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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참여, 시민참여, 지역예술, 공공예술, 대중예술 등과 혼욕 막아야
예술은 크게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의 순수예술과 사회를 위한 예술로서의 (사회)참여예술로 예술을 구분할 수 있다. 순수예술의 대립적 개념으로서 참여예술하면 정치적 참여예술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참여예술을 지역 공동체에 관한 미술작업과 문화적 담론 생산을 위한 프로젝트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동두천 미군’, 참여예술 소재되다, 뉴시스, 2008.07.15; 최병렬, '시민참여 공공예술프로젝트 만들겠다', 오마이뉴스, 시민참여 공공예술프로젝트 만들겠다, 2009.12.22), 사회 운동의 한 방법이자 공공 참여 예술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양효주, '불만분자(不滿分子), 노래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2008.10.8; 포스코 사회공헌사업 참여 아동들, 재능 기부를 통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진행, 나눔뉴스, 2010.10.18).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미래'(이사장 송 자)가 포스코의 후원으로 진행한 ‘함께 그리는 세상’ 프로젝트
이 밖에도 예술가들이 일반 사회 운동가들의 방식이 아닌 예술적 언어와 방법으로 시민들과 함께하는 사회 참여 활동을 뜻하는 '지역 예술 운동', 즉 지역에 기반한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를 참여예술로 보는 경우도 있다. 잰 코언 크루즈는 미국 흑인들의 준벅 프로덕션, 애팔래치아의 로드사이드 극단, 푸에르토리코인들의 프레고네스 극단 등 아홉 가지 사례 연구를 통해,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가 시작된 배경에서부터 미국 정치의 격동기였던 1960년대에 번성기를 거쳐 현대 대중문화 사회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기까지 발전 과정을 소개한다(잰 코언 크루즈 저/권영진 역, 『미국의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 지역 예술 운동』, 미메시스, 2008).
그러한 참여예술의 스팩트럼을 생각한다면 군종화가나 군종작가에 의해 전장에서 이뤄지는 군종예술이나 군종문학도 그렇거니와, 평상시 병영생활 중 미술병이나 마술병 등에 의해 이뤄지는 진중예술, 그리고 테니스병 등의 예체능 활동이 모두 참여예술의 한 분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참여예술이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면 과연 무슨 근거로 순수예술의 대립적 개념이라 할 것이며, 어떤 기준으로 순수예술과 참여예술을 구분할 것이며, 왜 구분해야 하는가? 이러한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해 문화예술의 가치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은 고유가치, 인본가치, 이미지가치, 그리고 소통가치를 갖는다. 문화예술의 고유가치는 실존적 가치와 학습적 계승, 창조적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문화예술 창조와 관련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창조형태와 정책대응의 변화이다.
문화예술에 있어 창조형태 변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이른바 '고급예술'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변화를 반영하는 대응이 해설 있는 오페라 등 '학습형 감상활동'이다. 이는 곧바로 참여형 예술창조와 체험활동으로 이어진다. 참여함으로써 창조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적 체험을 공유하는 마당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여형 학습을 통해 나타나는 참여형 예술'이라는 참여예술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는 개념을 만나게 되는데 그 특징을 보면 첫째 참여형 학습은 탈권위적인 쌍방향 소통 방식으로 이뤄짐으로써 창조의 활성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자극할 수 있고, 둘째 비일상적 문화예술 활동이 일상적 활동으로 바뀐다는 점, 예를 들면 예술가와 학교 선생이 협력하여 새로운 형태의 워크숍 방식의 수업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며, 셋째 문화정책도 시설 중심에서 향유자 중심으로 바뀐다는 점이다(이흥재, 『문화예술정책론』, 박영사, 2005, pp.31~37).
