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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초(三焦) 포락(包絡) 명문(命門)의 변(辨)>
(자궁(子宮) 혈실(血室)도 같이 변(辨)하니라.)
객(客)이 질문(問)하며 이르기를 "삼초(三焦) 포락(包絡) 명문(命門)은 의사(醫)의 요령(要領)이고 장부(臟腑)의 대강(大綱)이다. 혹자는 '그 모양(:狀)이 있다' 말하고 혹자는 '그 형태(形)가 없다' 말하며, 혹자는 '삼초(三焦) 포락(包絡)은 표리(表裏)이다' 말하고 혹자는 '삼초(三焦) 명문(命門)이 표리(表裏)이다' 말하며, 혹자는 '오장(五臟)은 각 하나씩인데 오직 신(腎)은 둘이 있어서 좌(左)는 신(腎)이고 우(右)는 명문(命門)이니, 명문(命門)은 남자(男子)는 정(精)을 장(藏)하고 여자(女子)는 포(胞)를 계(系:걸다)한다' 하니라. 이와 같은 여러 가지로 인해 의혹(疑)이 없을 수 없는데, 천년(:千載)을 내려와도 의론(議論)이 정(定)하여지지 않았다. 이치(理)는 둘에 이르지 않으니, 어찌 이와 같이 분분(紛紛)할 수 있는가? 하나의 정의(義)로 귀착(歸)하는 것은 없는가?" 하니라.
내가 이르기를 "아! 의도(醫道)의 시작은 헌기(軒岐)에서 비롯하니, 헌기(軒岐)의 지(旨)는 [영소(靈素)](:靈樞와 素問)에 밝히 나타나 있다. [영소(靈素)]의 묘(妙)는 정확(精確)하여 남음이 없으니, 그 논(論)한 바는 반드시 이(理)를 인하여 발(發)하였고 그 명명(命名)은 반드시 그 형(形)으로 인하여 생(生)하였다. 따라서 내경(內經)의 문(文)에서 그 자(字)는 구차(苟)한 말이 없고 그 구(句)에는 공연(空)한 표현(:發)이 없다. 그 후로 이 의통(醫統)을 이을 자가 어찌 [영소(靈素)]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렇게 분분(紛紛)한 까닭은 그 이유가 없지 않으니 [난경(難經)]에서 비롯된 것이다. [난경(難經)]은 [영소(靈素)]를 기술(述)하면서 만들었는데 제가(諸家)들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이지만, 다소 오류(誤謬)가 있으므로 인하여 후세(後世)에 의혹(惑)을 일으켰다. 3.000년 동안 이를 감히 위배(違背)하지 못하였으므로 후세(後世)의 의혹(疑)을 해구(解救)할 수 없었다.
청(請)하건데 먼저 삼초(三焦) 심포락(心包絡)에 대해서 말하고, 그 다음에 나머지(: 命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삼초(三焦)는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총사(總司)이고 포락(包絡)은 소음(少陰)인 군주(君主)의 호위(護衛)이다.
그런데 25난(難)에서 '심주(心主)와 삼초(三焦)는 표리(表裏)이니 모두 명(名)은 있으나 형(形)은 없다.' 하였다. 표리(表裏)라고 말한 것은 맞지만 무형(無形)이라고 말한 것은 틀렸다. 명(名)은 그 형(形)을 따라 지으니, 만약 명(名)은 있지만 형(形)이 없다면 내경(內經)의 말은 착공(鑿空: 쓸데없는 빈 공론)이 된다.
어째서 왕숙화(王叔和)와 계현자(啓玄子: 왕빙)의 후배들은 모두 이를 높이면서 '삼초(三焦)는 상(狀)이 없고 공(空)으로 명(名)만 있다.' 라고 하는가? 두 사람(: 왕숙화 왕빙)이 변(辨)하지 못하니, 그 후에 누가 다시 이를 변(辨)할 수 있겠는가?
서(徐: 서지재)와 진무택(陳無擇: 진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삼초(三焦)의 형(形)을 말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지막(脂膜)이 손바닥 크기이고 바로 방광(膀胱)과 서로 대(對)한다. 두 가닥의 백맥(白脈)이 그 속에서 나와 척(脊)을 협(夾)하고 위로 뇌(腦)를 관(貫)한다.' 하였다.
