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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소설가협회에서 발간한 "소설로 읽는 하동" <하동과 전설, 그리고 소설>에 수록된 소설가 승만석 회원의 단편소설 "연(緣)"을 올립니다.
단편소설 연(緣) 승만석
금계(金鷄)가 두 홰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한지창호에 밤새 남해바다에서 몸을 구른 해가 어둑새벽을 밝힌다. 한껏 기지개를 켠다. 사지가 짜르르하다. 밖을 나와 길게 숨을 들이키자 폐부가 가쁜 기침을 한다. 절집 새벽이 서늘해진 것일까. 새벽예불을 마친 정수 스님이 도량을 쓸고 있다. -나무관세음보살. 편히 주무셨는지요.- 정수 스님께 합장하고 대빗자루를 받아 대웅전과 미륵전과 마당을 쓴다. 서늘해진 새벽이라 하지만 등이 축축하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금오산 정수리를 디딘 해가 법당 연화살문을 지나 부처님 금빛 가사에 붉은 기운을 덧칠하고 있다. 십 년을 아침마다 비질하던 행자가 어느 가을 아침 수북이 쌓인 낙엽을 쓸다가 허리를 펴고 해를 보는 순간 견성하였다는데 모를 일. 부신 눈만 아릴뿐이다. 잡곡밥과 된장국과 두어 가지 나물반찬이 아침공양이다. 거친 음식과 소식하지 않으면 비명횡사할 것이라는 닥터 박의 협박(?)도 그렇지만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 혀가 성깔 누그러뜨리고 적응하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 미륵전이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연화좌대에 앉은 미륵석불이 중생을 살피고 있다. 갸름한 얼굴과 온화한 눈, 알맞게 뻗은 코와 두툼한 입술의 미소가 어떤 인연이 닿았기에 한낱 돌덩이에서 미륵의 숨길을 받잡았을까. 도솔천에 머물면서 천인에게 설법하다가 56억 7천만 년이 다하면 사바세계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미륵부처를 정으로 쪼면 얻어질까. 망치로 두드리면 이루어질까. 귀순한 할애비 닮았어. 천진무구한 아일 닮았어. 촛불을 밝힌다. 향을 올린다. 백팔 배를 한다. * 대자비로 중생들을 어여삐보사 대희대사 베푸시어 제도하시고 수승하신 지혜덕상 장엄하시니 저희들이 정성다해 예배합니다. 지심귀명례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 * 무릎이 아리고 옆구리가 저리다. 온몸이 후끈거린다. 두 손을 단전에 가지런히 모으고 정좌를 한다. 평온하다. 배꼽 밑에 갈무리해 두었던 화두를 꺼냈다. * -새 한 마리를 병에 넣어 길렀다. 이게 너무 자라서 병 아가리로 는 도저히 꺼낼 수 없게 되었다. 그냥 두면 더 커져서 죽게 될 것이 다. 새를 죽이지 않고 병에서 꺼낼 방도를 말하라. 그렇다고 병을 깨서는 안 된다.- * 남전(南泉) 늙은이가 천년 넘게 우려먹은 새가 펄펄 뛰며 지분대고 있다. 콕콕 눈알을 파면서 꺼내달라며 꽥꽥거리고 새끼 새들은 파인 눈 안을 뒤적거린다. 육식(六識) 경계라도 머물었다면 파인 눈알은 환하였을 것이고 깃털 하나는 뽑았을 것 인데 보이지가 않아. 도대체 만져지지가 않아. -맹추님, 화두 꼬랑지는 잡았나요?- 영아다. 콕콕 눈을 파던 새가 새끼 새들을 데리고 우르르 허공으로 난다. 그 허공에 오월 사과 꽃 같은 영아의 미소가 볕살처럼 퍼진다. -나가요, 억지로 앉아있다고 꼬랑지가 잡히나요.- * 봉학산에 다보록 쌓인 햇살 한 자락을 걷어낸 너른 바위는 알맞게 데워져 있다. 눈 아래 박달리 마을을 살찌우는 가을볕이 건강하다. 황갈색 갈참나무 이파리가 스륵스륵 알맞게 가을 키질을 해대고 옻나무는 제대로 붉은 물이 들었다. 절집을 둘러온 바람으로 하늑대던 억새가 길 나설 채비를 서두른다. -어떻게 왔어.- -어머니한테 온 김에 어찌하나 해서요.- 바위에 걸터앉아 팽팽한 종아리를 뽐내는 영아를 처음 만난 것은 사월초파일 할머니가 다니던 절에서였다. 사시예불이 끝나고 점심공양을 하러 요사채로 갔다. 요사채는 신도들로 가득이었다. 둘레둘레 살피다가 영아 옆자리가 빈 것을 목격하고 앉으려다 그녀 국그릇을 엎질렀다. 순간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어 치마를 꼭꼭 누르며 침착하게 닦았다. 