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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7월 이집트의 뜨거운 태양열 아래에서 진지작업을 지휘하는 프랑스 공병장교 피에르 부샤르 Pierre-Francois Bouchard 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일꾼들을 독려한다 도랑도 파고 오랫동안 버려진 허름한 벽도 허물어 낸다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라이벌 관계인 잉글랜드와 인도와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진격할 때이다 이집트사막과 나일강 유역에는 많은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중해 가까이 나일강 하구에 위치한 생쥴리엥 요새를 지킬 진지 구축 작업도 한창이다 이집트 군대와 전투도 벌여야 하고 또 요사이 잉글랜드군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날도 역시 진지 작업하느라 누런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땀들을 뻘뻘 흘린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오래된 벽 틈사이로 큰 돌덩어리가 무너져 나온다 모두들 깜짝 놀란다 모서리가 부서진 길이 1미터 정도 두께 30센티미터 정도의 평평한 돌덩어리이다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은 후 돌덩어리를 자세히 살펴보던 피에르 부샤르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돌덩이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잔뜩 새겨져 있는 것이다
뭔가가 있다고 직감한 피에르 부샤르는 즉시 상관인 메노우 장군에게 보고한다 이 돌덩어리는 발견된 지역의 이름인 로제타 (=아르 라쉬드 ar-Rashid) 를 따라 로제타스톤 Rosetta Stone 으로 이름 붙혀진다 그러나 불과 얼마되지 않아 유례 없이 큰 관심의 주인공이 된다
로제타스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이집트민중문자(Demotic: 민간인들이 사용한 문자) 이집트신성문자(Hieroglyph: 종교적 목적의 상형문자) 고대그리스대문자(Ancient Greek) 이렇게 3가지 문자로 97줄이 새겨진 로제타스톤의 중요성을 예감한 두 나라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그리고 이집트의 학자들은 경쟁적으로 문자 해독에 나선다 프랑스는 부랴부랴 보물로 지정한다
그즈음 프랑스 군대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 각 지역에서 수집한 수백톤에 이르는 막대한 유물들을 - 2.5미터 크기의 람세스2세의 검은 동상과 4미터 높이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 등 - 카이로의 군사기지에 모았다가 프랑스로 실어 보낸다 이들은 지금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메노우 장군은 개인소장의 욕심으로 로제타스톤을 카이로로 보내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의 개인막사에 보관한다
1800년 이집트에서의 전세는 점점 잉글랜드군 쪽으로 기운다 로제타스톤이 아직 이집트에 남아있다고 확신한 잉글랜드는 프랑스군을 압박한다 악착같이 숨기던 메노우장군은 결국 로제타스톤을 내놓으며 세상에 이런 약탈이 없다고 울부짖는다 로제타스톤은 지금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있다
이제부터는 로제타스톤 문자해독 전쟁이 벌어진다 이는 곧 두 라이벌 천재의 경쟁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에는 10대 시절부터 이미 10개 이상의 언어에 능통하여 언어의 천재라 불리는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cois Champollion 과 토머스 영 Thomas Young 이 있다 로제타스톤 발견 당시 토머스 영은 26세이고 샹폴리옹은 불과 9세이다 둘은 17년 선후배인 셈이다
그사이 여러나라 학자들이 로제타스톤에 덤벼드나 뚜렷한 성과가 없다
두사람의 불꽃 튀는 경쟁이 시작된다 두 나라 사이에도 숨막히는 긴장감이 돈다 특히 프랑스는 자기들이 발견한 로제타스톤을 힘으로 빼앗아간 잉글랜드를 용서할 수 없다며 분노에 가득 차 있다
토머스 영은 이집트민중문자의 해독에 먼저 성공한다 곧이어 최초로 논리적으로 언어를 분석하며 이집트신성문자 해독을 시작한다 일부 해독에 성공한다
샹폴리옹은 12세 때 로제타스톤 사본을 보고 꿈을 키운다 형의 조언에 따라 이집트 고대문자를 연구한다 나폴레옹은 직접 박사학위를 수여하면서까지 응원한다
1814년 24세의 샹폴리옹은 잉글랜드의 토머스 영에게 이집트신성문자 해독에 관하여 몇가지 도움을 청한다 토머스 영은 도움을 준다
1815년 샹폴리옹의 스승 실베스트르 드 사시는 토머스 영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집트신성문자 연구에 많은 성과를 이루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의 연구 결과를 샹폴리옹과 너무 많이 나누지 마세요 샹폴리옹이 먼저 해독하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1819년 토머스 영은 이집트신성문자에서 왕족 이름을 동그랗게 둘러싸는 모양인 카르투슈 cartouche 를 주목한다 거기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해독해내고 p, t, i, s, m 의 발음기호도 밝혀낸다
