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여성-대중-소비 문화
1. 1930년대는 20세기 초 일본을 통해 들어오던 서양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새롭게 유입된 서구적 문화는 한국인의 생활을 바꾸었으며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시켰다. 특히 한국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연애, 커피, 재즈, 대중가요, 헐리우드 영화 와 같은 쾌락적이면서도 감상적인 것들이었다. 한국적 전통에 존재하지 않은 것들이 새롭게 한국인, 특히 경성의 소위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의 상징적 모습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2. ‘연애’에 대한 갈망은 신문과 잡지의 자극적인 보도와 어울려 확산되었다. 조선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연애’라는 단어는 신세대의 남성과 여성을 자극했다. 사랑을 위해 죽는 사람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도피하는 사람들, 심지어 여성들의 동반자살 등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해수욕장은 젊은이들의 ‘에로적’ 사랑이 분출되는 쾌락의 공간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연애에 목숨을 걸었고 연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어쩌면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유의 영역에 탐닉하였다.
3. 특히 나혜석과 박인덕의 사랑과 연애 이야기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여성들의 인습과 제도에 반항하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최초의 여성화가였던 나혜석은 김우영이라는 인물과 결혼했음에도 프랑스에 만난 ‘최린’이라는 인물과 연애에 빠졌고 결코 그것을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정조는 취미다’라는 파격적인 발언과 함께 자유연애를 칭송하였다. “우리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나, 좀 더 정조가 극도로 문란해가지고 다시 정조를 고수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우리도 이것 저것 다 맛보아 가지고 고정해지는 것이 위험성도 없고 순서가 아닌가 한다.” 박인덕 또한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으로 급진적인 연애를 통해 여성의 자유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4. 이러한 자유연애의 확산과 비극적인 정사의 배경에는 ‘조혼’이 있었다. 10대 중반에 강요된 결혼은 인간적 성숙을 이루기 전에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절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특히 여성들에게 가부장적 질서의 희생자가 되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1930년대 성행한 아내의 남편, 시부모 살해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조혼의 감소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의해 공업이 발전하게 되자 여성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언론은 자유연애를 선택하거나 정사로 삶을 마무리한 사람들이나 가정적 비극 때문에 살인을 한 사람들과 같은 특정한 케이스에 주목함으로써 여성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지 못했다. 여전히 호기심과 도덕적 잣대에 의한 이중적 기준을 통해서 여성들을 판단하였던 것이다.
5. 어찌됐든 연애가 늘어났다는 것은 남녀의 접촉이 좀 더 활발해졌다는 것이며, 감정의 표현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사람들은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향락적이고 유미적인 것들에 몰입했다. 30년대는 유성기의 보급과 함께 현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대중가요가 인기를 끌었고 헐리우드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사람들에 잠시만이라도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특히 대중가요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대중가요의 번창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람들은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 시기고 식민체제의 봉사에 귀결했다고 공격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특별한 저항의 방법이 없던 사람들에게 슬프고 애닯은 대중가요는 그 시대의 고난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때론 ‘슬픔과 애상’은 우리를 지탱하게 해주는 내면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6. 유흥문화는 다방과 카페로 이어졌다. 상층 계급이나 문인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다방이나 카페에 모여 잡담으로 풀어내었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고 재즈나 서구의 음악을 들으면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심리는 커피를 신비화시켰고 외국 문화에 대한 과정된 찬사를 이끌어내었다. 당시 유행했던 노래 중 특별한 관심을 받았던 곡이 현재도 가끔 들을 수 있는 <글루미 선데이>였다. 짙은 애상과 고독이 담겨있는 이 노래는 식민지 시대 젊은이들의 애청곡이었던 것이다. 카페에서는 재즈가 흘렀고 생계를 위해 여배우들 상당수가 카폐의 여급으로 일을 했으며 카페는 상류층 남성이나 문인 및 학생들과 여성들의 연애가 시작되는 공간이었다. 당시 <실생활>이라는 잡지는 이러한 향략적 문화를 비판하였다. “투쟁을 잊고 이런 카페에 은신하여 에로를 핥은 그들의 생활은 그 얼마나 퇴폐적이고 환락적이며 도피적이며 환멸적인가.”
7. 풍기문란을 이유로 당시에는 ‘댄스’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카페에서는 불법적인 댄스가 유행하였다. 육체적 접촉과 향락적 음악이 넘치는 카페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비판 속에서도 은밀하게 성장하였다. 댄스 수요의 증가는 급기야는 식민지 정부에 ‘댄스홀을 허하라’라는 청원까지 하게 만들었다. 1930년대 경성은 묘한 공간이었다. 식민지적 지배가 공고해지며 사람들은 해방의 희망을 상실하여 갔고 그러한 추세에 따라 쾌락적이고 유혹적인 소비문화에 사람들은 도피해갔다. 누군가는 이러한 도피적 소비문화에서 식민지 권력에 저항하는 힘을 발견하기도 하였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자신의 처지를 잊게하는 마약과 같은 도구였다. 일제는 더욱 더 강력한 군국주의적 폭력을 가했고 우리는 그것에 무력하게 추종해야 했으며 저항의 힘과 도구를 빼앗긴 사람들은 쾌락을 통해 현실을 잊으려 했다. 하지만 쾌락의 추구가 반드시 부정적인 요소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나를 지키고 버티게 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힘을 보존하게 하는 요소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대중문화 특히 ‘대중가요’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희망이 사라지고 있던 시대에 식민지 백성에게 위안과 연민을 주었던 힘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 새로운 시대(?)의 변화, 자유에 대한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