예술가의 세계관과 활동의 시대성은 시대적 요청을 활동목표로 갖게 되며, 이러한 활동들은 대중들이 지지함으로써 지속적인 공공성을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는 참여형 예술은 대중예술인 셈이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대중예술조차도 참여(형)예술과 마찬가지로 중의적으로 쓰일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논의를 단순히 하기 위해 더 이상 대중예술에 대한 개념 논의는 다음 기회로 돌린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참여형 예술을 포함하는 다양한 스팩트럼을 갖는 참여예술의 가치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앞서 문화예술의 가치를 설명한 바 있는데, 그 중에서 인본가치에 입각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양한 스팩트럼 속에서 찾아낸 어떤 유형의 참여예술이 과연 인본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느냐 하는 관점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문화예술로서의 가치를 갖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화활동이 인본주의적인가, 즉 인간화를 실현시키는 방법인가 여부를 판단하여 참여형 예술과 참여예술의 경계로 삼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이른바 문화민주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문화예술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정리해보면 자율성, 독창성, 다양성, 공동성 등이다. 인본주의의 충족여부에 판단 척도는 소비자관점에서 즐기는 수단인가 여부와 창조자 관점에서 창조적 충동을 느끼는 수단인가 여부의 두 가지 관점이 될 것이며, 창조자가 이를 무시하고 굳이 인본주의적 효과를 개념화하려는 시도는 유치하고 독단적인 도그마가 될 뿐이다(이흥재, 『문화예술정책론』, 박영사, 2005, pp.40~41).
참여예술이 순수예술과 다른 점은 첫째, 목적지향성이 지나치게 커서 소비자의 일반적 문화예술 수요와 거리감이 생기게 만들고, 소수집단의 도구예술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둘째, 다양성과 예외성의 관점으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오히려 문화획일화에 따른 정체성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사회적 공유를 통한 파트너십이라고 볼 때 참여예술은 소수자 사회의 파트너십만 공유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넷째, 사회갈등 해소를 통해 열린사회로 안내하여 공존․공생․공진하도록 하는 문화예술의 순기능보다는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닫힌 사회로 만드는 역기능이 크다는 점이다.
예술과 인간,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크게 순수예술론과 사회참여예술론으로 나눌 수 있다. 순수예술론은 가장 창조적 인간 활동의 하나로서, 즉 예술가가 지닌 예술적 영감과 자질을 통해 예술작품을 창조해낸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이에 대해 참여 예술론은 사회와 무관한 순수한 예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예술 또한 사회 상황의 산물이라는 견해로, 예술가도 한 명의 사회인이며 예술 활동 역시 하나의 사회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와 무관한 순수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예술의식의 부재를 변명하는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술은 주어진 사회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순수예술이건 참여예술이건 어느 하나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묘사해야 한다는 순수 문학의 주장은 모순된 현실에 대한 도피를 정당화시켜 주는 수단이 될 수 있고, 참여예술론이 극단화되면 '정치적 선전도구로서의 예술'이 나타나 예술을 질적으로 저하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참여예술의 가치와 필요성을 옹호하는 주장 또한 만만찮은데, 앙리 미테랑의 머리말이 돋보이는 <파렴치한 사회>(Camille Pissaro, Turpitudes sociales, Paris, 2010)의 출간은 참여예술에 대한 편견을 일부나마 시정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참여예술에 대한 편견을 주장하는 친참여예술파들은 인상파를 비정치적 운동으로 못 박고, 당대에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예술가를 사회적 현실에서 유리된 존재로 간주하는 식의 자만심 어린 시각을 이 책이 바로잡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들은 '이러한 시각이 은연중에 예술가를 자신의 영역 속에서만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보며, 영원한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해 순수한 미학적 관점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고, 순수예술과 참여예술의 거리감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각이 있음을 경계한다(글•Evelyne Pieiller/번역•정기헌, '빛의 화가 피사로의 잊혀진 참여예술', "Les de Pissarro", 17호, 2010.2.4.).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1830~1903)를 정치참여 작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최근 새로 편집된 그의 작품집 「파렴치한 사회」에서 그는 섬세한 예술로 이해하기엔 너무 투박한 민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1889년 에펠탑이 높이 솟은 파리에서 모더니즘의 승리를 목도한 피사로는 예순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른 장의 펜화를 그리고 엮어 책으로 만들었다. 각각 제목과 설명을 단 후 일정한 순서로 종이에 붙여 무정부적 세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로 시작해 곧 진압당하게 될 ‘봉기’에 대한 묘사로 끝을 맺은 이 책이 바로 <파렴치한 사회>였다. 그림들을 책으로 묶는 일은 역시 화가였던 피사로의 아들 뤼시앵이 맡았으며, 피사로는 이 책을 그림에 대한 코멘트가 적힌 편지와 함께 런던에 살고 있던 조카에게 보냈다.
