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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大王 挽詞 御製二首(세종대왕 만사 어제2수)
節制使 武節公 辛有定에 내린 挽詞
秉心淸匣躡台班(병심청갑섭태반) 마음이 맑고 곧아 정승반열 올랐으니
名節應垂竹帛間(명절응수죽백간) 명분과 절의가 마땅히 역사에 드리워졌다
握手談論會幾日(악수담론회기일) 손을 잡고 만나 논의 하던때가 며칠도 안 됐는데
忍聞哀挽向花山(인문애만향화산) 차마 어찌 만사를 써 화산으로 향하랴
年踰七耋位仍尊(년유칠질위잉존) 나이 칠십이 넘으며 벼슬도 거듭 높아
一世皆推積善門(일세개추적선문) 세상에서 모두 선을 쌓은 가문이라 했다
瀼匸家聲應更大(양혜가성응경대) 가문의 융성함이 다시 크게 번창할 것이니
旣生文子又文孫(기생문자우문손) 벌써 문장이 뛰어난 아들과 손자를 두었다
◇어만각 원본과 다르게 표기한 내용들
⦿본 내용은 현재 어만각 현판의 만사 원본 내용을 사진으로는 몇자를 정확히 판독이 안되어 비각에
새겨진 글씨를 원본으로 보았다
⦿적색 글자는 변계량의 문집(춘정집4권)에 수록된 글자 임
⦿녹색 글자는 년도별 무절공총회 회의록에 실린 글자 임
*만사의 글을 살펴보니 그동안 몇글자가 자꾸 바꾸어 표기해서 원본 글자가 무엇인지 많이 헷갈린다
( 直과 匣).(會와 曾)(.仍과 伋).(一과 日).(皆와 階).(瀼匸와 瀼瀼과 滾匸). (而+又와 更과 曼)등이
바꾸어가며 표기되어 있었다
⦿ 변계량의 문집(춘정집4권)에 만사가 실려있는데 아래의 8글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躡-踐) (節-姓) (談論會-笑談曾) (耋-秩) (瀼匸-袞袞)
秉心淸匣躡台班(병심청갑섭태반) 마음이 맑고 곧아 정승반열 올랐으니
踐(천):밟을천 실천천 두루천 이음천
匣갑(2018)(2019)(2020)(2022)(2023)(2024)
直직(2014.2015.2016.)
名節應垂竹帛間(명절응수죽백간)명분과 절의가 마땅히 역사에 드리워졌다
姓(성):성질성 본성성
握手談論會幾日(악수담론회기일)손을 잡고 만나 논의 하던때가 며칠도 안 됐는데
笑談(소담):우스운 이야기/ 曾증:거듭증 일찍증 곧증
忍聞哀挽向花山(인문애만향화산)차마 어찌 만사를 써 화산으로 향하랴
年踰七耋位仍尊(년유칠질위잉존)나이 칠십이 넘으며 벼슬도 거듭 높아
七秩(칠질):61세에서 70까지//七耋(칠질):70살을 이르는말
伋급(2014)(2015)(2016)
一世皆推積善門(일세개추적선문)세상에서 모두 선을 쌓은 가문이라 했다
日일(2018)(2019)(2020)(2022)(2023)
階계(2014)(2015)(2016)(2018)(2019)(2020)(2022)(2023)(2024)
瀼匸家聲應更大(양혜가성응경대) 가문의 융성함이 다시 크게 번창할 것이니
袞袞(곤곤):곤룡포
滾匸(곤혜)2014.2015.2016.
瀼瀼양양(2018)(2019)(2020)(2022)(2023)
曼만(2014)(2015)(2016) . 비석의 글자-而+又
旣生文子又文孫(기생문자우문손)벌써 문장이 뛰어난 아들과 손자를 두었다
◇아래 내용은 어만각의 만사 내용과 춘정집에 실린 만사내용이 몇글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서(8글자) 뜻을 찾아보며 비교해 보았다(어만각에 세워진 비각의 한자 내용)
한학에 대해 잘 알지를 못해 판단할수는 없지만 전체 맥락은 대동소이하고 어만각의
글이 더 정확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색 글자가 춘정집과 다른 글자들 이고
아랫줄에 춘정집 글자를 써놓고 비교해 보았다
世宗大王 挽詞 御製二首(세종대왕 만사 어제2수)
節制使 武節公 辛有定에 내린 挽詞(절제사 무절공 신유정에 내린 만사)
秉心淸匣躡台班(병심청갑섭태반)마음이 맑고 곧아 정승반열 올랐으니
踐//秉잡을병.心 마음심.淸 맑을청.直 곧을직.躡 오를섭.台 별태.班 나눌반//台班:三公의 반열을 뜻함
躡(섭)오를섭 이를섭 踐(천)밟을천 실천천 지위에오를천.躡과 踐을 다 쓸수 있을것 같음
名節應垂竹帛間(명절응수죽백간)그 명분과 절의 역사에 길이 남으리
姓//名節:명분과 절의.應응할응 마땅히응.垂드리울수.竹대나무죽.帛비단백.
