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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 1937년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최능진 선생.<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29년 10월8일 오후 4시 서울 원서동 휘문운동장에서 1회 경평축구대항전이 열렸다. 원래는 전날인 7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폭우로 하루 연기해 열렸다. 승리팀은 평양팀이었다. 평양팀은 평양숭실전문대팀이 주축이었는데, 당시 숭실대 축구팀은 일본 대학 최강팀인 와세다대학팀을 이길 정도로 강한 팀이었다.
축구가 조선에 소개된 것은 1910년 전후였다. 축구는 조선에 착륙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각종 축구단이 결성되고 이어 축구대회가 열린다. 그러다가 간혹 한일전이 열려 조선 축구팀이 이기기라도 하면 일제탄압에 신음하던 조선인들은 마치 전쟁에서 이겼다는 듯 전 민족이 흥분의 도가니로 빨려 들었다. 이러한 축구 열풍 속에서 경평축구대항전이 시작됐다. 심지어 1930년에 열린 2차 대회에서는 폭력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이 폭력사태를 핑계로 경평축구대항전을 중단시켰지만, 속내는 조선인들이 한데 뭉쳐 열광하는 모습을 편히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33년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이 결성되고 경평축구대항전은 매년 봄과 가을에 열리는 정기전이 된다. 이때 평양축구단을 결성한 이가 최능진이었다. 경평정기전은 이후 1935년까지 진행됐고, 이후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축구팀이 늘어나자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로 발전한다. 경평축구는 1935년까지 22회 진행됐으며, 해방 직후 1946년에 한 경기를 더 치러 23경기가 치러졌다. 승패는 평양팀이 10승 7무 6패로 4승을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 이토록 민족적 자존심을 한껏 추어올렸던 경평축구정기대항전을 성사시킨 최능진을 누구인가?
미국에서 체육학 공부, 평양축구단 창설
최능진은 1899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경흠은 지주이자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숙부 최능찬과 최능현은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사형선고를 받는 등 그의 집안에는 항일운동가들이 많았다.
이러한 탓에 최능진은 어려서부터 조선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는 평양숭실중학을 졸업하고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 입학한다. 191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프링필드대학과 듀크대학에서 체육학을 공부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워싱턴에서 YMCA 체육담당 간사로 일하며 흥사단 14회 뉴욕대회에서 ‘운동회’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시기 최능진은 축구 외에도 럭비·농구·테니스 등 만능선수 활동했다고 한다.
이때 이승만을 만난다. 그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면서도 오히려 독립운동세력을 분열시키고 독립운동자금을 착복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특히 이승만이 주장하는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은 사대주의라고 규정했다.
1929년 10월9일자 동아일보에는 ‘만능주장선수 최능진씨 귀국’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최능진은 11년간의 미국생활을 통해 익힌 서구의 체육교육 시스템을 모국에도 전파하고자 돌아온 것이다. 동아일보는 그의 미국생활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조선체육계를 지도할 한 개의 별이 나타났다’며 칭송한다. 그는 곧 평양 숭실전문학교 체육부 주임이 된다. 이후 관서체육회 축구부를 맡았고, 심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32년 평양축구단을 창설해 전국에 축구 열풍을 일으켰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1월 결성된 수양동우회는 흥사단이 계몽활동을 위해 국내에 만든 단체였다. 여기에는 최능진을 비롯해 이광수·주요한·주요섭·김동원·조병옥 등이 참여했다. 그런데 1937년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수양동우회를 표적 수사한다. 이 사건으로 이광수·주요한 등 조선의 지식인들이 친일파가 됐다. 그리고 흥사단 지도자 안창호는 고문후유증으로 병사하고 만다. 체육계의 명망가인 최능진은 2년간 옥살이를 하지만 친일파로 전향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체육활동을 권장해 체력을 증진시키고 여러 종목의 경기를 통해 조선인들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한 최능진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최능진은 이 사건으로 일선에서 후퇴한다. 그리고 1942년 일제는 조선인 구기종목 경기 일체를 중단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해방 후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이 되다
최능진은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 현준혁)에서 치안부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그해 9월 현준혁 암살사건이 일어나자 북의 지도층에서는 치안부장이던 최능진을 살인 배후로 보고 수배령을 내린다. 최능진은 하는 수 없이 고향땅을 떠나 남으로 내려오게 됐다.
최능진이 남쪽으로 내려와 가장 놀란 일은 친일경찰들이 그대로 경찰직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노덕술은 해방되기 전 최능진이 머물고 있던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친일파였다. 해방 후 소련군에 체포됐던 그가 남쪽으로 도주해 수도경찰청의 수사국장이 되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래서 최능진은 능숙한 영어 실력으로 미군정을 직접 찾아가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는 임명직후 강습소 내에 친일파 출신들에게 사표를 받아 냈다. 당시 미군정 경무국장은 최능진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같이 감옥살이를 한 조병옥이었다. 미군정은 최능진을 경무국 수사과장으로 임명한다.
