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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大乘佛敎) 기원과 이동
대승불교의 원류 혹은 기원에 관한 탐구의 역사는 오래됐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확정적인 결론은
나지 않는 상태이다. 대체로 지금까지 대승불교 성립에 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첫째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노력이고,
둘째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불교의 내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노력이다.
셋째는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대승불교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첫째,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이다.
대승불교가 힌두교와 이란(페르시아)의 종교적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적 혼란이 대승불교 발전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흥기를 헬레니즘과의 교섭에 의한 영향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고대인도 북부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이후 건설된 그리스 식민지 국가인
박트리아(Bactria, BC 255-139)왕국이 있었다.
현재의 파키스탄 북부와 아프카니스탄 북부 발흐(Balkh)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계 왕국이었고, 이 국가는 한 때 불교가 국교였을 만큼 호불 국가였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인도 북부는 마우리아왕조의 멸망으로 다시 분열시대를 겪었고,
200여년의 혼란기를 거친 후 아프가니스탄 북쪽, 아무르강 남쪽의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이란계의 쿠샨왕조(Kusan/貴霜, 대월지국/大月氏國)가 일어나
인도 북부로 진출해서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통일제국을 수립했다.
쿠샨제국(Kushan Empire)은 월지(月氏, 月支) 민족이 세운
그리스계라기보다는 페르시아 계에 가깝지만, 박트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리스-인도 왕국을 계승함으로써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인도의 불교를 함께 받아들임과 동시에
타림분지의 사막 초원 지역까지 포괄한 광대한 제국이었다.
그리하여 쿠샨제국은 그리스-인도 양 문화를 융합해서
그리스계 불교문화라고 할 수 있는 그레코 불교(Greco-Buddhism)문화를
재창조함으로써 불교사(佛敎史)에 획기적인 분수령을 만들었다.
또한 쿠샨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장악하면서 동시에 불교문화를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아시아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승불교를 탄생시켜 동아시아로 전해준다는 사실이다.
중국 한국 일본 월남 대만 등의 대승불교는 바로 이 쿠샨왕조의 그레코-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Bhāgavad Gīt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바가바드 기타>와 <법화경>은 유사한 점이 많고,
<바가바드 기타>의 박띠(Bhakti) 신앙이 대승불교의 불타신앙 성립에 영향을 미쳤고,
대승불교의 범신론적 불타관(佛陀觀)은 힌두교의 신관(神觀)과 <우파니샤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아미타불(amitābha)과 보살사상 등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하다고 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특징인 보살사상의 형성에 있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보살사상이 페르시아 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년 마우리아왕조의 멸망으로 인도는 다시 분열시대를 겪었고,
이 과정에 북인도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빠져 전통적인 사회제도와 관습 등은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가 새로운 종교운동,
즉 불탑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이 대승불교 발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AD 2세기경의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Kaniska, 迦貳志加王)은
호불 군주로서 불교를 적극 후원함으로써
대⋅소승의 불교가 동시에 꽃피게 됐다는 주장이다.
즉, 이때부터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이 열리면서
대승불교는 인도북부와 중앙아시아로 옮겨가 그곳에서 비로소 꽃을 활짝 피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대부분의 경전들이 인도북부와 중앙아시아에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즉, 대승경전들은 각자의 품별(品別)로 별도로 내려오다가 인도북부와 중앙아시아에서
집대성돼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발상지는
대월지국(大月氏國)을 중심으로 한 인도북부와 중앙아시아지방으로 추측하고 있다.
둘째,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이다.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함에는 대표적인 두개의 가설이 있다.
하나는 대중부 기원설과 다른 하나는 재가의 불탑 기원설이다.
