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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91. [역경의 열매] 윤경숙 <1-10> “하나님 사랑을 재료로 ‘인생의 맛’을 요리”
신앙과 말씀으로 무장된 학생들… 조리 기술보다 사랑을 먼저 배워
윤경숙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 이사장이 서울 영등포구 본교 이사장실에서 밝게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사랑합니다.”
우리 한국조리사관학교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또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안녕하세요” 대신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한다. 그것도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으고 소위 ‘배꼽인사’를 하며 말한다. 학교를 방문하는 이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한다. 나중에는 환한 미소로 답한다.
‘사랑합니다’라는 인사가 우리 학교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학교의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우리 교육의 핵심이요,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에게 조리 기술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통해 삶을 변화시킨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 학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조리 기술인들을 양성하는 학교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학교 이름도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에서 따왔다.
1999년에 설립된 학교는 조리, 제과제빵, 식음료·관광 전문가 및 식공간 연출가를 양성하는 직업전문학교다. 국가평생교육원 학점은행제 운영기관으로 2년제 전문학사와 4년제 학사과정을 진행한다. 호텔조리, 호텔제과제빵, 관광식음료, 관광경영 전공 등 4개 전공의 전문학사 과정과 식품조리학, 외식경영학의 2개 학사과정이 있다.
지난해부터는 일반고 3학년 고교위탁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유명 호텔 총주방장·지배인, 조리명인과 제과기능장 등 각 분야 전문가가 1000여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학교에선 다양한 예배를 드린다. 건물 10층에서 매일 전공별로 채플이 진행된다. 매주 화요일 6시30분에는 찬양 집회가 열린다. 이 집회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 건물 11층에는 24시간 기도의 집이 있다. 교직원, 학생은 물론 인근 주민에게도 오픈하고 있다.
하지만 난 불교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아버지는 절을 세우셨고, 어머니는 아침마다 불공을 드렸다. 그 탓에 나는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채플 참석을 강요하지 말라”고 따졌다. 미션스쿨에 다녔던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교목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성경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교양 도서니까, 한 번 공부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신앙차원이 아니라 공부차원에서 성경을 접하게 됐다. 그보다 어릴 적 기억은 별로 없다. 오죽했으면 엄마에게 전화해 어릴 때 나는 어땠는지 물어봤을 정도다. 신생아 때는 무척 약했다고 했다. 자주 아팠다. 그래서 1961년에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는 62년에 했다. 의료기술이 없어 1년을 못 버티고 죽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엔 출생신고를 늦게 하곤 했다. 1남 3녀 중 세 번째다.
아버지는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다. 야전생활을 많이 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연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번병, 운전병 등 군인 아저씨들과 주로 놀았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 [역경의 열매] 윤경숙 <1> “하나님 사랑을 재료로 ‘인생의 맛’을 요리”
* [역경의 열매] 윤경숙 <2> 연애시절 남편을 교회 못 가게 막았던 불신자
* [역경의 열매] 윤경숙 <3> 예수님을 더 알고 싶던 때 신앙의 멘토 만나
* [역경의 열매] 윤경숙 <4> "아이가 달라졌어요" 교사·부모가 문제아들 맡겨
* [역경의 열매] 윤경숙 <5> 학점은행제 운영기관 인정 받고 서울로 옮겨
* [역경의 열매] 윤경숙 <6> '아프리카에 요리기술·복음 전하자' 비전 세워
* [역경의 열매] 윤경숙 <7> 하나님 '인도' 따라 현재의 학교 건물 마련
* [역경의 열매] 윤경숙 <8> 꿈을 잃었던 아이들, 모두 주님의 아픈 손가락
* [역경의 열매] 윤경숙 <9> 케냐 마사이족 청년 초청해 제과제빵 기술 전수
* [역경의 열매] 윤경숙 <10·끝> 조리기술로 복음 전하는 전사 키운다
약력=△2004 경기대 대학원 외식산업경영학 석사 △2004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장 △2014년 경기대 대학원 관광학 박사 △2015 교육부장관 표창장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 이사장, ㈔한국외식산업진흥원 이사장
***[역경의 열매] 윤경숙 <2> 연애시절 남편을 교회 못 가게 막았던 불신자
결혼 뒤 얼떨결에 교회 나가기 시작, 아픈 딸 위한 철야예배에서 환한 빛