竹帛:옛날에 종이가 안나왔을 때 대나무나 비단에 쓴글로 역사책을 의미함
名節(명절)명분과 절의 名姓(명성)이름하고 성씨를 말함인데 여기엔 名節(명절)이 맞는것 같음
握手談論會幾日(악수담론회기일)손 잡고 만나 논의한지 며칠도 안됐는데
笑談曾//握쥘악.手손수.談말씀담.論말할론.會모일회.幾거의기 낌새기 기미기.日해일
談論(담론)담화하고 논의함 笑談(소담)우스운 이야기 여기에는 談論이 맞는것 같음
會(회)모일회 모임회 曾(증)일찍증 곧증 거듭증 여기서는 담론하기위한 모임 會가 맞을것 같음
忍聞哀挽向花山(인문애만향화산)차마 어찌 만사를 써 화산으로 향하랴
忍참을인.聞서신보낼문.들을문.哀슬플애.挽당길만.向향할향.花山화산:무절공의 장지 현재도 화산임
年踰七耋位仍尊(년유칠질위잉존)나이 칠십이 넘어 벼슬도 거듭 높아
秩//年해년 踰넘을유.七일곱칠.耋늙은이질.位자리위.仍거듭잉.尊높을존
七耋(질)은 70세를 말하고 七秩(질)은 69세~70세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七耋이 맞는것 같음
一世皆推積善門(일세개추적선문)세상에서 모두 선을 쌓은 가문이라 했다
一한일.世대세.皆다개.推밀추 추천추.積쌓을적.善착할선.門집안문추
瀼匸家聲應更大(양혜가성응경대)가문의 융성함이 다시 크게 번창할 것이니
袞袞// 瀼 이슬많이내린양.물빛일렁일양.匸덮을혜.家집가.聲소리성.應응할응.현판 원본에 更(다시경)자인지 확인할수
없지만 비문에는 옥편에도 없는 而+又로 되어있음 .大큰대
瀼匸(양혜)는 융성함을 뜻하고 袞袞(곤곤)곤룡포곤자로 잘 쓰는자인지 의문이듬
旣生文子又文孫(기생문자우문손)벌써 문장이 뛰어난 아들과 손자를 두었다
旣벌써기 이미기.生태어날생.文글월문.子아들자.又또우 다시우.文글월문.孫손자손
⦿본 내용은 현재 어만각 현판의 만사 원본은 사진상 흐려서 잘 모르겠고 비각의 내용 임
⦿적색 글자는 춘정집의 틀린 글자와 비교한 것임
내용 요약(내가 보고 정리한 내용)
춘정집 초간 목판본
춘정집은 변계량의 문하인 승문원판사 정척(1390-1475)이 처음으로 변계량의 유고를 수집하여 편차한것을 변계량의 다른문인 권맹손(1390-1456)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자 이를 간행하고자 정서하여 세종에게 아뢰었다
세종은 변계량이 태종과 세종 양조에서 문형을 오래지낸 문신으로 한문이 해박하고그 글이 중국 조정에까지 회자된바 있었으므로 그 문집을 후학들의 모범 문한으로 삼기위해 즉시 집현전에 보내어 교정을 명하였다
그 일은 집현전 직제학 유의손과 저작랑 김서진이 맡아 보았다 그리고 이를 글씨 잘쓰는 사람으로 정서하여 밀양도호부에서 세종24년(1442) 11월에 개판한것이 바로 초간의 목판본이다. 그 초간의 경위는 춘정집 초간본에 붙인 권제와 안지의 봉교찬서 발문에 소상하게 실려있다 그 간역은 관찰사의 지휘아래 도사 권지가 돕고 밀양도호부사겸 권농병마단련부사 안질이 주관 하였다
춘정집 중간본
춘정집의 초간본이 임진왜란등을 겪으면서 흩어지고 없어져 전소가 되었는데 병암서원의 유생들이 흥해향교에서 훼손된 1질을 찾게되어 수정과 추가 작업을 거쳐 1825년(순조25)에 목판 간행을 발의하고 거창군 병산마을 병암서원에서 다시 간행 하였다
춘정집 중간본은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4권 사.시이고 5권 기.서.잡서.설 6-7권 봉사.상서.8권 대책.교서 9권 포전 10권 청사 11권 책문 제문 12권 비지 명발등이 실려있다
속집
1937년에는 변계량의 17세손 변두성(卞斗星)이 대구에서 4권 2책의 석인(石印)으로 속집(續集)을 간행하였다. 속집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중간본과 합편(合編) 된 것도 있다.
