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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9세기 종교개혁의 진전
종교개혁의 열등아 프랑스
종교개혁으로 치명상을 입었던 중세 카톨릭 교회가 제수잇(Jesuit)이 주도한 반(反)종교개혁으로 세계 각처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개혁 신앙이 거의 죽어 가던 18세기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결과로 1727년 세계 선교의 문을 연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청교도의 개혁 정신이 낡아져 버리고, 유니테리안(Unitarian)신조와 파멸적인 자연신론[理神論]마저 번져 형체만 남은 성공회는 물론 장로교와 침례교가 모두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졌던 18세기의 영국에서 101웨슬리 형제들이 일으킨 부흥 운동은 1740년 감리회를 탄생시켰으며, 같은 때 신대륙에서는 대 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이 일어나 개신교의 일대 확장과 부흥을 초래했다. 102
그러나 같은 18세기에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에 노출된 프랑스는 영적 부흥 대신 1789년 공포와 유혈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오히려 19세기를 휩쓴 무신론과 회의론의 요람이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 지방의 요람이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카톨릭 세력이 1545년 남 프랑스 지방의 왈덴스인들 4천여 명을 집단 학살하고103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밤, 화해를 모색한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Huguenots)들을 속임수로 모은 뒤 파리에서 2천명, 지방에서 2만 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실과204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혁명 직전까지 계속된 비인도적인 핍박으로 대부분의 위그노들은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개혁을 거부하고 신앙 양심을 짖밝은 행동의 열매를 거둔 것이 였다. 인간인 이성(理性)을 위주로 한 무신론적인 프랑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세(近世)의 시작인 19세기가 펼쳐지면서 1848년에는 칼맑스(Karl Marx)는 이념적 무신론인 공산주의 선언을 했고, 1859년에는 다윈 (charls Darwin)이 과학적 무신론인 진화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각각 1844년 태어난 벨하우센 (Julius Welhausen)은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신학적인 무신론인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내놓았으며, 니체(Friedrich Nietzzsche)는 철학적인 무신론인 초인 주의(超人主義)를 소개하였다. 모두 성서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조들이 였다.
게다가 1848년 3월 31일 뉴욕주 하이데스빌 (Hydesville)의 외딴 곳에 있는 감리교인 존 폭스(John Fox)의 집에서 그의 두 딸과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위장한 사단의 거짓 영과의 영계(靈交)가 시작되어. 사단의 태고의 속임수인 영혼 불멸 신앙을 진실인 것처럼 위장한 현대의 심령 과학, 즉 강신술(降神術 . Spiriualism)까지 문을 열었다.105 바야흐로 면면이 이어온 성서 신앙은 세상과 교회 안팎으로부터 근본을 위협하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방금 종교개혁의 정신을 등져 버린 현대 신학 사조가 밀물처럼 교회에 넘쳐 들러 온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자유주의 적인 현대 신학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은 신학교와 교회가 있는가 둘러보라.
무신론과 불신 사상에 대한 대응
이 비상(非常)한 시기인 19세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셨는가? “저희가 주의 법을 페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시119:126)
가 성경의 영감(靈感)과 역사성을 불신하는 파멸적인 현대 신학이 고등 비평에 맞서 이를 반증하는 성서 고고학의 열쇠인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1822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설형[쐐기]문자가 1847년에 각각 판독(判讀)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역사적 진실을 증거 하도록 “돌들이 소리지르게”(눅19:40)하셨다.
나. 1864년 세균의 아버지인 프랑스 학자인 파스테르(Lois Pasteur)는 실험을 통하여 기원전 4세기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이래 믿어 온 생명의 자연발생설이 거짓임을 입증하고, 생명은 생명에의해서만 발생된다는 창조 신앙을 뒷받침했다.