그 모습이 오월 사과 꽃 같았다. -이런, 한복이 못쓰게 되었네요. 죄송해서 어떡합니까. 이대로 나서기가 그러네요. 댁까지 모셔 드리겠습니다.- -아녜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가면 돼요.- 그날 나는 그녀를 그녀 아파트까지 정중하게 실어주었다. 오월 사과 꽃 같은 영아가 잊힐 쯤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날 용서를 구할 겸 식사가 어떻겠냐고 했더니 오월 사과 꽃같이 웃어 주었다. 백화점 칠 층 한식 정에서 식사를 한 후 영아가 명함을 주었다. ‘찻집 카페 달마. 영아’ * -어때요, 지내기가 불편하지 않아요?- -괜찮아, 새 모가지가 비틀어지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 제자 A가 입을 열었다. -새는 생사를 뛰어넘어 피안의 세계로 날아갔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구나.- 제자 B가 말하였다. -새도 병도 순간에서 찰나로 사라졌습니다.- - 미친놈이로구나.- 머리가 희끗한 제자 C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새는 병 안에도 병 밖에도 있지 않습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 남전 늙은이가 멀건 하늘에 쳐놓은 그물에 덜컥 모가지가 걸린 것은 낙우송이 열병(閱兵)한 병사처럼 서있는 산복도로변 카페 달마를 드나들면서였다. 할머니가 다니던 절에 나가기는 했으나 나일론 신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부처님 원력이 너를 살렸으니 절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귀가 읽히도록 말하였다. * 철이 들기 전부터 낚시를 다녔다. 그건 순전히 낚시광이었던 아버지의 절대적 영향이었다. 불심이 돈독한 할머니는 틈만 나면 아버지에게 살생의 업을 받을 거라며 한사코 말렸지만 외려 아버지는 어린 나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낚시를 즐겼다. 나는 커가면서 고기를 낚아 올릴 때 낚싯대를 타고 오는 짜릿한 손맛에 매료되었고 아버지 못지않은 낚시광이 되어갔다. 주말이면 아예 바다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할머니는 아들도 모자라 이제 손자까지 살생의 업을 짓게 되었다면서 점점 절에 가는 빈도가 늘어났다.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나무천수보살마하살. * 코앞이 추석대목이었다. 다대 앞바다에 감성돔이 떼거리로 몰려왔다는 소문에 꾼들의 입이 바빴다. 소문만으로도 손끝이 짜릿짜릿하였다. 추석대목 장사를 슬그머니 처에게 미루고 휑하니 다대로 갔다. 어둠이 깔리자 소문대로 대어급 감성돔이 네 마리나 걸렸다. 얼마나 용을 썼는지 팔목이 얼얼하였다. 입질이 뜸한 틈새기에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궁군 하늘에 총총 박힌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삽상(颯爽)한 바람이 불어왔다.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다급하게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파도가 우르릉거리며 덮쳐왔다. 본능적으로 엎드리면서 돌부리를 잡았다. 기세등등한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죽을 것이다. 죽고 말 것이다. 순간 살생의 업을 소멸시켜 달라며 부처님께 간구하는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 살려주세요. 제발요.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나무대륜보살마하살. * 그날 해일로 꾼 여러 명이 파도에 휩쓸려 시체도 찾지 못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는 트라우마로 악몽 속을 헤매야 했었다. 파도가 나를 삼키거나, 감성돔이 되어 낚시 바늘에 걸려 발버둥치는 꿈을 빈번하게 꾸었다. 