동생이 미술대회에 나갔을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모습. 당시 윤경숙 이사장(앞줄 왼쪽)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나는 미션스쿨이었던 고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께 “채플에 참석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따진 것 외에는 그냥 평범하게 고교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대학에 가자마자 연애를 시작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는 80학번으로 영남대 축산학과를 다녔다. 과에서 홍일점이었다. 축산학과를 통틀어 여성이 2명뿐이었다. 내가 축산학과를 택한 것은 평범하지 않은 대학생활을 원했기 때문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도 나에게 농대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여성이 드믄 분야에서는 조금만 잘해도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고 하셨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과 동기인 남편은 5대째 신앙을 가진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월남한 시할아버지는 신의주에 교회를 세우신 분이셨다. 반면 우리 집은 불교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절을 세웠다. 그렇다고 내가 독실한 불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을 교회에 못 가게 막았다. 연애를 하면서 남편에게 “교회 갈래, 나랑 놀래”라고 묻곤 했는데 남편은 늘 나랑 놀겠다고 답했다. 꼭 못 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의도적이었다. 남편은 내가 바빠 혼자일 때만 교회에 나갔다. 나중에는 내 스케줄과 상관없이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남편이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한동안 시어머니의 기도제목이기도 했다.
그러다 결혼 후 얼떨결에 교회에 다니게 됐다. 1987년 서울 목동으로 이사했을 때 옆 집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 나보다 몇 살 위인 옆 집 사람은 김치도 담가주고 커피도 주고, 언니도 그런 언니가 없었다. 속으로 ‘교회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8개월쯤 지났을 때 교회에 가자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을 데리고 교회에 출석했다. 남편도 그동안 교회 안 다닌 것이 편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주일예배는 물론 구역예배도 갔다. 그 언니가 너무 잘 해줘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는 더 열성적인 기독교인을 만났다. 이사를 가기도 전부터 우리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분은 아파트 문에 교회 전도지를 붙여놓았다. 이삿짐 차에서 짐을 내리는데, 그분이 나타나 짐을 옮기는 것을 거들었다. 이사할 때 많이 도와주셨으니 그 교회에 몇 번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천에 있는 은혜와진리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다. 89년에 태어난 딸이 기관지염을 앓았다. 천식으로 발전했다. 교회 구역장은 기도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요철야예배에 갔다. 이전에 철야예배는 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줄 알았다.
강단에서 목사님은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회개부터 하라고 했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지’ 싶었다. 주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어떤 이는 이상한 말로 기도했다. ‘마치 미친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도 그들처럼 회개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멀리서 작은 빛 하나가 보였다.
처음엔 ‘교회 천장에 달려있는 샹들리에 빛인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잘못 보았나’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다시 숙였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빛이 다시 나타나더니 점점 크게 다가왔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3> 예수님을 더 알고 싶던 때 신앙의 멘토 만나
강릉 사는 동안 요리 공부·강의 시작… 정종원 목사님께 준엄한 가르침 받아
윤경숙 이사장(왼쪽 여섯 번째)이 경기도 수원에 동양매직 요리학원을 오픈하고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금요철야예배에서 성령 체험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것 같았지만 딸의 기관지는 금방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아이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기침이 거칠어졌다. 살도 많이 빠졌다.
그 즈음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민간요법을 가르쳐줬다. 살구씨, 대추, 호두, 은행을 한줌씩 넣고 물을 두 배 붓고 반으로 졸인 후 먹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아이가 낫는다면 안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랬는데 기적처럼 2∼3일 만에 가래가 없어졌다.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의사도 놀랐다. 성령 체험과 교회 성도의 조언, 그리고 완치. 이 과정이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이게 뭘까 싶었다. 이때부터 예수님을 알고 싶었고 기독교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후 남편과 나는 안양 은혜와진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남편 직장 때문에 1993년 강릉으로 이사를 갔을 때는 나눔의교회를 섬겼다. 지금은 권사로서 서울 당산동에 있는 영광교회(오경남 목사)를 섬기고 있다. 남편 김정완은 안수집사다.
