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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성종 무덤인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지키는 문인석.
성종은 사림을 대거 발탁해 사대부들에게 성군으로 추앙받았다. 사진 문화재청
성종은 신하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가 유독 많이 따라 다닌다. 손순효(1427~1497)는 단종 1년(1453) 증광문과에서 을과(3등급 중 2등급)로 급제해 성종대에 대사헌과 우찬성, 종1품 판중추부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성종과 손순효는 사이가 돈독했다. 다음은 선조·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쓴 <기재잡기>의 내용이다.
"어느 날 상감(성종)께서 느지막이 두 명의 내시를 거느리고 경회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남산 기슭에 두어 사람이 수풀 사이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종은) 손공임을 직감하고 바로 사람을 시켜 가 보라고 하였다.
과연 손공이 손님 두 명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 위에 누런 오이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상감께서 바로 말 한 필에다가 술과 고기를 잔뜩 실어다 보내 주었다. 손공과 손님들이 머리를 조아려 감격하고 배불리 먹고 취하게 마셨다."
<기재잡기>는 손순효의 옛 집터가 명례방동(명동) 위쪽에 있었다고 했다. 명동 위쪽이면 남산초등학교 주변일 텐데 멀리 경회루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육안으로 남산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성종이 손순효를 아끼는 만큼 손순효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여러 신하 중에서도 각별했다. 맛있는 것이 하나라도 생기면 임금부터 생각했다.
<기재잡기>는 "손공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쇠와 돌을 꿰뚫을 정도였다. 그가 경기관찰사로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채소나 과실 한 가지라도 입에 맞는,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바로 가져다가 임금께 바쳤다"고 적었다.
이런 성종도 대궐을 자주 비웠던 세종과 마찬가지로 궐 밖으로 행차하기를 즐겨 입방아에 올랐다. 차천로(1556~
1615)의 수필집 <오산설림초고>에 따르면 성종은 궐 밖에 나갔다가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가마에서 내려 감상했으며 심지어 땅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악사에게 악기를 연주하게 했으며 흥이 나면 몸소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대간들은 바깥 나들이를 중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임금은 바깥 행차에서 만난 선비 여럿을 선심 베풀 듯 과거에 합격시켜 주는 일도 빈번했다.
"성종이 밤에 밖에서 놀다가 삼각산(북악산)에 불빛이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니 한 서생이 등불을 켜고 글을 읽고 있었다. 서생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과거에 급제하고 싶다'고 답했다. 임금이 불러 절구 짓기를 명한 뒤 급제 시켰다."<오산설림초고>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도 성종이 출신을 가리지 않고 재주와 기량을 갖췄다면 요직에 등용했다고 전한다. 구종직(1404~1477)도 시골의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성종이 미행할 때 우연히 만나 발탁됐다.
임금이 그에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춘추>를 익혔다고 답했다. 구종직이 막힘없이 줄줄 외워 내려가자 임금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바로 교리(홍문관의 종5품)에 임명했다.
당연히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원들이 부당한 인사라며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임금은 간원들을 불러 춘추를 외우게 했지만 모두 신통 찮았다. 오로지 구종직만이 막힘이 없었다. 이후로는 조정에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구종직이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세조 때 이미 공조판서, 지중추부사(중추부의 정2품) 등 고위직을 지낸 것으로 미뤄 구종직에 교리 벼슬을 내린 임금은 성종이 아니라 세종인 것으로 짐작된다. 구종직은 벼슬은 종1품 좌찬성에 이른다.
어쨌든 이런 일은 허다했다. "누구인지 이름은 잊었지만 그가 고을을 잘 다스리자 성종은 곧바로 그를 불러들여 이조 참의(정3품 당상관)에 제수했다. 대간들이 드세게 일어나자 오히려 이번에는 이조판서로 높여 임명했다. 그러자 대간들은 조용해졌다"고 <성호사설>은 썼다.
그런 반면 신하들을 두려워한 왕도 있다. 중종이 그런 경우다. 중종은 특히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반정군에 겁을 먹었다. 이복형인 연산군을 쫓아냈듯 자신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든 갈아치울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택영(1850∼1927)이 쓴 역사서 <한사경>에 따르면 중종반정 당시 반란군을 총괄 지휘했던 박원종(1467~
1510)은 중종 4년(1509) 영의정에 오른다. 중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박원종을 늘 어려워했다.
박원종이 아뢸 때마다 왕은 선 채로 보고를 받았으며 그가 보고를 마치고 전(殿)에서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자리에 앉았다. 이같은 중종의 행동에 박원종은 심적 부담이 컸다.
박원종은 "내가 일개 무부(武夫)로서 이와 같이 왕을 두렵게 만드니 고이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얼마지 않아 조정에서 물러나 이후로는 음악과 여색으로 여생을 보냈다.
사진2.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숙종은 1695년 중국 촉나라의 명재상 제갈량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그 위에 제갈량을 찬양하는 장문의 시를 직접 썼다. 고종대의 문신 김택영은 숙종이 사상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비판했다.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번영했던 시기로 흔히 19대 숙종(1661~1720·재위 1674~1720)의 치세를 꼽는다. 다수의 고전소설이 "숙종 호시절에…"라는 상투적 문구로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런데 <한사경>은 "숙종의 시대에 오히려 사회가 퇴보했다"고 규정한다.
숙종이 다양한 사상 발전을 가로막은 '사문난적(斯文亂賊·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성리학의 질서와 학문을 어지럽히는 도적)금법'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본 것이다.
김택영은 "조선은 인재가 매우 적게 태어난다. 숙종이 사문난적 금법을 시행한 이래 학문적으로 크게 퇴보했기 때문이다. 일마다 중국을 배웠지만 일마다 반드시 중국보다 심했다.
주자의 성리에 관해 들으면 다른 사상가는 다 폐하였고 주자도 혹 틀린 것이 있고 다른 사상가들도 혹 옳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녀의 수절에 관한 말을 들으면 가혹하게 개가를 금지했고 귀천에 관한 말을 들으면 크게 벌열(閥閱·엘리트)을 숭상했다. 진실로 견문이 협소하고 비루하다"고 강하게 질타한다.
김택영은 마찬가지로 21대 왕 영조도 혹독하게 비판한다.
"영조 때부터 노론이 국가의 골육이 됐고, 정조 이후로는 왕실이 오직 노론과만 혼인을 맺었다. 이 때를 전후해 노론이 국가의 운명을 틀어 쥐었고 그것이 200년간 이어졌다."<한사경>
고전은 우리가 갖고 있던 역사적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허물어 버린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4.박원종을 겁내 일어서서 보고 받았던 중종…성군의 황당한 모습2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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