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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논평
선생은 《상서(尙書)》를 강하다가 채침(蔡沈)의 《집전(集傳)》을 읽을 때마다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말하기를,
“주자의 제자로 도를 전한사람으로서 면재(勉齋 황간(黃榦))를 제일로 치지만, 《집전》으로 본다면 구봉(九峯 채침)이 마땅히 제일이 될 것이다. 면재의 저술은 많이 보지 못해서 그 말한 바와 본 바가 어떤지 모르지만, 어찌 이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덕홍(李德弘)-
최응룡(崔應龍) 자는 현숙(見叔) 이 묻기를,
“형서(邢恕)는 스승 문하에서 죄를 입었는데, 그래도 그 제자로 꼽혔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뒷세상의 학자들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화숙(和叔)은 두 정자를 따른 지가 아주 오래었으나, 간사한 생각 하나 때문에 문득 제멋대로 하는 소인이 되고 말았으니, 학자로서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였다. -김성일(金誠一)-
허노재(許魯齋 허형(許衡))의 출처(出處)를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구경산(丘瓊山 구준(丘濬))의 무리들은 다 원나라를 섬긴 그의 잘못을 비방하지만, 그때는 오랑캐가 아직도 중화(中華)의 주인이 되어, 하늘의 이치나 백성들의 도리, 또 규칙ㆍ법칙과 문물이 거의 끊어져 없어질 형국이었으니, 하늘이 노재를 낸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노재가 만일 혼자만 착하게 세상을 잊고 일생을 마쳤다면, 하늘의 이치는 누가 밝혔을 것이며, 백성의 도리는 누가 바루었을 것인가. 천하는 마침내 오랑캐로 변하여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노재가 세상에 나온 것은 의리에 해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성현이 다시 나온다면, 그 의견은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허노재의 묘비에 왜 그 벼슬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평소에 벼슬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만일 벼슬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누가 권해서 억지로 벼슬하게 했겠습니까. 이것은 필시 그가 중화의 문화로써 오랑캐들을 변혁시키려 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요즈음 선비들은 대개 자기 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옛날 어진 이들을 논하려 하니 나는 모르겠다. 젊은이들은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ㆍ허노재ㆍ오임천(吳臨川 오징(吳澄))ㆍ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ㆍ길야은(吉冶隱 길재(吉再)) 같은 이들을 품평하여 모두 그르다고 말하니, 대개 서산이 동궁(東宮)에게 빈사(賓師 빈객으로 대우 받는 학자)로 있었는데, 그것이 어찌 제왕(濟王)의 신하란 말인가. 이런 일은 나는 잘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李國弼)-
구사맹(具思孟)이 사호(四皓)가 태자를 보좌하였던 것을 논한 글을 지어서 선생에게 질문하니, 선생이 비평하기를,
“잡고 놓으며 열고 닫는 데 있어서 눈이 높으면 손도 높다. 그러나 다만 이 일에 있어서는 매우 난처한 점이 있었다. 이미 지난 일로 말한다면, 여치(呂雉)는 진실로 한실(漢室)의 적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큰 죄악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고조(高祖)가 아직 오지 않은 화를 어찌 미리 알아내어 적(嫡)을 폐하고 서(庶)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이미 여의(如意)를 세웠으니, 장차 여치는 어떻게 처리할 것이었겠는가.그를 그대로 두면 둘 다를 온전하게 할 도리가 없고, 폐하든지 혹은 죽이든지 하자면, 이 죄목에 해당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고조가 바꾸려 하여도 마침내 바꾸지 못한 까닭이다. 오직 사호의 힘만으로서 그 뜻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장량(張良)ㆍ진평(陳平) 등 여러 사람들의 걱정일 뿐이었고, 자지옹(紫芝翁)이 눈썹을 치뜨고 소매를 흔들 때가 아니었는데, 이런 점에 경솔했기 때문에 마침내 두목(杜牧)의 비방을 받았으니, 그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글에서 사호를 비방하는 것은 옳지만 그렇다 해서 태자를 바꾸려고 한 것을 잘 생각한 일이라고 한다면, 타당할 것 같지 않다.”
하였다. 구사맹(具思孟) 《팔곡집(八谷集)》에 보인다.
