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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기사년의 조선인 대탈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조선이 망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앞을 다투어 만주로 들어간 사람들이 오늘의 중국 조선족의 원조이며, 해방 후에 돌아오지 않고 그 땅에 남은 자들이 연변 조선족자치구를 이루어 낸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 연길에 들어와 조선족 역사에 대한 많은 책을 접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적 일반상식이 역사적 사실과 다름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조선족 역사 제 1장, 제 1과에서 모든 서적들이 조선족의 본격적인 역사는 1869년 기사년 자연재난 이후 당시 조선 왕조의 적지 않은 백성들이 기근을 피하여 만주지역으로 대거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869년에 이어서 3년 사이에 이주한 조선인은 함경도 주민 26,000명을 포함하여 약 6만 명이었다. 1871년 한성부의 인구가 총 20만 734명인 것을 감안할 때, 6만 명이라는 숫자는 조선 사회의 기저를 흔들만하였지만 조선 정부 관리들은 한갓 변방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치부하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기민 구휼에 나서지 않았다. 오죽이나 그 피해가 컸으면 조선족의 역사기술에서 “기사년” 이 일상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겠는가!
한국인들이 흔히 “선구자” 노래를 부르면서 만주를 독립투사의 땅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해서 만주로 가기 40 여 년 전에 이미 10 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기아를 면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60년대 함경도의 자연재해가 얼마나 심각하고 비참하였는가를 모든 조선족역사 책이 다루고 있다.
김철호의 ❰중국 조선족, 그 력사를 말하다❱ 상권 제1장 월강곡은 아래와 같이 기재하였다.
“항간에서는 게걸스럽게 먹는 아이를 보면 ”기사년에 난 애 같다“고들 한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의 11년간, 조선 북부에는 대 한재와 대 충재가 련이어 들었다. 특히 1869년 기사년에 함경도의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 이래 겪어보지 못했던 특대 한재였다. 해동머리부터 가물이 시작되었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비 한 방울 오지 않았으니 전대미문의 왕가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부패한 관리배들의 학정으로 풍년이 들었다 해도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는데 왕가물까지 겹쳤으니 살길이 꽉 막혀버리고 만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을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었다. 집집에 굶어죽고 얼어 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길가에는 임자 없는 시체가 나딩굴기도 하였다. (중략)
사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의 유일한 삶의 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길마저 순순히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에서는 강안에 포막을 세우고 월강을 엄금시켰으며 월강하다 잡힌 자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버렸다.(중략)
장백산지구는 이렇게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으로 200여 년 간 비어있게 되었다. 무성한 삼림, 비옥한 땅은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너무나 충분하였다. “
서봉학과 리광수의 ❰연변아리랑❱에 의하면
“앉아서 굶어 죽으면 어떻고 월강하다 잡혀죽으면 어떠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인데 강을 건너고 보자. 혹 성공하면 살 수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비밀리에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장 2절 20쪽과 21쪽은 아래와 같이 기재하였다.
“1860년 (조선 철종 11년)부터 1870년(조선 고종) 까지 조선의 북부 변경지구는 련속 엄중한 자연재해를 입었다. 1860년, 1861년, 1863년, 1866년에는 홍수가 졌고 1869년, 1870년에는 련속 왕가물이 들었다. 이렇듯 엄중한 자연재해로 하여 원래 곤궁하던 민중은 설상가상이 되었는데 특히 동북지구에 있는 함경도의 6진(경원, 종성, 회령, 경흥, 온성, 부령)이 가장 엄중하였다. 이리하여 조선변민들은 봉금을 무릅쓰고 월강하여 압록강, 두만강 북안의 중국경내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일성록❱의 기재에 의하면 1860년 8월, 조선 함경도 부령 등 10개의 읍은 심한 수재를 입었다. “북관이 큰 수재를 입어 부령 등 10읍 민가 1,225호가 무너지고 기타 읍의 무너진 민가가 수천 호에 달하는데 무산, 경성 등 백성들은 경황없이 목숨을 구하러 떠나고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며 길 떠나는 사람들의 통곡소리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성내의 민생을 보면 금년의 수재로 인하여 실농한 자와 병에 걸려 잘못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길을 메웠으며 백성들은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 조석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청정부에서 동북을 봉금하고 조선에서 변계를 봉쇄했지만 조선북부변경지구가 해마다 심한 재해를 입어 살아갈 수 없게 된 조선북부변경지구의 변민들은 살길을 찾아 봉금을 무릅쓰고 도강하여 압록강, 두만강 북안의 중국경내에 와서 땅을 개간하고 거주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사람이 많아지고 엄중해져 비법개간의 고조가 이루어졌다. “
❰훈춘조선족 이민사❱47, 48쪽에서 최석숭은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60년후인 1869년 기사년에 북관 땅에 또 대기황이 들었다.