먼저 대중부 기원설부터 검토해 보자.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기원을 대중부(大衆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불신론(佛身論), 아라한(阿羅漢)을 인간적으로 보는 점, 공사상(空思想), 법무아(法無我) 등을
설한 점 등을 들어 대중부가 대승의 기원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 기원의 문제에 대해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대중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음을 많은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교리적인 공통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비구승가(Bhikkhu- saṅgha)’와는 별도로
‘보살가나(Bodhisattva-gaṇa)’가 존재했었다는
교단사적 증거가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출가자 집단에서
대승불교를 전적으로 주도했다고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만일 대중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대승불교 교단이었다면
굳이 별도의 대승계경(大乘戒經)을 찬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부는 이미 <마하승기률(摩訶僧祇律)>이라는 율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재가불자들에 의한 불탑 기원설이다.
본래 초기불교는 경전을 문자화해서 전승하지 않고 암송해서 전승했다.
그럴 당시 경전 암송가로서 원시경전의 내용을 해박하게 꿰고 있었던 법사(法師, 다르마바나카)들은
불탑을 중심으로 한 찬불승[讚佛乘: 佛傳文學]을 발전시켜오기도 한 이들이기에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해, 내용적으로는 원시경전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형식,
문체와 체제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함으로써 대승불교 성립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재가신자(在家信者)를 중심으로 하는 불탑교단(佛塔敎團)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보시(布施)를 함으로써 찬불승들과 더불어 불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탑교단 기원설은 불교연구의 역사 중에서도 독특한 것이며,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들은 부파들의 아미달마불교가 승원중심의 불교로서 너무 전문적인 법(法) 중심의 불교를
전개시키고 있었음에 대해, 이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출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불타의 절대성과 자비성이 무한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불멸 후 나타난 불타 신격화의 일환이 됐다는 것이다.
셋째, 최근에는 대중부 외에도 대승과 공통된 주장을 하는 부파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하여 대승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는 경향도 있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교리적 유사점은 단지 대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파와의 관련성 또한 있다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 경량부(經量部)에 속했던 비유자(譬喩者, Darṣṭāntika)들의 설에는 대승불교와 공통되는 교리가 보이고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경량부에 속한 하리발마(訶梨跋摩, Harivarman, 250~350년경)가 지은 <성실론(成實論)>은
대승 논서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또 화지부(化地部)와 법정부(法藏部) 등이 대승경전과 관계가
있음을 명확히 밝혔는가 하면,
심지어 상좌부계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조차도 대승불교의 발전에 일정 부분 공헌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불교 발생의 원인을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정리할 수 있고,
대승불교 성립의 직접적인 사회적 배경은 사회적 혼란으로 나타난 불탑숭배이고,
그 중심에 재가신자의 활동이 있었으며,
이들에 의한 불전문학(佛傳文學)과 불탑신앙(佛塔信仰)이대승불교의 원류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부파들 내부에 대승불교와 공통된 부분이 있었다는 가설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
대승불교운동의 주체가 부파교단의 출가자 집단이었다는 주장과 기존의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그룹,
즉 불전문학과 불탑신앙을 주도했던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집단이 대승불교의 성립을 주도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역사의 퍼즐 맞추기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아무튼 대승불교는 다양한 외적인 요인과 불교 내적인 복합적 요소가 얽혀 전개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전된 사상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다른 이질적 요소를 통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확실히 해 둘 것은, 대승불교가 불법의 멋진 확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는 궁극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현실문제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회적 환경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교라도 그 종교가 속한 사회의 전통과 문화를 철저하게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일반대중들에게는 현실이익적인 의례나 기원 등의 소박한 종교적인 행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이러한 것이 절실히 요구되기도 했다.
일부 남방불교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현실이익적인
기원을 마치 미신 수준으로 폄하하지만 남방불교를 신봉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현실이익적인 기원은
북방 대승불교 신자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별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불교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초기불교의 고집을 꺾고,
인도사회의 문화를 불교적인 원리로 재구성하는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 이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 전통 위에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사상적인 변화와 함께 인도의 사회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경향이 현저해지면서 불교는 더욱 화려해지고 풍부해졌다.
이러함에 대해 일부에서 불교를 왜곡시켰다고 편협한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대승불교의 깊은 함의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말은,
대승불교는 소승불교 혹은 남방불교에 비해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라는 것이다.
