섯이다.
김계권의 5남 찰방 김영수(金永銖)는 11세로 3남을 길러 차남은 12세로 평양서윤 김번(金璠)은 그의 아들 13세 김생해(金生海)는 신천군수를 하였다.
김생해는 슬하에 4명의 아들 대효(대효), 원효(元孝), 극효(克孝), 선효(善孝)을 두었다.
김옥균(金玉均)은 김극효의 장남인 김상용의 후손으로 김극효(金克孝)는 상용, 상관, 상건, 상헌을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으나 넷째 아들 김상헌을 백형 김대효에게 양자로 보냈다.
김옥균의 직계 조상인 14세 김극효(金克孝)는 돈녕부 도정의 벼슬을 하고 아들 네명 중 장남인 김상용(金尙容)은 우의정을 하고 시호는 문충공이다.
문충공 김상용의 아들 16세 김광현(金光炫) 이조참판, 차남 17세 김수민(金壽民) 덕산현감, 18세 김성달(金盛達) 고성군수, 차남 19세 김시윤(金時潤) 충청도 청산현감을 지냈다.
김시윤의 차남인 20세 김겸행(金謙行) 이조참의를 하고 김경행 4남인 21세 김이적(履績) 이조참의, 김이적의 3남은 22세 김후순, 23세 김교근(金喬根) 광주목사, 김교근의 차남 김병기(金炳基)는 옥천군수 살고 형조참의에 증직되었고 김병기 부사의 형인 김병규(金炳圭)는 대사헌을 지냈다.
김옥균(金玉均)은 옥천군수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양어머니는 전주이씨 이고 생부는 김병태(金炳台), 생모는 은진송씨 이며 조부는 김영근, 증조부는 김능순, 고조부는 김이적(金履績) 이다.
양아버지 김병기와는 김옥균 친가로 7촌 아저씨 이며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친가로 11촌, 양가 쪽으로 19촌에 이르는 가까운 종친이다.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金斗漢)과는 20촌, 김을동(金乙東) 의원은 21촌 이다.
3. 김옥균의 생애
고우 김옥균은 1851년(철종 2년)~1894년(고종 31년) 조선말기의 정치가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우(古愚), 고균(古筠) 이며 본관은 조선후기 세도가인 (신)안동김씨 이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1851년(철종 2년) 1월 13일 아버지 안동김씨 김병태(金炳台)와 어머니 은진송씨(恩津宋氏)와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기존의 출생지 설은 3곳으로 공주시 정안면과 대전시 동구 이사동과 옥천군 인포리 걸포 등 3 지역이 거론되나 아직 불명확한 것으로 알려졌다.
3살 때 천안으로 이사갔고 거기 천안 삼거리 부근에서 아버지 김병태는 시골 훈장을 하였으며 6살 때 7촌 일가인 한양의 세도가 집안인 서울시 종로구 화동 (구)경기고 자리에 살던 부사 김병기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원래 총명했던 그는 글과 서예 서화 등에 능하고 젊어서부터 바둑에 조예가 있었다 한다. 청년 김옥균은 1872년 21살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고 전적(典籍)을 거쳐 그 당시 출세코스인 정언(正言)을 역임했다.
□ 개화된 김옥균의 활약
1877년 김옥균은 의관 유흥기를 비롯한 박규수, 역관 오경석으로부터 개화사상과 신학문을 배웠고 유흥기는 개화승 이동인을 소개해 주었으며 이동인이 김옥균과 박영효의 도움으로 일본의 신문물을 돌아본 뒤에 귀국하여 일본의 각종 신문물을 전달해 주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의 선진문물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겸 부사로 일본에 가서 17만원의 차관을 얻어 가지고 1883년에 돌아왔다.
