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35차 우보익생만허공 – 단비같은 보배구슬 중생휘애 허공가득
직역으로 다시 해석해 보자,
우보 : 보배 비가
익생 : 중생의 이익을 주는
만허공 : 허공에 가득찼다.
=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 찼다 는 것이다.
화엄삼매에 들어간 불보살은 그 힘으로 성불을 시현 하기도 하고 가르침을 시현하기도 하며, 보름달처럼 그 모습을 온 세계에 나투어 중생교화 하기로 하고 성문,연각, 보살의 삼승의 길을 시현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여의보왕이 뿜어낸 보석같은 빗방울이 허공가득 내리는 것과 같으리라. (여의= 부처님의 가르침, 지혜, 복덕, 자비... 뜻과 같다))중생을 위해 허공에 가득채운 보배비는 이타행을 말한다.
해인삼매에 들어가 <능입해인삼매중>에 서 <번출여의부사의>하여 <우보익생만허공>이 삼매중에서 일어남이다.
법기에서 ‘우보익생만허공’의 설명을 보자.
‘허공이 끝이 없기에 세계도 끝이 없다. 세계에 끝이 없기에 중생도 끝이 없다.
이렇게 끝없는 중생이지만 이와 같은 가르침이 가피(加被)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보익생만허공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사홍서원에서 '중생무변서원도'라고 하듯 '중생이 끝이 없다 그래도 서원컨대 다 제도하겠다’고 발원 하듯이
중생의 숫자도 끝이 없다.
화엄경 곳곳에 보살의 법문을 보배 같은 비에 비유하고 있다.
법의 몸, 법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든지 계시다. 온 우주 그 자체가 법신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보익생만허공, 허공 가득 보배같은 법문의 비를 내리시는 분은 진리의 몸, 법신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이시다.
이 모두 '대비(大悲)'라는 한 맛의 비에서 유래한다고 설한다.
부처님께서 내리시는 가르침의 비(法雨)는 모두 '대비(大悲)'에서 비롯하지만
번뇌의 불길을 소멸하는 비(제멸)
중생의 선근을 일으키는 비도 있으며(능기),
갖가지 사견(邪見)을 파괴하는 비(능괴),
중생의 마음을 분별하는 비(분별)도 있다.
이렇게 우보익생만허공, 허공가득한 보배같은 빗방울은 법신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유한다.
세상은 부처님의 법문으로 가득하다. 세상 전체가 부처님의 설법이다. 이 우주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설법이다.
자 그럼
중관논리로 분석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들여다 보자.
이미 중론에서 다룬 이야기다 다시 떠올려보자!
비가내린다. 바람이 분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진짜 비가 내리나? 바람이 부나?
잘못 되었다.
비가 내리기는 뭐가 내리고, 바람이 불기는 뭐가 바람이 부나?
그럼에도 비가 내려도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문이고 바람이 불어도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문이다.
온 우주이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항상 시현(示現)하고 계신 중도의 법문이다.
어째서 그럴까?
세상만사가 중도의 법문인지 따져보자.
중도법문!!
이미 중론에서 중도를 얘기했다.
'비가 내린다' 당연한 얘기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비'와 '내림'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게 된다. 그래서 오류가 발생한다.
비는 반드시 '내림'을 갖고 있다.
내림이 없는 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주어로 사용된 '비'는 의미상 '내림을 갖는 비'다. 술어에 다시 한번 '내린다'는 표현을 덧붙임에 따라
'의미중복의 오류'가 발생한다. (增益見)
'내리는 것'이 비가 되는데 내리지 않는 비는 있을 수 없다. 하늘 위로 올라가 보아도 내림이 없이 멈추고
있는 비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내리지 않는 비는 있을 수 없다.
이를 '사실위배의 오류'라고 부른다. (損減見)
중론에서 다루었던 4구 비판에서 보듯이
1)'내리는 비'가 내린다 -증익견 : 의미중복의 오류
2)'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 손감견 : 사실위배의 오류
3)'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상위견(相違見) : 상호모순의 오류
4)'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가 내린다 - 희론견(戱論見): 언어유희의 오류
이것이 용수가 개발한 중관논리다.
세상만사가 중도를 가르키고 있다.
그래서 세상만사가 부처님의 법문인 것이다. 언어 도단이고 불가사의 한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가 끊어진 불가사의한 중도적 현상인 것이다.
이분법적 사유, 흑백논리적 사유가 들어갈 수 없는 중도적 현상이다.
모든 것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중도법문이다.
이분법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이 지어내는 갖가지 고민을 모두 떨쳐 버리게 해주는
중도의 법문이다.
우주이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보이시는 무언(無言)의 교화다.
부처님이 고락중도(苦樂中道)을 얘기 하셨다.
고와 락의 중도! 법문
경전에 있는 고락중도! 어떻게 하라는 건가?
바로 8정도의 삶을 살아라! 한다. 이것이 중도다. 더 간단하게 얘기하면 계.정.혜의 삶을 닦아라 이 얘기다.
계는 마음이 산란하면 선정에 들 수 없고,
정은 선정에 들지 못하면
혜라,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
고! 고행하지 마라 하지않았나?
락! 삼매의 즐거움만 추구하지 마라 하셨다. 삼매에서는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고요히 집중한 상태일 뿐이다.