꿈을 깨면 볼이 낚시 바늘에 꿴 것처럼 아팠고 가슴은 울울하였다. 게 고둥처럼 안으로 파고들어가던 나는 술기운을 빌리기 시작하였다. 빠르게 몸이 쇠약해져 갔다. 닥터 박이 그랬다. 술을 끊든가 정신병원에 가든가 그도 아니면 산에 눕든가 선택하란다. 그때부터 할머니 따라 절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문딩이는?- -맹추님이 떠나고 나니 살판이 났는지 기고만장이지 뭐예요. 여북하니 제가 다 죽을 맛이라니까요.- 말이 그렇지 실상은 아닌 것 같은 눈치다. 증명하듯 과녁을 향해 착실히 날아가는 화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지 않은가. 해맑은 미소가 석인상을 닮았네. 미륵석불 입술을 훔치네. 영아는 해맑은 미소만큼이나 신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불교에 관심 있는 손님을 중심으로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정기모임을 갖고 있었다. 가입 권유를 받았다. 망설이는 나에게 땡추가 거들었다. 삶 그거 별 거 아니야. 제행무상(諸行無常) 아니든가. 우리 같이 가보세. 저 피안(彼岸)의 언덕으로. 매주 모이는 동호회는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독송한 후 교리를 학습하거나 회원들의 불교체험을 이야기하였다. 밑둥치에 쌓인 벚나무 이파리가 무심하게 날리던 밤이었다. 싸늘한 시가지 불빛이 떨고 있었고 적적한 바다에 묶인 상선 불빛이 외로워 보였다. 영아가 이야기를 꺼냈다. *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필연이었다. 명줄이 짧다는 내 사주를 절에 팔아서 명줄을 이었다는 어머니 말씀도 그렇거니와 우주에서 밀려오는 파문처럼 나를 감싸는 알 수 없는 근기(根機)의 작용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이었다. 봄 소풍을 학방사(鶴芳寺)로 갔다. 입 바람에도 엎어질 낡은 절 한 채가 석인상과 돌거북과 무너진 탑 돌을 힘겹게 거느리고 있었다. 친구들과 놀던 나는 갑자기 절 안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누가 절 안에서 꼭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보물찾기를 하였다. 보물을 찾는다면서 절 안으로 들어갔다. 삭은 지붕 틈새를 타고 내려온 볕살이 후광처럼 미륵석불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수없이 절을 했다. 미륵석불 입술이 달각거렸다. 착하고 착하구나. 아가야. 한량없는 너의 공덕이 나를 살리겠구나.- 미륵석불 입술처럼 달각거리는 영아 입술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 산을 내려오면서 영아가 손을 내밀었다. 따스한 기운이 친밀하게 교환되었다. 길가에 핀 산국을 꺾어 영아 머리에 꽂아주었다. 높은 하늘이 더욱 파래졌다. 점심공양을 끝내고 돌아가는 영아가 언제 하산할 거냐고 물었다. 글쎄, 고개만 끄덕였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는 영아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 나무정취보살마하살. * 학방사를 찾은 것은 영아 영향이 컸다. 학방사에 가면 영아가 증험한 그 신비의 체험을 나도 꼭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첫날부터 학방사에서 만난 조주 늙은이가 휘두른 시퍼런 칼날에 신비한 체험은커녕 가슴팍이 쪼개지고 말았다. 덩달아 미륵석불이 놀란 내가 뺑소니라도 칠까봐 감시의 눈길을 한시도 늦추지 않으니 아뿔싸 이런 고약한 경우라니. 학방사 첫날 요사채에 여장을 풀고 정수 스님을 만났다. -어떻게 여기 오시게 되었습니까.- -미륵석불을 보고자 왔습니다.- -무엇이 미륵석불을 보고자 했습니까?- -갈증이었습니다.- -갈증이라면 물을 마셔야지 웬 미륵석불은요? 미륵석불을 갈아마실 작정이었다는 말이오?- 말을 놓쳤다. 말을 놓치니 길을 놓치고 길을 놓치니 허상마저 놓쳤다. 머리통이 깨지고 조주 똥 막대기가 사정없이 똥꼬를 찌른다. 아팠다. 