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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면 곤란한데....
6월초 삼성테크윈 임직원 비리에서 촉발된 삼성그룹의 조직쇄신 한파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21일에도 "(조직 쇄신이)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해봐야 한다. 계속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는 말로 다시 채찍질을 가했다. 지난 15일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장과 인사지원팀장 등 그룹 컨트롤타워의 핵심 보직 두 자리를 동시에 바꾼 뒤 일본으로 떠났던 그가 귀국하며 한 말이다. 이 회장이 '부정부패 척결'을 화두로 던진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최근 부산저축은행 사태로 촉발된 금융업계의 연이은 비리와 부정이 한국 금융계를 뒤흔들고 있는 상황이다. 저축은행 사태와 관련된 부정부패 고리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금감원 검사역은 물론 전현직 국회의원에 이어 현직 감사위원의 수뢰까지 그 종착점을 모른 채 달려가고 있다. 재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리온그룹과 CJ그룹, 한화그룹, 대우조선해양, 금호석유화학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비자금과 횡령 등의 사건이 마치 일상적인 경제순환과정의 일부분으로 여겨질 정도로 만연해 있는 상황이다.
특히 일부 기업의 경우 회사자금을 횡령해 자녀 통학용 고급 외제차를 구입하는 등 개인용도로 쓴 혐의를 받거나 개인 직위의 연임을 위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부정부패가 개인의 영달(榮達)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과거의 부정부패와 크게 달라진 양상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탓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윤리의식이 강하다는 삼성 임직원들 사이에서도 부정부패 내성 분위기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을 우려하여 초강경 대책을 마련한 것이라면 이는 마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 꼴이라고 할 것이다.
질책이 하루 이틀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 아니며, 외부가 아닌 그룹 내부를 겨냥한 것이고,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삼성그룹 관계자의 말처럼 절박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지난해 3월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이 5월 직접 사장단 회의를 열어 '5대 신수종 사업'을 정하고 밀어붙였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놓은 '10년 뒤', '미래', '신사업', '위기', '긴장감', '자만' 등의 키워드를 보면 '잘나가는' 지금의 삼성이 아니라 '불확실한' 10년 뒤의 삼성을 걱정하는 속내가 그대로 묻어난다. 10년 뒤를 보며 시작한 신사업들만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일본 소니를 제친 삼성전자가 애플이라는 더 크고 무서운 존재를 맞닥뜨린 것처럼 그룹 전체가 어쩌면 총체적 난국인지도 모른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한 당시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런 고민의 깊이가 전염된 것처럼 느껴질 법도 하고, 그래서 삼성내부든 외부든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공감하려는 분위기지만, 이 회장이 과연 그룹 내부만을 겨냥했을까 하는데 대한 내 판단은 다르다. 그 자신은 그룹 내부만을 노렸을지 모르지만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라는 게 재계 사람들의 생각이며 벌써 외부에 파장이 더 커지고 있다. 삼성이 혼자 치고나갔든 정부와의 사전 교감을 갖고 한 것이든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한때 그룹을 좌지우지했던 옛 경영 인맥을 솎아내며 승계 기반을 다지는 과정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룹 관계자의 말처럼 이 회장의 선언이 삼성그룹 내부를 겨냥한 것일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삼성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의 감사 기능 확대는 계열사의 독립경영체제 약화와 '친정체제 강화'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대선 비자금 사건 등을 겪으면서 그룹 조직을 축소해온 것과는 다른 흐름이기 때문에 또 다른 논란이 일 것이다.
아무튼 이 회장의 돌출에 가까운 행보가 사내용이든 정재계와 경제계에 대한 화두로 제기된 것이든 간에 진정한 사회적 책임과 윤리경영으로 이어져 삼성이 한국사회의 윤리적 잣대로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과 삼성에 대한 국민 일반의 곱지 않은 시각을 먼저 씻어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자금 사건으로 형 집행을 받고 최근 사면된 전력을 갖고 있는 본인 입으로 '제일 나쁜 건 부하직원을 닦달해서 부정을 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낯의 두께’나 부패=퇴출이라는 삼성식의 강력한 대응방식이 최고 책임자인 자신이나 일족에도 적용되는 것이냐는 비아냥을 못 알아듣는 ‘사오정급 청력’을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삼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실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 재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혹시 제시해줄까 하는 기대감으로 몇 가지 짚어 보았다.
22일 공정거래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공정위 조사를 가장 많이 방해한 기업은 삼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공정위 발표에 따르면 CJ제일제당은 대기업의 담합행위를 조사하는 가운데 주요 증거자료를 화단에 숨기고, 거짓 진술을 하는 등의 행태로 조사를 방해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사상 최대인 3억 4천만원의 과태료를 부과 당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날 발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98년부터 올해까지 조사방해 행위를 적발해 과태료를 부과한 건수는 총 15건으로, 삼성그룹이 총 5건, CJ그룹이 총 3건을 차지했으며, 나머지 7건은 현대상선, 귀뚜라미보일러, 현대하이스코, 세매스, 아이피앤피중공업, SK커뮤니케이션즈, 이베이지마켓 등이었다.
