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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정씨(草溪鄭氏)의 관향인 초계(草溪)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동부의 옛 군현의 지명으로 풀이 자라는 늘푸른 시내라는 뜻이다. 시냇가에 흔한 갈대가 우거질 경우 노계(蘆溪)요, 꽃이 우거지면 화계(花溪)요, 소나무가 우거질 경우 송계(松溪)가 된다.
시조 광유후(光儒侯) 정배걸((鄭倍傑 ; ?~1051)은 고려시대 초계 사람으로 1017년(현종 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종(文宗) 때 예부상서와 중추원사를 지냈다. 사학인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종 이후 개경 12사학 중 하나인 홍문공도는 12공도 중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와 함께 가장 융성하였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유가(儒家)의 대가요, 백세의 존사(尊師)라 일컬었다.
홍문광학 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중 상주국 광유후(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에 추증되었고, 초계군(草溪君)에 봉하여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정배걸의 7세손되는 정수기(鄭守琪)는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삼별초의 항쟁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때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 공을 세워, 1280년(충렬왕 6) 고려 조정에서 품고하여 원나라 황제로부터 총관(摠管)의 직책을 받았다. 1316년(충숙왕 3) 변경에서 그가 세운 공으로 고향인 초계가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초계 정씨는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등 크게 5파로 분파되었다.
옥전서원 (玉田書院)은 시조 정배걸과 2세 정문(鄭文 ; 1051~1106)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정문은 고려 숙종 10년(1105) 형부상서(刑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임명되었고, 검교사공(檢校司空)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사후에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特進左僕射參知政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서원은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소재한다. 조선시대 서원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지정되었다(지정일 ; 1993.12. 27) 인근에는 가야시대 다라국 옥전고분군과 출토된 유물이 전시된 합천박물관이 있어 둘러볼 수 있다.
초계정씨의 후손 5파 중 첫째 큰집 가닥인 내급사공파, 천호장공파와 둘째집인 대제학공파는 경기도 광명, 충청북도 음성, 강원도 횡성, 전라북도 순창 등 일원에 세거하고, 셋째 끝집인 박사공파와 대사성공파는 경남의 합천과 의령, 거창 등 일원에 세거해 왔다.
임진왜란(1592~1598) 7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남의 남부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초입으로 전란 내내 육전의 최전방 격전지였다. 전쟁에서 이순신, 곽재우, 정인홍, 권율, 정기룡, 김시민, 조헌처럼 주장이나 의병장은 아닐지라도 분연히 일어나 창의 기병으로 충렬을 바친 인물이 너무나 많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김유신, 김춘추, 계백, 서희, 강감찬, 최영, 김종서, 최윤덕, 남이, 이순신, 류성룡 등은 역사에 크다란 족적과 명성을 남긴 주장과 주역들이다. 찾아보면 우리나라의 전란사에는 큰 족적을 남겼으면서도 이름이 주장 아래 가려진 인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조선 중기의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는 주장 아래 수하장과 부장, 백성들의 애국애족의 헌신과 희생이 없고서야 어찌 주장의 전승이 있었겠는가! 근현대사의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국군파병 참전도 그러하다.
'2016.8.25 임진란위훈록 7권 발간 기념행사'를 기하여 임란 때 창의 기병하여 전선의 선봉장, 돌격장으로 목숨을 초개와 같이 희생시키며 힘써 싸웠으나 주장의 공훈에 가려진 좌막과 부장, 수하장의 공훈을 발굴하여 그 이름을 들추어내는 데 의의가 있다. 현재까지 임진왜란사에는 주장의 이름만 거론되어 온 게 사실이다.
초계정씨 5파 중에서 임진왜란 충의 충절 위훈자는 사료에 의하면 천호장공파는 1인, 내급사공파 1인, 대제학공파 5인, 박사공파는 9인, 대사성공파는 8인으로 초계정씨에는 모두 24인 임진란 공훈자가 있다.
초계정씨 임진왜란 위훈자를 분별의 편의상 시조 광유후(光儒候) 홍문공(弘文公) 정배걸(鄭倍傑)로 부터 세계(世系)를 부여하여 발현 열거한다.
내급사공파 1인.
20세 공두공(公斗公) 정국추(鄭國樞) ; 임진왜란 때 공훈으로 부정(副正)을 제수, 여지승람에 사적이 실렸으며 도장사(道莊祠)에 추배되었다.
천호장공파 1인.
19세 군서공(君叙公) 정예남(鄭禮男) ;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녹훈되었다.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대제학공파 5인.