내가 양경(兩經)을 두루 상고(考)하건대,
[영추(靈樞)] 본수편(本輸篇)에서는 '삼초(三焦)는 중독지부(中瀆之府)이니 수도(水道)가 나온다. 방광(膀胱)에 속하니 이는 고(孤)의 부(府)이다.' 하였다.
본장편(本藏篇)에서는 '밀(密)한 리(理)와 후(厚)한 피(皮)는 삼초(三焦) 방광(膀胱)이 후(厚)하고 조(粗)한 리(理)와 박(薄)한 피(皮)는 삼초(三焦) 방광(膀胱)이 박(薄)하다.' 하였으니, (厚薄과) 완급(緩急) 직결(直結)의 여섯 가지로 각 나누는 바가 있었다.
논용편(論勇篇)에서는 '용사(勇士)는 목(目)이 깊고 굳으며 가로로 길고도 곧게 날리고 삼초(三焦)의 리(理)가 횡(橫)하다. 겁사(怯士)는 목(目)이 크면서 감(減: 곧 䁍 눈동자가 꺼지다)하지 못하고 음양(陰陽)이 상실(相失)하며 그 눈초리(焦理: 꼬리)가 종(縱: 세로. 늘어지다)하다.' 하였다.
결기편(決氣篇)에서는 '상초(上焦)가 개발(開發)하여 오곡(五穀)의 미(味)를 선(宣)하여 훈부(熏膚) 충신(充身) 택모(澤毛)하여 마치 무로(霧露)의 개(漑)함과 같으니 이를 기(氣)라 한다. 중초(中焦)는 수기(受氣) 취즙(取汁)하고 적(赤)하게 변화(變化)하니 이를 혈(血)이라 한다.' 하였다.
영위생회편(營衛生會篇)에서는 '영(營)은 중초(中焦)에서 나오고 위(衛)는 하초(下焦)에서 나온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상초(上焦)는 위(胃)의 상구(上口)에서 나오고 인(咽)과 같이 상(上)하고 격(膈)을 관(貫)하며 흉중(胸中)에 포(布)한다.
중초(中焦)도 위중(胃中)과 같이 상초(上焦)의 뒤에서 나오며 조박(糟粕)을 비(泌)하고 진액(津液)을 증(蒸)하며 정미(精微)를 화(化)하여 혈(血)이 되니, 신(身)을 봉생(奉生)한다. 따라서 홀로 경수(經隧)로 행(行)하니 이를 명(命)하여 영기(營氣)라 한다.
하초(下焦)는 따로 회장(回腸)에서 방광(膀胱)으로 주(注)하고 삼입(滲入)한다. 수곡(水穀)은 위중(胃中)에 거(居)하다가 조박(糟粕)이 되고 대장(大腸)으로 하(下)하여 하초(下焦)가 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상초(上焦)는 무(霧: 안개)와 같고 중초(中焦)는 구(漚: 거품)와 같으며 하초(下焦)는 독(瀆: 도랑)과 같다.' 하였다.
[소문(素問)] 오장별론(五臟別論)에서는 '위(胃) 대장(大腸) 소장(小腸) 삼초(三焦) 방광(膀胱)의 다섯가지는 천기(天氣)가 생(生)한 것이니 그 기(氣)는 천(天)을 상(象)하므로 사(瀉)하되 장(藏)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육절장상론(六節藏象論)에서는 '비(脾) 위(胃) 대장(大腸) 소장(小腸) 삼초(三焦) 방광(膀胱)은 창름(倉廩)의 본(本)이니 영(營)이 거(居)한다.' 하였다.
심포락(心包絡)에 있어서는 [영추(靈樞)] 사객편(邪客篇)에서는 '심(心)은 오장육부(五臟六腑)의 대주(大主)이니 그 장(臟)은 견고(堅固)하고 사(邪)를 허용(容)하지 않는다. 만약 허용(容)하면 심(心)이 상(傷)하고 심(心)이 상(傷)하면 신(神)이 거(去)하며 신(神)이 거(去)하면 죽는다. 따라서 여러 사(邪)가 심(心)에 있어도 모두 심(心)의 포락(包絡)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경(經)의 지(旨)이다.