매혹적 빛으로 가득한 평소 그의 그림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작품이었다. 긁힌 상처처럼 거친 선들, 수정선, 펜 끝으로 묘사한 음영을 통해, 피사로는 ‘불쌍한 사람들’(les miserables)을 묘사한다. 이 작품들 속에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투쟁, 죽음에 대한 삶의 투쟁’이 최대한 감정이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돼 있다. 피사로가 <파렴치한 사회>를 그리던 당시는 파리코뮌에 가해진 탄압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던 시대였다. 나중에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에 영감을 주게 되는 1880년 앙쟁시 사건이나 광부들에게 책임자가 살해된 후 군대가 주둔하게 된 드카즈빌시 사건 이후, 곳곳에서 벌어지는 파업은 여론을 불편하게 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쥘 게드나 루이즈 미셸 같은 이들이 중심에 선 광부 지지 시위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었다(글•Evelyne Pieiller/번역•정기헌, '빛의 화가 피사로의 잊혀진 참여예술', "Les de Pissarro", 17호, 2010.2.4.).
하지만 오랜 논쟁을 거치면서 예술인도 현실로부터 괴리될 수 없다는 참여예술의 논리보다는 순수예술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주장이 우위에 서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정치적 선전물로서의 예술을 부정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다. 이 말은 프랑스의 문예학자 쿠쟁이 주장한 것으로 예술에는 미의 실현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이 예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수다쟁이 홉스에게 말걸기』, 신원문화사, 2001, p.35).
예술활동도 인간의 사회적 활동의 한 분야라는 점에서 예술작품의 궁극적인 추구인 미적 가치 외에도 사회적 가치나 도덕적 교훈, 그리고 영감을 줄 수도 있어야 하며, 예술도 사회적 모순에 대해 작품을 통해 발언함으로써 사회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지만, 자칫 이와 같은 참여예술관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다. 예술작품의 창작은 예술의 자율성에 근거한 것으로, 예술이 예술로서의 순수함을 잃고 정치도구가 된다면 예술이 아니라 선전물이 될 뿐이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수다쟁이 홉스에게 말걸기』, 신원문화사, 2001, p.35).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시대를 거쳐 남북분단, 오랜 민주화 투쟁기를 거치면서 참여예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그 어떤 나라보다 크게 각인돼 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예술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순수예술파와 참여예술파로 나누어졌고, 참여예술 중에는 친일, 또는 정반대로 독립운동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고 분단의 역사 속에서 이데올르기의 부산물이 되기도 했는데(윤문원,『영화속 논술2』 , 세종서적, 2007, p.213),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참여예술은 대중예술이라는 이름의 운동권 전위예술로 전락했다. 참여문학 역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예술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위예술이라는 오명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시도를 여전히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참여예술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순수예술을 기초예술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변주함으로써 참여예술과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물타기 시도까지 등장하고 있다. 기초예술연대라는 특별한 모임에 속한 오세곤은 기초예술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초예술은 단순히 응용예술, 실용예술, 상업예술 등의 대립개념이 아니며, 기초학문과 기초산업, 기초사회가 그렇듯이 한 국가의 존립기반이자 사회공동체가 유지되는 문화적 토대이다. 사회구성원들의 일상적 삶의 질을 지정하는 것, 즉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삶을 사는지의 기준이 바로 기초예술인 것이다. 사실 기초예술은 신조어로서 기존의 표현인 순수예술과 내용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기초예술이라는 새 단어를 내세우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상업 예술은 그 표현부터 명백히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순수예술은 이윤 창출이 아닌 예술적 가치 실현, 즉 예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성취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윤창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발생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순수예술 대신 기초예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순수(純粹)라는 것을 현실과 거리가 먼 사치품 정도로 여기는 경향에 의해 기초예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게 되었다.