다. 1865년에는 진화론이 비과학적임을 드러내는 멘델의 법칙이 발표되어, 다윈이 무질서한 것으로 관찰한 종(種)의 변이(變異)가 결코 전혀 새로운 종(種)을 만들어 낼 수 없도록 법칙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라. 1804년에는 대영(大英)및 해외 성서공회가 발족되고 1816년에는 미국 성공회가 발족되어 세계 적인 성경 보급이 촉진됨으로써 개인적인 성경 연구, 특별히 예언에 관한 연구가 고조되었다.
1800년으로부터 1830년 사이에 다른 나라말로 번역된 성경의 수 (86개 말)는, 그 이전의 1800년 동안 번역된 수(71개 말)보다 더 많았다는 놀란 운 사실이다.106
마. 18세기 전 후반에 걸쳐 일어난 부흥과 대각 성은, 19세기에 이르러 세계 선교의 열정으로 이어져 온 세상에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 일을 위해 미국의 해외 선교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810년)잇달아 회중교 총회(1810년)침례교 선교 연합회(1814년)장로회(1837년)등도 세계 선교를 위한 조직을 갖추었다. 107
바, 이러한 분위기에서 19세기초 미국을 비롯한 유럽, 남미, 아시아 등 복음이 전도된 세계 각 곳에서는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니 재림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재림 운동(the Advent Movement)이 일제히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웨이(Lewis Way)와 드루먼드(Henry Deummond)등이 일어 낫고, 독일 태생 유대인 울프(Joseph Wolff)는 8개국 언어를 구사하며 근동 지방과 중앙 아시아, 인도에 이르러 재림 기별을 전했고 1837년에는 미국 상원에 초빙되어 기별을 전했다. 108 스코틀랜드의 어빙(Edward Urving)과 커닝햄(William Cuninghame), 스위스의 가우센(Francois gausen), 독일의 리히터 (Johann Richter). 호주의 플레이 포드(Thomas Playford),특히 저술을 통해 스페인 과 남미에 재림 기별을 전한 전직 예수회 신부 라쿤자(Manuel de Lacunza), 미국 전역에서 10만 이상 이참 여한 재림 운동을 주도한 침례교 신자[ 후에 목사 가됨]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등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 세상에 전한 기수들이 였다.109
이러한 재림은 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마지막 심판을 알리는 일곱째 나팔이 불기 적전에 (계11:15)있을 것으로 예언된 (계10장)숙명적인 운동(Movement of Destiny)이었다. 예언을 통하여 이들에게 주어진 다음의 기별은 근세를 시작한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발판을 굳힌 무신론 적인 합리주의 풍조가 넘쳐 온 세상과 교계에 얼마나 시의 적절한 하나님의 대응이었는가?
하나님의 대응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 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14:7)
예언에 나타난 개신교 국인 미국
18세기말 (1789-1799)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발판을 굳힌 파멸적인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즉각 적이고도 단호한 것이었다. 10년간이나 계속된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정치적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루이 16세 부처가 1793년 로마의 시스틴 성당에서 제위 2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던 중 프랑스 혁명 군사 정권에 의하여 체포되어 교황직은 박탈당하고 치욕적인 굴복을 당한 후, 그 이듬해 8월 29일 발렌스(Valence)감옥에서 옥사함으로써 중세 교황 권이 몰락함과 동시에 기나긴 중세기도 끝나고 근세사(近世史)로 접어든다.110
그것은 6세기(538년)교황 권의 확립으로부터 18세기(1798년)몰락까지 정확히 1798-538=1260년간의 기간으로써, 열 뿔 가진 짐승으로 상징된 로마제국(단 7:8, 23~25; 계12:2)을 이어서,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으로 상징된 하나님의 참 백성을 핍박한 중세 로마 교회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잇다.(단 7:25 ; 계12: 6, 13).