무형(無形)이라고 말한다면 어찌 수도(水道)의 출(出)이 있겠으며 또 어찌 후박(厚薄) 완급(緩急) 직결(直結)의 구분(分)이 있겠는가? 또 어찌 종(縱)이니 횡(橫)이니 하는 이(理)가 있겠는가? 또 어찌 무(霧) 구(漚) 독(瀆)과 같다거나 기(氣) 혈(血)이라 하는 구별(別)이 있겠는가? 심주(心主)를 또한 무형(無形)이라 한다면 심(心)을 대(代)하여 사(邪)를 받는 것이 심(心)의 포락(包絡)에 있는데, 무형(無形)이라면 또 받는 곳이 어디이겠는가? 곧 이 경문(經文)으로 그 유무(有無)를 알 수 있다.
난경([難經])이란 내경([內經])의 난(難)한 것을 발명(發明)한 것이므로 난경([難經])이라 하였으니, 난경([難經])은 실로 내경([內經])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내경([內經])에 그 명(名)과 상(狀)이 이렇게 상세(詳)한데 난경([難經])에서 무형(無形)이라 하니, 난경(難經)의 무(無)하다는 것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내경([內經])의 유(有)하다는 것을 따를 것인가?
한편 서(徐) 진(陳)의 두 사람이 말한 삼초(三焦)의 모양(:狀)은 신(腎) 아래의 지막(脂膜)을 가리켰는데 과연 그렇다면 어째서 삼(三: 곧 삼초)이라고 명(名)하였는가? 또 어째서 상(上) 중(中) 하(下)로 구분(分)하였는가? 또 어째서 그를 부(府)라 하였는가? 이러한 설(說)은 무엇을 근거(據)하여 상고(考)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더욱 불경(不經)한 것에 속한다." 하니라.
객(客)이 이르기를 "심(心)의 포락(包絡)은 (내경의) 문(文)에서나 정의(義)에서나 밝힌(:曉) 것이고, 고금(古今)의 제현(諸賢)을 거쳐 심(心)을 싸는(:裹) 막(膜)이라고 가르키는데, 진실로 의혹(疑)이 없다. 그런데 삼초(三焦)는 지금 유형(有形)이라 하고 또 서(徐) 진(陳)의 논(論)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물체(物)인가?" 하니라.
내가 이르기를 "다만 자(字)의 정의(義)로만 구하여도 얻을 수 있다.
소위 삼(三)이란 삼재(三才)를 상(象)한 것이니, 제상(際上) 극하(極下)란 말이다. 소위 초(焦)란 화(火)를 상(象)한 류(類)이니, 색(色)이 적(赤)하여 양(陽)에 속한다는 말이다.
지금 사람의 일신(一身)은 외(外)의 피모(皮毛)에서 내(內)의 장부(臟腑)까지 거(巨)한 것에서 명(名)이 없는 것이 없고 세(細)한 것에서 목(目)이 없는 것이 없다. 거기에서 강복(腔腹)의 상하(上下)의 전체(全體)를 주조(周遭: 두루 돌다)하면서 그 상(狀)이 마치 큰 낭(囊)과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무슨 물(物)이겠는가? 또 내(內)의 일층(一層)에 붙어서(:著) 형색(形色)이 매우 적(赤)하고 그 상(象)이 육합(六合)과 같으며 제양(諸陽)을 모두 호(護)하니 이것이 삼초(三焦)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오륭진액별론(五癃津液別論)에서는 '삼초(三焦)에서 나온 기(氣)는 기육(肌肉)을 온(溫)하고 피부(皮膚)를 충(充)한다.' 하였으니, 진실로 분명하게(:顯然) 기육(肌肉)의 내(內)이면서, 장부(臟腑)의 외(外)를 삼초(三焦)라 가리킨 것이다.
