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_09_27_세번째 글 : 박미라 를 읽고 ]
괜찮은 비밀친구
서울 2기 강온유
교회 앞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던지, 이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대도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그녀는 아이들을 불러 곰돌이모양 젤리를 하나씩 나누어 준다. 젤리를 받아들고 상기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하는 소리에 오늘 하루 빠듯했던 일정으로 고단해진 마음이 토닥토닥 위로라도 받는 듯, 그녀의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이제 젤리가 몇 개 남지 않았다. 가까운 벤치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엄마들 중 하나가 그녀를 부른다.
“나도 줘.”
“이제 하나 밖에 없어요. 나눠 드세요.” 그녀가 말한다.
“근데 너 애들한테는 엄청 상냥하더니, 우리한테는 왜 이렇게 귀찮은 듯 말하니? 언니한테 이래도 되는 거니?”
농담이듯 진담 같은 언니의 일침에 그녀가 당황한다. ‘내가 뭘 잘 못했나?’ 순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엄마의 아이들에게 젤리를 다 나눠주고, 남은 젤리까지 탈탈 털어 엄마에게도 줬건만 어째서 친절까지 강요하는지, 그녀는 어이가 없다.
“그랬어요? 오늘 좀 피곤해서 그랬나봐요. 저 먼저 갈게요. 다음 주에 봐요.”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한다.
‘언니가 밉다. 그렇지만 밉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못난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그러면 우리의 관계에 금이 갈 테니까. 언니 뱃속의 둘째아이 때문에 괜스레 짜증이 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언니는 그것도 표현하는 사람이겠지. 그렇지만 그때는 언니의 짜증까지 받아줄 수 없고, 아니 받아주기 싫었어. 그래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자.’
그녀는 종종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상처받고 속상한 마음을 의연하고 신속하고 달래기 위해, 그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객관? 다분히 주관적인 인간이 그것도 혼자서 객관성을 견지하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견지해보려 한다.) 뭐 그게 객관적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관계의 고비를 만들지 않는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일정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 할 수 있고, 나 또한 그러하다. 쌍방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 자유 안에서 종종 상처가 오간다. 상처도 오가도록 내버려둔다. 때때로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처를 막아내기엔 약한, 우리는 인간이니까. 서로의 ‘어쩔 수 없음’, ‘그땐 그랬음’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한다. 하지만 다음이 조금 두렵다. 비교적 작은 상처이긴 하지만, 다시 아프기 싫다. 그래서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이 일은 빙산의 일각이다.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아픔들... 지금껏 여러 방법으로 다독여왔다. 직면하고, 일기 쓰고, 아픔을 지닌 사람들과 나누어보고, 기도하고, 울어보기도 하고,,,,,,. 갖가지의 방법들이 자기 모양으로 그때의 나를 격려했다. 어느 방식하나 버릴게 없지만, 지난 시간 글의 흔적들을 다시금 꺼내보면서, ‘글쓰기’가 주는 위로를 생각해본다. 박미라의 도 ‘글’이 지닌 치유의 힘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독자들의 두 가지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다. 하나는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이 무엇인지(What), 다른 하나는 어떻게 쓰면 그 힘을 경험할 수 있는지(How)를 말해준다. 저마다의 사연을 종이 위에 쏟아내면, 우리는 자신의 숨겨진 자아와 직면하게 되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자기를 먼저 자신이 수용할 때, 마음이 쉼을 누리고, 삶을 이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작가는 ‘개인의 내면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자기가 있기에, 각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여러 방법의 글쓰기’를 권한다. 미운 이에게 하소연하고, 자기를 포함한 그 누군가를 용서하고, 때로는 소위 미친년(?!)처럼 한 맺힌 마음을 두서없이 쏟아 내보라 한다. 혼자도 쓰고, 또 함께 쓰고 나누라 한다. 부끄러운 자아를 먼저는 자기가 수용하고, 다음으로는 타인에게 포용됨을 느낄 때, 안전감을 느낄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본성’과 ‘치유하는 글’에 대해 생각해본다. 신은 사람을 사랑하려고 만들었지만, 사람은 그가 사람을 사랑하듯 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은 다른 사람도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다. 사랑하고 싶다가도, 어느덧 증오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사람과 함께 인간(人間), 즉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다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고의로 상처를 준 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드라마 ‘또오해영’의 독백처럼 ‘이 세상에는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하나둘씩 늘어난 상처의 무게가 영혼을 짓누를 때, 위로해줄 이를 찾는다. 괜찮은 위로자들 중에 하나가 ‘종이와 연필’이다. 이제는 제법 어른 구실할 나이가 되었지만, 언니가 미웠던 응석꾸러기 같은 내 마음을, 깨끗한 종이가 받아준다. ‘밉다’라고 쓰고 보니, 언니를 미워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언니의 말과 행동을 내 기준에서 판단하고 규정하며 나를 두둔하다가도, 계속되는 미움에 이내 마음이 불편해진다. 글을 쓰기 전에는 내 눈으로 본 진실에만 집중했는데, 언니의 눈으로 본 진실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 양심의 여유가 생긴다. 이게 바로 저자가 말한 해방감일까? 언니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를 자유롭게 할까? 지금은 언니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공감을 위한 노력은 내가 다시 언니에게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열어두게 만드는 것 같다. 나를 다시 사람 사이에 두고,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내가 믿는 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치유하는 글쓰기’를 만난 건 큰 기쁨이다.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 착한 어린이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때. 다 하지도 못할 것을, 알아주는 척 하는 내 모습이 위선자 같을 때. 한편으로는 (성경)말씀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저버리지도 못하겠고, 사람들 앞에서 실패자의 모습을 숨기고 싶을 때. 종이 위에 내 마음을 자유로이 풀어놓고 위로한다. 착한 어린이의 옷을 벗어두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세밀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글쓰기는 마치 내 손을 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괜찮은 비밀친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