그 동안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으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를 공동으로 개혁하려 나섰던 개신교는, 내분과 함께 카톨릭의 반(反)종교개혁 공세와 영국 등의 국교(國敎)정책 에 부딪혀 고전을 계속하다가 때 마침 개방된 신대륙 미국에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받는 피난처를 찾았다. 이 사실에 관하여, 요한 계시록 12장은 중세 교회에 의한 1260년간의 핍박을 예언한 후에 (6, 14절),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16절)켰다는 정확한 예언을 구사하고 있다. 또 다시 계시록 13장은 여자를 도와 준 땅이 바로 “42개월”(계13:5)에 해당하는 중세기 1260년간 (42×30=1260일)활동하던 중세 교황 권의 몰락을 전후하여(계13:5-10), “땅에서 올라”온 “새끼 양같이 두뿐이 있”는 짐승으로 상징된 북미 합중국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예언이다.
역사상 최초의 개신교 국가인 미국이 이전의 다른 나라들처럼 (단7:2-7)맹수라 아닌 그리스도교 국인 “새끼 양”같은 나라로 상징된 것과, 기존 국가가 없는 신대륙인 “땅”에서 전쟁을 상징하는 “바람”도 없이 (단 7:2)올라올 것으로 묘사한 것과 함께,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이 실제로 교호작용(交互作用)을 했다는 사실은 이 예언의 역사적 성취를 뚜렷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예언에의하여 섭리된 나라 미국에서, 역시 계시록 10장에 예언된 재림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둘” (계12:17)이 출현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예언된 재림 운동
1800년대 초반에 신속히 보급된 성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신된 선교의 열정, 그리고 1800년에 1700만에 이르게 된 일대 변화는 111 미국 개신교 세력의 신속한 확장을 가져왔다. 1800년부터 1830년까지 30년동안 미국의 회중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는 110만의 신자가 증가하였고 특히 1826년부터 1830년동안 20만이 증가하였다. 112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경의 예언 연구에 몰두했던 미국 동부의 성실한 침례교 신자 윌리암 밀러(William Millier. 1782-1849)는 1816년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후, 113 더욱 깊은 성경 연구에 전념하였다, 1818년 그는 다니엘서 연구를 통하여, “2.300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8:14)는 말씀의 뜻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 기간이 기원전 457년에 시작되어 1843년경에 끝나게 되며 그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성경과 역사에서 예언 해석의 근거와 타당성을 거듭 확인한 후,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1831년부터 그는 결딜수 없는 사명감을 가지고 말과 글로 그의 깨달음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즉시로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1833년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격을 인정받아 침례교의 지방 목사로 인준을 받았으며, 1835년에는 초교파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로서의 심임 서를 받았다.114 조직적이고 빈틈없는 다니엘서의 예언들에 기초한 밀러의 가르침은 각 교회들로부터 대대적인 호응을 얻어, 이름이 확인된 숫자만도 174명이나 되는 목사들이 재림 운동의 지도자로 참가했는데 감리교와 침례교 개혁 교회 퀘이커교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115 밀러는 이들과 함께 13년간 (1831-1844)지칠 줄 모르고 재림의 임박함을 전파한 결과 최고 13만 5천명으로 추산되는 재림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16
그러나 그들이 거듭 확인했던 1844년 10월 22일에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지 않으셨으며 그 결과는 예언된 대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서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계10:10)는 쓰디쓴 대실 망이었다. [자세한 배경과 해석은 전장의 성소 제도와 구속의 계획, 6, 7참조] 그러나 그것은 쓰디쓴 실망으로 끝날 성질의 우발적인 운동이 아니 였고,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백성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계10:11)는 숙명적인 운동 이였기 때문에 역사는 다시 계속되었다.
재림 운동과 하늘 성소의 회복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 때문에 빚어진 십자가에 대한 오해는 예수 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다니엘서의 70주에 관한 예언에 포함되어 연대까지도 정확히 알려진 (단9:25-27)진리요 수천년 동안을 가다려온 구속의 약속이 영광스럽게 이루어진 극적인 순간에 기쁨과 희망 대신 쓰라린 실망을 경험하게 했음에도 전 장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같은 다니엘서에 숫자로 표현된 2300주야에 관한 예언이 성취되었을 때에도 꼭 같은 경험이 똑같은 이유로 1844년의 재림을 기다렸던 신자들에게 일어났음도 확인했다. 십자가 사건으로 낙망한 제자들을 깨우쳐 다시 예언하게 하시려고 뒷수습에 친히 나서신 예수께서, 1844년의 대 실망 후에도 같은 일을 행하셨다.