영인본
마지막 영인본은 한국고전번역원이 위에서 언급한 중간본 12권과 속집본 4권을 합치고 본문에 표점을 찍어서 축쇄 영인하여 1990년 한국문집총간 제8집에 수록 발행한 것이다 이 영인 판본에서는 초학자들의 문장해석과 이해를 돕기위해 표점을 찍은것이 특징이다
무절공 만사와 춘정집4권
춘정집은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변계량의 문집이다
춘정집은 변계량의 문하인 승문원판사 정척(1390-1475)이 처음으로 변계량의 유고를 수집하여 편차한것을 변계량의 다른문인 권맹손(1390-1456)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자 이를 간행하고자 정서하여 세종에게 아뢰었다
세종은 변계량이 태종과 세종 양조에서 문형을 오래지낸 문신으로 한문이 해박하고그 글이 중국 조정에까지 회자된바 있었으므로 그 문집을 후학들의 모범 문한으로 삼기위해 즉시 집현전에 보내어 교정을 명하였다
그 일은 집현전 직제학 유의손과 저작랑 김서진이 맡아 보았다 그리고 이를 글씨 잘쓰는 사람으로 정서하여 밀양도호부에서 세종24년(1442) 11월에 개판한것이 바로 초간의 목판본이다. 그 초간의 경위는 춘정집 초간본에 붙인 권제와 안지의 봉교찬서 발문에 소상하게 실려있다 그 간역은 관찰사의 지휘아래 도사 권지가 돕고 밀양도호부사겸 권농병마단련부사 안질이 주관 하였다
이것이 초간본 이다
애석하게 임진란때 소장 서적들이 전소되었는데 흥해향교에서 훼손된 한질을 찾게되어 교정하고 증보하여
1825년에 중간본으로 간행 되었다.
구성과 내용
원집 12권 5책, 속집(續集)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원집 권 12와 속집 권 1은 저자(著者)인 변계량의 시문(詩文)이고, 속집 권 4는 부록(附錄)이다.
원집 권 1~4는 여러 형식의 시(詩)가 섞여서 편차(編次)되어 있다. 권 1에는 사(辭) 2편과 시 118제, 권 2에는 시 127제, 권3에는 시 81제, 권 4에는 시 84제가 각각 실려 있다.
속집 권 1은 저자의 시문이다. 권 2~4는 부록으로서, 권 2에는 연보(年譜)와 「사제문(賜祭文)」 · 「병암서원봉안문(屛巖書院奉安文)」 · 「부곡제단상향문(釜谷祭壇常享文)」 등이 실려 있고 연보는 국조실록(國朝實錄)에 따라 작성한 것이다.
『춘정집』의 특징은 다른 문집(文集)과 달리 불교와 도교와 관련한 글이 다양하게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춘정집』에는 왕명(王命)으로 제찬(制撰)한 비탑명(碑塔銘)과 사사로이 작성한 제문(祭文) 등의 전기 자료도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춘정집』 권 4에 실린 악장(樂章)과 권 6 · 7에 실린 봉사(封事)가 주목된다. 악장의 하나는 「자전곡(紫殿曲)」이다. 여기서는 임금을 향한 헌수(獻壽) · 경계(鏡戒), 군신(君臣)의 의리(義理)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춘정집』에 실린 봉사의 글은 시정(時政)에 대한 변계량 자신의 견해를 여러 차례에 걸쳐 임금에게 올린 것이다. 이를 통하여 조선 초기의 다난(多難)하였던 여러 정치적 사정과 사대부(士大夫)들의 정치의식을 알 수 있다.
춘정집 서발(序跋) 임오년(1822년 순조22) 김시찬(金是瓚)
춘정선생문집 중간지(春亭先生文集 重刊識)
《춘정집》은 건국 초기 태학사(太學士) 변 선생(卞先生)의 저서인데 우리 세종 대왕께서 집현전의 신하들에게 교감(校勘)하도록 명하여 영남의 감영(監營)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관청이나 개인이 소장한 서적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소실되는 바람에 《춘정집》도 전해지지 않은 지 2백여 년이 되었다. 세상에 남아 있는 선생의 글은 《동문선(東文選)》과 《청구풍아(靑邱風雅)》에만 뒤섞여 나오는 몇 편에 불과할 뿐이므로 영남의 선비들이 전집(全集)을 보지 못하여 한스러워하였다. 이에 거창(居昌)의 유림들이 이를 개탄하여 국내를 두루 찾아본 끝에 곡강(曲江 흥해(興海)의 옛이름)의 향교에서 찾아냈는데 그것도 대부분 먼지가 끼고 좀먹었다. 이에 한 벌을 베껴 중간하여 널리 전파하려고 시찬(是瓚)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그에 관한 일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자신을 돌아볼 때 지식이 얕아 감히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멀리서 찾아와 부탁하는 것을 사양하기 어려웠으므로 삼가 받아서 보고 교감을 끝마치었다.