귀국하여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화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개화독립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유학생을 받아 일본학교에 유학하도록 주선하며 「치도약론」을 집필하여 조선의 도로정비에 관한 글로 치도국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구비, 오물처리법 등을 포함한 17개 세목에 달하는 글을 한성순보에 게재했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여 서재필을 비롯한 17명의 청년을 일본에 보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참의교섭 통상사무를 거쳐 수구파에 밀려 외직인 동남개척사가 되어 포경 업무를 겸하였다. 1884년 차관교섭을 위해 일본에 갔으나 민비세력과 묄렌도르프 등의 방해로 차관모집에 실패하여 민비 세력과 갈등과 알력이 커졌다.
김옥균은 개화, 개방을 주장하며 조선은 프랑스와 같이 자주 근대화한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 김옥균의 대경장(大更張) 정책
김옥균 그는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완전한 자주독립을 성취하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정치에 대경장(大更張)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봉건제도인 양반신분제도 및 문벌을 폐지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을 통해 프랑스와 같은 근대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국가재정의 개혁, 화페개혁, 관세 자주권 확립 등을 통해 국가 재정의 효율적 관리와 확대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 개발, 선진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하는 상공업 발전 정책을 주장했다.
농업과 양잠은 물론 목축의 발전과 임업, 어업, 포경산업의 개발을 주장하였고 국가의 기반시설인 철도 부설,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한 통신의 발전, 도로의 개선과 정비, 인구조사 실시를 주장했다.
특히 그는 국가의 근대화를 위한 인재 양성을 위해서 학교를 널리 설립하며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고 국방력 양성과 경찰제도의 개혁, 그리고 위생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며 조선의 중립화를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위와같은 정책들로 자주독립과 근대화 된 부강한 국가건설을 실천하려 했다.
□ 태극기 만든 김옥균과 박영효
김옥균은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문화를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외국과의 개방에 따른 외국과의 통상 등의 교류를 위해 우리도 국가의 상징인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개화당 동료 박영효와 함께 태극에 사괘를 넣은「태극사괘 太極四卦」의 태극기(太極旗)를 고안하였다.
이 태극기는 조선 정부에서 1883년(고종 20년) 1월에 공식 국기로 사용할 것을 공포하였다. 이같은 일은 국제사회에 조선이 자주 독립국가라는 것을 온세계에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김옥균은 이 시기에 동남개척사가 되어 조선의 해양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일환으로 동해의 포경업과 울릉도의 임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 베트남에서 청국과 프랑스 전쟁 틈타 갑신정변
마침내 청국이 베트남의 프랑스와 전쟁으로 청국군이 연전연패하고 조선의 청국군 군사를 그곳으로 절반을 빼가자 이에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갑신정변을 우정총국 낙성연회에서 일으켜 주도자로 호조참판에 오르나 일본의 배신으로 3일만에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의 정치개혁안은 대원군 송환, 문벌폐지, 내시부해체, 탐관오리 정죄, 순사제도 실시, 혜상공국 해체, 근위대 창설, 호조로 재정일원화 등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던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 이었다.
이에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그 당시 일본 바둑계의 본인방과 바둑으로 소일하며 일본이 의도적으로 1886년 6월 오가사와라섬, 1888년 홋가이도로 추방․연금시키는 등 오랫동안 유배되었다가 도쿄로 다시 돌아온다.
1894년 3월 동양평화를 위해 상해에 이홍장을 만나러 갔다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전에 복권 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어 시호는 충달(忠達) 이다.
4. 옥천군수를 역임한 김옥균의 안동김씨 종친들
(1) 제228대 김이기(金履基) 군수
• 재임기간 : 1781년(정조 5년)~1782년(정조6년) 능주목사로 감
. 위치 : 옥천읍 교동리 비석거리(개나리 유치원), 둘째줄, 좌측 3번
. 건립시기 : 건륭乾隆 병오丙午 (1786년, 정조 10년)) 10월 세움
. 비문 : 郡守金候履基永世不忘碑
군수김후이기영세불망비
. 크기 : 가로50 ☓ 세로 120 ☓ 두께 22cm
. 석재 : 화강암 .보존상태 : 비신 양호, 비갓 없음
김이기(金履基 1724~1790년) 옥천군수의 자는 덕녀(德女), 영안부원군(김조순)의 백부로 관직은 온능령(溫陵令) 하고 통훈대부에 이르렀고 양손자 김유근과 양증손자 김병주는 각각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한 동생 김이경에 양자간 아들 김명순 이조판서, 손자 김홍근 좌의정, 김응근 형조판서, 김흥근 영의정에 각각 관직에 오르고 증손자 김병덕 좌의정에 올랐다.