또 배수편(背腧篇)에서는 '폐(肺)는 삼초(三焦) 사이에 있고 심(心)은 오초(五焦) 사이에 있으며 격(膈)은 칠초(七焦) 사이에 있고 간(肝)은 구초(九焦) 사이에 있으며 비(脾)는 십일초(十一焦) 사이에 있고 신(腎)은 십사초(十四焦) 사이에 있다.' 하였으니 어찌 구체(軀體)를 초(焦)로 칭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우천민(虞天民)은 이르기를 '삼초(三焦)는 강자(腔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전체를 삼초(三焦)라 한다. 그 체(體)는 지막(脂膜)이 강자(腔子)의 내(內)에 있는 것으로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외(外)를 포라(包羅: 싸매다)한다.' 하였다. 이 설(說)은 사실에 가깝지만, 다만 초(焦) 자(字)의 정의(義)에 분명(明)하지 않은 것이며, 지막(脂膜)이란 설(說)에서 일층(一層) 더하여졌다(:添)는 것을 면(免)할 수 없다.
서로 배(配)하는 표리(表裏)로는 삼초(三焦)가 장부(臟腑)의 외위(外衛)가 되고 심포락(心包絡)이 군주(君主)의 외위(外衛)가 되어 마치 제궐(帝闕)의 중성(重城)과 같으므로 모두 양(陽)에 속하고 모두 상화(相火)라 칭하며 그 맥락(脈絡)의 원(原)이 서로 통(通)하니 진실로 표리(表裏)가 된다.
[영추(靈樞)] 경맥편(經脈篇)에서는 '심주(心主) 수궐음(手厥陰)의 맥(脈)은 나와서 심포락(心包絡)에 속(屬)하고 격(膈)을 하(下)하고 역(歷)하여 삼초(三焦)에 락(絡)한다. 수소양(手少陽)의 맥(脈)은 산(散)하여 심포(心包)에 락(絡)하고 심주(心主)에 합(合)한다.' 하였다.
[소문(素問)] 혈기형지편(血氣形志篇)에서는 '수소양(手少陽)과 심주(心主)는 표리(表裏)이다.' 하였다. 이는 진실로 심히 분명(明)한 것이니, 어리석게(:庸) 변(辨)할 필요는 없다." 하니라.
객(客)이 이르기를 "삼초(三焦) 심주(心主)는 표리(表裏)인데, 어째서 또 명문(命門) 삼초(三焦)가 표리(表裏)이다는 설(說)이 있는 것인가?" 하니라.
내가 이르기를 "삼초(三焦) 포락(包絡)은 표리(表裏)이니 이는 내경([內經])의 일음(一陰) 일양(一陽)으로 정(定)하여진 짝(:耦)이다. 처음에는 명문(命門)이 표리(表裏)에 들어간다는 설(說)도 없었고 또 명문(命門)이라는 명(名)도 없었다. 오직 [영추(靈樞)] 근결편(根結篇) 위기편(衛氣篇) 및 [소문(素問)]의 음양이합편(陰陽離合篇) 등에서 이르기를 '태양(太陽)은 지음(至陰)에 근(根)하고 명문(命門)에 결(結)하니 명문(命門)은 목(目)이다.'란 말 뿐이다. 이는 태양경(太陽經)의 혈(穴)이 정명(睛明)에서 종(終)하는 것을 가리킨 것이니, 정명(睛明)이 협(夾)하는 곳은 뇌(腦)의 중심(心)이고 명(命)에 이르는 곳이니, 따라서 명문(命門)이라 한 것이다. 이 외(外)에 좌우(左右)의 신(腎)의 구분도 없었고 또 우신(右腎)은 명문(命門)이라는 설(說)도 없었다.
명문(命門)의 시작(始)은 또한 36난(難)에서 나왔으니(:起) 이르기를 '신(腎)에는 두 개가 있으니 모두 신(腎)은 아니니, 좌(左)는 신(腎)이고 우(右)는 명문(命門)이다. 명문(命門)은 정신(精神)이 사(舍)하고 원기(原氣)가 계(系)한다. 남자(男子)는 정(精)을 장(藏)하고 여자(女子)는 포(胞)가 계(系)한다.' 하였다. 왕숙화(王叔和)가 이를 인하여 이르기를 '신(腎)과 명문(命門)은 모두 척부(尺部)에 나온다.' 하였다. 결국 후세(後世)에 명문(命門) 표리(表裏)의 배(配)가 있게 된 것이지, 내경(內經)에는 실로 없었다." 하니라.