강릉은 내 삶에서 중요한 곳이다. 신앙적, 사업적으로 큰 전환점을 맞은 곳이었다. 신앙적으로는 멘토를 만났다. 당시 나눔의교회 목사님으로 현재는 은퇴하고 전주로 내려가신 정종원(85) 목사님이 바로 그분이다. 정 목사님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인 김준곤 목사님과 CCC 및 성시화 운동을 함께하셨다. 우리가 강릉에 도착한 날, 이도자 사모님이 전도지를 들고 오셔서 목사님을 알게 됐다.
현재의 한국조리사관학교를 설립한 후엔 목사님을 교목으로 모셨다. 중요한 일은 목사님과 의논하고 기도를 부탁드렸다. 목사님은 신앙적 관점에서 ‘이것은 맞다’ ‘이것은 틀렸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내가 “목사님 이렇게 하면 돈을 조금 더 버는데요”라고 아쉬워하면 그분은 “이사장”하며 준엄하게 불렀다. 그러면 나는 “알겠습니다. 목사님”이라고 했다. 목사님은 지난해 “이제는 나 없어도 되겠다”며 이형빈 목사님을 교목으로 임명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전주로 내려가셨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도 강릉이다. 나는 1984년 농림부 산하기관에 준공무원으로 취업해 3년 6개월간 근무했다.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여성이어서 진급이 늦었다.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겨놓고 일했는데, 아이만 불쌍하고 이것은 아닌 것 같았다. 사표를 냈다.
강릉으로 이사 가서는 취미삼아 요리학원을 다녔다. 이때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복어요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이것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싶었을 때, 동양매직이 요리학원 ㈜베스트홈을 자회사로 설립하고 학원장을 모집했다. 합격했다. 열심히 일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일을 하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그러자 회사가 나를 인정했다.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베스트홈에 사직서를 내자 서울 구로 애경백화점 내 요리학원장 자리를 내줬다.
그곳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나를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똑같이 대우했다. 열심히 일하나 안하나 월급이 같았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직서를 냈다.
그러자 회사는 내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가맹비는 50만원만 받고 시설 일체도 지원할 테니 프랜차이즈를 하라고 했다. 직접 운영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1999년 수원에 동양매직 요리학원을 차렸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4> “아이가 달라졌어요” 교사·부모가 문제아들 맡겨
자격증 따고 성취감 맛보게 지도·관리… 수원 학원까지 목동·부평서 찾아와
수원 동양매직요리학원 시절 교직원과 함께한 윤경숙 권사(왼쪽 네 번째).나는 1999년 수원지역에서 동양매직프랜차이즈인 동양매직요리학원을 동업으로 시작했다. 파트너는 현 한국조리사관전문학교 문숙정 본부장이다. 그는 동양매직 일산요리학원장으로, 나는 서울 구로 애경백화점내 요리학원장으로 일했다. 문 본부장이나 나나 당시 잘 나갔다. 그러나 동양매직 일산요리학원은 건물 주인이 자체사업을 한다고 해 문을 닫았고, 나는 내가 일한만큼 인정을 못 받는 것이 싫어 사표를 냈다. 이후 의기투합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다. 처음 1년간은 동양매직 요리학원프랜차이즈, 이후 동양요리학원, 한국조리사관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면서 매사에 같이 기도하고 같이 의논해왔다. 나는 강한 아빠 역할을, 문 본부장은 부드럽고 세심한 엄마 역할을 한다.
학원은 아주 잘됐다. 오픈한지 1년 정도 지났을 땐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그때는 231㎡(70평) 정도 됐다. 그래서 유치원 건물이었던 2644㎡(800평) 정도로 이전했다. 이전한 후에도 학원은 잘됐다.