청산 현감을 지낸 김병시(金炳始)는 영의정, 총리대신을 지낸 안동김씨 실세인 세도가 출신이다.
(2) 제243대 김인순(金麟淳) 군수
• 재임기간 : 1802년(순조 2년)~1807년(순조 7년), 임기만료
김인순 군수는 아들 김준근, 수근, 문근 3형제를 두었는데 3자인 김문근을 김이순에게 양자로 보냈으며 그의 손녀인 철인왕후 김씨가 철종비가 되어 김문근은 영은부원군에 봉해졌다.
차남 김수근 이조판서, 손자 김병학 영의정, 김병국 영의정을 각각 역임했다.
(3) 제252대 김면순(金勉淳) 군수
• 재임기간 : 1830년(순조 30년)~1834년(순조 34년), 임기만료
청음 김상헌의 7대 종손이다. 생부는 김이석(金履錫) 이다.
(4) 제256대 김이종(金履鍾) 군수
• 재임기간 : 1841년(헌종 7년)~1843년(헌종 9년), 남원부사로 감
(5) 제259대 김유순(金有淳) 군수
• 재임기간 : 1850년(철종 1년)~1853년(철종 9년), 부평부사로 감
(6) 제269대 김병기(金炳基) 군수 ⇦ 김옥균 양아버지
• 재임기간 : 1865년(고종 2년)~1867년(고종 4년), 양양부사로 감
김병기 군수는 1856년 옥과현감을 시작으로 1859년 금성현령, 1865년(고종 2년) 옥천군수를 거쳐 1868년 양양부사, 1877년 마전군수, 1880년 강릉부사를 역임하고 가평현감을 살고 형조참의에 올랐다.
1883년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부호군 이었으나 정변 실패후 김옥균의 양부로 삭탈관직 되었다.
1886년 허직 등 대각에 상소하여 사면을 요청하였지만 거부되었다.
김옥균의 양아버지인 김병기의 5대조 김시윤(金時潤)이 청산현감을 지냈고 큰형 김병규는 대사헌에 올랐다.
(7) 김병시(金炳始) 공충도 관찰사
※ 그 당시 충청도(忠淸道)의 행정구역 명칭을 「공충도(公忠道)」라 하였고 관찰사의 감영은 충남 공주에 있었다.
. 건립시기 : 광무 8년) 11월
. 비문 : 觀察使金公炳始永世不忘碑
관찰사김공병시영세불망비
. 크기 : 가로45 ☓ 세로120 ☓ 두께22cm
. 석재 : 화강암(비석大)
. 보존상태 : 양호, 비갓 없음
형조판서 김응근의 아들로 1832~1898년 자는 성초(聖初), 호는 용암으로 1855년(철종 6년) 별시 병과 6위로 급제하였다.
처음 관직에 훈국금위 종사관을 살고 성균관 전적, 정언, 1860년 홍문관 교리, 1863년 이조참의, 1865년 병조참의, 1869년 예조참판, 의금부사, 1870년 공충도 관찰사를 하였다.
1874년 도승지, 1878년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이후 영의정, 구한말에 총리대신까지 지낸 안동김씨 세도가 사람이다.
(8) 김시윤(金時潤) 청산현감
• 김옥균의 친가 및 양자 가계도에서 직계 6대 조상이며 청산현감을 살았다.
(9) 제261대 유정환(兪廷煥) 옥천군수
김옥균의 부인 기계유씨는 현감을 한 유영환(兪永煥) 손녀이다.
유영환과 유정환 제261대 옥천군수와는 같은 기계 유씨(兪氏) 이며 빛날 환(煥) 돌림자(字)가 같아서 앞으로 유씨 부인과 관계가 있는지 관련성을 더 밝혀 보아야 한다.