객(客)이 이르기를 "내경([內經])에 명문(命門)이 없는데 난경([難經])에는 어떻게 있으며, 명문(命門)의 이해(解)는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라.
내가 이르기를 "난경([難經])의 여러 편(篇)은 모두 내경([內經])에서 나오니 이러한 명문(命門)은 반드시 근거(據)가 있을 수 있다.
생각하건대, 고(古)에서 멀어 경문(經文)에 탈오(脫誤)가 없을 수 없는데, 진실로 칠난(七難)에 활씨(滑氏)의 주(注)와 같은 것이 있었다.(활씨(滑氏)는 칠난(七難)의 주(注)에서 '편(篇)의 앞에 칭한 경언(經言)이란 두 글자를 영소(靈素)에서 상고(考)하여보니 나타나는 곳이 없는데, 어찌 월인(越人)의 시(時)에는 따로 상고(上古)의 문자(文字)가 있었겠는가? 아니면 내경([內經])에 있었는데 후세(後世)에 탈간(脫簡)된 것인가? 이를 알 수는 없다.)
오직 우신(右腎)이 명문(命門)이 되어 남자(男子)는 정(精)을 장(藏)한다면 좌신(左腎)은 무엇을 장(藏)하겠는가? 여자(女子)는 포(胞)를 계(系)한다면 포(胞)가 과연 무엇이기에 홀로 우신(右腎)에만 계(系)하겠는가? 이처럼 의심(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내가 여러 서(書)를 두루 상고(考)하여 보니,
황정경([黃庭經])에서 '상(上)에 황정(黃庭: 옥황상제가 근무하는 광한루의 앞마당)이 있고 하(下)에 관원(關元)이 있으며 후(後)에 유궐(幽闕)이 있고 전(前)에 명문(命門)이 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명문(命門)을 폐색(閉塞)함이 마치 옥도(玉都)와 같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단전(丹田) 중의 정기(精氣)는 미(微)하고 옥방(玉房) 중의 신(神)은 문호(門戶)이다.' 하였다. 양구자(梁丘子)가 이를 주(注)하며 이르기를 '남(男)은 정(精)을 장(藏)하고 여(女)는 혈(血)을 약(約)하므로 문호(門戶)라고 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관원(關元) 속은 남자(男子)는 정(精)을 장(藏)하는 곳이다.' 하였다. 원양자(元陽子)는 이르기를 '명문(命門)은 하단전(下丹田)의 정기(精氣)가 나와서 비(飛)하는 곳이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의가(醫家)가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실로 이를 족히 발명(發明)한 것들이다.
또 맥경([脈經])에서는 '신(腎)은 방광(膀胱)에 합(合)하여 부(腑)가 되고 관원(關元)의 후(後)에서 하초(下焦)와 합(合)한다. 좌(左)는 신(腎)이고 우(右)는 자호(子戶)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신(腎)은 명(名)하여 포문(胞門) 자호(子戶)라 하니 척중(尺中)의 신맥(腎脈)이다.' 하였다.
우(右)는 자호(子戶)라는 말은 곧 우(右)는 명문(命門)이라는 설(說)이니, 여러 말을 상세(詳細)하게 묵(默: 잠잠하게)하여 이해(:會)하여야 한다. 소위 자호(子戶)란 곧 자궁(子宮)이니 곧 옥방(玉房)의 중(中)이다. 속명(俗名)의 자장(子腸)은 직장(直腸)의 앞, 방광(膀胱)의 뒤, 관원(關元) 기해(氣海)의 사이에 거(居)한다. 남정(男精) 여혈(女血)은 모두 여기에 있으니, 아기(:子)가 이로 말미암아 생(生)하므로 자궁(子宮)은 실로 또한 남여(男女)의 통칭(通稱)이다.
도가(道家)에서는 선천(先天) 진일(眞一)의 기(氣)가 장(藏)하니, 이는 구환(九還) 칠반(七返)의 기(基)이므로 이를 단전(丹田)이라 명(名)한다. 의가(醫家)에서는 충임(衝任)의 맥(脈)이 이에 성(盛)하고 월사(月事)가 시(時)로 하(下)하므로 혈실(血室)이라 명(名)한다.
