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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리즈 (2)
성전을 청결케 하라
막 11: 11-18
I. 서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간의 월요일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를 조금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 분이 정말 예수님일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고, 그것을 휘둘러서 양과 소를 성전 밖으로 내쫓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어버리셨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말씀으로 책망하셨던 예수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갸룟 유다가 배신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화를 내시지 않았습니다. 로마 병정이 채찍질하고, 침을 뱉고, 손바닥으로 때려도, 이렇게 화를 내시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두 손과 두 발을 십자가에 못을 박을 때에도, 이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사건은 다릅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자리에도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떤 반응을 보이고 계실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방해하면, 예수님께서 분노하십니다.
II. 본론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1절 말씀은 일요일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요일에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둘러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저물어 일요일에는 그냥 베다니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월요일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날, 결심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15-17절,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행동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요일에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둘러보셨고, 월요일에 행동으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것"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전의 구조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가면, 가장 먼저 이방인의 뜰이 나옵니다. 이 이방인 뜰에 경계(partition)가 있는데, 이 경계를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이방인 들어올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고, 우측으로는 유대인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이 나옵니다. 유명한 프랑스 고고학자 찰스 클레르 몽가노(Charles Clermont-Ganneau)라는 교수가 1871년에 이곳에서 비석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비석에는 헬라어로 대략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에 이방인을 데려오는 자는 그에 상응하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은 성전을 계단으로 올라와서 처음 만나는 “이방인의 뜰”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경계를 넘어서 유대인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의 뜰에서 짐승의 매매와 성전세 환전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제사에 쓸 짐승을 매매하고, 외국 화폐를 성전 화폐로 환전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왜냐하면, 먼 외국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이 소나 양 같은 짐승을 외국에서 가지고 올 수 없었고, 19세 이상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성전세는 성전 안에서만 통용되는 세겔로만 내야 했기 때문에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짐승의 매매와 화폐의 환전을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전 밖에서 해야 했는데, 성전 안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할 이 곳이 짐승의 울음 소리, 짐승의 배설물 냄새, 장사꾼들의 흥정 소리로 바뀌고만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 56:6-7,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로 인해서 이방인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자리가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사꾼들이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까지 올라와서 장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것을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날 수 있도록 인도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직책으로 돈벌이는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강도질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시 하나님께 나와서 제사를 드리려면,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맞도록 소나 양, 염소나 비둘기와 같은 짐승을 가지고 와서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짐승들은 흠이 있으면 제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것을 꼬투리 잡아,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결탁한 상인들로부터 희생 제물을 사지 않으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짐승을 불합격처리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터무니 없는 값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많게는 10배의 값을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먼 로마에서 예루살렘으로 몇 주를 여행해서 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양을 꼭 사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양 한 마리는 500불이면 살 수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해 보니, 그 값의 10배인 5000불을 내라는 것입니다. 겨우 시간을 내고, 많은 돈을 들여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값을 지불하고 제사를 드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내년에 다시 온다고 여기 있는 장사꾼들이 양의 값을 내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5000불에서 조금 깎아 3500불에 양을 사서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이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 차고,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욕이 흘러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노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종교 지도자들이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17~18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보인 반응은 자신들의 돈벌이를 방해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논의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무엇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성전을 청결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청결하게 해야 할 성전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교회당입니까? 예수님 당시 헤롯 성전이 있던 옛 성전 터 입니까? 지금 우리의 성전은 어떤 건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고정된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방해를 받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것을 그리스도의 편지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상징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설명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즘에도 편지를 주고 받으십니까? 편지를 받으면, 기분이 어떠십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편지 자체가 아니라 편지의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오고자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과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질까요?