CJ그룹 역시 범삼성가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삼성가에서 절반 이상의 조사방해 행위를 자행했다는 얘기다. 문제는 공정위의 조사뿐이 아니다. 삼성생명의 경우 걸핏하면 금감원의 검사를 방해하는 회사로 악명이 높다. 2010년 7월 8일 MBC뉴스데스크는 국내 최대 보험사인 삼성생명이 금융감독원의 검사를 방해한 사실이 담긴 금감원 내부 문건을 보도하면서 최근 10년 간 금감원의 검사 대상 3천 여 곳 중 검사 방해로 제재 받은 경우는 모두 5차례인데, 그 중 세 차례가 삼성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MBC가 입수한 금감원 내부 문건에 따르면 2009년 11월 삼성생명 종합감사 당시 검사역들이 PC에 보관된 자료 제출을 요구하자, 법무실 변호사 등이 나타나 "파일을 열어주는 사람은 죽을 줄 알아라",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가"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문건에는 "위협적인 고성을 지르며 검사를 방해했다"는 당시 상황이 적혀 있었다. 직원들의 성과급 내역은 제출하면서도 임원들에 대해서는 사생활 보호를 내세우면서 자료 제출을 반복적으로 거부했다. 이 사건에 대해 금감원은 2010년 5월 임원 2명에 대해 주의적 경고, 직원 2명에 대해 감봉, 3명에 대해 견책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보다 훨씬 더 악질적이고 심각했던 것은 전자 문서 6만 건을 폐기하고 전산 프로그램까지 조작한 것이 드러나 직원 4명 문책과 함께, 과태료 천만 원이 부과된 2004년의 검사방해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보험업계 관계자는 "다른 회사는 속된 말로 벌벌 기죠. 자료 내놓으라고 하면 다 내놓고... 삼성이니까 가능하다 생각이 제일 먼저 드네요." 라며 삼성이니 가능한 게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는데 그 말을 간접적으로 확인해주는 사례는 또 있다. 지난 3월 24일 휴대전화 단말기 가격 관련 불공정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삼성전자를 방문한 공정거래위원회 직원들을 회사가 출입을 거부하며 30~40분 동안 실랑이를 벌어지자 경찰이 출동한 일이 바로 그런 사례인 셈이다.
이러한 일련의 조사방해 행위에 대해 공정위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조사방해가 더욱 지능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특히 과거 조사방해로 제재 받은 사업자가 재차 조사를 방해하는 행태가 확인돼 엄중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자료를 삭제하고 전산을 조작하고, 검사 및 조사를 물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야 저축은행 등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세계 최고를 지향한다는, 그리고 회장이 나서서 부패척결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삼성그룹이 법률 전문가까지 내세워 검사나 조사 등 공권력적 행정행위를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조사방해나 검사방해 행위의 경우 공정위나 금융위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고작 과태료 부과 정도라는 게 문제일 수 있다. 조사나 검사를 당해서 잃을 수 있는 손실에 비하면 방해 행위로 받는 ‘솜방망이 처벌’ 정도는 ‘새 발의 피’에 해당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탓일 수도 있다. 삼성의 영악성이라면 충분히 계산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삼성은 안 된다는 것이다.
삼성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지난 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진창수)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직원을 산업재해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전직 삼성반도체 직원 황유미씨와 이숙영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에게 유족급여와 장례비용을 지급해야 한다"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특히 이들이 가장 낡은 기흥사업장 3라인의 3베이에 설치된 수동 설비에서 세척 작업을 한 점을 고려하면 유해 물질에 (다른 직원들보다) 더 많이 노출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판결 이후 4년간 삼성에 맞서 소송을 이끌어온 부친이 "10억 주겠다는 (삼성측의) 회유를 딸과의 약속으로 버텼다"고 한 말에서 본의 아니게 우리는 삼성의 본 모습을 보았다. 당시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가 구성되어 제보를 받은 결과 삼성반도체와 LCD 등 전자업체에서 접수된 피해제보 수는 124명으로, 그중 46명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황유미씨를 비롯해 18명의 피해자들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냈지만 번번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 결정이 내려졌으며, 2007년 산업안전관리 공단이 역학조사에 나섰지만 피해자들이 산재 이유를 증명해 내야 한다는 다소 황당한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당시 박재완 고용부 장관이 "반도체 사업장과 백혈병 발병과는 통계적인 유의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밝히는 등 삼성반도체의 산재건에 대해서는 앞서 공정위나 금감위의 경우와 달리 정부와 삼성 그룹의 의견이 다르다기보다는 오히려 한통속이었다.
산재 피해자가 악전고투 끝에 의미 있는 성과를 얻어낸 이번 판결을 보면서 정부조차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삼성의 포스를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일종의 정경유착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치기 어렵다. 겉모양만 보면 행정권에 저항하는 것과 정경유착을 하는 것이 정반대 같지만 사회적 기업이나 윤리의식과 거리가 멀다는 느낌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는 7월 1일 이후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것을 계기로 삼성그룹에 반드시 투쟁력 있는 노조를 만들겠다는 노동계의 투쟁의지에 대해서도 삼성그룹은 산재건에 대한 것과 유사한 방식의 정경유착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역시 바로 저와 같은 삼성의 책임없는 행태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회장 본인이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는 그 순간 국민들은 삼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비윤리적인 행태들을 생각하게 된다. 준법정신은커녕 법질서를 아예 무시하면서도 그 법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가장 유능한 법조인을 부리고 있는 아이러니, 그러다 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버리는 일도 있었고... 오늘날의 삼성을 있게 해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 다름 아닌 삼성이라는 것을 국민들도 이제는 알 것이다.
지난 번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초과이익공유제를 들고 나왔을 때 이 회장은 ‘듣보잡 공산주의’가 아니냐는 비아냥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대한민국 자본주의를 더 흔드는 것이 과연 ‘듣보잡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삼성의 윤리적 이중 잣대인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국민들은 이제 매의 눈으로 그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