(10) 제261대 유정환(兪廷煥) 옥천군수
. 재임기간 : 1856년(철종 7년)~1858년(철종 9년) 남원부사 역임
Ⅳ. 김옥균 유씨부인 -옥천구읍 10년간 피신생활
1. 유씨부인 옥천 피신생활 사료
(1) 주한일본 공사관 기록1
<문서제목 63> 김옥균(金玉均)의 처(妻)와 딸에 대한 배려지시
. 발송일 1894. 5. 28, 발송자 대신, 수신일 1984. 5.29
「김옥균의 처와 딸이 엄벌을 받으리라는 보도가 있음.
4월 14일 보낸 본관의 전문을 참조하여 잔혹하거나 비인도적 처사를 하지 않도록 조선정부에 충고할 것」
(2) 주한일본공사관기록2
<문서제목31> 옥천군 수색중 김옥균 처 발견 건
. 발송일 1894. 12. 5, 발송자 후비보병 독립 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
「우리부대가 옥천에 머무르면서 거괴(巨魁)를 수색하던 중 조선국의 지사였던 古김옥균의 처자가 이 옥천군에 있음을 듣고 제19대대 소야통역에게 사실 여부를 알아보도록 하였던 바, 정말로 김옥균의 미망인 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야통역의 요청도 있고 또 그 사람도 시급히 그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정이었으므로 소야통역에게 모든 일을 주선케 하여 오늘 출발, 귀관 앞으로 상경하도록 주선하였습니다. 그러하오니 공사관에 가는 병사를 선처해 주실 것을 바라며 이상 말씀드립니다.」
(3) 주한일본공사관기록3
<문서제목>1.박영효 복작과 갑신죄범사면 및
2.김옥균의 처(妻). 여(女) 발견의 건
. 문서번호 발제 130, 발송일 1894. 12. 31,
. 발송자 특명 전권공사 백작 정상성(井上성)
. 수신자 외무대신 자작 육오종광(陸奧宗光)
『세 사람 모두 관작이 회복되고 기타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죄인도 하나같이 그 죄명이 취소되었습니다.
그 시달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조선개국 : 503년 11월 13일(명치 27년 12월 9일) 궁보사록(宮報사록)
◦ 전교 : 故상신 홍순목, 故판서 박원양
故참판 서상익, 등 모두 관직에 복귀시킨다.
◦전교 :
『이제 겨우 처분을 내렸으나 동일시 하는 입장에서 달리 처리할수 없으므로 그 사건이 갑신년에 해당되는 죄인들은 죄명을 모두 제거해 주고 멀리 유배된 사람들도 모두 방면하여 조정의 관대한 뜻을 보인다.
그 후 3일이 지나 12월 13일 서광범 일행이 인천에 도착하고 다음날 14일 입경하는데 이날 우연히 김옥균의 처와 딸이 충청도 옥천에서 호송되어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초에 김옥균의 처와 딸에 대해서는 금년 봄 이래 누차 내려 힘썼지만 혹은 생존해 있다고도 하고 혹은 살해되었다고도 해서 그 설이 한결같지 않았는데, 이번 동학당들 토벌하는 일본군대가 옥천근방에서 수괴를 수색하던 중 뜻밖에도 위의 모녀 2인을 찾아 냈으므로 일본군대에 소속되어 있는 선통변 박윤영(朴允榮)으로 하여금 그 보호를 담당하게 하여 경성으로 호송 현재 박, 서 두사람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옥천에서 극히 불쌍한 모습으로 살아왔으며 경성에 도착하기 까지는 김옥균이 살해 돤 사실마저 확실히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4) 상경후 노량진, 논산 아들 집에 살았다.
김옥균의 부인 기계유씨와 딸은 10년간 옥천 구읍에서 비참한 비녀, 비첩 생활을 끝내고 1894년 12월 초 옥천에서 일본군 통역 박윤영에게 발견되어 함께 한양으로 호송되었다.
