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元曉)는 뛰어난 학자이며 사상가이지만, 정작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파계승’으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강하다. 그리고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닫고 당 유학을 중단한 일화, 요석공주와의 사건 이후 ‘무애(無碍)’춤을 추며 ‘나무아미타불’ 염송을 백성들에게 가르친 일 등이 여러 서사 장르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도 원효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에게 덧씌워진 ‘성승(聖僧)/파계승(破戒僧)’이란 모순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 고승들조차 존경했던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던 그가 오계(五戒) 가운데 하나를 깨뜨린 파계승의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원효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는 중국 유학을 하지 않고도 부처님의 진리를 확철히 깨달은 주체적 지식인인 동시에, 계율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면서 자신이 깨친 진리를 못 배운 백성 눈높이에 맞춰 가르친 실천가이다. 원효가 태어난 지 1400년이 지난 오늘까지 널리 회자되는 것도 그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양극점의 한계를 넘나들며 무애의 삶을 실천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소설 원효’(한승원),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김선우) 두 편의 장편소설에 나타난 원효 상(像)이 각각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를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한승원 ‘소설 원효’에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치기 위해서는 기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설 원효’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권력을 쥐기 위해 벌이는 계략이 상세하게 서술되고, 특히 당과 모의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뒤 삼국을 통일하려는 김춘추가 반전(反戰)과 삼국 화평을 주장하는 원효를 제거하기 위해 딸 요석공주를 이용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원효의 입을 빌려 “우리 모두 기둥 깎을 도끼 자루가 됩시다.”고 외침으로써 ‘삼국유사’의 해석과 삼국통일을 위해 당과 손잡고 전쟁을 일으킨 김춘추·김유신의 행위를 함께 비판한다.
김선우의 소설은 제목에서 원효와 요석의 관계를 직접 드러내 작품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소설에서 원효의 노래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질서를 끊어 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미로 이해되고, 따라서 ‘자루 없는 도끼’는 ‘민중’의 의미로 재해석된다. 노래가 서라벌에 퍼지자 김춘추는 원효가 “지금 백성이 신라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의심하면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요석공주를 이용한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가 두 사람의 원력(願力)과 만남에만 초점을 맞춰 서사를 전개시킴으로써 원효의 무애행이나 화쟁사상에 대한 서술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작품의 서사 전개 방식을 암시한 터이므로 온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효 설화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원효가 지어 불렀다는 노래를 전해들은 무열왕이 “이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모양”이라고 해석했다는 일연의 기술(記述)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일연은 이 대목의 소제목을 ‘원효불기(元曉不羈)’라 하여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원효의 정신세계를 강조하고 있거니와, 그것이 하필이면 남녀의 육체관계를 암시하는 이야기라는 점은 오늘의 관점에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 사건이다. 작가들이 이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수긍이 되나, 그 일화만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불법을 실천한 승려 원효의 진면목이 가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현대소설에서 원효는 중국 유학을 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은 고승, 요석과의 육체관계를 회피하지 않고 파계한 뒤 스스로를 ‘복성거사’로 낮추고 하층민들과 어울린 무애인으로 즐겨 그려진다. 그러다보니 ‘대승기신론소’ 등을 저술한 학승의 이미지나 ‘화쟁 사상’을 주장한 사상가의 면모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가 실천했던 무애행이 불교의 올바른 깨달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작품을 통독하고 난 뒤에도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일반 대중에게 원효는 불사음계(不邪淫戒)를 지키지 않은 파계승이란 단순한 이미지로 기억될 뿐이며, 이런 이미지는 파계(破戒)가 오히려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이라는 그릇된 사고를 갖게 하는 요인이 된다. 어떤 소설에서는 계율에 철저한 청정비구보다 주색(酒色)조차 가리지 않는 승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 정진하는 참된 수도자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원효는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늘 새롭게 조명되고 평가되어야 할 귀중한 존재다. 그런 점에서 시대나 작가에 따라 전혀 다른 원효가 창조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더욱 권장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소설 속의 원효는 거대한 지식인이면서 정신의 자유인 원효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원효의 사상을 학술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원효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체유심조’ ‘화쟁’ ‘무애’ 등에 대해서는 작가 나름의 고민과 해석이 있어야 한다. 원효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은 것은 불교의 자력신앙의 특징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이며, 저잣거리로 나아가 하층민들과 생활하며 염불을 가르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성실하게 실천한 입전수수의 모범적 사례다. 우리가 원효를 기리는 까닭은 그의 사랑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걸출한 학자이자 경계를 뛰어넘은 고승이기 때문이다. 그는 삼국 쟁투가 가장 극렬하던 시기에 ‘화쟁’을 주창했고, 홀로 깨달음을 얻은 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민중 포교에 앞장 선 인물이다. 그의 화쟁사상은 민족·종교·이념·빈부·남녀 등 온갖 문제로 대립과 갈등을 벌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정신적 가르침이며, 무애행(無碍行) 또한 오늘날 지도층이 본받아 실천해야 할 행동의 지침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는 요석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지만, 원효의 사상과 행동을 좀 더 쉽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교훈을 주려는 작가적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