이유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우리 학원에 보냈기 때문이다. 문제아였던 아이들이 우리 학원을 다니면서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던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면서 눈빛이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우리 학원에는 소위 문제아들이 많았다. 성적은 반에서 꼴찌인 아이들,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학원에서 자격증도 따고 요리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가 놀랐다. 아이들이 자존감을 회복했고 희망을 갖게 됐다. 선생님들은 성적이 꼴찌인 아이들에게 공부가 안되면 학원가서 요리 자격증을 따라, 사람 돼서 오라고 보냈다. 멀리 서울 목동, 인천 부평에서도 왔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자동차로 태워다 줬다.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비법도 있었다. 우린 아이들이 조리자격증 필기시험에 떨어지면 복도에 사진을 붙여놓는다. 2번 이상 떨어지면 아예 현수막을 만들어 학원입구에 걸었다. 자존심을 좀 건드린 것이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자마자 교무실에 와서 사진 떼어달라고 하는 아이들, 현수막 떼어달라고 목에 힘주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 번은 학교 선생님이 학원을 방문했다. 도대체 학원에서 어떻게 가르치기에 학생이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온 것이다. 이 선생님은 복도에 있는 불합격자 사진을 보고 “이거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이런 방법 덕분에 여기 오면 무조건 필기시험에 합격한다는 소문이 났다. 처음으로 필기시험에 합격해 칭찬을 받고 자신감이 생긴 아이들은 실기시험 준비도 열심히 했다. 요리와 관련해서는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도마에, 그릇에 무엇인가 더러운 것이 묻어 있으면 그것에 담긴 음식을 무조건 먹였다.
깨끗하지 않은 요리는 소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은 나를 무서워했다. 또 요리를 하다가 잘못을 하면 슬리퍼 등으로 때렸다. 물론 애정을 담아 장난처럼 때린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자신에 대한 이사장의 애정 척도를 ‘얼마나 큰 것으로 맞았느냐’로 결정했다. 아이들은 학교는 안가도 요리학원에는 왔다. “학생이 결석했는데 혹시 학원에 있느냐”며 전화가 오곤 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학원 오는 것은 거의 빼먹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5> 학점은행제 운영기관 인정 받고 서울로 옮겨
가산동 아파트형 공장 1층 공간… 기적 같이 저렴한 임대료로 마련
수원 동양요리학원 수강생들이 한 요리경연대회에서 수상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수원 동양요리학원은 국내 유일의 입시전문요리학원으로 유명해졌다. 학생들이 각종 요리대회에 입상해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하는 등 수강생 상당수가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대학은 가는데 오래 다니지를 못했다. 한 학기가 지나면 대학을 자퇴하거나 휴학했다. 대학의 커리큘럼은 대부분이 이론과 실기자격증 위주이다 보니 이미 자격증이 3개 이상인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간과 비용이 아깝다며 쉽게 자퇴해 버렸던 것이다.
고민 끝에 아예 대학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일정한 학점을 이수하면 대학 또는 전문대학 졸업을 인정해주는 학점은행제가 있었다. 정규대학은 아니지만 가정형편상, 그리고 시간이 여의치 않아 대학을 다니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제도다. 요리에 관심 있는 학생들과 일반 성인 학습자들을 위해 과목 단위로 수강하고 기본 학점만 채우면 전문(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커리큘럼은 학점은행제 제도가 제시하는 표준교육과목으로 편성하고, 현장에 맞는 실기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2007년에 학점은행제 학습과목 운영기관 평가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난관에 부닥쳤다. 전세로 있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낙찰을 받아야 했다. 낙찰 가능한 입찰 금액을 정해야 했다. 문숙정 당시 부원장이 여러 사안을 고려해 입찰 금액을 제시했다. 이를 놓고 기도하는데 그날 밤 꿈을 꿨다. 꿈속에서 숫자가 나타났다. 이는 부원장이 제시한 금액에서 1000만원 정도가 줄어든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금액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입찰 금액이 차 순위로 낙찰 받지 못했다.
창피했다. 학원 관계자들에게는 물론 수원 시내 모든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 부원장에게 “호텔 셰프가 꿈인 학생들을 위해 우리 차라리 서울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두세 달 지났다. 서울 가산동의 아파트형 공장을 소개받았다. 아파트형 공장인데다 2층이어서 학원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일단 330㎡(100평) 정도만 임대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장소를 보고 내려오다 분양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직원이 이왕이면 학원이니까 1층을 임대하라고 했다. 991㎡(300평)이라고 했다. “원래는 평당 1850만원인데, 1300만원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이야기만 잘하면 평당 600만원에도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
나는 집에 와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은행에서 90%까지 융자를 해준다고 했으니 1억8000만원만 있으면 임대할 수 있었다. 이튿날 일찍 분양 사무소를 찾았다. 평당 600만원에 계약하자고 했더니 그 직원은 “어제는 그냥 해본 이야기”라고 말했다.