섭문숙(葉文叔)이 이르기를 '사람이 생(生)을 받은 초(初)에는 포태(胞胎)의 내(內)에서 모(母)의 호흡(呼吸)을 따라 기(氣)를 받아 성(成)하고, 생(生)의 하(下)에 이르면 일점(一點)의 원령(元靈)의 기(氣)가 제하(臍下)에 취(聚)하면서 스스로 호흡(呼吸)한다. 기(氣)의 호(呼)는 천근(天根)에 접(接)하고 기(氣)의 흡(吸)은 지근(地根)에 접(接)한다. 사람의 생(生)에 오직 기(氣)가 선(先)하므로 또한 기해(氣海)라 명(名)한다.' 하였다. 그런데 명(名)은 비록 부동(不同)하지만 실은 하나의 자궁(子宮)일 뿐이다.
자궁(子宮)의 하(下)에 일문(一門)이 있고, 여(女)에 있어서는 수(手)로 탐(探)하여 얻을 수 있으니 속인(俗人)은 이를 산문(産門)이라 명(名)한다. 남(男)에 있어서는 정(精)이 설(泄)할 시(時)에 저절로 관란(關闌: 가로 막다. 정문(精門))하는 지각(知覺)이 있는 곳이다. 청(請)하여 질문(問)하건데 이것이 어느 곳인가?" 하니라.
객(客)이 이르기를 "이것이 곧 명문(命門)이 아닌가?" 하니라.
내가 이르기를 "그러하다. 청(請)하건데 다시 모두 풀어보겠다.
신형(身形)이 생(生)하기 이전의 초(初)에 부모(父母)가 교회(交會: 성교)할 때 남(男)은 이 문(門)을 통하여 (정액이) 시설(施)하여 나가고 여(女)는 이 문(門)을 섭(攝: 지키다)하여 (정액이) 들어간다. 태원(胎元)이 (10개월에) 족(足)함이 되면 다시 이로 말미암아 (태아가) 나온다. 그 출(出)과 그 입(入)이 모두 이 문(門)으로 말미암으니 선천(先天)의 입명(立命)의 문호(門戶)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이미 생(生)하면 삼초(三焦)의 정기(精氣)가 모두 여기로 장(藏)하여진다.
따라서 금단대요([金丹大要])에서 이르기를 '취(聚)하면 정(精)이 영(盈)하고 정(精)이 영(盈)하면 성(盛)하여진다.' 하였다.
양구자(梁丘子)가 이르기를 '사람의 생(生)은 정(精)에 명(命)이 계(係)한다.' 하였다.
주옥집(珠玉集)에서는 '수(水)는 삼재(三才)의 조(祖)이고 정(精)은 원기(原氣)의 근(根)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정(精)이 거(去)하면 기(氣)가 거(去)하고 기(氣)가 거(去)하면 명(命)이 거(去)한다. 그 고(固)함과 그 거(去)함이 모두 이 문(門)으로 말미암으니, 후천(後天)의 입명(立命)의 문호(門戶)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44난(難)을 살펴보건대(:閱) 칠충문(七衝門)이 있으니 모두 출입(出入)하는 곳을 가리켜 말하였으니 따라서 출입(出入)하는 곳을 모두 문(門)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일문(一門)은 가장 거(巨)하게 회(會)하는데 왜 명(名)이 없겠는가? 이것이 명문(命門)이 아니라면 또 어디에 속(屬)하겠는가? 이 곳이 명문(命門)임을 알면 남(男)의 장정(藏精)과 여(女)의 계포(系胞)가 모두 귀착(歸着)하게 되니, 천고(千古)의 의혹(疑)이 홀연히 풀린다." 하니라.
객(客)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명문(命門)은 우신(右腎)이 아니다. 다시 자궁(子宮)이라 한다면 이는 또 다른 하나의 부(腑)이다. 이는 어느 경(經)에 배(配)하고 맥(脈)은 어느 부위(部)에 거(居)하는가?" 하니라.