대체로 선생은 하늘에서 타고난 바가 범인과 다른데다가 문장도 일찍 성취되어 약관 이전에 마치 입가의 수염을 뽑듯이 쉽게 과거에 급제하였다. 또 포은(圃隱), 도은(陶隱) 및 양촌(陽村) 등 여러 선배들에게 수업하여 은미하고 심오한 성리설(性理說)을 전수받았는데 가슴에 쌓인 것이 발로되어 시행될 때 모두 시의(時宜)에 적중하였다. 변방에 경보(警報)가 있을 경우에는 배 진공(裴晉公)의 역할을 하였고, 해마다 바치는 조공을 잇대기 어려울 경우에는 정 문충(鄭文忠)의 역할을 하였으며, 9월 이후에 죄수의 논고(論考)를 올릴 적에는 가엾이 여기고 신중히 하여 공평하게 하였고, 집현전을 설치할 것을 요청한 것은 인재를 양성하여 임금의 학문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조상을 받들 적에는 사당(祠堂)을 세워서 하남(河南)의 가르침을 따랐고, 과거를 관장할 적에는 법을 엄중하게 제정하여 고려의 비루한 관습을 깨끗이 척결하였으니, 새로 세운 나라에 기여한 공로가 위대하였다.
그러하기 때문에 헌릉(獻陵)과 영릉(英陵)에게 크게 쓰이어 수십 년 동안 문예를 관장하였는데 고귀한 교서(敎書), 위대한 책문(冊文), 악장(樂章), 청사(靑詞)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가 하면 대국(大國)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에 있어서도 명 나라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으니, 한 이부(韓吏部)가 이른바 “하늘이 그 사람의 소리를 화평하게 하여 국가의 융성을 찬미하게 하였다.”는 말은 선생을 두고 한 말인가 싶다. 아, 주정(周鼎)이 분수(汾水)에서 나타났고풍검(豐劍)의 빛이 두우(斗牛)를 찔렀으니, 매우 귀중한 보물은 끝내 인멸될 리가 없는 것이다. 동해안의 외딴 일개 고을에서 선생의 전집을 얻었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명원(明院)의 유림들이 선생의 문집을 중간한 것은 어찌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그 독실한 마음만 가상할 뿐이겠는가. 선왕(先王)께서 간행하라는 하교를 소급해 따라 선왕의 뜻을 선양(宣揚)하였으니, 이것은 기록할 만한 일이다.
성상(聖上) 22년 임오년(1822, 순조22) 남문견초길(南門見初吉) 아침에 광산(光山) 김시찬(金是瓚)은 삼가 쓴다.