인간은 자신의 지적 한계를 초과하는 기대 이상의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언제나 충격과 시행착오를 통하여 진상을 깨닫고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의 중심 이였던 십자가 사건 때 그랬고, 천상 분사의 중심인 지성소 봉사가 시작될 때 또한 그랬다. 모두가 사건을 치른 후에야 그 진상을 깨닫게 된 것이다.
1844년의 대 실망으로 충격을 겪고 난 감리교 출신의 열렬한 재림 신자 에드슨(Hiram Edson)과 그의 친구 크로지어 (O. R. L. Crosier),의사였던 한(F. B. Hagn)등은 실망 직후부터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몇 달 동아의 성경 연구를 통하여 2300주야 끝인 1844년부터 하늘의 지성소에서 시작된 대속죄일 봉사의 진상을 깨닫게 되었다.117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세속적인 기대대로 지상으로 재림하신 것이 아니라, 재림 직적의 단계로서 나라와 백성을 받으시기 위해 지성소에 보좌를 차리신 (출 25:20-22)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신 것을 깨달았다.(단7:13, 14).
이제 그들은 십자가의 진상을 깨달은 예수 님의 제자들처럼, 실망한 이유를 찾게 되고 “다시 예언할”(계10:11)사연과 기별을 확신하게 되었다. 중세의 암흑에 가려졌던 하늘 성소에 관한 진리가 마침내 회복된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도하신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실망에서 벗어나 수치스럽게 여겼던 십자가를, 이제는 영광스러운 구속의 성취로 다시 가르친 제자들은 환영 대신 온갖 조소와 핍박을 겪어야 했다. 십자가의 영공과 승리를 “다시 예언해”던 스데반은 기성 종교인 유대교 지도자들에의해 즉시 이단으로 고소되었고 그들이 선동하여 던진 돌에 맞아 죽는 비극을 치렀다.(행7:54-60). 그들은 스데반 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행7:55)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의 장본인들이 된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깨닫고 바라보지 못하면 그 떼에 슬픈 역사를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중추인 성소 제도를 통하여 드러난 엄숙한 심판과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오해하고 아래와 간이 무분별한 비평의 돌을 던지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이며 비극인가?
비 평 박 영관
“안식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분명히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이제 제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118
비평 김 순명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였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재림 교파라고 한다. 예수 님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제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119
사실 이 무근(無根)한 이러한 비평들에 대해 변증하는 일조차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재림하였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재림 신자가 되었고, 또 다시 “제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 사람이, 성경을 알고 있는 재림 신자 중에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일러줄 뿐이다.