17세 매헌(梅軒) 충정공(忠貞公) 정이겸(鄭履謙) ; 임진란 때 곽재우 의병장을 따라 창의 기병 1593년(선조 26) 6월 진주성 함락에서 순절, 호조참의에 증직, 숙종조에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세 충숙공(忠肅公) 정유일(鄭惟一) ; 곽재우 장군을 따라 창의 기병 공훈, 1593년(계사년) 진주성 출진에서 순사, 숙종조에 시호 충숙공을 받았다.
18세 응길공(應吉公) 정유설(鄭惟說) ; 임란 때 성현찰방(省峴察訪)을 지냈으며 창의 기병에 참전, 배위 전(全)씨 부인은 임란 때 왜군에 항거하다 순절(殉節)한 열녀(烈女)이다. 순절 열녀비가 있다.
18세 계봉(季鳳) 충절공(忠節公) 정석조(鄭錫祚) ; 임진왜란에 곽재우 장군을 따라 창의 토적 공훈, 공조참의 증직, 시호 충절공을 받았다.
18세 충렬공(忠烈公) 정석지(鄭錫祉) ; 임란에 형 정석조와 같이 창의 기병하여 공을 세웠으며, 시호 충렬공을 받았다.
박사공파 9인.
14세 정응구(鄭應龜) ; 중봉 조헌의 문인으로 금산 칠백의사의 한 분이다. 청주성을 회복하는 대첩을 거두고 금산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순사하였다. 청주 강외면 양지촌에 정각이 있다.
16세 계암공(溪庵公) 정수(鄭守) ; 충익공 곽재우 장군과 창의 계사년(1593) 진주성싸움 함락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녹권을 하사 받았다. 계암사(溪庵祠)에 향사되었다.
16세 정연(鄭演) ; 곽재우 장군의 독후장(督後將)으로 기강(岐江)싸움에서 공훈, 사적이 충익공 창의록에 실렸고, 의령 충익사에 십팔장과 함께 배향되었다.
16세 정암(正庵) 충숙공(忠肅公) 정석희(鄭錫禧) ; 육도삼략 등 병서에 깊은 조예로 곽재우 장군과 창의 기병하여 공훈, 문학과 필법이 비범하고 시문에 뛰어나고 좌승지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증직, 시호 충숙공을 받았다.
17세 영풍정공(詠風亭公) 정임(鄭紝) ; 임란 때 김송암(金松庵)과 같이 창의 공훈을 세웠다.
18세 정의국(鄭義國) ; 경북 영일군 청하에서 창의 기병하였다. 공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하마비를 하사 받았다.
18세 일재공(逸齋公) 정치순(鄭致淳) ; 임진란에 창의 기병으로 1593년(계사년, 선조 23)진주성싸움에서 두 아들 정의룡, 정예룡과 같이 장렬히 순절하였다.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9세 정의룡(鄭義龍) ; 임란 때 진주성싸움에서 의병으로 나가 부친 정치순, 아우 정예룡과 함께 분전하다가 장렬히 순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9세 일암공(一嵒公) 정예룡(鄭禮龍) ; 초유사 학봉 김성일의 의병에 호응하여 조종도, 이로 등과 함께 격서를 전하고 창의 기병, 형 정의룡, 사위 변덕홍(卞德弘), 부친 정치순(鄭致淳) 등 4인이 모두가 6월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하여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대사성공파 8인.
14세 송암공(松岩公) 정담수(鄭聃壽)장군 ; 임란 때 창의 기병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녹훈한 녹권(1605년, 선조 38년에 발간)을 하사 받았다. 후손이 약한고로 사적이 묻힌 게 안타깝다.
15세 정질(鄭晊) ; 망우당 곽재우 수하장 18장 중의 한 분으로 조군 직책, 기강전투 승전지(함안군 대산면, 의령군 지정면, 창녕군 남지읍이 접하는 낙동강과 남강의 합강 지점, 현재도 기강나루터 지명이 있다)에 있는 십팔장보덕비(十八將報德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임) 중의 한 사람, 의령 충익사에 향사되고 있다.
15세 정경(鄭璟) ; 초유사 학봉 김성일과 함께 창의 기병으로 공훈하여 학봉의 문집 개록장(開錄狀)에 그 공적이 상세히 실려있다.
15세 삼송당공(三松堂公) 정방준(鄭邦俊) ; 학봉 김성일을 따라 창의 기병하여 산청 단계진에서 전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는 화왕산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사적이 김학봉집 창의록(金鶴峯集 倡義錄), 망우당동고록(忘憂堂同苦錄) 등에 실려있다. 배위 초계변씨는 왜적에 항거 순절하여 조정에서 그녀의 순절을 정려(旌閭)하여 그 정절을 기렸다.