그후 부인 유씨의 소식을 매일신문은 1914년 9월 9일자 기사에서 “김옥균의 부인 유씨가 충남 논산군인 양자 김영진(金英鎭)가에서 숙식해오다 오늘(1914년 9월 9일) 64세로 사망하였다.” 사망한 소식을 다뤘다.
또 이날 기사에서 “부인 유씨는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한 뒤 옥천감옥에서 10여년 재옥중(在獄中) 청일전쟁 이후 석방되어 노량진 친가에서 기식하다가 융희 연간에 김옥균이 죄가 풀려 전기(傳記 김영진) 양자집에서 살았다.”고 전했다.
□ 김옥균 부인 기계유씨 가계도
10대조 함(函) - 진사, 증의정부 좌찬성
↓
9대조 대우(大佑)- 창녕현감, 사헌부 감찰
↓
8대조 차증(次曾)- 증좌승지
↓
7대조 비(棐) - 선공감역, 증이조참판
↓
7대조 명일(命一) - 양시문과, 승지, 의주부윤, 증이조판서
↓
6대조 복기(復基) - 진사, 좌참찬
↓
5대조 언술(彦術) - 1757년 증시합격, 대사헌
↓
4대조 한기(漢基) - 진사, 부사
↓
3대조 영환(永煥) - (1799~1844년) 진사, 현감
↓ ※棲(사위)―김석근(金晳根) - 안동인 문과합격, 참판
2대조 치상(致庠) -(1822~1912년)부인 창원황씨〔부 목사 황종림(黃鐘林)〕
부인 전의이씨 (부 근생)-1녀
↓
양자 진황(鎭璜)-주사, 유씨부인(兪氏婦人)――김옥균(金玉均), 안동인, 참판
↓양자
김영진(金英鎭) 평안도관찰사(일제시대)
↓
김성한(金聲翰)
(5) 친아버지 김병태 천안서 체포, 교수형
한편 갑신정변 실패 후에 생부 천안에 살던 김병태에게 역적의 아버지라고 체포령이 내려져 천안감옥에 갇혔다가 교수형을 당하였고 누이동생 김균은 위장 자살하고 부인은 7살 난 딸을 데리고 선대 조상묘가 있는 옥천으로 피신해 왔다.
옥천 구읍에서 주막을 하다 주변의 밀고로 옥천옥에 갇혀 비녀(婢女 여자 노비)로 있다가 옛날 아버지의 부하였던 아전에게 비첩(婢妾 여자노비신분의 첩)으로 가서 살다 그마저 살수 없어 비참한 생활을 하다 일본군 통역 박윤영이 옥천 동학군을 수색하다 발견하였다.
(6) 남편 송병희의 애뜻한 사랑
-위장 자살 꾸며 김옥균 누이동생 살려
김옥균 여동생 김균(金均)은 남편 송병희의 애뜻한 사랑으로 죽음을 면하게 된다.
오빠 김옥균의 거사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약을 마셨다.
그러나 치사량에 미치지 않는 양 이었다.
남편 송병희는 약을 마신 아내 김균을 숨겨 살려내고는 거짓 시체를 만들어 3일장을 치른다. 모두 김균이 죽은 줄 알았다.
1년이 지난 후 송병희는 경상도 영천(永川)에서 재취를 맺는 혼인잔치를 성대히 베풀었다. 신부는 진한 화장에 꿀물을 눈에 발라 눈을 뜨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신부가 다름 아닌 본처인 김균 이라는 사실을 영천 사람들이나 관아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영천에서 혼인을 마치고 사흘만에 천안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리 서당골로 옮겨 여생을 마쳤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그녀의 묘소와 비석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Ⅴ. 김옥균 아버지 김병기는 옥천군수 였다.
1. 아버지 김병기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인 김옥균의 양아버지 김병기(金炳基)는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김씨 이며 옥천군수를 재직하였다.
조선후기인 1814년(순조 14년)에 태어나 목사 김교근(金喬根)의 아들이며 대사헌 김병규(金炳奎)의 동생으로 갑신정변의 주도자 김옥균의 양부이다. 김병기의 집은 서울시 종로구 화동 (구)경기고 자리로 옛날 박팽년 선생이 살던 집터 이다.
