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如法受持分 여법수지분 : 여법하게 받아지니다.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불고 수보리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부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시위다부 수보리언 심다세존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 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 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 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 三十二相 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 삼십이상 견여래부
不也 世尊
불야 세존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 三十二相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설 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 삼십이상
須菩提 若有 善男子 善女人 以恒河沙等 身命布施
수보리 약유 선남자 선여인 이항아사등 신명보시
若復有人 於此經中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약유부인 어차경중내지 수지사구계등 위타인설 기복심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고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보리여! 부처님이 설한 반야바라밀을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이름이 반야바라밀인 까닭이다. 수보리여!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올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법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네 뜻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모든 미진은 여래가 말하길 미진이 아니고 그 이름이 미진이다. 여래가 말하되,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이것의 이름이 세계라 한다. " "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가이 32상으로써 여래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길 32상이 공 32상이 아니고 이것의 이름이 32상 이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몸과 목숨으로 보시하고 ,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만이라도 수지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심히 많느리라.”
지금까지 앞에서 설하신 내용에 대한 경의 이름을 어찌 불러야 합니까?
하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된다’고 하신다.
금강이라는 말로 반야를 도우고 있다.
그럼 금강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금강(바끄라)은 모든 걸 다 깨어 부순다는 것이다. 우리 범부가 가지고 있는
미혹의 모든 번뇌장, 종자번뇌까지 다 깨어 부순다는 것을 알려 주시면서
너히들은 이러한 이름으로 ‘여당봉지’ 할 것을 말씀하셨다.
어떻게 여당봉지 할 것인가?
‘받들어 지닐지니라’ 수지하고 지녀라는 것은 수(受)와 지(持) 하라는 말씀으로
4종 수행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스승으로부터 받아 배워 익혀서 듣는 것, 지니는 것(내지 불망), 즉 안으로 지녀서 잊지 않고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을 통해 본성을 보게 되고 그 뜻을 자꾸 새겨서 안에서 그 뜻을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문을 들을수록 공덕이 커진다.
깨닫기 전에는 ‘부처는 부처, 나는 나’ 이지만 깨닫고 나면 둘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자, 이렇게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이자하!
하시고는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로 이유를 밝힌다.
부처님게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다.
“즉비”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을 우리는 모른다.
왜 그럴까? 아직 경험하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즉비”다
하여 이름만 반야바라밀이라고 방편을 붙였다.
“시명” 에는 또 2가지 뜻이 있다.
1)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 할 수밖에 없다.
깨닫지 못한 범부는 깊고 넓은 그 심오한 뜻을 알 수 없어 그저 이름일 뿐!
2) 이름을 방편으로 붙이긴 했지만 진짜로 반야바라밀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의 세계를 말씀하신 것은 직접 체득한 것으로 그대로 얘기 했을 뿐! 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 체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단지 그 깨달음으로 인도 할 수 있는 경전이기에 “시명반야바라밀”이지만 이 경전이라는
도구를 통해 진짜 깨달음을 체득할 수 있어서 진짜 반야바라밀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여래가 설한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누군가요? 단방에 알아차리고 ‘설한바 없습니다.’고 ‘무설’을 답한다.
그럼 왜? ‘무설’인가?
뭔가 ‘설했다’ 라고 하려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말한 이의 주장이나 자기 견해가 있어야 하는데 부처님은 이런 주장이나 견해가 없다.
‘무설’의 근거를 살펴보자,
그냥 깨달은 세계를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이것을
1) 여증설법이라 한다.
2) 공동설법으로 삼세제불이 다 같이 말했다.
3) 방편설법으로 깨달음을 위해 많은 수단과 방편으로 모르는 사람을 위해 비유를 들어 설법하셨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해를 돕기 위해 미진과 세계를 들어 이 모두가 ‘시명’임을 덧붙여 주신다.
미진이라는 세계라는 것을 관조하다 보면 결국 자체 성품이 없다는 것이고
미진이 모여서 세계가 되고, 미진으로 이루어진 세계도 속에 들어가 보면 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미진이고 세계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진짜 미진이고 세계다. ‘실상’을 얘기 한다.
자성이 공하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관조해서!
공하다는 공까지 공한 것을 보는 게 바로 ‘반야’다. 이건 설명할 수 있나?
없다. 오직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여 이름만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는 ‘깨달음의 세계’라 하는데 우리는 취할 수 있나?
취할 수 없다. 내가 설령 깨달았다 하더라도 취할 수 없다.
앞에서 이미 ‘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을 얘기 하셨다.
결국 무슨 얘기냐?
일체가 다 끊어진 세상, 법성게의 구절에서 보듯이 ‘무명무상절일체’ 라 하지 않았나!. 이름도 지을 수 없고 형상도 없고 일체가 끊어진 세계 그것이 바로 ‘반야세계’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에게 나타난 세계는 뭔가? 깨달은 세계, 중생의 세계, 다 자성이 없다. 세속의 세계는 그대로다 이것을 ‘불수자성수연성’이라 했다.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따라 이루어진다. 진리는 일체가 절일체 되었지만 다만
‘수연성’ 즉, 인연따라 일어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성이 없음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이름으로 알려 주기 위해 그 이름을 ‘반야’문자로 다 통하도록 하셨다. = 서로 상응한다 는 이것을 진짜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이므로 ‘시명’ 이다.
수보리의 또 다른 의심을 눈치챈 부처님께서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하고 물어보신다.
‘공’에 있어서 누구보다 밝은 수보리의 대답!
‘볼 수 없습니다.’
왜? 여래의 32상은 수행공덕으로 얻었다. 지혜로 조견해서 실상을 바로 보기 때문에 이런 대답이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래의 말씀을 인용한다. ‘즉시비상 시명32상’ 이라고.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과 목숨으로 보시하여도 이 경의 사구게 등이라고 수지내지 위타인설하면 그 복이 더 많다‘고
반야수행을 한번 더 강조 해 주신다.
반야바라밀수행에서 바라밀에는 2가지 뜻이 있다.
1) 도착해서 완성했다.
2)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반야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조견오온개공해야 한다.
오온이 공함을 꿰뚫어 보고 ‘무아’를 알아야 한다.
색수상행식 하나 하나 관조하여 자체성품이 없다는 것을 꿰뚫어야 한다.
모든게 다 인연따라 나타났다 흩어질 뿐!이라는 사실을.
즉, 아공과 법공이 다 공하다는 진리를 수행으로 완성할 수 있도록 해 보자
그래서 13분 복습을 끝맺는다.
일화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