경무국 수사과장 최능진은 조병옥의 만류에도 계속 경찰 내 친일청산을 주장한다. 당시 경찰 간부의 80%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일경에 종사한 조선인 8천명 중 5천명이 미군정에서도 경찰에 복무하고 있었다는 통계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 10월 인민항쟁이 발발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의한 폭동사건’이라고 미군정에 보고한다. 하지만 수사과장 최능진은 ‘친일파 경찰들이 해방 후에도 경찰에 남아 있어 이에 국민이 반발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당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있던 김규식 박사가 나서서 최능진의 주장을 옹호한다. 그러자 미군정청장 하지는 ‘대구사건의 원인규명과 대책수립을 위한 한미공동회담’을 열게 된다. 한 달여에 걸친 회담 결과 ‘친일경찰 청산과 조병옥 퇴진’ 내용을 담은 내용을 하지에게 전달했다. 하지는 친일파 출신 경찰들을 파면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친일경찰들은 계속 경찰직에 남았다. 또한 조병옥 해임 요청은 거부했다.
결국 미군정의 재신임을 얻은 조병옥은 최능진을 “경찰 사기를 떨어뜨리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유해한 인물”이라면서 1946년 12월4일자로 파면했다. 그러자 최능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했다.
“귀하는 당연히 현직을 사퇴해 3천만 민중 앞에 고두(叩頭) 사과하는 동시에, 속죄의 의미로서 8·15 이후 불의(不義) 취득한 재산을 전재(戰災) 동포를 위해 제공한 후 해방 전의 애국자 조병옥으로 돌아가기를 충고한다.”
반 이승만 활동, 이승만의 보복
최능진은 경찰직을 그만둔 뒤에도 친일파 제거를 위한 투쟁을 계속 전개한다. 미군정하에 만들어진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서는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이 발의돼 제정이 됐으나, 미군정은 이를 거부했다. 최능진은 서재필·김규식 등과 만나 친일파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은 이승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단독정부 반대론’에 함께하고 있었다.
1948년 5월10일 미군정은 남한만의 분단국가를 세우기 위한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에 들어간다. 이때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 선거구에 단독출마한다. 친일파와 일부 우익세력들은 초대 대통령감으로 이승만을 추대하려 했다. 이때 최능진이 반대했다. 최능진이 출마를 선언하자, 유권자들은 친일경찰을 몰아내려 했던 최능진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렇게 되자 단독출마로 당선을 꿈꾸고 있던 이승만은 낙선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이승만에게 매수된 동대문 갑구 선거위원회에서는 최능진의 후보추천서를 갖은 이유를 대며 받아주질 않았다. 청부업자를 동원해 추천서를 탈취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최능진의 출마는 무산되고 말았다.
최능진은 1948년 10월1일 ‘내란음모죄’ 명목으로 체포돼 종로경찰서로 강제 연행됐다. 이승만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최능진이 서세충 오동기 등과 반란을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일명 ‘인민해방군사건’)를 씌운 것이다. 게다가 그해 10월19일 여순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추가됐다. 그는 1심에서 3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례적으로 2심에선 그보다 많은 5년형을 선고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심(二審)에서 이심(李心)이 반영돼 벌어진 일이라고 해석했다.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서대문형무소 옥사 문을 열었다. 출감한 최능진은 서울에 머물면서 전쟁은 안 된다며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UN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최능진의 평화통일 주장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불법 구속했다. 최능진은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1951년 2월1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은 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친일파 김창룡이었다. 훗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최능진을 구속한 인민해방군 사건도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최능진은 유서에서 “가아(家兒) 필립·봉립·만립·화선·자립과 애처요 친우인 이풍옥에게 끝으로 부탁과 사과의 말씀을 남긴다. 부(父)의 금일의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됨인데…. 우리 국가가 이 모양으로 간다면 너희들의 생명도 안전치는 못할 것이다” 하고 적었다.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여기 셋째 아들 ‘필립’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 최필립이다. 국가폭력에 의해 사망당한 아버지를 둔 아들이 국가폭력으로 민간인에게 불법으로 빼앗은 단체의 대표가 된 것이다. 손자 최우석은 조선일보 기자로 방우영 사장의 측근이 됐다. 국가폭력의 피해자의 자녀들이 국가폭력 가해자의 협력자가 된 것이다. 죽는 날까지 일제와 분단세력과 싸운 최능진에게는 비운의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최능진의 죽음과 관련해 “근거 없는 재판부에 의해 사실관계가 왜곡된 판결로 총살을 당했음으로 중대한 인권인 생명권을 침해받았다”고 밝혔다.
이창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