어이없었다. 마침 그 직원의 상급자인 대표가 나타났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 대표에게 “이 사람이 내게 거짓말을 해서 나를 능멸했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 대표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평당 600만원은 어렵고 1350만원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싫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1100만원을 제시했다. 약속대로 하라고 했다. 옥신각신하다 결국 680만원까지 내려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6> ‘아프리카에 요리기술·복음 전하자’ 비전 세워
사건 잇따르는 조리학교 운영 벅차… 아름다운교회와 목사님 기도 큰 힘
2007년 한국조리사관학교 윤경숙 이사장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성교육을 하고 있다. 오른쪽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가 윤 이사장.2006∼2008년은 나의 소명을 확고히 하는 시간이었다. 아프리카에 가서 요리 기술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자는 생각을 했다. 이를 비전으로 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학점은행제 운영을 앞두고 2007년 대학과정 모집을 위한 마케팅이 절실해졌다. 그때 부산 동의대 정재진 교수님을 소개받아 학교 운영을 위한 마케팅 자문을 받았다. 여러 가지를 자문해 주신 정 교수님은 본인의 비전 이야기를 하셨다. 교수님은 학교를 퇴직하면 아프리카에서 선교 및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내게 큰 도전이 됐다.
그때까지는 ‘기도생활 잘하고 교회 열심히 섬기면 됐지’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것이 내 신앙의 수준이었다. 나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삶이 힘든 학생들과 함께한다는 것, 이들에게 요리 기술을 가르쳐주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만 해도 큰 상급이 있을 거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어디로 숨어야 할지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이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명과 역할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대한민국을 흔들어서 크게 변화시켜 놓겠습니다. 제가 해내겠습니다.’ 나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런 기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시키는 것 같으면 대부분 소극적으로 “안 하면 안 될까요”라고 반응했다.
조리사관학교 일도 그랬다. 주님 안에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버거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피 끓는 10대와 20대가 1000여명씩 있다 보니 이런 저런 사건사고가 넘쳤다. 사고를 수습하러 병원으로, 경찰서로 뛰어다녔다. 항상 긴장상태였다. 또 대출이자를 갚기도 힘들었고, 가끔씩은 상수도 하수도가 말썽이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큰소리로 외쳤다. “하나님 왜 접니까? 조리사관학교를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있든지, 돈이 있든지, 카리스마가 있든지 해야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없잖습니까?” 그때 이런 마음이 들었다. “똑똑하고 돈 많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다 했다고 할 것 아니냐.”
내 입에서 회개가 터져 나왔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 서서 이 학교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구나’ 싶었다. 더 이상 무슨 질문과 답이 필요하랴. 그냥 나는 하나님이 주인인 조리사관학교의 직원으로 일하면 되는 것이었다.
당시 섬겼던 아름다운교회 박성진 목사님에게 한국조리사관학교의 비전을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청년 사역에 열심인 분이었다. 목사님은 우리 학교를 아름다운교회의 소속으로 생각하시며 기도 후원을 하셨다. 새벽기도 시간에 가장 먼저 우리 학교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또 매주 화요일 저녁 6시30분부터 9시까지 서울의 학교에 오셔서 직원예배를 인도해 주셨다. 성도들도 학교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박 목사님과 아름다운교회 성도들의 눈물과 엄청난 기도로 한국조리사관학교는 세워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복음을 전하겠다, 그리고 해외에 요리기술을 통해 선교하겠다는 나의 소명도 확고해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7> 하나님 ‘인도’ 따라 현재의 학교 건물 마련
부담돼 계약 미룬 뒤 사고 잇따라… 계약서 쓰고나니 50억이나 올라