15세 수재공(壽齋公) 정구룡(鄭九龍)장군(1563~1598) ; 충의공 토왜대장 정기룡의 수하장으로 7년간의 싸움마다 최선봉이 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정기룡 장군의 63접전 63전승의 불패의 신화 뒤에는 좌막 정구룡과 별장 한명련(韓明璉)이 있었다. 임란 말기인 1598년(선조 31) 9.28에 순절하였다. 임진왜란은 그해 11월에 끝났다. 선무원종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현재까지 녹권을 종중에서 411년간 보유하고 있다. 경남 함안 군북 유현에 경충재(景忠齋)를 두고 향사한다.
16세 원화공(元和公) 정진선(鄭震善) ; 아우 임란공신 정진철을 도와 창의 기병하여 가산으로 군사 보급을 후원하였다. 임란 후 자신은 처사로 자처하고 공을 나타내지 않고 전공을 아우 정진철에게 돌렸다.
16세 원숙공(元叔公) 정진철(鄭震哲) ; 구암(龜嵓) 박엽(朴燁)과 송재(松齋) 조계명(趙繼明) 3공이 더불어 합심 창의 기병하여 물령 아치 등지에서 적병 격퇴, 정유재란에는 악견산성에 의거하여 적병 수만명을 격퇴 시켰다. 이 사적이 박매계문집(朴梅溪文集), 조송재문집(曺松齋文集), 참판 노극성가승(盧克誠家乘), 허창주시집(許滄州詩集) 등에 실렸다. 임란 후 명천부사와 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지냈다.
16세 정덕희(鄭德希) ; 임란 때 창의 기병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대구 판관을 역임했다.
박사공파 9인과 대사성공파의 임란 공훈자 8분 합 17분 중 7분은 전쟁 참전(접전) 중 30대 초반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받쳐 순절했거나 후손이 몰락(약)한 고로 나라에 상소(소지)하거나 표충하지 못하여 시호는 커녕 호마져 없는 경우도 많았다.
5파 중 끝파인 박사공파, 대사성공파는 시조의 관향을 연고로 옛 합천에 편입 병합된 초계군과 삼가군을 중심으로 주변 인근 의령, 함안 등지에 흩어져서 세거하고 있기에 이번 임진란위훈록 발간을 계기로 합천 대병면 성리(합천댐 아래) 소재 '임란창의사'에 선조들이 어떻게 들어있는지도 궁금하여 이틀 뒤인 2016.8.28(일)에 참배차 방문하였다.
합천군 창의사에는 박사공파의 9인은 한 분도 없고, 현재 대사성공파의 정진철(鄭震哲), 정방준(鄭邦俊), 정질(鄭晊) 3분만이 봉안되어 있었다. 대사성공파는 합천 쌍백면과 삼가면, 가회면 등 옛 삼가군의 일원에 세거하는 거족의 집성촌으로 임진왜란 참전 공훈자는 8인이나 된다.
창의사는 임진왜란 때의 합천 지역 의병사를 재조명하고, 합천을 중심으로 경상우도의 의병(義兵)을 일으켜 모은 수많은 창의장(倡義將)과 왜군을 격퇴하여 '영남 의병장(嶺南義兵將)'의 호(號)를 받은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1535~1623, 서산 정씨 ; 瑞山鄭氏)을 비롯한 관병과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라 한다.
내암이 들어갔다면 경상우도는 물론 나아가 경상좌우도(영남) 임진란 의병의 성지이다. 출발 깃점의 깃대가 합천군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합천군에 국한된 임진란 창의사'라는 말은 역사를 모르는 좁은 소견이라고 보여진다. 내노라하는 학계의 거창한 사학자가 아니라도 중등학교의 역사에서 우리가 기초적으로 그렇게 배워왔다.
민초가 외람되이 첨언한다면, 민족주의사관(民族主義史觀, 통칭 ; 민족사관)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우수성을 강조한 역사관으로 기본적으로 근저(밑바탕)에 당연히 깔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글로벌 세계사(世界史)의 중심(무대)에서 창조적(創造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인 통찰사관(洞察史觀, 通察史觀)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여진다.
합천군이 사업비 61억 원을 투여해 건립하여 2001년 5월 10일 개관하였다. 초계정씨 대사성공파 물계정종중에서 당시 종중의 재정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사성공파 종회장 정현준(작고함)께서 민간의 성씨 별 문중(종중) 부담금 3,000만원을 1등 선착으로 쾌척했다고 한다.