로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해 땅이 녹을 무렵부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가물었다 한다. 비탈 밭을 갈아 간신히 파종하여 씨앗이 움터 올라왔는데 여름철에 접어들면서 우박이 퍼부었다. 우박이 어찌나 컸는지 소가 우박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우박이 내린 면적도 대단히 넓어 곡식은 진창이 되어버렸다. 보종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낟알 한 톨도 거두지 못하고 한해 농사를 폐농하였다.
북관은 불모의 땅으로서 땅이 척박하고 저온랭해가 심하다. 게다가 지방 탐관오리들의 탐학하고 가혹한 정치는 승냥이나 호랑이와도 같이 사나와 천재보다 인재가 더 심하였다. “
“연길변무보고”에는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있다.
“동치8년 (1869년), 조선에 큰 우박이 퍼부어 보기 드문 흉년이 들었다. 길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조선 리재민들은 국금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국경을 넘어와 처자를 팔고 류리걸식하였다.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은 그 해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홑몸인 사람들은 남재애들은 머슴으로 되고 여자애들은 종으로 되었다. 그 당시 길림, 훈춘 등 곳에서는 쌀 한 말로 조선 남자애 한명이나 여자애 한명을 바꿀 수 있었으니 제 자식을 중국 사람에게 양 아들로 파는 경우도 많았다.”
❰계림구문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다.
“동치년간 조선에 대기황이 들어 들판에는 류리걸식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들은 집식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탈주하였다. (중략) 안해와 자식들을 한 사람당 쌀 한 두 말을 받고 팔았으니 참으로 처참하였다. 이로부터 변경이 좀 열렸다.”
❰연변조사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있다.
“조선 함경북도 6진에 전례 없던 대기근이 들었다. 6진의 백성들은 봉금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아 강북으로 왔다. 이것이 최근 60년간 조선인들이 연변에 이주해온 력사의 한 페지이다.”
❰중국조선족통사❱상권 제1장 제2절 28, 29쪽은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1860년 조선 국내에서는 유사 이래 보기 드문 대수재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재해는 그후에도 련속되었고 여기에 수년간 북변지역에 만연되었던 질병은 그 해를 더한층 심각하게 했다. 하여 1860년 조션의 부령일대만 해도 1천여호의 농민들이 류량민으로 전락했으며 길가에 식량을 구걸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러한 현상은 후에도 계속되다가 1869년과 1870년에 또다시 흉년이 발생하자 수많은 백성들은 길가에서 굶어죽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경에 대하여 윤준희는 ❰간도개척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갑자(1864년) 이후로 북변은 해마다 흉작으로 민생 곤란이 심하더니 경오(1870)년에는 유사이래 전무한 대기근이 왔다. 이로 인하여 경원, 경흥, 두 군은 폐읍의 지경에 이르렀고 류리걸식하는 기민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화와 길가에 굶어죽는 시체가 널려있어 차마 눈 뜨고 볼수 없었다.(중략) 조정에서는 좌시할 따름으로 어떠한 구제도 하지 않았다. 하여 류리걸식하던 기민들은 월강하여 청인들의 노예로 되거나 혹은 자녀로 쌀을 바꾸거나 가정부 혹은 양자로 들어가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 그러므로 경오년 기근은 조선백성들이 월강한 동기라 말할 수 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중국 조선족의 본격적인 역사 출현에 몇 가지 공통요소가 있다.
첫째는 반복되는 자연재해다.
함경북도 동북지역은 산이 많아 밭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한랭하여 작물 소출이 그리 좋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1860년, 1861년, 1863년, 1866년에는 대홍수가 났고 1869년, 1870년에는 연속 대가뭄이 들었다. 6년 계속된 흉년은 함경도 백성들을 도탄과 기아로 내몰아 가정과 마을 해체를 가져왔다.
둘째는 상층계급인 조선정부와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지방탐관오리들의 악정이다.
중앙정부 조정은 민생에 무관심하여 백성들의 고난을 좌시할 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으며, 지방 탐관오리들은 관청에 있는 구휼미를 풀고 다시 거두어 가는 과정에서 가렴주구로 백성을 수탈하고 폭력을 휘둘러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사나와 실상 천재보다 인재가 더 심하였다.
셋째 죽음에 직면한 기민들이 강을 건너서 불법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
분노와 절망에 빠진 소작농민들, 천민계급의 사람들이 “헬조선”을 탈출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도강 중에 청나라 팔기군의 단속에 걸리지 않은 자들은 1867년 이후, 청조의 발상지로서 봉금으로 무인지경이 된 백두산 및 그 주변 지역으로 들어가 중국인들의 눈을 피해서 마을을 이루었다.