1822년 샹폴리옹은 이집트로부터 아부심벨신전의 상형문자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손에 넣는다 이를 로제타스톤 사본과 비교하며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변형된 어음인 k, l, m, p, r, s, t 와 카르투슈 사이에 쓰인 l, p, t, r 에 대한 추론을 더한다 그리고 일부 발음기호의 형태를 밝힌다 연이어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대그리스문서를 번역하면서 추가했을거라 나름 추정한 표어문자들도 증명한다 결국 이 표어문자들이 결정적인 단서 역활을 한다
드디어 오래 전에 사라진 문자인 이집트신성문자(상형문자)가 완전하게 해독되는 순간이다 로제타스톤이 발견된지 25년만이다
"새로운 왕이시며 왕관의 주인이신, 영광이 크시고 이집트를 평탄케 하시며 신들에 대해 경건하며 적들보다 우월하며...." 이렇게 적혀있다
평범한 찬양글이다 로제타스톤은 프톨레마이오스5세를 찬양하기 위하여 기원전 196년에 세워진 기념비석이다 원래는 다른 곳에 세워져 있던 것이 모서리가 부서진 채 로제타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5세는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후계자 자손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이집트를 물려받은 부하장수 프톨레마이오스1세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을 신격화하면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집트의 번영을 이어간다
알렉산드리아는 동서양의 융합이라는 헬레니즘 문화가 실현되는 곳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여러 종교들을 인정하는 사원들이 많이 세워지고 이집트인 그리스인 마케도니아인 아프리카인 솀족 아시아인 등이 같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이다 이집트인들은 그리스문화를 흡수하고 그리스어를 같이 사용한다 이집트신성문자는 주로 종교의식 법률 용도로 사용되고 필기체 형태인 이집트민중문자는 일반행정 상업 일상사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3개 문자로 새겼을 걸로 추정한다 이러한 예는 고대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1세왕을 찬양한 베히스툰 비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샹폴리옹의 쾌거로 고대이집트 시대의 상형문자 기록들이 해독되기 시작한다 고대이집트의 수천년 전설들이 찬란하게 깨어나서 문명의 역사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고대이집트의 역사부터 법 종교 문학 의학 기술 무역 등등이 차례차례 밝혀지고 신전을 지을 때 노동자와 군인이 몇명이나 동원되었는지 일할 때 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얼마나 많은 돌들이 사용되었는지 해마다 곡식은 얼마나 수확되었는지 세금은 얼마를 거두었는지 또 평민들은 어떤 놀이를 즐겨했는지 어떤 고민을 하였는지 등등 모든 것이 하나하나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이집트신성문자의 해독은 샹폴리옹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우선 3개 문자가 새겨진 로제타스톤이 발견되었고 이를 둘러싼 실베스트로 드 사시, 요한 애커블래드, 스테픈 웨스턴 등의 학자들의 호기심과 노력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토머스 영의 논리적인 문자이론과 우정어린 정보 교류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샹폴리옹 본인만 함구할 뿐 주변의 모든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7년 후 토머스 영은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이집트학회의 영웅이 된 샹폴리옹은 루브르박물관 관장까지 역임하다가 3년후 그 역시 세상을 떠난다 불과 41세의 젊은 나이다
후대들은 이런 의문을 가진다 먼저 시작하고 훨씬 앞선 연구를 하던 토머스 영이 왜 17년이나 후배인 샹폴리옹에게 최후의 성공을 빼앗겼을까? 일부는 대답한다 토머스 영은 너무 재능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후학인 아이슈타인이 칭송하던 천재이자 의사 물리학자 고고학자 생리학자인 토머스 영은 로제타스톤 신성문자를 해독을 하는 도중에도 의사로서 병원도 운영하고 물리학자로서 '빛의 파동' 실험도 발표하고 다방면으로 재능이 많아 여기저기 바쁜 학자이었다 그러는 사이 샹폴리옹은 건강도 해쳐가며 오로지 이집트 상형문자에만 몰두하였고 그 결과 이런 역사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 같이 필요하다는 에디슨의 말이 생각난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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