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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더 2:19–3:6
제목 : 왜 그랬어, 모르드개?
일시 : 2017. 11. 19.
I. 여는 말
1. 이 본문을 읽으면서 나는 세 가지 질문이 생겼다. 하나는 독재자인 왕의 암살 모의 사건을 고변했는가? 다른 하나는 왜 왕에게는 절을 하면서 하만에게만 절하지 않았을까? 세 번째는 왜 이 대목에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밝혔느냐는 것이다.
2. 나에게는 이 본문이 내게 그걸 말하는 것 같고, 나는 그걸 들어야 한다. 또한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그 외의 것들은 이 세 질문에 자연스레 풀리거나 한데 엮여져 있다.
II. 본문 설명(19-23절)
1. 첫 번째 질문을 다루는 본문을 보자. 적국이자 이국이요, 폭군인 왕에 대한 모르드개의 충성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수양딸의 남편이라는 것.
2. 저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이 본문에서 소소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두어 가지 있다. 그것부터 보자.
하나는 19절인데, 너무 뜬금없다. 처녀들을 두 번째 소집했다는 부분인데, 김윤희교수가 잘 정리한 몇 가지 해석을 봤지만,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틴데일 것이나 Interpretation 주석을 봐도 신통치 않다.
내 나름의 대답은 이러하다. 일단, 애매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다음으로는 처녀 소집 보다는 그 다음 문장인 모르드개가 대궐에서 일을 맡아 보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요지는,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기에 그녀의 (수양)아버지인 모르드개가 관료가 되었거나 승진했을 것이고, 그가 맡은 일이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타당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가 이전에는 어떤 관직을 맡지 않았다는 것과 본문에서 그가 처음 관직에 올랐다고 명시적으로 말해 주어야 하는데, 이 또한 확정하기 어렵다. 새번역에는 처녀를 소집할 때, 그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상상력, 아니 역사적 가능성에 주목했다. 우리 조선의 경우라서 딱히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정이라고 본다. 왕의 입장에서는 왕비의 가문이 너무 처져도 안 되고, 너무 강해져도 안 된다. 모르드개는 ‘부원군’이 아닌가? 왕의 장인이다. 장인에게 적절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직위, 한직도 아니고 요직도 아닌 자리에 앉히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3. 다른 하나는 20절이다. 여전히 모르드개는 자신의 ID를 숨기라고 에스더에게 요청한다. 그리고 에스더는 그 말을 순순히 따른다.
유배지에서 소수자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라서 민족과 종교를 감추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2장 1-18절에서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본다.
조금 다른 것을 보자. 우리는 여기서 한편으로, 에스더의 성품이 여전히 지혜롭고 그러면서도 순종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다른 한편으로 생존 전략이다. 이 둘은 연동되어 있다.
구중궁궐에 혈혈단신으로 들어갔다. 명문가 집안도 아니다. 유대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지만, 세력이랄 것이 전혀 없다. 그런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자폭이다. 자멸의 길이다. 페르시아에 패전국가의 포로 출신이 왕비가 되었다? 그러기에 생존전략이고, 그걸 알아들으니까 지혜롭고 순종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곧 이어 등장하는 본문에서 모르드개가 자신이 유대인임을 공개하는 것과 이어진다. 그래서 그 본문에서 모르드개의 행동에 의문을 품게 한다. 여하튼, 그것은 그 곳에서 다루도록 하자.
4. 21절이다. 문화의 차이가 성경을 읽을 때, 도움도 되지만 장애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대궐문이라고 하면, 영화나 사극에서 보는 성문 앞을 연상한다. 사람들이 오가고, 시장도 서고, 가끔, 유생들이 고개를 조아리고‘전하,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며 연좌농성하는 그런 공간으로 여긴다.
고대 근동에서 성문, 그것도 대궐문 앞은 우리의 것과 다르다. 이스라엘과 페르시아가 같다고 단언할 수 없겠지만,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 이야기가 기록된 사무엘서이다. 그곳에서 압살롬은 다윗에게 재판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민심을 얻었던 곳이 바로 대궐문 앞이다. 또 하나가 룻기 4장인데, 마을의 장로들이 송사도 다루고, 마을 일도 의논하는, 민회와 같은 곳이다.
