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젠가, 서울을 떠나 남도로 터를 옮긴지 몇해 되지 않았을 무렵, 부산의 뱃사람들이 '귀한 것'이라며 목포 뒷깨의 거친 장정들에게 호기롭게 내어보이던 고래의 투명한 살을 본 적이 있었다. 바다가 통째로 '물컹'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것마냥 시퍼렇던 '살'의 투명함과, 그 살을 향해 왁자하게 흥분하며 손아귀를 뻗치던 남정네들을 통해 투영되던 生의 집요함은, 그 날 이후 뇌리에 파편마냥 박혀버리고 말았다.
거추장스러운 겨울 외투를 훌렁 벗어던지는 상춘객처럼, '여자'라는 육신의 거죽을 시원스레 벗어던질수만 있다면, 하고 바랬던 나날들이었다. 여자의 몸은 왠일인지 몹시 무겁고, 때론 지루할만치 매끈하고, 시절을 따라 자주 변덕을 부리는 탓에, 나는 영영 '그것'과 친해질 수가 없었다. 아, '그것'. 여자, 아니, 여자라는 몸.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지만, 여자(라는 몸)만큼은 결코 즐길 수가 없지 싶었다. 그리고, 이 이물스러움과 매정히 결별하지도 못한채 꽤나 긴 시간을 보내고야 말았다.
Emile Chambon의 이 노오란 여인 덕에, 나는 '여자'라는 거죽 너머의 여자를 흘깃 바라본다. 저 노오란 스웨터 속에 있는 '살집' 역시 지나치게 투명하고, 어이없이 무겁고, 지루할만치 매끈하고, 고집스럽게 변덕스러울테고,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살'이 이 여인을 신비로이 어우르고 있는 비밀(없음)의 전부라는 사실을, 나는 참선하듯 진득히 그리고 무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가만히 매만져 본다.
'살'이 있기에 '살'아 있다고, 고해를 하듯 나지막히 말을 피어올린다. 이런다고 '살'과 화해 할 수 있을까? 아니, '살'은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언제나처럼 죄를 완결시키는 구조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고해 또한 무슨 소용일까? 여인을 바라보며 나는 벌써 의심이라는 大罪를 향해 찬찬히 녹아든다.
노오란 스웨터 속 보드런 살내음만이 보살의 미소마냥 하염없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