한국조리사관학교 이사장 윤경숙 권사가 서울 영등포구의 학교 건물 입구에 놓인 돌비석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2010년 새 건물이 필요해졌다. 학생들과 직업훈련생들이 계속 늘었고 서울 가산동의 건물은 좁아서 대안이 필요했다. 갈수록 관리비와 시설 부대비용도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한 건물에 여러 업체가 입주해 있다 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리는 요리를 하고 빵을 굽고 커피를 만들어야 하는데 다른 입주사 측에서 ‘냄새 때문에 근무에 집중이 안 된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한 번은 중국 요리를 하는데 화재경보기가 울린 적도 있었다. 수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당시 섬겼던 동탄 아름다운교회 박성진 목사님께 기도를 요청하고 새 건물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 전역을 다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곳이 있다고 확신했다. 서울 홍대 근처에서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이 건물을 달라고 여리고성 기도를 했다. 전 직원이 6일 동안 점심시간마다 이 건물 주위를 돌았다. 7일째 마지막 한 바퀴는 박 목사님과 함께 돌고 한목소리로 “이 건물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께서 이 건물을 주실 거라 생각하고 건물주를 만났다. 그런데 처음 제시한 가격보다 수십억 원을 올렸다.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가격을 올려도 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냥 포기할까, 지금 있는 곳에서 버터야 하나, 아직 때가 아닌 건가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던 중 지금의 서울 영등포 건물을 소개 받았다. 처음 보는 순간 아니다 싶어 1초 만에 돌아섰다. 건물이 너무 컸다. 15개 층(지상 11층, 지하 4층)이나 됐다. “하나님 이건 아니겠죠? 제 능력 밖입니다”라고 혼자 이야기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날 집에 돌아와 딸과 외출을 나갔는데 교통사고를 당했다. 정지신호에 멈춰 섰는데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밀렸다. 뒤차가 정지신호를 못 본 것이다. 차는 정비소에 맡기고 렌터카를 타고 다니던 중 또 사고가 나고 말았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뒤차가 계속 쫓아오는 것 같았다. 앞의 트럭을 보고 속도를 줄였는데 뒤차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그대로 내 차를 들이받았다. 렌터카는 폐차했지만 다행히 나는 멀쩡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이 놀랄 정도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고 순간 “하나님 그 건물로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무슨 관련이 있을까를 고민하다 이 건물을 계약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여기고 건물을 사겠다고 했다.
계약 날짜는 그해 12월 1일. 계약서는 하루 앞서 11월 30일에 쓰고 계약금은 이튿날 입금하기로 했다. 12월 1일 아침 7시 건물 앞에서 감사예배를 드리고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아직 계약금을 입금하기 전이었는데 남들이 알면 웃을 일이었다. 그리고 9시 정각에 계약금을 입금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그 건물은 정부의 한 부처가 사려던 것이었다. 국회에서 예산 승인이 나지 않아 미루고 있었는데 11월 30일 우리가 계약서를 쓴 날 그제야 승인이 났던 것이다. 가격은 우리보다 50억원이나 많았다. 해당 공무원이 30일에 건물을 사겠다며 뛰어왔단다. 건물주는 다음날 우리가 계약금을 안 넣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2011년 3월 4일 우리는 새 건물에서 첫 수업을 진행했다. 이 건물 입구에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적힌 돌비석을 세웠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8> 꿈을 잃었던 아이들, 모두 주님의 아픈 손가락
방황 속에 상처 받은 학생들 조리사관학교에서 반전의 삶
한국조리사관학교 이사장 윤경숙 권사가 수료식에 참가한 학생을 안아주고 있다.한국조리사관학교에는 주님의 아픈 손가락인 학생들이 아주 많다. 고3학생으로 위탁교육을 온 P양은 20년 베테랑 교사들도 경직되게 만들었다. 분칠한 듯한 화장을 하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미리 본교 선생님으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상담은 할 만큼 했다며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우리는 많이 안아주고 기도해줬다.
그러자 본인 입으로 아픈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어른인 것이 부끄러운 이야기들이었다. 우린 같이 엉엉 울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자 이 학생의 마음에 작은 꽃이 피었다. 한 선생님의 생일날 자기가 만든 케이크를 들고 와서 어설픈 목소리로 “선생님 생일축하해요”라고 했다.
이 학생에게 수료식날 선물을 줬다. 전도의 씨앗을 심고자하는 마음이었다. 그랬더니 화장실에 따라 들어와 “이사장님, 이거 저한테 왜 주셨어요”라고 묻는다. 세상에, 그 나이가 되도록 고맙다는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단다. 그 질문이 고맙다는 말이었다. 나는 화장실 복도에서 그 아이를 꼭 안아줬다. 나는 문제아를 본 적이 없다. 문제 부모만 수도 없이 봤다.
