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姜氏(강씨) 득성(得姓)의 유래 4500여년전 최초로 姜氏를 득성하신 분은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농(神農)씨의 이름 은 석년(石年)이며 천수<天水 지금의 중국 감숙 성(甘肅省) 위천현(渭川縣)> 지방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 협서성 기산현) 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따서 성을 姜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강씨는 모두 관향을 천수(天水)로 쓰다가 천년 내려 오면서 분파되어 운남(雲南), 광동(廣東),산서(山西), 니연(尼淵),유이(維夷) 등으로 갈리었다.
2. 진주(晉州) 득관(得貫)의 유래
통일신라 때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 정순공(正順公) 강진(姜縉) 선조님께서 진양후(晉陽侯)로 봉(封)해 사실(史實)을 근거로 고려 중엽부터 본관(本貫)을 晉陽(진양), 晉山(진산)으로 하다가 1900년대 이후에 진주(晉州)로 본관을 삼았다. 晉陽(진양), 晉山(진산), 진주(晉州)는 다 같은 이름이다.
3. 家門의繁榮
조선시대에만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5명, 대제학 1명,원수및 장군 25명,명신과 공신 51명,문과급제자 227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가문이 번성하였다.
* 참고문헌- 남한보(1685년간) 姜縉: 崇仁殿四韻壯元 太中大夫 判內議令 贈諡正順 晉陽侯, 강씨 세덕지(1749년 계향청 발간) 始祖元帥公 齊康公之後而 天水縣人也正順公 諱縉 封晉 陽侯 仍貫晉陽, 진양 강씨 문헌록(1809년 간 통훈대부 감찰공(휘 弼魯)의 서문)高句 麗兵馬元帥 至後 正順公 諱縉 封晉 陽侯 仍貫晉陽 其後 分爲四派 曰殷烈公, 曰博士公, 曰關西公,曰少監公 四派也
4.강씨 구기택지(舊基宅誌) 대봉산(大鳳山)은 진주(晉州)의 뒷산, 지금의 비봉산(飛鳳山)이요 봉곡촌(鳳谷村)은 지금 의 진주시 상봉동동(上鳳東洞)과 상봉서동(上鳳西洞)의 두 동을 합친 마을 이름이다. 옛날 이 봉곡촌에는 우리들의 조상님들께서 스스로 마을을 이루고(自作一村:자작일촌) 姜氏 들만이 집단으로 사셨다고 한다. 이 봉곡촌(鳳谷村) 택지(宅誌)를 이야기하려면 우리 晉州 姜氏의 흥망성쇠와 파란곡절이 얽히고 섥힌 대봉산(大鳳山) 봉지(鳳池:봉의 연못, 즉 봉서 지), 봉암(鳳岩:봉바위), 봉란대(鳳卵臺 : 봉알자리), 봉강재(鳳降齋)의 피눈물나는 사연들 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우리 姜氏들이 정부 요직 높은 벼슬자리에 많이 계셨기 때문에 세도가 대단하 였다고 한다. 영상서(領尙書) 정절공(正節公), 구만(九萬 : 서기 931∼975)할아버지의 집 (봉곡촌)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이 큰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바위가 얹혀져 있어 보기에 크고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흡사 봉(鳳:봉황)의 형상과 같으므로 칭하기를 봉바 위(鳳岩)라 하였다. 어느날 강남도사(江南道士)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바위를 보고 하는 말이 "강씨지대성(姜氏之大盛)이 유차암고야(有此岩故也)라" 즉 姜氏들의 대성함이 이 바위로 인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그후 상서좌복야 문하시중 평장사(尙書左僕射 門下侍中 平章事) 홍(洪:서기 1010∼1122) 할아버지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형제 열 한사람이 경상(卿相:정승판서)으로써 한나라의 정권 (政權)을 한 문중에서 장악하다시피 하였으니 그 부귀(富貴)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摩)격으로 남이 잘되는 일에 시기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합문지후(閤門祗候) 이지원(李之元)이라는 자가 그 세력을 시기하여 임금에게 姜氏를 모함 하여 사람을 시켜몰래 봉바위를 부수니 그 바위 속에서 함박같이 생긴 흰돌 네개가 들어 있어 이를 철추(鐵椎)로 부수니 새빨간 피가흘렀었다고 한다. 