묻기를,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이 사직을 중히 여겼다면, 비록 군사를 돌이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표(表)를 올려 답하고 조서를 받들지 않음으로써 사직을 붙들었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명령을 듣고 군사를 돌이켰더라도 오히려 왕차옹(王次翁)의 간악한 무고를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끝내 군사를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이것은 반역이다. 그러고도 어찌 금로(金盧)에게 죄를 물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이국필-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의 〈숙매계관(宿梅溪館)〉이라는 시를 읽고, 내심 호담암(胡澹菴)의 일을 괴상히 여겼더니, 《주자어류》에 기록하기를, ‘이미손(李彌遜) 자는 사지(似之) 도 좋은 선배였다. 이(李)가 호(胡)에게 말하기를, 「인생이 일마다 칭찬받을 수 없고, 다만 한두 가지의 좋은 일을 하면 좋다.」라고 하였다. 호(胡)가 뒷날에 이름과 절개를 잃어버린 것도 이 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였고, 그 문단의 위에서는, ‘호방형(胡邦衡)은 유식하다는 칭찬을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참고로 하면, 방형의 만년에 혹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어찌 좌두(莝豆)의 욕을 당하는 데에까지야 이르렀겠는가. 자못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안도(李安道)-
묻기를,
“전조(前朝 고려) 왕씨의 뒤를 이어 일어선 사람은 신씨(辛氏)인데, 정포은 선생은 그를 섬기고 버리지 않았으니, 뒤에 비록 공이 있었다 한들 어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비록 신씨였으나, 왕씨(王氏)의 종사는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은이 여전히 섬긴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저 진(秦)나라의 여씨(呂氏)나, 진(晉)의 우씨(牛氏)와 같은 것이니,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도 왕도(王導)의 무리를 배척하여 말하지 않았다. 포은은 진실로 이 뜻을 얻었다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기준(奇遵)이 이색(李穡)을 가리켜 부처에게 아첨하는 요망한 영웅이라 하였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해도 그로서는 반드시 안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선생께서 풍기에서 도백에게 올린 글에, 정길(鄭吉)ㆍ우 좨주(禹祭酒 우탁(禹倬))ㆍ김점필(金佔畢 김종직(金宗直)) 등 여러 사람을 아울러 논하였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과연 큰 잘못이다. 점필은 결국 문장하는 선비일 뿐이다.”
하였다. 묻기를,
“이 태조께서 이색을 만나볼 때, 이색은 흰 옷으로서 길게 읍(揖)만 하고 절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높은 절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진실로 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태조의 포용(包容)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禹性傳)-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 이학(理學)은 정포은을 조종으로 삼고,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ㆍ조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을 우두머리로 삼는다. 다만 이 세 선생의 저술을 구할 수가 없어서 지금은 그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요즘 《회재집(晦齋集)》을 보았는데, 그 학문의 바름과 그 터득함의 깊이가 거의 근세의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였다. -우성전-
융경(隆慶) 원년 정묘(1567, 선조1) 가을에, 조사(詔使)로서 한림원(翰林院) 검토(檢討)인 신안(新安) 허국(許國)과 병과(兵科) 급사중(給事中)인 홍도(洪都)ㆍ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와서 묻기를,
“동방에도 공자의 심학과 기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그들이 물었을 때, 선생은 고려의 우탁(禹倬)ㆍ정몽주(鄭夢周)와 본조(本朝)의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윤상(尹祥)ㆍ이언적(李彥迪)ㆍ서경덕(徐敬德) 등을 적어 보이고 또 글로써 답하기를,
“우리 동방에 기자가 오고부터 구주(九疇)로써 교화를 베풀고 팔조(八條)로써 다스려 어진 이의 교화가 스스로 신명에 응하였으니, 선비로서 심학을 알고 주수를 밝힐 수 있는 이름 난 이가 반드시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4군(郡)이니, 2부(府)니, 3국(國)이니 하며 서로 갈라져 다투고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문적(文籍)이 흩어져 없어져서 도를 전하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앞 사람의 성명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신라가 3국을 하나로 통일하였고 고려의 5백 년 동안에는 세상의 도리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문화의 풍조가 차츰 열려 중원(中原)으로 유학하는 선비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서 경학이 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어지러움이 바뀌어 다스림이 되고, 중화를 사모하여 오랑캐가 변하였으니, 《시(詩)》와 《서(書)》의 덕택과 예의의 풍속은 기자의 구주에서 끼친 풍속을 점점 회복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방을 현재 문헌의 나라, 군자의 나라라고 일컫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시대의 선비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침내 언어와 문장에 있었던 것이니, 고려 말년에 이르러 정자와 주자의 글이 조금씩 동방으로 들어오자 우탁과 정몽주 같은 이가 성리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본조에 이르러서는 중국 조정에서 나누어 주는 사서, 《오경대전》,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얻어 본조에서도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았고, 또 사서삼경을 환히 아는 사람들이 선발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로서 외우고 익히는 것이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의 말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혹 습속에 젖어 그대로 답습하기만 하여 저술도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였으며, 혹은 뜻만 크고 일에는 거칠어서 이용할 줄도 모르고 비판할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중에는 혹 걸출하게 뛰어나 특별한 주장을 세우기도 하고, 혹은 붓을 내서 성현의 학문에 힘쓰는 이도 간간이 있었으나, 그리 많이 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한 몇몇 사람은 모두 이전의 사람이요,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몇 사람도 천 년 뒤에 태어나서 궁벽한 바닷가에 있으므로 성현의 문하에서 직접 지식의 가르침과 인격의 단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른바 심학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여기에 힘쓴다면, 어찌 심학을 하는 무리가 될 수 없겠습니까.