진땀이 났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조차 부끄러웠다. -새 한 마리 줄 터이니 잘 키워보시오. 혹시나 아오. 키우다 보면 미륵석불 본래면목을 얻을지.- 그렇게 얻은 새가 갈수록 꽥꽥거리며 야단법석이다. 꺼내달라고, 어서 꺼내달라고 숨이 가빠서 죽겠다고, 죽으면 책임지라면서 닦달이 여간 아니다. 남전 늙은이를 빼닮은 괴팍스런 새 한 마리. * 육긍(陸亘) 대부가 남전 늙은이 똥꼬를 살살 간질였다. -어떤 농부가 병 속에 거위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거위는 무럭무럭 자라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커지고 말았습니다. 스님은 이 거위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육긍 대부가 말을 마치자 남전 늙은이가 대뜸 그를 불렀다. -대부!- -예?- -나왔소.- 남전 늙은이가 빙그레 웃었다. 자신이 졸자인 줄 모르고 절대 고수인 남전 늙은이를 에멜무지로 묶으려 했으니 에그 불쌍한 육긍이, 스스로 조롱에 들어가 갇힌 새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네그려. 깜깜한 밤중이나 다름없는 그대가 동아줄도 부득인데 썩은 새끼줄로 남전 늙은이 앞에서 까불어 댔음에야. * 무료한 오후에 빠진다. 졸음이다. 이러다가 미륵석불 헛기침 소리도 듣지 못하겠다. 하기야 미륵석불도 하품하며 눈꺼풀을 슬근거림에야. 미륵전을 나선다. 미륵전 뒷마당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는 옹달샘이 우주 한 볼때기를 싣고 있다. 청정하다. 청정하니 고요하고 고요하니 속되지 않음이다. 속되지 않음이니 문수보살이 유마거사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 -잘 오셨습니다. 문수사리여, 오지 않음으로 오시며 보지 않으므로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유마여, 온다하여 온 것이 아니며 간다하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온다는 것은 온 데가 없고, 간다는 것도 간 데가 없으며, 본다는 것도 실상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사의 병은 무슨 인연으로 생겼으며, 무슨 인연으로 나을 수 있습니까?-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보살이 병들었습니다. 중생의 병이 나아지면 보살의 병도 나아질 것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에 들어가는 것이요,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병을 여의면 보살의 병도 여읠 것입니다.- 슬쩍 우주 한 볼때기를 건드린다. 유마도 문수도 중생도 제 갈 길로 흩어진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 허깨비야. 때 낀 거울이야. *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카페 달마에는 나와 영아와 땡추가 시틋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영아가 묵은 김치에 홍합과 오징어와 땡초를 넣어 만든 부침개를 안주로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오른 땡추와 나는 천근한 밑천을 슬슬 털어내기 시작하였다. 가령 달마(達磨)는 뭣땜시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왔을까? 운문(雲門)의 커다란 똥 막대기는 어떤 미련 곰탱이 똥구멍을 쿡쿡 질러댔을까? 겁 없이 조주(趙州) 잣나무 씨를 한 말이나 턴 놈의 간뎅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천연(天然)이 목불을 태워 사리를 찾았으니 금부처를 태우면 금이 나올까 천연의 목불이 나올까? 둘은 영아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이런 유치한 치기로 희희낙락 했다. 