한국조리사관학교에는 ‘반전의 삶’을 사는 학생들이 많다. 이 지면을 통해 몇몇 학생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
김대섭 학생은 31세인데 경제적으로 안정된 간호사직(금연 상담사)을 그만두고 조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아내에게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애원한 끝에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윤지현 학생은 기계자동차공학과를 3년간 다녔지만 이 일을 평생 한다는 것이 끔찍하다면서 방황을 거듭한 끝에 우리 학교에 입학했다. 25살에 한국조리사관학교 학점은행제를 통해 지난 대학시절의 학점들을 인정받고 1년여 만에 전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교에는 질병을 극복하고 조리사의 꿈을 키워가는 학생들도 많다. 최재혁 학생은 백혈병 투병이 너무 힘들어 자신처럼 암에 걸린 환우들을 위로하는 셰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사관학교에 왔다. ‘반안면 왜소증’이라는 희귀성 난치질환을 앓고 있는 학생도 있다.
한때 호주에서 노숙까지 했던 이주용 학생은 올해 미국 3대 요리학교 중 하나인 존슨앤웨일즈 대학교 조리외식서비스 경영학부를 지원해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고 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반항적인 삶을 살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우리 사관학교에서 전문학사 과정을 마친 학생도 있다.
‘꼴찌의 반란’이라고 할 만한 아이들. 고3 위탁교육에 참가한 아이들은 조리 자격증을 취득하고 본교 교장선생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만찬을 준비한다. 그러면 이런 말이 나온다. “가가 가가?” ‘그 애가 그 애냐’는 경상도 사투리다. 아이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성적 최하위, 학교에서 잠만 자던 학생들, 꿈이라는 단어를 잊었던 학생들, 세상을 향해서 분노를 쏟아내던 아이들. 모두 주님의 아픈 손가락들이다.
제빵 기술로 가난한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학생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 사관학교 직원들에게 감사하고, 믿고 따라 와주는 학생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9> 케냐 마사이족 청년 초청해 제과제빵 기술 전수
아프리카 단기선교에 한계 느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대로 이뤄져
한국조리사관학교 윤경숙 이사장(왼쪽)이 마사이족 청년 안토니, 박태일 교수와 함께 이사장실에서 포즈를 취했다.2012년 2월, 우리 사관학교의 재정상태가 어려워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할 때였다. 나는 콩고에서 열린 아프리카 기독교대학 콘퍼런스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우리도 도움이 절실한 상황인데, 콩고 르완다 세네갈 등 많은 기독교 대학 총장님들은 제대로 된 교육기회를 갖지 못한 자국민들을 위해 기술교육을 하고 싶다며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오히려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행사가 열린 대학교의 총장님이 나를 학교 구내식당으로 안내했다. 파리 떼로 가득했다. 상하수도가 없어 직원들은 오염된 물로 채소를 씻고 그 물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새까만 행주로 도마를 쓱 닦고 또 일을 하는데 기겁할 정도였다. 마음이 아팠다. ‘하나님, 저도 어렵지만 이들은 더 어렵네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고 묻게 되었다.
우리 학교에 돈은 많지 않지만 인적 자원은 풍부하다. 나는 우리의 인적자원을 활용하고 후원단체와 연결해 현지에 직업학교와 빵 공장을 세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관학교 교수진을 파견해 기술을 가르치고 빵을 생산해 현지에 공급하자는 것이다. 한 지역에서 이를 성공시킨 후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같은 사역을 하면 나라 전반에 상당한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 우리는 단기선교를 통해 현지에 제과제빵 기술을 전수해 주고 온다. 그러나 늘 시간이 부족하다. 2∼3주 동안 가르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현지인을 데려다가 제대로 가르쳤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 바람은 현실이 됐다. 사관학교는 지난해 9월말 케냐의 마사이족 안토니(23)를 데려와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 임마누엘교회(김정국 목사)가 체류비 및 교육에 필요한 재료비 일부를, 우리 조리사관학교가 교육비용 일체를 지원하고 있다.
안토니는 지난여름 방학 때 케냐에서 알게 됐다. 안찬호·김정희 케냐 선교사의 요청으로 박태일·김영복 교수가 현지에서 2주 동안 제과제빵 기술을 전수했는데 거기서 만났다.
