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공생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개중에는 공존을 절대 원하지 않는 나무도 있다. 인간사회로 보면 ‘사회성이 없는 나무’다. 그래서 부득이 숲 가장자리로 밀려 나거나 아예 홀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렇게 숲을 벗어나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자연스럽게 접촉할 기회가 늘면서 사람과 친숙해졌다. 이 나무가 아까시나무이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라는 동요 ‘과수원길’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아카시아는 정겨움이 느껴진다. 그런데 ‘아카시아’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아까시나무’가 맞다. 둘은 서로 다른 종이다. 열대지방에 사는 아카시아와 유사하여 ‘아카시아를 닮았지만, 가시가 있다.’에서 아까시나무가 되었다.
외래종 아까시나무는 한국전쟁 후에 산림녹화를 위해 심어진 나무이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력이 높았다. 그 강점은 무엇이었을까?
공기 중에는 약 78%가 질소이다. 질소는 생물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핵심 원소로 식물 재배에는 질소비료(요소비료)가 필수이다. 20세기 초에 인류는 질소를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농업의 대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자연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이를 질소고정이라 하며 공기 중 질소를 이용해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든다.
첫 번째는 번개 칠 때 발산하는 강한 에너지로 생성한다. ‘천둥 번개가 심한 해는 풍년이 든다’라는 속담이 그래서 생겼다. 번개가 한 해 농사를 좌우했다. 과거 조상들의 예리한 눈썰미가 빛이 난다.
두 번째는 세균의 공로이다. 콩과식물 뿌리에는 뿌리혹박테리아가 득실거린다. 이들은 토양 속 질소를 식물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 공급한다. 자기 몸에 세 들어 사는 기특한 세균 덕분에 질소비료를 공짜로 챙긴다.
아까시나무가 바로 콩과식물이다. 그래서 질소를 얻는 강점은 얻었으나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나무의 생장은 양분 외에 햇빛도 중요하다. 질소 공급이 많으면 빛의 흡수량도 비례한다. 아까시나무는 일조량이 많은 극양수(極陽樹)라서 빛 흡수에 매우 민감하다. 다른 나무로 인해 그늘지면 사는 게 녹록지 않고 빛의 방해를 좀 더 받으면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 경쟁에 밀려 다른 나무와 결코 상생할 수가 없는 홀로서기 운명이다.
아까시나무는 산기슭이나 탁 트인 공간을 선호한다. 이러한 양지바른 곳에서 생장 속도가 매우 빨라 활용 가치가 높다. 쉽게 구할 수 있어 땔감으로도 으뜸이었고 다른 나무의 대체재 역할도 톡톡히 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놀이도구를 만들었던 나무다. 가지에 붙은 잎자루를 끊어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한 잎씩 떼어냈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었던 낭만이었다.
아까시나무는 5월 중순쯤 중부지방에 개화했으나 지구온난화로 시기가 많이 앞당겨졌다. 흰 꽃이 만개하면 향기와 꿀을 얻는 혜택을 주었다. 어린 시절 꽃송이를 따서 한입에 넣고 훑어 먹을 때의 달콤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아쉬운 건 오늘날 도시에서는 보기 어렵다. 나무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생활환경이 달라져 서식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활용도도 낮고 숲이 우거지면서 어린나무의 설 땅도 좁아졌다. 나무를 만나려면 이제는 찾아가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홀로서기 운명에 위기가 진행 중이다.
아까시나무는 콩과(科)의 낙엽 활엽 교목이다. 가시가 있어 생명력이 강할 것 같지만, 뿌리가 약해 큰 나무는 태풍에 잘 넘어진다. 자신을 보호하는 가시도 어린나무는 많지만, 어느 정도 자라면 방어력이 생겨 퇴화한다.
오늘날에는 다른 활용도는 낮아도 벌꿀 생산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밀원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