1846년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급제를 못하고 음직으로 1852년(철종 3년)광릉참봉을 지냈다.
1856년 옥과현감을 시작으로 1859년 금성현령, 1865년(고종 2년) 옥천군수를 거쳐 1868년 양양부사, 1877년 마전군수, 1880년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복권되어 부호군(副護軍)에 가자(加資)되었으며 1892년(고종 29년)에 감리 관북육로통상 사무가 되었다.
Ⅵ. 기존출생설이 있는 공주와 대전 이사동 현황
1.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생가지
. 위치 :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
광정리 밤톨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300m 지점인 사목동 감나무골에 위치한다.
충청남도는 1976년 유형문화재 충남 기념물 13호로 지정 고시하였다.
이곳 생가지에는 비신이 오석(烏石)인 추모비를 세웠다.
충남 공주시는 「김옥균 생가지 복원 및 교육문화시설 설립 추진계획」을 세우고 2009년부터 총 11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전시교육관 설립, 생가지 복원, 주차장 설치를 계획하여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 “김옥균 선생 유품을 찾습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공주박물관과 심우성 공주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이 적극 유물수집에 나서고 있다 한다.
2. 대전시 이사동 생가지 현황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은진송씨 문중은 김옥균 선생의 외가집 마을로 은진송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 이다
조선말 정치가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선생이 이곳 동구 이사동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대전시 비지정문화재로 생가에서 200m 떨어진 곳에 김옥균 생가지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해 놓았다.
이 표지석 전면에는 “믿음의 모든 도의 근원이다‘는 “신위도근원 信爲道根源” 김옥균 선생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Ⅶ. 김옥균의 죽음과 그의 묘지
1. 상해에서 김옥균 암살 이후
1884년 2월 22일 살해된 상해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이 유해가 조선으로 옮겨져 마포 양화진에서 사지가 찢기는 부관참시를 당하여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되고 잘려진 토막난 신체는 전국 각 고을에 보내졌다.
한편 민영소의 지시로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본래 프랑스에 유학한 사람이며상해에서 귀국하여 홍문관 교리에 특채된다.
아관파천 후에 고종에 건의하여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정할 것을 건의하고 궁내부 외사과장으로 승승장구하며 황국협회를 만들어 개화세력을 계승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대해 사사건건 대립하다 개화세력에 밀려 몰락한다.
2. 김옥균의 묘지
김옥균의 묘지는 3곳으로 아산시 영인산과 도쿄 아오자와(청산공원 외국인묘지) 도쿄 진죠지(眞0寺) 세 곳에 묘지가 있다.
(1) 아산시 영인면 김옥균 묘역
. 위치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 번지 (영인산 자연휴양림)
. 묘소 : 규장각 대제학 김옥균과 정경부인 유씨 합장
. 문화재 : 충청남도 기념물 13-1호
. 설치물 : 문인석, 망주석, 석등, 석양(石羊)
아산시 영인면에 위치한 김옥균 선생 묘지는 그 당시 아산군수를 하던 양자 김영진(金英鎭)이 1912년 9월 일본 도쿄 아오자와(청산공원 묘지 외국인묘역)에서 김옥균의 의복과 머리카락 일부를 가져와 기계 유씨 부인과 합장하였다.
(2) 일본 도쿄 아오자와(청산공원) 외국인 묘지
. 위치 : 도쿄 아오자와 외국인 묘역
. 조성 : 일본인, 김씨우인회
. 내장품 : 중국 상해에서 가져온 의발 (의복과 머리카락)
. 설치물 : 대형비석(낡고 초라함)
유길준(兪吉濬)은 조문에서 죽은 김옥균에 대해 “슬프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도 못한 채, 비상한 죽음을 당했다”고 썼다 한다.
일본정부는 김옥균 암살 2개월 전부터 암살계획을 감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김옥균이 상해에서 살해되자 생전에 홀대하던 것과는 달리 그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분투하다 희생됐다면서 일본인 인사들이 김옥균 우인회를 만들고 20여명으로 장례위원회를 만들어 중국 상해에서 신체를 인수할 것과 기념비 건립을 위한 의연금 모금을 결의한다.