안토니는 3개월여 전문교육을 마친 후 돌아가 ‘안토니 베이커리’를 세울 계획이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배운 제과제빵 기술을 나누고, 마사이 부족을 포함해 케냐 자국민들에게 영양 많은 빵을 공급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안토니를 만나고 데려오는 과정에서 ‘예비하시는 하나님’도 경험했다.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려면 설비가 필요하다. 최소한 오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케냐에서 오븐을 쉽게 구할 리가 없었다. 우리 교수 2명이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도 구할 수 없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 당일, 케냐에 베이커리를 내려다 만 한국인 한 분과 연결됐다. 그분은 제과제빵 기계들을 창고에 잘 보관하고 있었다. 할렐루야.
또 하나님은 안토니를 예비해주셨다. 안토니는 케냐의 한 조리학교에서 조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마사이족 사람들은 “마사이 전사가 앞치마를 두르고 무슨 조리를 하느냐”며 크게 반대했었다. 조리기술을 배운 안토니가 있었기 때문에 케냐에 제과제빵 기술을 전수하겠다는 계획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윤경숙 <10·끝> 조리기술로 복음 전하는 전사 키운다
목회자포럼과 선교 인재 양성 협력… 세계 10대 명문조리학교 비전 품어
한국조리사관학교가 지난해 11월 국민일보기독여성리더스포럼, 국민일보목회자포럼과 기술선교 인재양성 장학사업을 위해 업무협약을 하고 기념촬영한 모습. 앞줄 왼쪽이 윤경숙 이사장.많은 대학들이 교수님들과 교직원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해외 연수를 보낸다. 한국조리사관학교 교수님들과 교직원들도 이를 은근히 부러워했다. 2014년 나는 “하나님, 저희학교 교수님들과 교직원들에게도 해외연수 기회를 주고 싶은데 돈이 없네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기도했다. 그때 눈에 번쩍 뜨이는 정보가 있었다. 해외에 있는 한식당 종사자를 교육시키는 기관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바로 입찰에 들어갔다. 나는 여기에 선정되려면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외 여러 곳을 사전 방문해 조사했다. 해외의 대형 식당부터 작은 생계형 식당까지 직접 찾아가 어떤 교육과정을 원하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이를 반영해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학점은행제 기관 최초로 해외 한식당 종사자교육 수행기관으로 선정됐다. 선정 지역이 첫해에는 중국이었지만 2년째는 영국 프랑스, 3년째는 몽골 인도네시아 등 해외 여러 나라들이 추가됐다.
한인들은 멀리 타국에서 외국인 주방장과 홀 직원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전공별로 나눠 해외에서 식당을 하며 고생하는 한인들을 위로하고 필요한 기술 등을 전수했다. 그냥 기술을 가르쳐주는데 그치지 않고 말 그대로 헌신했다. 우리는 중국 내 한식당 종사자 교육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조리기술을 나누려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 같은 활동은 전 세계를 품는 ‘2020년 세계 10대 명문조리학교’라는 비전을 품게 했다. 우리는 우리 학생들이 전 세계로 나가 조리기술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전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비전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완성해 가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비전을 보시고 국민일보기독여성리더스포럼과 국민일보목회자포럼을 연결해주셨다. 그래서 기술선교 인재양성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목회자포럼은 장학생들을 선발·심사하고 리더스포럼은 장학사업을 주관하고 조리사관학교는 최종 선발된 장학생들을 대상으로 호텔조리·호텔제과제빵·관광식음료 등의 전문학사 학위과정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 2년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인당 4학기 1600만원씩 총 1억6000만원을 한국조리사관학교에서 책임지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장학생으로 선발, 교육시킨 후 교수님들과 함께 아프리카 현지로 보내 직업학교와 빵 공장 설립을 지원하도록 할 계획이다. 정말 선교에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1989년 철야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2010년 1월 갑상선암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누워있을 때 당시 섬겼던 동탄 아름다운교회 박성진 목사님이 위로와 함께 평생 함께할 성경구절을 주셨다.
이사야 40장 10절 말씀이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내가 연약해져 힘들어 할 때 성령님께서 항상 이 말씀을 통해 나를 위로해 주신다. 하나님은 내게 “지금은 심히 바쁜 때니 나를 아는 자들로 기술 교육을 시켜 내 일을 감당하게 하라”는 말씀을 새벽 기도 중에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직접 이뤄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를 위해 한국조리사관학교를 사용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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