영아는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낄낄거리는 나와 땡추를 한심한 듯 흘기더니 훔친 미륵석불 입술을 열었다. * -고향을 떠날 때까지 종종 학방사를 찾았다. 낡은 절을 외롭게 지키는 미륵석불에게 절을 하면 삭은 지붕 틈새로 내려온 볕살처럼 환하게 밝아진 마음은 환희심이 충만하고 육신은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런 이야기를 어머니께 들려주면 돌부처가 네 전생인연이었나 보다 하면서 학방사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곤 하였다.- * -약 200년 전이었다. 스님 하나와 열대여섯 돼 보이는 계집아이가 봉학산 자락에 토굴을 짓고 기거를 하였다. 계집아이 헌디로 온 몸이 헐어있었고 양손은 늘 싸매고 있었다. 수상한 소문이 박달리 마을에 떠돌았다. 계집아이가 풍병이었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떠돌이 걸승과 계집아이를 쫓아내려고 온갖 협박과 함께 토굴을 허물었으나 스님은 그때마다 무상무념 염불만 하였다. 삼 년의 세월이 지난 봄날이었다. 스님과 계집아이가 박달리 마을에 나타났다. 헌디로 헐었던 계집아이 얼굴은 달덩이같이 훤하였고 통실한 손에는 갓난아이가 안겨있었다. 스님과 계집아이가 떠나가자 사람들은 토굴로 달려갔다. 그들이 머문 토굴 에는 돌부처와 석인상이 있었다. 사람들은 스님이 성불한 대사일 거라면서 돌부처에게 치성을 드렸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차츰 토굴도 미륵석불도 잊혀져갔다. 어느 날 젊은 스님 하나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토굴로 찾아와 절 한 채 지어 미륵석불을 봉안하니 학방사였다.- * 빗소리가 굵어졌다. 메타세콰이아 여린 순이 팔랑거렸다. 그 여린 순을 쳐다보는 아늑한 영아 모습이 계집아이와 겹쳐 보였다. 육조 혜능(慧能)은 팔 개월 방아 짓고 발우를 얻었는데, 삼 년 동안 미륵을 쪼았으니 계집아이의 갓난아이야 허공의 한 점 아니겠는가.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심한 갈증을 느꼈다. 빌어먹을 비는 왜 구질구질하게 내려 남의 속을 뒤집어. 그러나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사선을 그으며 미륵전 빗살무늬 창에 매달려 앙앙대던 고양이 갈색 눈 같은 저녁햇살이 빗살무늬 창을 비집고 들어와 점잖게 미륵석불 옆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남전 늙은이가 모처럼 마을에서 거하게 한 잔하고 와보니 예쁜 제자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갈색 눈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본래가 갈색이니 가부좌를 틀었다.- -가부좌를 틀었으니 갈색이 본래이다.- 기분이 확 틀어진 남전 늙은이가 갈색 눈을 뎅강 두 동강이를 냈다. -죽었는가? 살았는가?- -말해, 어서 말해봐. 멍청한 놈들아.- 머쓱해진 예쁜 제자들이 벙어리 꼴이니 조주 얼뜨기가 짚신을 이고 빙빙 방안을 돌았다. 이러나저러나 한통속 아닌가. 슈뢰딩거가 이렇게 말했다. -죽었으면서도 살아있는 고· 양· 이· 갈· 색· 눈.- 양자역학에서 미시세계의 모든 입자는 파동성(波動性)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입자는 어떤 한 시점이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운동 공간 내에 퍼져 있다. 하나가 동시에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죽으므로 저것이 죽는다. 편파(偏頗)를 만났으니 갈색 눈이 두 동강이지, 알음알이가 덧났으면 천 동강 만 동강 날 뻔했지. 덧나면 어떤 처방도 끝장이야. 제 눈이 두 동강 난 줄도 모르는 갈색 눈이 미륵석불 사타구니를 긁어 댄다. 사타구니가 빨갛게 타들어갔다. * 길을 걷는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외길이다. 냇가에 이르렀다. 한 여인이 우두커니 서 있다. -무엇이 그리하시오.- -내를 건너려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답니다.