이곳의 성격을 유대인인 요람 하조니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왕궁문은 도성의 광장으로 전국 각지에서 온 민원인들이 왕과 대면하기 위해 대기하거나, 용무를 가지고 왕을 만나던 장소다. 별도의 입법 기관이나 의회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요한 국사도 그곳에서 처리되었다. 물론 왕궁 문에 ‘정기적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국회에 ‘의석’을 차지한 국회의원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모르드개는 이때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한 인사로, 궁정의 업무들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50쪽)
저 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것은 이후에 펼쳐지는 상황이 그 증거다. 단적으로 말하자. 모르드개가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다고 두 내시의 시해 음모를 알았단 말인가? 두 내시, 빅단과 데레스는 왕의 최측근 비밀경호원이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세력과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 가려 뽑아 훈련시켜 왕의 주변을 호위하게 한 자들이다. 출신성분이 모르드개랑 애시당초 다르다. 그런 일급 비밀 정보를 모르드개가 알려면, 모르드개가 나름 중간 이상의 고위직에 있어야 설명이 된다.
불행하게도 많은 주석들이 우연히 들었다고 한다. 아이고. 그게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란다. 그렇게 말하면 틀린 것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맞는 것도 아니다. 하나도 틀리지 않으니 하나라도 맞는 것도 없다.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의 논리를 빌리면, 틀릴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이 없으면 그건 도그마다. 과학이 아니다.
지금 나는 우연과 섭리라는 개념이 이 본문에 맞느냐고 묻는 거다. 우연히 왕비가 되고, 우연히 시해 음모를 알게 되고..... 말을 말자. 그런 식으로 성경 읽으면, 그런 식으로 우리도 살라는 건데, 어쩌라고? 로또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네 번, 그렇게 연속으로 당첨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당신은 그런 드라마를 보겠는가? 채널 바로 돌린다. 그런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글쎄, 식상하고 재미없고, 조금은 화가 난다. 그런데 왜 나는?
5.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다. 나는 모르드개가 그런 지위에 있다고 그런 정보를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적으로 노력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왕을 살해하는 음모의 실체가 모르드개에게 저절로 굴러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다.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모르드개가 알았는가? 첫째, 그런 고위직과 친분 관계를 맺을 만큼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고, 둘째는 그가 나름 탄탄한 정보력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그는 이곳저곳에 자신의 끄나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보 요원들이 왕궁와 정부 내의 관료들에 관한 정보를 캐내고 정기적으로 모르드개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셋째, 그 보고를 받고 저 두 사람의 행동에서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추적하고 그걸 기반으로 에스더에게 보고하고, 에스더는 모르드개 이름으로 왕에게 모반 사건을 알려주었다.
이 과정을 드라마로 만들면 정말 재미있겠다.
6. 나무에 매단 것은 추후에 하만이 나무/장대에 매달려 죽은 것을 암시하는 하나의 복선이 될 것이다.
7. 그러나 이상한 것은 궁중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종결되었다는 점이다. 주석들을 보니,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제국이 상을 주는 일에는 관대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상식적으로 큰 포상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에스더서가 과장과 과시, 지나침이라는 문학적 특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이다.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데 유독 이 부분에서는 모자라고 부족하다.
나는 두 가지로 추정한다. 하나는 하만을 제거하는데 이 궁중실록이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이 실록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적 기교일 수 있다. 이것은 주석에 다 나오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나만의 추정인데, 왕이 의도적으로 모르드개를 견제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모르드개가 반역자를 제거하는 능력/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왕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에스더에게 든든한 뒷배가 있구나, 그랬을까? 적어도 ‘어, 저것 봐라?’는 되었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정보력과 인맥, 실력을 갖추고 부상하는 조짐을 보이는 친왕비파를 왕이 그리 좋아했을까? 얼마간의 견제를 했기 때문에 상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8. 이제 서두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모르드개는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가?
사실, 답은 간단하다. 왕의 안전이 곧 에스더의 안녕이다.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딸을 지키는 일이다. 왕이 건재해야 에스더의 미래가 있다. 현 정권의 안위를 유지하는 일은 모르드개에게 중차대한 과제인 것이다. 그러니 주변의 사람을 모으고, 인맥 관계를 넓히고, 왕에게 헌신하고 있다.