저 기자의 〈홍범(洪範)〉이나 주자ㆍ채원정(蔡元定)의 학설은 의리를 남김없이 밝혔으니 그것을 배워 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수학에 있어서는 구봉(九峯)의 〈내편도설(內篇圖說)〉이 지금도 있고, 원락자(苑洛子)가 발명한 것 또한 있지만 우리 동방에서는 아직 그것을 훤히 아는 사람이 있다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근세에 이순(李純)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그 학설에 통한다 하면서 책을 지어 주해까지 내었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과연 잘못된 곳이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조목의 집에 간직된 선생의 글씨
선생이 말하기를,
“김점필(金佔畢)은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가 종신토록 했던 일은 다만 화려한 사장(詞章)에 있었으니, 그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 저술도 없고, 또 문헌에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조예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이제 천곡서원(川谷書院)에서 정자와 주자를 제사하면서 한훤을 거기에 배향(配享)한다고 하지만, ‘배(配)’ 자의 뜻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문선(文宣 공자)의 사당에는 오직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만을 배향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공문십철(孔門十哲)의 서열에 든 사람이라도 다 사당 안에 종사(從祀)한다고 일컬으며, 정자와 주자 같은 큰 현인도 오히려 문묘의 동쪽과 서쪽에 모셔 놓고 종사한다고 일컫는다. 이로써 본다면, ‘배(配)’ 자와 ‘종(從)’ 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훤의 학문이 비록 문묘에 들기에 부끄럽지 않으나 다만 ‘종사’라 일컬을 것이요, ‘배향’이라고는 일컫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훤의 학문이 실천하는 데 돈독했다고는 하나, 도에 있어서 묻고 배우는 공부에는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조정암(趙靜庵)은 타고난 자질이 비록 아름다웠으나, 학문에 충실하지 못하여 시행한 것에 지나침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일에 패하고 말았다. 만일 학문에 충실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뒤에 세상에 나가서 세상일을 담당하였더라면, 그 이룬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요순 때의 임금과 백성같이 되게 하는 것이 아무리 군자의 뜻이라 하더라도, 때를 헤아리지 못하고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기묘년(1519, 중종14)의 실정(失政)도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암은 이미 실패할 줄 알고 자못 스스로 억제하였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잘못이라 하여 창을 거꾸로 해서 치고자 하였으니, 정암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중종을 뵈올 때의 정암을 유심히 본 일이 있는데, 그 걸음걸이가 마치 날개를 편 듯하고 위의(威儀)가 본받을 만하였다. 한 번 보자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조원기(趙元紀)ㆍ조광림(趙廣臨)은 다 선한 사람이니, 정암의 가학의 근본도 우연이 아니다.”
하고는, 또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도학을 한 선비가 없지 않으나 문헌에서 찾아볼 길이 없으니, 그 조예의 깊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우 좨주(禹祭酒)ㆍ정포은(鄭圃隱)은 시대가 멀고, 한훤(寒暄)ㆍ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같은 여러 선비들은 전해들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지만, 또 찾을 수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말하면, 근대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인데 그 학문이 매우 바르다. 그가 지은 문장을 보면, 모두 가슴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서, 이치가 밝고 의리가 발라 바로 그대로 하늘이 만든 것이니, 조예가 깊지 않고서야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조원기는 정암의 숙부요, 조광림은 정암의 종형이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정암의 행장을 지을 때 그 타고난 자질의 높은 곳에 대해서는 지극히 말하였으나, 그 학력을 말한 곳은 비교적 적었다. 회재의 행장을 지을 때에는, 그 학력의 깊은 곳에 대해서는 지극히 말하였으나, 그 타고난 자질을 말한 곳은 비교적 소홀했다.”
하였다. -우성전-
일찍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의론을 보면 ‘기(氣)’를 논한 것은 지극히 정밀해 마지않으나, 이(理)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를 주장하는 데 너무 치우치기도 하고, 혹은 기를 이로 알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동방에는 이보다 앞서 책을 지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와 기를 밝힘에 있어서는 이 사람이 처음이다. 다만 그가 말할 때에 자부함이 너무 지나친 것을 보면, 아마 그가 터득한 경지가 깊지 못한 것 같다.”