- -내가 건너 주리다.- 여인을 업는다. 솜털같이 가볍다. 찰방찰방 내를 건넌다. 냇물이 여인처럼 부드럽고 따습다. 여인을 내린다. 영아다. 오월 사과 꽃같이 웃는다. 어머니에게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는 영아는 나신이다. 천지 가득한 구절초 꽃잎을 따서 나신에다 뿌린다. 나신이 꽃잎인가 꽃잎이 나신인가. 눈이 장엄하다. 찬란하다. 산 그리메를 그리던 구름이 소나기를 뿌린다. 꽃이 진다. 영아가 진다. 꽃이 떨고 있다. 영아가 떨고 있다. 꽃 진 자리에 무지개가 핀다. 일곱 빛 무지개가 영아를 감싼다. 나를 감싼다. 아, 나무만월보살마하살 나무수월보살마하살. * 깜박 참선하다가 졸았나보다. 꺼내라는 새는 깃털 하나 건들지 못하고 객쩍게 마구니(魔軍)에 걸렸어. 애마(愛魔)에 홀렸어. 마당에 내려선다. 열이레 달이 홀로 세상을 차지하고 있다. 차가운 제 빛이 낮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정화시키는가. 창량하고 창량하구나. 청신하고 청신하구나. 들꽃 향을 싣고 온 찬바람이 달그림자를 쓸었다. 은행잎이 나선형을 그리며 떨어진다. * 제자 1이 말하였다. -새가 죽든지 병을 깨든지 하나를 고르겠습니다.- -뻔뻔한 놈이구나.- 제자 2가 대들었다. -새는 생사를 뛰어 넘어 피안으로 날아갔습니다.- -네놈이 환장을 했구나.- 제자 3이 비장의 칼을 휘둘렸다. -위성공간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어쩌고, 빅뱅 이전이 저쩌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자빠졌구나.-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항의를 했다. -스승님, 도대체 답이 있기나 합니까?- 허허, 속깨나 타는 남전 늙은이 혀를 끌끌 차는데 -모를 뿐, 네놈들이 모르는데 낸들 어떻게 알겠느냐.- 모를 뿐이라. 주인이 모른다고 잡아떼는데 객이야 두 말 하면 번데기 주름 아니겠는가. 정말 모를 뿐이다. 다음날 해거름에 영아와 땡추가 왔다. -야 이놈 맹추야, 이 땡추 형님 없는 세상이 그리 좋더냐. 전화한 통하면 손가락이 부러지더냐. 발가락이 곱아지기라도 하더냐. 이놈아.- -허허, 땡추 이놈이 맹추 형님을 못 보더니 그 단새 버릇이 패려 궂어졌구나. 그래 이왕 왔으니 이 맹추 형님이랑 같이 푹 썩어 보자꾸나. 네놈도 좋아할 걸세.- -적반하장이라더니 이놈이 그 꼴일세. 네놈을 생각해서 먼 길마다 않았더니 이거 꼬락서니하고는.- 선한 눈빛들이 학방사 허공에 반딧불처럼 날아다닌다. 송송 별들이 돋기 시작했고 풀벌레 소리가 적요한 가을을 울린다. 미륵전에 들렀다. 미륵석불이 돌아앉아 귀지를 파며 딴청을 하다가 정색을 하였다. 백팔 배를 하고 요사채로 갔다. 모감주 열매로 만든 염주를 돌리고 있던 정수 스님이 반갑게 맞이한다. -멀리서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잘 오셨소. 그래, 거사의 새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굶어죽지 않을 만큼 먹이를 줍니다.- -그래서야 언제 꺼내겠소.- -몸집을 줄어볼까 합니다.- -굶어 죽일 작정이오.- 말 꼬랑지에 관심이 없는 땡추가 입을 열었다. -이곳 미륵석불이 영험하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한지요?- 정수 스님이 땡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건 사람마다의 마음가짐이 아니겠소.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요, 처처(處處)가 도량일진대 여기에 계신 미륵석불만이 영험하시겠소.- 병에서 꽥꽥거리던 새가 모가지를 내밀려고 안간힘을 쓴다. 대가리를 꼭 눌렀다. * -소승이 밤길을 걸어가다가 그만 헛발을 디뎌 언덕에 떨어지게 되었소. 마침 길옆에 작은 나무가 있어 거기에 매달렸지요. 밑을 보니 깜깜하여 끝이 보이지 않고 올라가려고 하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소. 날 새기까지 버티기에는 힘이 빠져 견딜 수가 없었다오. 그대들이라면 이 난관을 어떻게 하시겠소?- 뭘 주고자 하는 걸까. 