그후 고려 인종(서기:1123∼)때에 척준경(拓俊京)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 상서강홍(尙書 姜 洪)의 형제들 일당이 불의의 앙심을 품고 있으니 속히 조처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 라." 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인종(仁宗) 임금은 깜짝 놀래면서. "어떻게 하면 강홍(姜洪) 일가의 세력을 꺽을 수 있겠는가."하고 물으니 척준경은 말하기를 "강홍(姜洪)과 그의 도당(徒堂)을 내치시고 그들의 향토(鄕土) 晉州의 명소(名所) 지명을 고치소서." 하니 인종 은 그말이 옳다고 여겨... 상서공(尙書公) 강홍(姜洪)의 형제와 일족을 죽이고 대봉산(大鳳山)의 이름을「봉을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비봉산(飛鳳山)으로 고치고, 봉지(鳳池:봉 연못)의 명칭을 「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으로 부지(釜池:가마못) 이라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姜氏들은 한순간에 망하고 말았다. 남에게 나쁜짓을 한 자는 그 댓가를 받는 법이 라, 척준경도 그후 서기 1126년에 반역(返逆)을 도모하다가 실패하고 그도 죽음을 당했던 것 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많은 후손들이 번성하고 권력도 회복되어 전날의 선조들의 세도를 꿈 꾸게 되었다.
5. 봉란대(鳳卵臺) - 봉란대(鳳卵臺)의 유래
현재 진주시 상봉동 911-11번지에 소재(所在)하고 있는 봉란대(鳳卵臺)는 서기 1200∼1300 년 사이에 만들어 졌는데, 어느 도승(道僧)이 봉곡촌을 지나가다 선대(先代)의 사적의 사연 을 듣고 말하기를「날아간 봉황새는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드소서 함으로 도승의 말대로 봉곡촌 중앙「동산」에 봉황새의 알자리인 봉란대(鳳卵臺)를 만들었 고 그 후손들이 이자리에 시조(始祖)이신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이식(以式)장군 의 유허비(遺墟碑)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대봉산(大鳳山)의 지맥(支脈)인 봉래산(鳳來山)밑에 자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재 (書齋)를 마련하고 재호(齋號)를 봉강재(鳳降齋 : 봉이 날아 오라는 뜻)라 하여 자녀들의 교육에 임하고 그 재산으로 대봉산 전역(大鳳山 全域 : 대봉산 ~ 봉래산까지)의 임야와 샘 골에 수십 두락의 전답(田沓)과 「봉란대」부지 3천여평, [봉강재]의 본지 (本地)등 많은 문중재산(門中財産)을 마련했다 그러나 조선 말엽(末葉)에 봉강재(鳳降齊)는 관(官 : 정부)의 서재(書齋)로 만들어졌고,한일 합방 후에는 학교로되어 봉강학교(鳳降學校)라 하고 후에 봉양학교(鳳陽學校), 보통학교(普 通學校, 봉래소학교(鳳來小學校)로 개칭되어 내려오고 봉황새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불행히도 봉강재(鳳降齋) 유지재산인 문중 재산 전부가 국유화 되어 시설물과 재산 전체를 빼앗겼으므로 후대 어른들께서 문중 재실(齋室) 재건을 발의하 여 봉란대 동북편에 소재한 봉산사(鳳山祠 : 시조 사당)밑에 재실(齋室)을 재건하고 재호 (齋號)를 봉곡재(鳳谷齋 : 서기 1911년 새로건립)라 하였다. 이는 현재의 봉산사(鳳山祠)와 봉양재(鳳陽齋)의 전신인 것이다. 晉州의 산천(山川)은 영원히 우리 姜氏의 집터로 자랑할 만한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