춘정집 제4권 / 무절공에 대한 시(詩)가 2편이 실려있다
무절공께서 경원병마사로 떠날때는 태종7년 12월 이다 그래서 이 시는 태종때의 전별시인데 내용중에
(성주께서 합당한 인물을 찾으시니
신공의 그 충의 견줄이 없었다네)라는 문장으로 보아 변개량 개인의 송별시로 보인다
무절공께서 졸 하셨을때 만사2수가 수록되어 있다
만사는 변계량이 짓고 세종대왕이 직접 쓰셔서 내렸는지는 원본이 없으니 알수가 없다
현재 상주의 어만각의 만사와 춘정집의 만사는 칠언절구인데 8행중 5행의 8글자가 다르게 되어있다
상주 어만각이 소실되기전 문중에서 필사를 해놓은 글이라면 현재 어만각 글이 정확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 썼다면 춘정집 글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춘정집도 많이 훼손된 원본 한질을 찾아 교정 증보했다 하니 훼손된 부분을 짜깁기 식으로 했을 가능성도 많고
또 초간본 발간도 오랜기간 몇번의 필사와 정서가 이루어 진다.이 과정에서 몇자씩 바뀔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무절공의 벼슬에 형조 예조 공조 전서를 지내셨는데 판서로 표기가 되어서 돌고있고 공숙공의 벼슬은 형조판서 병조참판등 인데 병조판서로 되어서 돌고있고 문희공의 벼슬은 집현전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개성유수이다.그런데 신도비에는 집현전 대제학으로 되어있어 나는 지금도 의아하다 사실이 아닌 내용이 실리면 그 신빙성이 확 떨어지기 때문에 기록의 정확성은 매우 중요하다.문희공께서는 장원급제 최초 사가독서 삼공서대등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고 모두가 정승감으로 미리 점쳐두었던 그런 분이신데 계유정난의 격변기와 안타깝게 수53세로 일찍 졸 하셔서 1품까지 오르지 못하고 2품에 그쳐
하연에게서 받은 서대(1품관복의 허리에차는 혁대)를 후대에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큰 분이시다.(--국초(國初)부터 삼공(三公)이 서로 전하는 서대(犀帶)가 하나 있었는데, 반드시 문생(門生)에게 전하되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전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연(河演)은 이 서대를 신석조에게 전했는데, 신석조는 벼슬이 정2품에 그친 탓에 서대를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사가독서제를 변계량이 세종께 건의하여 시행하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 뽑힌사람이 신석견(신석조의 초명) 남수문 권채 였다 그만큼 변계량도 신석조를 높게 평가한것 같다 그래서 우리 신씨가와 잘 아는 변계량은 만시의 끝절에 아들 신인손과 손자 신석견(신석조의 초명)이 이미 뛰어난 학자로 태어났다며 끝을 맺는다 하여튼 현재도 이렇게 사실이 아닌 정보가 필사를 거치면서 또는 오류로 다르게 표현 되는데 춘정집은 580년전 자료로 없어지고 다시 편집하고 했던 과정을 참고하면 현재의 춘정집 내용보다는 어만각 글이 훨씬더 원본이라 생각된다
흥해향교의 원본을 본다해도 그 출판까지 몇번의 필사로 몇글자 틀릴가는성도 충분히 있기때문에 원본이라 할수는 없다
하여튼 8자가 틀리지만 두글이 뜻은 대동소이 한것같고 원본이 없으니 누구도 장담할수 있는 상황은 아닌것 같다
내가 한자를 찾으며 비교해 봤을때 어만각 글이 더 매끄럽고 정확해 보이는데 한문 지식이 짧은 내가 판단할수는 없다
어느날 이렇게 훌륭하신 선조가 계셔서 이런 자료를 다시 접할수 있다는 것이 또한 즐거움이다
아래는 춘정집 4권에 수록된 시 2편 이다
신 무절공(辛武節公) 유정(有定) 에 대한 만사 2수
마음이 맑고 곧아 정승 반열 올랐으니 / 秉心淸直踐台班
그 명성 청사에 영원히 남으리 / 名姓應垂竹帛間
손 잡고 담소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 握手笑談曾幾日
화산으로 향하는 상엿소리 듣는구나 / 忍聞哀挽向花山
칠순이 넘도록 높은 지위 유지하니 / 年踰七秩位仍尊
온 세상이 적선의 가문으로 추앙했지 / 一世皆推積善門
도도한 가문 명성 더욱더 커지겠네 / 袞袞家聲應更大
훌륭한 아들과 손자를 두셨으니 / 旣生文子又文孫
辛武節公 有定 挽章 二首
秉心淸直踐台班。名姓應垂竹帛間。握手笑談曾幾日。忍聞哀挽向花山。
年踰七秩位仍尊。一世皆推積善門。衮衮家聲應更大。旣生文子又文孫。
경원 병마사(慶源兵馬使)로 나가는 신 총제(辛摠制) 유정(有定) 의 시권에 쓰다.
경원 풍속 거칠어 순화하기 어려우니 / 慶源之俗梗難馴
중신을 간택해서 다스려야 된다네 / 控理應須擇重臣
성주께서 합당한 인물을 찾으시니 / 聖主諮諏能稱職
신공(辛公)의 그 충의 견줄 이 없었다네 / 明公忠義更無倫
세류처럼 추상 같아 큰 위엄을 떨칠 거고 / 霜催細柳威聲大
감당처럼 춘색 짙어 교화가 새롭겠지 / 春滿甘棠惠化新
틀림없이 야인들이 감복하고 말 것이니 / 定使野人皆悅服
소부를 노래하며 개선을 맞이하리 / 擬歌疏附迓回輪
題辛摠制 有定 兵馬使于慶源詩卷
慶源之俗梗難馴。控理應須擇重臣。聖主諮諏能稱職。明公忠義更無倫。霜催細柳威聲大。春滿甘棠惠化新。定使野人皆悅服。擬歌踈附迓回輪。
상주 어만각의 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