땡추가 첫 번째 매를 맞았다. -그래도 죽을힘으로 날이 샐 때까지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가 뽑히면 그때는 어찌 하겠소.- -…….- 영아가 두 번째 매에 손을 내밀었다. -소리를 지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면 기운이 더 빠질 텐데요.- -…….- -시주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아예 종아리를 걷었다. 놓으면 형체도 못 찾을 것이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버틸 자신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지 않은가. 새 한 마리 꺼내기도 벅찬 나를 영아와 땡추가 쳐다보고 있으니 어쩔거나 똥 막대기에 똥꼬를 갖다 댈 수밖에. -새 꼬랑지를 잡겠습니다.- -허허, 그래서야 새 꼬랑지가 어디 남아나겠소.- -새 모가지라도 비틀겠습니다.- -새타령 자주하면 새도 죽고 시주 또한 죽을 것인데도 말이오.- -…….- 걸렸다. 알음알음으로 대들다가 몽둥이로 박살이 났다. 똥 막대기에 육신이 꼬치가 되고 다리 몽뎅이가 뚝뚝 부러졌다. -그냥 놓으면 되는 것을, 집착을 버리면 발아래가 바로 평지인 것을. 생사가 한판 꿈인데 꿈을 꾸면서 꿈속에서 헤매니 꿈을 깰 수가 없지요. 나무서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실상도 허상도 둘(二) 아닌 오직 하나(一)에 이르고자 할 뿐. 건넜으면 버려야지. 집착이 사람을 잡는구나. 방하착(放下着)이라. * 무거운 공기를 영아가 가만히 흔들었다. -스님은 무슨 인연이 있어 학방사 중창불사를 하시게 되었습니까?- -다 부처님의 원력이지요. 소승이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꿈을 꾸었지요. 환한 빛으로 싸인 부처님께서 남쪽에 있는 학방사로 가서 새로이 법당을 지으라고 하기에 무작정 왔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무형문화재인 최기영 대목장이 같은 날 같은 꿈을 꾸고는 나를 찾아 왔어요. 그래 부처님 원력만 믿고 빈손으로 시작하여 십 년 만에 대웅전과 미륵전과 요사채를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거지요.- 정수 스님은 가부좌를 풀고 그때까지 돌리고 있던 염주를 놓고 합장을 하였다. 엉겁결에 따라 합장을 하였다.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스르륵 스르륵 대숲이 울었다. 부엉이 소리가 깊어가는 밤을 보채고 있었다. * -소승이 이곳으로 와보니 폐사 직전의 대웅전 옆에 무덤이 하나 있더이다. 나는 무슨 까닭으로 대웅전 옆에 무덤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우선 무덤을 이장하고 불쌍한 영혼을 위해 천도제를 올렸지요. 그런 후 대웅전 옆에 무덤을 쓴 이 괴이한 행위를 수소문한 끝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절 아래 천석지기 부자가 있었는데 자식이 생산되지 않아 애를 태우던 중 우연찮게 계집종을 건드려 아이를 갖게 되었지요. 부자는 계집종에게 사내아이를 낳아 준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고 약속을 했지요. 열 달이 지나 사내아이를 낳은 계집종이 말하기를 ‘나는 이제 절에 들어가 살고 싶으니 학방사를 새로 지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부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 해 돌림병으로 계집종이 죽자 소원대로 절에 살라면서 대웅전 옆에 무덤을 썼더라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인연을 악연으로 만든 부자는 그 자식도 죽고 패가망신하였다는 겁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들이 자신도 모르게 짓는 악업에 대한 경계하라는 이야기겠지요.- * -아이들이 장난으로 땅에다 불상을 그리거나 작은 돌로 탑을 쌓는 그 인연으로도 업이 일시에 소멸된다고 하지요, 또 어떤 사람이 꽃 한 송이를 부처님께 공양한다든지 합장을 하거나 머리만 숙여도 위없는 공덕으로 견성을 이룬다 했지요. 