두 번째,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한약을 다리고 있는 한약방 옆을 지나가신 적이 있으십니까? 시장하실 때, 갓 구운 맛있는 빵을 만들고 있는 빵집을 지나가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굳이 가게 정면에 있는 간판을 보지 않더라도, 그 가게가 무엇을 파는 곳인지 그 근처만 가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에서부터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은 우리를 조금 자세히 관찰해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것은 우리 옆에만 와도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하나님의 편지였습니까? 어떤 하나님의 향기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그대로 두는 무능한 하나님이거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행실을 인정하는 나쁜 하나님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했을까요? 그들 안에 있는 탐욕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편지의 내용과 향기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드러낼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안에는 세상적인 탐욕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거룩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존재가 거룩한 존재로서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청결케 해야 합니다.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의 책 <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먼 옛날, 알프스 산 높은 곳에 아름다운 강이 흐르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강은 태고적부터 있었던 바다처럼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샘에서 발원되었습니다. 강물은 수정같이 맑았고, 백조와 거위가 헤엄치는 강가에서 아이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놀았습니다. 강 바닥에는 바위와 모래, 무지개송어가 훤히 보였습니다. 노인은 높은 산봉우리 너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살았습니다. 이 노인은 강의 수호자였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고용된지라, 마을 주민들은 그를 본디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산 속의 샘을 찾아 다니며, 물을 더럽히는 나뭇가지, 낙엽, 잔해를 치웠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 마을은 재정 회의를 열어 예산을 심의했습니다. 노인을 감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도로도 보수해야 하고, 세금도 거둬야 하고, 복지도 확대하려면, 눈에 안 띄는 일을 하는 노인에게 돈을 쓰는 것이 아까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을은 그 노인을 해임했습니다. 산 속 높은 곳의 샘들은 방치되었습니다. 나뭇가지와 유해 물질이 샘으로 흘러 들었습니다. 진흙과 점토가 강바닥에 쌓인 채 굳어갔습니다. 농장의 폐수 때문에 강의 일부가 수렁으로 변했습니다. 한동안 마을 주민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강은 이전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강물은 까맣게 변했습니다. 백조는 다른 곳으로 멀러 떠났습니다. 상쾌한 물의 향기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더 이상 강가에서 놀지 않았습니다. 몇몇은 병이 들었습니다. 마을 주민은 한때 마음의 젖줄이었던 아름다운 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을의 생명은 강에 달려 있었고, 강의 생명은 강의 수호자에게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강은 당신의 영혼입니다. 당신은 강의 수호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우리 영혼의 수호자입니다. 어떻게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신앙 생활을 할 때, 말씀과 기도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과 기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거울과 나침반의 역할을 하고, 기도는 회개와 도우심을 간구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오늘은 이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부분만 말씀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이웃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 것은 주일학교에서도 배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성경의 기준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고, 이 부분을 잘 돌봐야지만, 거룩을 유지하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두 가지 예를 드릴텐데, 이것은 케빈 드영(Kevin DeYoung) 목사님의 책 <The Hole in our Holines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 성경이 허용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을 최종 기준으로 삼으라.
여러분이 어릴 때, 음주가 잘못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해 봅시다. 맥주를 마시느니 차라리 세제를 마시겠다고 할 정도로 음주는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가는 교회에서는 과음만 피하면 되지, 음주는 죄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적당량의 음주를 성경에서 허용한다고 확신한다면, 자유롭게 마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꺼림직한 양심이 남아 있다면,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청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느끼더라도 양심에 적신호가 켜지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에서 양심을 한 번 범하게 되면, 비록 그 행동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일지라도, 다른 일에서도 양심을 어기는 습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내가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으라.
지난 몇 년간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영화, TV, 음악과 같이 애매한 영역을 판단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는 분명히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 아내와 나는 여름방학을 겨냥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한 편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12세 이상 관람가였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유해한 장면은 거의 안 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장면이 아주 도발적이고 야했습니다. 영화를 다 본 후, 나는 “내가 이 영화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즐기는 오락 대부분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이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던 내용과 오늘 말씀 드리는 내용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힌트를 조금 드린다면, 지난 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고, 오늘은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일주일 남겨 놓으시고, 여인와 이방인을 챙기신 것이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대 사회는 여자와 이방인을 존중하지 않았던 문화였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일주일 남겨 놓으시고, 가장 먼저 여인에게 섬김을 받으셨고, 이방인의 예배를 챙기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처럼 사회적인 약자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우리의 주머니에만 관심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고,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돌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