재림 운동과 안식일의 회복
하늘 성소에서 시작되는 대속죄일의 심판을 알리는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울리면서(계11:15)열려진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서, 요한 은 십계명의 두 돌 비가 보관된 언약 궤를 분명히 목도했다. (계11:19). 그리고 잇달아 12장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그 여자의 남은 자손”(17절)의 출현을 확인했다. 이러한 예언이 어떻게 재림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는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준수했고, 성경과 역사가 확인한 제칠일 안식일이 4세기이래 어떻게 유린되었고 종교개혁이래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를 이미 앞서의 III장에서 낱낱이 밝힌바 있다. 종교개혁의 진전에 따라 중세 교회에의하여 짓밟혔던 구원의 진리들은 잇달아 회복되었어도, 배도의 세력에의하여 단단한 전통의 굴레가 씌워진 네째 계명인 제칠일 안식일의 회복은 가장 힘겹게 이르러 왔다. 왈덴스인→위클립→허스→루터와 재세레파→개혁[장로]교→[청교도]→회중교→침례교→제칠일 침례교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의 정통적인 진로를 따라 힘겹게 회복된 제칠일 안식일이, 마침내 1800년대에 일어난 재림 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1844년의 실망이 있기 전인 1844년 3월 제칠일 안식일 침례 교인인 라헬 오우크스(Rachel Oakes)부인이 제칠일 안식일에 관한 진리를 재림 운동에 참가한 감리교 목사 휠러(Frederick Wheeler)에게 전함으로써 안식일 을 지키는 최초의 재림 교회가 뉴햄프셔 주에 출현했다.120 프레블 목사의 안식일 에 관한 기사를 읽은 재림 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 죠셉 베이츠(Joseph Bates)는 즉시로 확실한 전리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출판물을 통해 광범위하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기초한 확신으로 가득찬 그의 가르침으로 재림 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제임스 화잇(Jsmes White)내외와 하늘의 지성소 봉사를 가장 먼저 깨달은 에드슨(Hiram Edson)이 1846년에 안식일 진리를 받아들였다.122 이리하여 일곱째 나팔이 물 대에 하늘 성전의 지성소가 열리고 십계명이 보관된 언약 궤가 공개된 장면처럼(계11:17), 재림 운동을 통하여 밝혀진 하늘 성소의 진리와 회복된 안식일의 진리가 극적으로 합류하게 된다.
재림 운동과 예언의 은사의 회복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아침에 오히려 슬픔에 잠겨 무덤을 찾아왔던 젊은 여인, 보잘것은 업으나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막다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부활을 확증시키시고, 낙망한 제자들에게 보고들은 것은 전하라는 메신저(使者)의 직분을 주셨었다. 1844년 실망 직후 주님은 보잘것은 없었으나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고대했던 감리교 출신의 재림 신자로, 결혼 후에는 엘렌 화잇(Ellen G. White)으로 불린 엘렌 하몬(Ellen Hamon)양에게 꼭 같은 일을 하셨다.
전장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세우며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약속하신 성령의 은사 가운데 선지자와 예언의 은사였다. (고전14:1-5 ; 엡4:8-12). “모세와 선지자”(눅16:29-31), 곧“[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와 말씀”(사8:20)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께서는 (롬3:21), 마지막 대에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계12:17)를 통하여 남은 백성을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특별히 “예수의 증거는 대언[prophecy. 예언]의 영[the Spirit. 성령]이 라”(계19:11)는 천사의 확인을 통하여,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께로 부터 받은 기별을 백성에게 전달하는(계1:1)선지자의 직분(계22:9),곧 “예언의 은사”(the gift of prophecy)임을 재확인하게 된다.(고전12:10 ; 엡 4:11 ; 요15:26), 실제로 신약 시대의 교회에 선지자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여러 사람들이 일어나 필요한 때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쓴 사실은 이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행11:27, 13:1, 15:32., 21:10).
이리하여 구속의 역사를 매듭짓는 대속죄일의 봉사가 시작된 2300주야의 끝(단8:14)이 이른 1844년을 계기로, 중세기 이래 가려지고 짓밟혀 온 하늘의 성소가 회복되고(계13:5,6)중세 로마교회의 배도에 의하여 일요일로 대치되었던 안식일이 그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로 마침내 되돌아옴으로써(막2:28; 마12:8) 오랫동안 황폐되었던 진리의 터가 복구된 것이다(사56:1,2, 58:12-14). 그리고 사도 교회 시대이래 끊겨졌던 예언의 은사가 마지막 시대의 백성을 위하여 약속된 대로 (계12:17, 19:10)온전히 회복되어 이 무든 것이 한데 융합(融合)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예언의 성취인가? 이러한 융합이 가능하도록 개혁과 회복의 용광로가 된 것이 곧 재림운동 이었음이 역사에서 자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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