내가 이르기를 "십이경(十二經)의 표리(表裏) 음양(陰陽)은 이미 배정(配定)되어 있는데, 만약 이 명문(命門)을 다시 일경(一經)에 배(配)하면 신장(腎臟)은 유일(唯一)한데 경(經)은 둘이 거(居)하니 반드시 그러할 리(理)는 없다.
명문(命門)은 자궁(子宮)의 문호(門戶)이다. 자궁(子宮)은 신장(腎臟)이 장정(藏精)하는 부(府)이다. 신장(腎臟)은 선천(先天) 진일(眞一)의 기(氣)를 주(主)하고 북문(北門)의 쇄약(鎖鑰)을 사(司)하니, 그 쇄약(鎖鑰)은 바로 명문(命門)의 폐고(閉固)에 의뢰(賴)한다. 이는 감(坎) 중의 진양(眞陽)을 축(蓄)하여 일신(一身) 생화(生化)의 원(原)이 된다. 이처럼 명문(命門)과 신(腎)은 본래 동일(同一)한 기(氣)이다.
도경(道經)에서 이르기를 '이는 상하(上下) 좌우(左右)의 가운데 해당하고 그 위(位)는 극(極)을 상(象)하니 이를 단전(丹田)이라 명(名)한다.' 하였다.
단(丹)이란 기(奇)이므로 북방(北方) 천일(天一)의 장(臟)을 통(統)하고 그 외수(外腧)인 명문(命門) 일혈(一穴)이 바로 독맥(督脈) 14추(椎)의 가운데이다. 이처럼 명문(命門)은 원래 신(腎)에 속하지 또 별(別)하는 일부(一腑)가 아니다. 39난(難)에도 이르기를 '명문(命門)은 그 기(氣)가 신(腎)과 통(通)한다.' 하니 또한 신(腎)과 이(離)하지 않는다.
오직 오장(五臟)은 각 하나이고 홀로 신(腎)은 둘이 있으니, 둘이 있다면 그 상(象)이 다르지(:殊) 않을 수 없다. 비유(譬)하건대, 이목(耳目)은 같은 하나이지만 좌(左)가 우(右)보다 명(明)하고, 수족(手足)은 같은 하나이지만 우(右)는 좌(左)보다 강(强)하다. 따라서 북방(北方)의 신(神)에는 사(蛇) 무(武)가 있으니, 사(蛇)는 양(陽)을 주(主)하고 무(武)는 음(陰)을 주(主)한다.
양척(兩尺)의 맥(脈)은 좌우(左右)로 나누어지니, 좌(左)는 수(水)를 주(主)하고 우(右)는 화(火)를 주(主)한다.
좌양(左陽) 우음(右陰)은 정상적(常)인 이치(理)인데 여기서는 좌수(左水) 우화(右火)이라 하였는데, 왜 그러한가?
신(腎)은 자(子) 중에 속하고 기(氣)는 동지(冬至)에 응(應)하여 음양(陰陽) 중분(中分)의 위(位)에 해당한다. 동지(冬至)의 후(後)에서부터 천(天)은 좌(左)로 선(旋)하고 시(時)는 춘(春)이 되어 두표(斗杓)는 석목(析木)에 건(建)하며 일월(日月)은 우(右)로 행(行)하여 해(亥)에 합(合)하고 진차(辰次)는 추자(娵訾)에 회(會)한다.
이처럼 양(陽)이 일월(一月)을 진(進)하면 회(會)는 일궁(一宮)을 퇴(退)하여 태양(太陽)은 점차 우(右)로 행(行)하니 사람도 또한 이에 응(應)한다. 따라서 수위(水位)의 우(右)가 화(火)가 된다.
또 사람의 사체(四體)는 본래 지(地)에 응(應)하는데, 지(地)의 강(剛)은 서북(西北)에 있으니 또한 당연히 우척(右尺)은 양(陽)이 되는 이치(理)가 마땅하다.