삼매에서는 시간 가는줄 모른다. 남이 볼때 하루 종일 그냥 있어도 당사자는 눈 감았다. 뜨는 순간, 그 뿐이다.
그런데 왜 추구하지 마라 하나?
깨면 탐진치가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다. 하여 삼매만 추구하지 마라 하는 것이다.
고행하지 마라!
왜?
우리는 나름의 고행을 많이 한다. 3천배, 철야기도, 다라니.. 수 많은 고행을 왜 할까?
고행을 하고 나면 어떤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하는 이런 수행은 사실 고행도 아니다.
몸을 학대하는 이 고행을 하고 나면 뭔가 마음에 죄책감이 사라진다.
왜 이런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있나! 중생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말 그대로 나 혼자 살 수 없다.
밥을 먹어도 나 혼자 할 수 있는게 없지 않나! (밥그릇, 수저, 밥솥, 쌀... )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만들어
내고 있다. 스스로 하는 게 없다.
여러 사람의 힘으로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힘을 같이 하기에 최고의 동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더불어 산다. 알고 보면 같이 살기 때문에 그속에서 선과 악이 나온다.
본래 선과 악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러니 선악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다. 사람에게만 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딘가 불편하다.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고행해야지!! 고행으로 스스로 뭔가 가벼워진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그래서 또 고행한다. 스스로 편해졌다, 무거워졌다 한다.
우리는 이미 배웠다.
'죄무자성종심기'라고, 죄의 무자성을 알면 공부로서 수행을 해야지!
공부를 수행으로 하라고 수 없이 얘기 했지 않나!
아무리 고행해도 탐진치를 여의지 못한다.
고행한다고 의문이 풀릴 수가 없다. 그러니 수행으로써 하라고!!!
그래서 고락중도라 하신 것이다.
제발공부하라!!!!
부처님도 최고 삼매의 경지에 들었지만 깨어나서 깨달음을 얻었나? 못했다.
그래서 선정을 하시고 4선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호흡을 왜? 보라 하나!
호흡을 통해 뭘 보라고 하나?
염불을 왜 하고, 절을 왜 하나? 경전을 왜 독송하나?
무상,고,무아(삼법인)을 보라고. ... 이걸 보라고 하는 거다.
무상이 뭐냐? 제행무상, 항상하는게 없다는 것을 보라
고.. 호흡이 편한데 왜? 괴롭나?
항상한게 없음을 어떠헤 보나?
호흡이 왜? 무상한가?
들이마시고, 들이마시고, 계속 해 보자 항상할 수 없으니 괴롭지
내 쉬어야 편하다. 그럼, 이제 계소 내 쉬어보라...
계속 날숨만 할 수 있나?
아니다. 무상하다, 괴롭다.
무상한게 '나'인가? 괴로운 것이 '나'인가? 여기에 '나'가 없다.
이것이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이다. 바로 '실천적 중도'다.
세상을 보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가 망상이다. 전부 흑백논리고 이분법적 논리다
이걸 깨닫게 된다.
실천할 수 있는 실천적중도를 통해 사상적 중도를 본다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삼법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 일체개고 (사법인)
남방에서는 3특상이라 한다. 무상,고,무아라 부른다. 순서가 바뀌면 안된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무상,고,무아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색은 무상한가? 영원한가? ------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 고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 중에 '나'라 할 만한게 있나? ---- 무아입니다. "
전부 '나'라 할 만한게 없다.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 무상,고 설명을 먼저 한 것이다.
무상,고를 가지고 무아를 확실히 설명하셨다.
불교에서
삼법인은 붉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불교가 아니다.
다른 종교와 차별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수행의관점, 삼법인은 법의 도장으로서 본다.
무상,고,무아는 오온을 보는 것이다. 내 몸을 보는 것이다.
오온의 본질, 없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생무상'이라는 무상과 우리가 삼법인에서 쓰는 '무상'은 어떻게 틀린가?
우리는 내가 보니 내가 있는 상태에서 인생무상이라 하고
삼법인에서 '나'가 없는 상태에서 '무상'이다.
낭만이 아니다. 천지차이다.
무상을 알지 못하고 고가 뭔지, 무아가 뭔지를 모르는 것이다.
삼법인은 깨달음을 향한 것이고,
우리의 무상은 인생무상을 허무, 회의를 향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알고보면 '나' 한테서 일어난 것이다
밖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지 않으면 무상,고,무아도 못 느낀다.
해외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그리 와 닿지 않는 것과 같다.
오온 밖에 있는 것은 내 세상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결해야 할게 뭐냐?
'나'를 해결해야 한다. 다른거 해결하려 들지 말고 '나'를 먼저 해결 해야 해!
그래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해도 안 하는게 내 오온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안하니까!
간단히 말하지만 내 오온으로 안 하니까!
어떤 수행을 해도 내가 왜 하는가? 분명하게 하고 바로 나아가야 한다.
자꾸 공부하면서 항상 바로 세워야 한다.
내가 항상 똑 같은 소리 하고 있다. 항상 그 말이 그 말이다.
수행목표가 딱 있다.
바로 나아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
공부해야 한다.
고락중도다!
팔정도다!
계정혜다.!
선이다.!
멈추고 무상,고,무아를 보라고
내 몸을 통해서 제대로 보라는 것이다.
일화합장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