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꽃
당신은 고구마꽃을 본적이 있는가. 농촌에 살았던 사람들도 보지못한 진귀한 꽃을 본 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고구마꽃은 얼마나 예쁘기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뿌리를 보면 울퉁불퉁 못생겨 꽃이 예쁘다는 걸 기대하지 않지만 한편으론 부잣집 귀부인같은 자태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을 내심 품은 적도 있었다.
유년에 부모님을 따라 넓은 고구마밭에도 가보았지만 우글우글 뱀처럼 엉겨붙은 줄기들만 무성할 뿐 꽃은 보지 못했다. 고구마는 아예 꽃을 피우지 않는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낸 세월이 수십년이었다.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이주하며 생할 터전을 마련할 때까지도 부모님이 수확한 고구마를 맛보며 지냈다.
내 어린 시절 농촌의 우리 집은 고구마를 많이 재배하였다. 콩이나 깨, 감자 등의 작물도 많이 심었지만 고구마는 매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밭에서 캔 고구마는 어김없이 아랫목에 설치한 통가리로 옮겨져 겨울을 나게 되었고 겨울이면 화로에 고구마를 묻어 구워먹거나 날로 깎아 먹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흔한 고구마지만 난 그때까지도 고구마꽃을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을 따라 고구마 밭에서 풀을 매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꽃이라 고구마는 아예 꽃을 피우지 않는 종족으로 여겼다. 늘 보며 지나쳤던 다른 작물들은 그 꽃의 모양이나 빛깔이 아직도 선명히 뇌리에 박혀있지만 고구마는 줄기로만 대를 있는 줄 알았다. 봄만 되면 한뼘씩 자른 고구마 줄기를 한아름 않고와 밭고랑에 그 줄기들을 꽂는 부모님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안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산행을 할겸 해서 집을 벗어나 사정동 도로변을 터덜터덜 걷게 되었다. 쏟아지는 땡볕에 도로가 축축 늘어지는 한낮, 동물원 못미쳐 한적한 상당마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몇 평 되지 않는 도로변 고구마 밭에 잠시 눈길을 멈추었다. 밭은 공간이 작은 데도 고구마들이 실하게 줄기를 뻗어 무성한 잎을 매달고 넌출거리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다가 혹시나 하고 무성한 줄기들을 헤젓는 순간, 연분홍으로 물든 꽃들이 수줍게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밀었다. 고구마 줄기에 왠 나팔꽃인가 싶어 유심히 줄기를 따라가 보았더니 말로만 듣던 고구마꽃이었다. 한평생 시골에서 뼈 빠지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보지 못했던 고구마꽃이었다.
꽃잎 속 깊숙이 혼자 가느다란 다리를 뻗고 있는 암술과 그 암술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수술들, 그 정분을 견디지 못했는지 어느새 벌이 날아들어 중매를 서고 있다.
세상의 암수는 필시 열매를 위해 사랑을 하는 법인데 열매를 맺지 않는 저 고구마꽃은 덧없는 사랑을 하는 것인가. 그 사랑 때문에 고구마꽃은 그 지겨운 세월을 모습조차 보여 주기를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그 오랜 세월을 참고 참다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기에 세상은 또 그렇게 시끄러운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렵사리 만난 꽃이라 더 귀한 법인가. 카메라에 그 꽃을 담아와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나팔꽃을 찍어와 수선을 떤다고 오히려 타박이다. 아내의 말처럼 고구마꽃은 그 모양과 빛깔이 영락없는 나팔꽃을 닮았다. 오히려 메꽃에 더 가깝다고 하는 편이 낫다.
요즘 고구마꽃이 만개했다고 여기저기서 수선을 떨었다. 괴산과 제천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 오랜만에 만발한 고구마꽃을 길조라고 하며 연신 떠들어댔다. 물론 처음에는 고구마꽃을 흉조의 대상으로 삼은 적도 있었다. 그 꽃이 피면 나라에 기근과 전쟁이 들고 마을 인심이 흉흉해진다며 애써 피어난 꽃을 남몰래 따내던 시절은 그런 데로 순박하였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 고구마꽃을 길조라고 여기는 북쪽 사람들의 고구마 사랑은 더 분에 넘친다. 실례로 고구마꽃이 만발한 시기에 맞춰 해방을 맞이했고 6·25가 끝났으며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됐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것은 속설로 치부될 수 있지만 고구마꽃이 간직하고 있는 그 신비의 매력이 그런 속설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고구마꽃에 그런 신비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고구마가 평생 한 번 만에 피는 꽃이든간에 신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꽃은 어차피 식물일뿐, 갈수록 심해지는 공해와 이상한파 때문에 고구마가 꽃을 피워 그런 신비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