따라서 맥경([脈經])에서는 신장(腎臟)의 맥(脈)을 양척(兩尺)에 배(配)한다. 다만 당연히 '좌척(左尺)은 신(腎) 중의 진음(眞陰)을 주(主)하고 우척(右尺)은 신(腎) 중의 진양(眞陽)을 주(主)한다.'고 말하여야 하는데, 명문(命門)은 양기(陽氣)의 근(根)이므로 삼초(三焦) 상화(相火)의 맥(脈)을 따라 우척(右尺)에 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만약 '좌신(左腎)은 신(腎)이고 우신(右腎)은 명문(命門)이다.'고 말하면 안 된다.
비록 그렇게 나누어 말하면 좌(左)는 수(水)에 속하고 우(右)는 화(火)에 속하니 명문(命門)은 당연히 우척(右尺)에 부(附)하여야 한다고 하지만, 합(合)하여 말하자면 명문(命門)은 극(極)을 상(象)하여 소장(消長)의 추유(樞紐)가 되어 좌(左)는 승(升)을 주(主)하고 우(右)는 강(降)을 주(主)하며 전(前)은 음(陰)을 주(主)하고 후(後)는 양(陽)을 주(主)한다. 따라서 수(水)의 상(象)은 외(外)가 암(暗)하고 내(內)가 명(明)하며 감(坎)의 괘(卦)는 내(內)가 기(奇)이고 외(外)가 우(偶)이다. 신(腎)의 양자(兩者)는 감(坎)의 외(外)의 우(偶)이고 명문(命門)의 일자(一者)는 감(坎) 중(中)의 기(奇)이다. 일(一)로 양(兩)을 통(統)하고 양(兩)으로 일(一)을 포(包)한다. 이처럼 명문(命門)은 양신(兩腎)을 총(總)하고 주(主)하니 양신(兩腎)은 모두 명문(命門)에 속(屬)한다. 따라서 명문(命門)은 수(水)의 대(大)한 부(府)이고, 음양(陰陽)의 택(宅)이며, 정기(精氣)의 해(海)이고, 사생(死生)의 두(竇)이다.
만약 명문(命門)이 휴손(虧損)하면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모두 믿을(:恃) 바를 잃어 음양(陰陽)의 병변(病變)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연고(故)는 바로 천지(天地)의 발생(發生)의 도(道)는 하(下)에서 종시(終始)하고 만물(萬物)의 성쇠(盛衰)의 리(理)는 근(根)에서 영허(盈虛)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학사(許學士)는 홀로 보신(補腎)하는 것을 알았고 설립재(薛立齋)는 매번 명문(命門)을 중시(重)하였다. 이 두 현자(賢)의 고견(高見)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니, 왕태복(王太僕)이 말한 '장수(壯水)하는 주(主)이고 익화(益火)하는 원(原)이다.'에서 얻은 것이다. 이는 진실로 성명(性命)의 대본(大本)이니 의사(醫)가 이를 모르면 어찌 족(足)하다 말하겠는가?
따라서 내가 분명(明)하게 이를 알려서(:申) 그 의미(:義)를 활용(用)하게 하고 널리 펼치려 한다. 이 편(篇)의 전후(前後) 여러 논(論)에서 비록 억견(臆見: 마음대로 추측한 의견)이 많겠지만 모두 경(經)의 의(意)를 췌(揣:헤아리다)하려 한 것이니 감히 망언(妄言)은 아닐 것이다. 나와 마음이 같아서 정확(正)하게 헤아려준다면(:裁) 다행(幸)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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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문은 해부학적으로는 회음부로서, 자궁의 아래(산도)나 전립선 아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위 근처에 가장 좋은 정혈을 보관하고
이것이 생명의 장수와 요절을 결정하므로
명문이라 이름한 것이다.
명문은 신의 기능의 일부이지만
그 곳의 정혈은 인체 대사 전체의 최종적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체 대사의 어떠함을 알 수 있다.)
즉 후천적 영양은 비위에서 시작하지만
명문이 그 종착점인 셈이다.
그리고 음의 최종적 종착점인 동시에
또한 상승하는 양(상화)의 시작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즉 정 -> 기 -> 신의 변화의 시점이기도 하다.
또한 음정이 일정량(2.5홉?) 이상이 되어야
양이 시작된다.
그래서 명문에는 음과 양이 동시에 존재한다.
명문의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인체에 있는 생명의 근원(음양의 근본, 태극)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