위의 세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불법이주가 시작되었지만 당시 청나라는 조선인의 불법이민을 막을 수 있는 군사적 여력이 없었고 6만 명에 가까운 조선인 불법입국자를 묵인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무엇보다도 청은 동북삼성의 땅을 노리는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야 했다.
러시아는 1858년 “중-로 애훈조약”을 통하여 흑룡강 이북의 60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을 빼앗고 1860년에는 “중-로북경조약”을 통하여 우수리강 이동의 40만 평방킬로미터의 이르는 땅을 강탈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서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하였고 조선인들을 집단이주 시켜서 연해주를 개발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청은 러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봉금령으로 황폐해진 동북삼성을 개발하고자 산해관 너머에 사는 한족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였다. 그 후로 봉금을 해제하고 불법입주한 조선인에게 귀화 입적할 수 있는 혜택을 주면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였다.
또한 청은 아편전쟁이후 2,3억 만냥의 배상금을 갚아야 했는데 이는 당시 청조의 연간 재정수입의 두 배에 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구제국들과의 불평등조약 체결로 12억에 달하는 외채를 짊어지고 있어서 재정이 고갈되어 있었다. 당시 동북지역은 장기간의 봉금정책으로 인하여 인구가 적은 반면에 넓은 황무지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동북지역 개척은 동북지역 관리실무자들에 의해서 경제위기 타개의 방안으로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조는 봉금을 폐지하고 군부제 산하에 만인관리기관을 설치하고 관청에 소속된 땅과 군대가 주둔하며 관리하는 땅을 일반인들이 경작할 수 있는 땅으로 전환시키는 등 일련의 조치를 통하여 동북삼성의 활성화와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조선인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기사년부터 내리 3년 동안 불법으로 도강한 조선인들은 주로 압록강 북안에 정착하거나 훈춘을 지난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정착을 하였다.
압록강 북안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불법 이주하여 주로 봉천(요녕)지구에서 개간하고 거주하였다. 최종범이 기록한 ❰강북일기❱애 보면 봉천지구 혈암평에 거주한 조선인이 192호, 1,673명 있었고, 반내동에 거주한 조선인은 270여 호, 1,466명, 파저평에 거주한 사람은 400호 였다. 1869년 중국 봉황성, 변문 등지에 불법으로 이주한 사람은 10만 여명이 있었고, 1870년 전후에 집안현의 조선인은 1,000여 호나 되었다.
두만강 북안은 압록강 북안과 달리 조선인에 대한 봉금이 1885년 까지 유지되었고 러시아 연해주로 나가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청의 엄한 단속이 있었다. 1870년에는 청의 대대적인 수색으로 524명이 잡혀서 조선으로 강제 축출되기도 하였다. 연변일대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생활은 참으로 비참하였다. 굶주림에 시달린 조선인들은 처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오록정의 ❰연길변무보고❱의하면 연변지역으로 온 조선인들은 청인들의 종살이의 운명을 피할 길이 없었다. 연변지역도 압록강북안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의 대량 이동이 있었지만 청조의 봉금정책 강화로 연해주로 이동했거나 조선으로 쇄환되어 가서 정착이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지에서 숨어서 정착생활을 한 몇 몇 사례가 있다.
두만강 북안은 1886년에야 비로소 조선인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1886년과 1887년 사이에 형성된 마을들은 무산, 회령 대안에 휘반동, 상하연동, 소동, 상하로포, 함박동을 비롯한 6개 마을에 대략 700여 호가 정착을 하였으며 온성대안에는 마패동과 구평에 100여 호, 경원 대안에는 고이도에 7~8호, 종성대안에는 풍평, 향수고지, 자동, 제동을 비롯한 9개 마을에 740여호가 정착을 하였다.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크라뵈”의 보고서에 의하면 1863년 13호가 포셋트에서 경작을 하였고 1868년에는 165호, 1869년에는 765호에 달했다. 1869년 11월 길림장군이 예부에 엄저하와 길심하 지방에 조선인수가 1,000 여명에 달한다고 보고하였다.
이상으로 기사년 재해와 조선족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기사년은 언제든지 우리 역사 속에서 반복될 수 있다.
문제는 재난과 고통을 바라보는 지도자, 지식인들의 시각이다.
우리 사회가 과거 유교문화의 사람차별과 계급질서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신봉건질서 의식과 개인주의에 빠져있다.
사회적인 책임의식과 연대감, 고난당하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공감, 공생공존의 의지,
사회적인 안전망 형성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외경심이 사라진 현대인에게 기사년은
생명에 대한 차별, 폐쇄, 배타와 소외가 될 것이다.
기사년이 사회전체가 희년으로 출애굽하는 기회가 되길 빌어마지 않는다.
2019.6.13.목
우담초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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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의 아픔은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