그런데 종중에서 묻혀진 임란의 충신, 충렬, 열사, 의병 사적을 제대로 찾아 발현하지 못하여 옛 삼가군 세거의 대사성공파 하나만 보더라도 임란공훈자 8인 중, 5인의 위훈자가 누락되어 있었다. 창의사 사무국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창의사에는 113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합천임란창의사적비'를 근찬한 성균관장 최근덕과 근서한 정도준은 모두 합천 쌍백면 출신이고, 특히 쌍백은 초계정씨 대사성공파의 집성촌으로 서예가 정도준이 그 후예라서 솔선수범으로 그랬다고 한다.
빈약한 종중 재정이었지만 있는 돈 없는 돈 기금을 탈탈 긁고 털어서 타 성씨 문중에 앞서 시원스럽게 선뜻 내었다고 한다. 그해 수곡 수입도 빈약하여 고려조 울산대도호부사와 대사성을 지낸 대서성공파 정태화(鄭太華) 예하 선산의 벌초와 묘사를 못 지낼 판이었다고 한다.
이번 합천 임란창의 창의사 참배를 계기로 합천 초계를 관향으로 하는 초계정씨의 24공훈자에서 몇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합천의 초계가 관향인 초계정씨로선 전체적으로는 임진란 공훈 24인 중 21인이 누락되었다고 보면 된다.
항간에는 합천 임란창의사에 누락된 인물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려면 1인당 500만원의 기금을 내어야 한다고 들린다. 누구의 제안인지는 몰라도 크게 잘 못된 발상이다. 엄청 큰일 날 일이라고 보여진다.
나라를 위한 충렬로 초개같이 목숨을 바친 임진란 위훈자와 그 후손을 모독하고 욕뵈는 행위라고 본다. 꼭 필요하다면 자발적 기부 기금이어야 한다. 조건부는 말도 안 된다. 일종의 위훈자 매관매직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끝으로,
합천군 쌩책면 성산리에 시조 광유후의 옥전서원 경내에 큰 뜰이 있으므로 임진왜란의 위국충렬정신을 후세에 고양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라도 임진왜란공훈초계정씨이십사장충렬비(壬辰倭亂功勳草溪鄭氏二十四將忠烈碑) 혹은 초계정씨임진왜란공훈이십사장보덕비(草溪鄭氏壬辰倭亂功勳二十四將報德碑)를 세우기를 후손의 한 사람으로 초계정씨 서울 중앙종회에 외람되이 제언한다.
2016.8.25(목) 국립 창원대학교 종합교육관 대강당에서 개최한 임진란 7주갑 임진란 위훈록 7권 발간 축하연 행사를 주최한 (사)임진란정신문화 선양회(회장 ; 류한성)와 주관한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경남지회(지회장 ; 박홍기)의 행사장 사진과 합천임란창의사(陜川壬亂彰義祠)를 2016.8.28(일) 참배하여 방명록에 서명한 후 경내를 둘러보며 사진을 촬영하였다.
합천 임진란 창의사에서 김해 장유로 돌아오면서 중간에 의령 대의면(大義面)에 들러 저녁(금오식당) 식사 후 마당으로 나오다가, 모처럼 대의(大義)의 오색(서양 기독문화권은 일곱 빛깔이라 함) 무지개를 보았다.
중국의 황사 스모그로 한반도의 대기가 오염된 데다, 도회지에 살아서인지 하늘의 무지개를 본지가 한 40년은 된 것 같다.
※註 ; 다음은~
424년 전 임진왜란(1592~1598)의 창의 기병의 순절 순사와 베트남전쟁 국군파병(1564~1973 ; 비둘기부대,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의 참전 전몰장병은 시대는 달라도 같은 전쟁사이기에 맨 아래에 관련 신문보도 사진 3장를 첨부한다.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채명신(중장 예편)과 이세호(대장 예편)는 전쟁사의 주장(主將)이다.
☆☆☆2016.11.28자 조선일보 ;
''장군, 그리운 병사들 곁에 눞다''
고 채명신 예비역 중장 ''병사 묘역에 묻어달라'' 유언
''전사자(戰死者)묘역서 눈물, 초대 주 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1966년 7월 일시 귀국해 서울 동작동 서울현충원의 월남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눈물을 닦는 모습이다''
☆☆☆2016.11.28자 중앙일보 ;
''나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해 이곳에 묻힌다''
장군 유언 따라 병사묘역에
☆☆☆21016.11.29자 동아일보 ;
''참군인 채명신, 그리운 병사들 곁에 영원히 잠들다''
제2병사묘역 앞줄에 단(壇)도 없이 누워
[출처] 임진란위훈록 합천 임란창의사와 초계정씨 임진란24충렬|작성자 민초 농계 정봉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