9. 그렇지만 여기서 멈추면, 이것이 성경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 그것을 말하고, 듣기 위함이 아니던가?
앞의 글에서 나는 유배지는 두 가지가 없다고 했다. 성전과 국가이다. 이제 국가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 부분은 예레미야, 다니엘은 물론이고 요셉까지 거슬러 가는 큰 이야기라서 요점만 말해 볼 참이다.
다시 말하건대, 국가가 없다는 말은 왕이 없고, 충성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조선 중후기의 유교 선비들처럼 이미 망한 명나라를 떠받들고 실재하는 제국인 청을 무시하는 그런 비현실적인 멍청한 짓을 유대인들은 하지 않는다. 하여간에,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체념과 순응, 저항과 투쟁의 양극단 사이에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택한다. 예레미야도, 다니엘도 그랬고, 에스더는 그 전형이다.
국가 혹은 왕을 어떻게 이해했기에 다니엘은 조국을 멸망시킨 바벨론, 그러니까 우리로 말하면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 제국의 충성스런 신하가 되었다는 말을 해도 될 만한 일들을 한다. 이름도 바꾸고, 의복도 바꾸고, 그곳의 학문과 전통, 문화를 습득해서 단연 최고 전문가가 된다. 그리고 승승장구해서 고위 관료까지 된다.
다시 묻는다. 그들에게 국가란 뭘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국가를 보자면, 하나님 나라는 국가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러기에 어떤 국가나 왕조도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에 절대적 지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국가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부이기에 나름의 지지와 참여를 하게 된다.
그 나라와 정권이 악하든, 선하든, 이중성을 지닌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말이다. 그러기에 1980년대에 유행했던 정치 용어, 비판적 지지가 딱 어울린다.
10. 존 요더는 내가 번역한 <제자도,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KAP)에서 국가는 참아 줄만한(tolerable)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단어를 요람 하조니도 사용한다. 그러니까 국가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 악과 무,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허용된 시스템이다. 그런 체제는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더 낫다. <필요하다면 좀 더 설명할 것>
그러기에 원조격인 요셉부터 다니엘, 에스더, 느헤미야 등은 그 국가가 선한지, 악한지를 묻지 않고 세계와 시민의 안녕을 위해 국정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이것이 모르드개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사악해 보이기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정권의 유지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베팅’한 것이다.
III. 본문 설명(3:1-6절)
1. 자, 이제는 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을 살펴보자.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왕에게 충성을 다했으면서도 왕이 특별하게 세운 하만에게는 굳이 절을 하지 않아 일을 이렇게 벌리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에스더에게는 함구하라고 해놓고는 정작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걸 밝힌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이 이 지경으로 커질지는 몰라도, 도리어 자신이 불리해진다는 것쯤은 알법한 데 말이다.
2. 나는 요람 하조니의 생각을 사용하면서도 내 것을 아주 조금 덧붙여 보려 한다. 정리하면 세 가지다. 정치적인 요인, 종교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이다. 대개 학자들은 뒤의 두 가지에 주목하는 반면에 하조니는 첫 번 것을 강조한다. 나도 첫 번째에 좀 더 무게를 싣는 것이 본문 해석이 맞다고 본다.
3. 1절을 보자. 개역개정과 영어성경을 보면, 그냥 단순히 ‘그 후에’(later)라고 되어 있는데, 새번역은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라고 번역했다. 그후에, 라고 했을 때의 그것은 내시들의 반역 사건을 가리킨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현 정권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권의 지지기반이자 최측근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은 그 성패와 상관없이 크세르크세스가 허약한 정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와스디 사건이 그랬다. 왕은 절대권력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무소불위의 힘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아내의 마음을 얻고, 최측근 경호원의 지지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비단 크세르크세스만의 일일까? 모든 독재권력이 그러할 것이다. 안에서, 내부에서, 강력한 지지기반층이 허물어지고 이반하면서 결국 파탄한다.
4. 자, 이럴 때에 왕들은, 권력자들은 대개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돌파하는가? 어리석게도 강성파를 등용한다. 정직하게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성의 있는 조치를 조금이라도 취했다면 탄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최근의 일이었다면, 30여 년 전으로 돌아가자. 자기 권력 지킨다고 국민들의 요구를 짓밟고 잘못된 헌법 지키자고 4월의 꽃피는 봄날에 부당한 질서를 수호한다고 공표했다가 결국 백기 비스무리하게 물러서지 않았던가.