동경 진죠시 절에서 치러진 김옥균의 동경 장례식에는 일본의 82개 언론사 대표가 참석한다.
일본은 김옥균의 암살을 기회로 별안간 일본 조야에서는 김옥균을 추모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리며 중국의 김옥균에 대한 처사를 비난하는 등 청국에 대한 일본인의 국민감정을 악화시키는데 이용하였다.
이렇게 일본정부는 국내 정치의 불만을 타개하고 청일전쟁에 심리적 요인으로 십분 활용하여 청국에 대한 침략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조선에서 그해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진압을 위해 청군이 조선에 상륙하자, 일본군도 이에 뒤질세라 인천항에 상륙하여 동학군 토벌과 조선에 와있던 청국의 군대와 청일전쟁을 벌여 동북아의 평화는 깨진다.
그러자 한반도는 청일 양국군대의 주 전쟁터가 되었고 일본이 동양의 패권을 잡는 계기를 만든다.
(4) 김옥균 유물, 기타
1. 친필 소장 : 전북 고창군 신재효 “판소리 박물관”
2. 각자(刻字) : 설악산 비선대 절벽에 새긴 글.
3. 포항 호미곶에 부관참시된 팔 하나를 뭍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맺는말
김옥균 그는 누구인가?
그는 19세기 개화, 개방의 선각자로 조선 말기 구태․의연하게 반복되는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민생파탄, 습관화 된 유교적 매너리즘에 빠진 조선의 정체성을 자주화된 근대국가로 탈바꿈 하려 했던 시대를 선도한 정치지도자 였다.
김옥균 그는 개혁가인가? 친일파인가?
물론 김옥균 선생은 일찍이 유흥기, 박규수, 오경석 선생에게 개화사상을 배우고 일본으로부터 신문물을 익혔으며 일본의 힘을 빌려 갑신정변 성공시키려 했다. 단선적인 시각과 측면에서 친일파라고 단정지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반대 정파의 암살 위협과 청나라의 제거의지 등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가 그 당시 청나라 실세인 리홍장(李鴻章)과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단판하려 하는 등 통 큰 정치․외교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자본주의 발달의 암흑기에 산업 경제를 부흥시켜 자유하고 독립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갑신정변의 변혁을 시도한 동아시아 근대사에 길이 남을 옥천이 배출한 큰 인물 이다. 김옥균 선생은 근대시대의 선각자 이며 동아시아 대전환기에 영향을 끼친 옥천에서 출생한 개혁가였다.
김옥균 선생과 관련한 윗글이 사료로서 한계성은 있지만 김옥균 선생이 옥천에서 출생하였다는 출생지가 밝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옥주유고」는 그간 옥천에서 설왕설래 하던 김옥균 선생 출생과 관련한 이야기가 구체화 되며 신빙성을 더하는 역사자료로 앞으로 「김옥균 사료 찾기」에 강호재현의 노력을 기대한다.
【참고문헌】
. 沃川郡誌, 1976년, 옥천군지편찬위원회, 옥천문화원,민우인쇄사
. 沃川郡誌, 1994년, 옥천군지 편찬위원회, 충북보훈복지인쇄조합(청주) 삼양인쇄
. 公州郡誌, 1988, 공주군지 편찬위원회, 공주합동출판사
. 옥주유고, 정납, 정구충 발문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실용국사년표, 김현길, 1998년, 도서출판 수서원
. 한국 근대인물 백인선, 신동아 1970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 옥천신문, 2002년. 2. 9일자 기사
.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2004, (주)웅진닷컴
. 자료 한국근현대사입문, 이종범·최원규, 1995, 도서출판 혜안
. 옥천문화재, 옥천문화원, 2004년, 옥천기획인쇄
. 옥천의 마을유래, 옥천문화원, 2008년, 옥천기획인쇄
. 한국성씨보감, 김종진 편저, 1978, 범양출판사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