소승불교 혹은 남방 상좌부불교는 좁은 틀에 꽉 맞게, 정확하게 맞게,
그리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규정된 교의인데 비해
대승불교는 끝 간 데를 알 수 없을 만큼 확 열린 모호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이다.
마치 현대 철학의 한 영역인 카오스(chaos)의 이론을 연상케 하는 것이 대승불교 교의이다.
따라서 대승 교의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며,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대승불교 본거지의 이동―――
어떤 학문이나 종교의 전통은 반드시 그 발상지에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의 발상지가 중국이지만 청나라시대인 조선 중기 이후엔 유학의 전통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자부하기도 한 때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불교 발상지가 인도이지만 오늘날 불교전통은 스리랑카에서
지켜지고 있으며,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보존되고 있다. 기독교도 예루살렘에서 생겨났지만
오늘날 로마를 비롯한 서양에서 그 전통을 더 잘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적절한 다음과 같은 예화가 있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마가다국에 12년째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던 가운데 자이나교단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가뭄을 피해 교단을 잠시 옮길 것인지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에 남을 것인지….
상당수 원로와 수행자들이 끝까지 남자고 했지만, 교단의 수장은 그보다 많은 대중들의 뜻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은 사람들은 어렵더라도 그곳을 지키며 살기로 했다.
그렇게 12년이 흘러 가뭄이 극복되면서 남쪽으로 갔던 교도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다. 교조 마하비라 때부터 이어져오던 나체의 전통을 깨고 수행자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에게 옷을 입는다는 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는 수행자의 다짐을 깬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자이나교가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空衣派)와 흰 옷을 입는 백의파(白衣派)로 나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이와 같이 때때로 전통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곳은 그 전통의 발상지가 아닐 수 있다. 자이나교처럼
전통 문화권에서 벗어난 이들이 오히려 전통의 계승에 더 적극적임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가 발달한 것도 인도에서 더 이상 불교(대승불교)가 발 불일 수 없게 되자,
그 중심부가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으로 옮아온 것이다.
대승불교 초창기의 중심지는 인도 북부와 카슈미르(Kashmir)였다.
그리하여 중국 불교사에서 카슈미르의 중국식 표현인 계빈국(罽賓國) 출신의 많은 승려들이
중국으로 와서 초기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 후 쿠샨제국(Kushan Empire)의 확장에 따라 대승불교의 중심지는 지금의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
그리고 타림분지의 우전국(于闐國, 현 허탄/和田) 등의 여러 사막국가들이 번성했던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Bamyan) 불교유적과 로가(Logar)지역에 위치한
메스 아이낙(Mes Aynak)의 불교유적이 현존하며, 파키스탄 지역은 간다라 유적을 비롯한
수많은 불교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특히 페샤와르(Peshawar) 지역은 실크로드의 거점이자
대승불교 교학 및 간다라미술 발전의 핵심을 이룬 고장이었다.
그리고 타크라마칸 사막의 타림분지 남서 지역의 우전국(于闐國, 현 허탄/和田)은 특히 대승불교가 성해,
심지어 <화엄경>을 비롯한 많은 대승경전이 이곳에서 조성될 정도로 학문적으로나 불교예술에서나
중앙아시아 불교의 중심에 있었다.
또 타림분지 북부의 쿠차(龜玆, Kucha)의 키질(Kizil) 석굴,
쿰트라(Kumtura) 석굴,
수바시(Subashi, 蘇巴什) 사원,
투르판 지역의 베제클릭(柏孜里克) 석굴,
고창고성(高昌故城)과
타림분지 서쪽 카스 지역의 삼선동 석굴 등은
당시 대승불교의 발전이 남방불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혼돈으로 실크로드가 쇠퇴함에 따라 중앙아시아 사막국가들이 쇠망하자
달마의 동진에 따른 선불교(禪佛敎)의 흥기로 명실공히 대승불교의 중심지는 중국으로 옮겨오게 됐고,
그러한 전통은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