그대들은 본래 심신이 착하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좋은 인연을 쌓아가도록 하세요. 참, 소승이 어릴 적에 언뜻 지나가는 말로 이 학방사를 창건하신 스님이 어머니 집안 윗대 어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답니다. 나무서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 손맛을 느끼고자 무수히 잡은 감성돔이 뇌리에서 요동을 친다. 가슴지느러미를 파닥이며 물을 박차고 올라오는 감성돔을 볼 때마다 희열하던 악업의 빚을 생생세세 어떻게 다 갚겠냐며 대가리 눌린 새가 날개를 치며 꽥꽥거린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웠다. 초여드레 달이 기운 하늘엔 푸르고 흰별들이 수천만 년의 세월로 빤짝거리고 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이제 버릴 수 있겠다. 너도 나도 미륵석불도 병속의 새까지도 한없이 용솟음치는 환희심마저도. * 남전 늙은이가 세상 인연이 다되었다. -내가 죽은 뒤에 절대로 나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의 스승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하겠느냐.- -근본으로 가셨다고 하겠습니다.- 남전 늙은이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벌써 나를 더럽히는구나.- 다 버렸는데, 속옷까지 홀랑 벗어 던졌는데, 늙은이가 새도 모자라 이제는 무(無)로 사람을 아예 죽일 작정을 하는구나. 허허. * * [작가 노트] 하동 학방사를 찾아가는 여정
하동지역에 관한 소설 한 편을 써보라는 회장의 제의에 성큼 대답은 하였지만 실상은 막막하였다. 하동에 특별히 연고가 있었거나 절친한 지인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실없는 치기였음을 오회(悟悔)하였다. ‘예’라는 말의 무서움을 이번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그리 없었던 것 같았다. 어찌하겠는가. 이 또한 삶의 부분이고 인연의 자락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께 의탁하는 심정으로 구하니 닿은 연(緣)이 학방사(鶴芳寺)라. * 우연찮게 학방사에 관하여 동기생으로부터 얻어 들었다. 그는 하동군 양보면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종종 학방사로 소풍을 갔었는데 폐허의 절집을 지키는 미륵석불이 유독 그를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 나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 편 소설을 그리고 원고를 메워갔지만 한 번도 학방사를 찾지 않은 허수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감을 앞두고 사천 하 선생, 김 선생, 마산 김 선생과 동행하여 학방사를 찾았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개인 늦가을 경개(景槪)는 티 없이 맑아 먼 산 단풍이 장엄하니 수미산이라. * 학방사는 아담하고 정갈하였다. 영험하다는 미륵석불은 노리개 삼아 한낮 볕살을 굴리고 있었고, 미륵전 앞 옹달샘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한 조각을 띄우고 있었다. 고요가 설법하니 화엄장 세계가 펼쳐지고, 붉은 낙엽 한 잎 떨어지니 천지가 진동하네.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서가모니불 *
승만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경남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경남문인협회, 경남소설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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