이렇듯 기초예술은 순수예술과는 달리 그 표현 자체에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선언을 담고 있다. 예술은 순수해야 하므로 돈을 벌 필요가 없다거나 배가 고파야 우수한 작품이 나온다는 식의 해괴한 논리를 거부하고, 예술이 사회적 내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내포하는 표현인 것이다(오세곤, 「기초예술의 개념」,『기초예술 살리기 정책』(기초예술연대 2차 포럼 3발제), 2004).
한편, 이처럼 참여예술계 스스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예술계의 주변이라는 현실을 타개하려는 시도를 하는 와중에서 나온 또 다른 물타기 시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주의 예술가들도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는 변종 극우파의 해괴한 논리였다. '자유주의자들의 예술적 사회참여'를 주장하고 나선 복거일의 논리가 그랬다.
예술 작품은 우리의 감성에 호소하므로, 예술 작품 속에 담긴 사상이나 이념은 사람들 마음속으로 쉽게 그리고 깊이 스며들 수 있다고 전제한 그는 전체주의자들은 이 점에 일찍 착안했고 예술을 자신들의 목적에 성공적으로 이용했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과 같은 이론적 바탕을 만들고 예술을 선동선전의 수단으로 한껏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서 우리 사회에서도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예술가들은 작품들을 통해서 대한민국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늘리는 데 큰 몫을 한 반면에, 자유주의 예술가들의 예술적 사회참여는 거의 없었다면서 자유주의 예술가들은 모처럼 이런 움직임이 운동량을 그대로 지니도록 애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행히,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올해에는 북한 정권이 일으킨 그 재앙을 제대로 살피려는 예술 작품들이 여럿 나왔는데, 영화 <포화 속으로>, 연극 <6·25 전쟁과 이승만>, 그리고 뮤지컬 <생명의 배>는 두드러진 작품들이라고 극찬했다(복거일, '자유주의자들의 예술적 사회참여', 일요신문, 956호, 2010.9.6)
복거일의 이러한 주장은 참여예술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참여예술의 필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특히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러서는 참여연대 등과 같은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사실상 정치참여에 가까운) '사회참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참여예술이나 참여문학과 같은 말들도 거부감이 없는 단어처럼 사용되게 된 면이 없지 않다.
복거일이 자유주의 예술가들도 사회참여를 해야 된다고 주장한 논리는 이런 점을 부러워 한 나머지, 우파 정권이 된 이 마당에 왜 참여정부에서와 같은 대대적인 지원이 '우파 운동권 예술가'에 대해서는 안 되고 있느냐는 볼멘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복거일의 변종 우파적 주장은 참여예술에 대해 오랫동안 씌워졌던 결계를 벗겨주는 면죄부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참여예술은 안 된다는 더 붉은 주홍글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선정성에 편중되는 등 예술이 비즈니스에 치우치는 환경에서는 훌륭한 예술가를 육성할 수 없다는 문제점은(박정배․서정일, 『예술경영학개론』,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9, p.10) 대중예술에 대해 주로 가해지는 비판이겠지만(이 경우 대중예술은 앞서 참여형 예술과 비슷한 개념의 대중예술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의 대중예술임), '선정성'을 '선동성'으로 바꾸고 '비즈니스'를 '목적성'으로 바꾸면 참여예술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비즈니스는 그냥 둬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혁명도 사업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