이 왕도 마찬가지다. 왕이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의 신변과 안녕을 확보하고, 무수히 많은 이견들을 잠재우고 제국의 통일과 일치를 지킬 전사를 2인자로 등용하지 않았겠는가? 그가 바로 하만이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자신이 맘 속으로 생각만 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캐치하고 실천할 사람으로 세운 것이 하만이었다.
5. 이런 해석의 타당성은 일차적으로 ‘그후에’이었다면, 두 번째로는 다른 대신들 위에 두었다는 1절이다. 이 점을 요람 하조니는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에서 잘 설명해 준다. 1장과 2장 전반부까지, 왕의 주변에 신하 그룹들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간단히 써 줄 것>
다른 대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두었다는 것은, 그가 왕을 빼고 최고 지위에 등극했다는 뜻도 있지만, 이제 왕은 하만과 이야기하면 되는 거다. 왕에게로 향하던 언로가 하만에 의해 차단된 것이다.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소통되고, 그것을 왕이 경청하고 최종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이 거추장스러워진 것이다.
6. 이것이 하조니의 해석이라면, 나는 요셉 스토리에서 착안한 한 가지를 이 부분에 적용해보니 의외로 새로운 것이 보였다. 간단하다. 요셉이 일약 총리의 자리로 부상한 것은(한 번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왕과 신하들 모두가 동의한 것이다. 그럴만한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재앙을 해결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고 그것이 당시 권력층/지도층들의 호응을 얻어냈던 것이다.
다니엘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 존재를 몇 번이고 증명해냈다. 그것이 주변의 질투와 시기를 불렀지만 말이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에게, 벨사살에게도 중요되었다. 그는 그럴 만한 대접을 받을 실력을 갖추었다.
최근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비서실이나 내각을 지명할 때, 국민 앞에 나와 왜 이 사람을 지명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언론에서는 후보자의 면면과 실력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러다가 부정과 부패가 들통나서 물러나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하만에게는 그런 묘사가 전혀 없다. 그가 무엇을 했고, 왜 그 중요한 포스트에 지명했는지를 성서는 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침묵한다.
나는 그가 아무 한 일이 없이, 소위 낙하산인사라고 본다. 연줄 인사, 정실 인사인 게다. 나중에 그가 실각할 때에 관료와 내시들의 움직임을 보면, 모반 사건 이후라는 것 등과 합하면 그런 그림이 그려진다.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은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라고 했다. 모르드개는 반 하만 노선에 선 것이다. 소통하지 못하고, 실력도 없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하만의 정치 노선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래서 왕에게는 절하지만 왕의 신하인 하만에게는 절하지도, 꿇지도 않았다.
7. 종교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은 웬만한 주석에 다 나와 있다. 그래서 아주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려 한다. 종교적인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되었고, 민족적인 것은 아말렉 출신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으로 설명한다. 대개 우상숭배를 종교적인 것으로 설명한 반면, 요람 하조니는 우상숭배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는데, 나는 그게 맘이 든다.
8. 저 세 가지를 모두 합해야 그림이 완성된다고 했다. 그 정점이 나는 유대인이다, 는 선언이다. 정치, 종교, 민족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하만 정권을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정권에 대한 그의 입장 표명이었던 것이다.
9. 여기서 <시민불복종>에 관해서, 그리고 불복종이 상당히 평화적이었다는 점은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나중에 자료를 보충할 것이다. 그 요지를 국가에 대한 모르드개의 태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10. 하만의 짓거리는 참으로 폭력적이다. 인종 청소를 기획하다니! 이는 자기 개인의 수치를 모든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로 확대시킨 크세르크세스를 빼다 박았다. 그 죄악에 있어서 감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폭력적인 것이 하만이다. 이런 정치를 하니까 모르드개가 처음부터 반대하였던 것이다.
IV. 닫는 말
1. 위의 논의를 정리하고
2. 구체적인 적용이 있으면 추가할 것.

첫댓글 좋은 글을 이제 보내요!
좋은 묵상 나눔 감사합니다
에공, 저는 이 댓글을 이제야 보네요 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