하였다. 화담이 일찍이 〈귀신생사론(鬼神生死論)〉을 지어, 박희정(朴希正 민헌(民獻))ㆍ허태휘(許太輝 엽(曄)) 등 여러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 이론은 말이 비록 졸렬하기는 하지만, 그 본 바는 천명의 성인도 다 전하지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후학들에게 전할 만하다. 성리서(性理書) 끝에 붙여, 원근의 화(華)ㆍ이(夷)들로 하여금 동방에 학자가 났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너무 풍을 치는 병통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매우 중히 여겼으니, 어떤 사람이 공부하러 송도(松都)에 갈 때 선생이 그에게 시를 주었는데,
서로(徐老)는 이제 학을 타고 떠났으니 / 徐老今爲鶴背身
깊고 밝게 남은 자취 쓸쓸하여라 / 藏修遺迹揔成陳
어느 누가 화담원(花潭院)을 지었네마는 / 何人爲築花潭院
그 마음 이어 전해 줄 이 몇 사람인고 / 心緖相傳有幾人
하니, 그를 그리워함이 이러하였다. -김성일-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을 지었는데, 뒷사람이 그를 서원의 사당에 모시고자 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서도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여론이 들끓어 마침내 그대로 되지 못하였다. 이 일도 시비가 정해진 뒤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사당을 세워 자기를 거기에 배향하면, 그 마음이 편할 것인가.”
하였다. 대개 주(周)는 이기(李芑)의 문하에 발을 들여놓아, 그의 몸가짐에 크게 낭패한 일이 있었으니, 선생의 이 말은 실로 은근한 뜻을 가진 것이다. ○ 정유일의 기록에, “주신재(周愼齋)는 문장에 능하고, 효제(孝悌)에 독실하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즐기며, 평생을 맑은 절개로써 스스로 믿어서, 비록 귀한 자리에 있다고 해도 맑고 검소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그가 경연에 있을 때에는 일을 따라 넌지시 깨우쳐 주고 비평해 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강직하지 못하여 여러 번 권세 가진 자들에게 농간을 당하여 언제나 절개를 잃었다는 비방을 면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병이 많았으나 물러나지 아니하므로 선생이 물러나기를 권하였으나, 좇지 않아서 고을 여론이 매우 애석히 여겼다.” 하였다. -정유일-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이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고 상소할 때 시사(時事)를 논하였는데, 거기에는 심지어, “대왕대비도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정원에 전교하기를,
“조식의 상소를 보니, 불공한 말이 많으므로 큰 죄를 주려고 하였으나, 명색이 은사(隱士)이기 때문에 일단 불문에 부쳐 다스리지 않겠다.”
하였다. 모든 벼슬아치들이 그가 죄를 얻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선생은 이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남명은 비록 이학(理學)으로써 자부하고 있지만, 그는 다만 일개의 기이한 선비일 뿐이다. 그의 의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주장에 힘쓰니, 이 어찌 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정유일(鄭惟一)-
선생은 남명의 소(疏)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개 소장(疏章)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뜻은 곧으나 말은 순해야 하고, 너무 과격하여 공순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보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이 정도를 지나쳐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으니,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였다. -정유일-
계축년(1553, 명종8) 7월에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선생이 조건중(曺楗仲)의 답서를 내게 보여 주셨다. 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을 여러 해 동안 존경하고 사모하며, 학문이 나아가고 덕이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더니, 이제 이 글을 보니 감정적인 말이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사람들은 대개 그를 꿋꿋하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하나, 학문에 있어서 그처럼 공부를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일에 진취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인우(洪仁祐)-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홍응길(洪應吉)은 독실히 믿고 힘써 행하는 선비이다. 늘 수레를 타고 찾아와서 의리를 강론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갔다. 마음으로 그 사람됨에 감복하여 내심 유익한 친구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응길은 부친상을 만나 너무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서, 나이 겨우 40에 죽었다. 그 집이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그 상사를 도왔다. 한번은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 마음이 항상 착한 데 있어서 외물에 휘둘리지 않았으니, 이제는 그러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하고는, 또 말하기를,
“그 학문에는 차이가 없지 않았는데, 그는 대개 수학(數學)에는 정통했으나, 이학(理學)에는 정통하지 못하였고, 또한 기를 이로 아는 병통이 있었다. 그러나 독실히 믿고 힘써 행하는 것과 깨끗한 수양이나 꼿꼿한 절개에 있어서는, 그런 사람을 또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면서 오래도록 애석해하였다. -정유일-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만년에 식견이 매우 정밀하고, 의리를 논하는데 쉽고도 분명하였기 때문에 선생은 못내 칭찬하였다. -정유일-
선생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정이(鄭靜而)는 타고난 바탕과 성질이 매우 높고 식견이 또한 뛰어났지만, 그 근본 학문에 있어서는 차근차근히 생각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사람에게 글을 보내기를,
“정이는 소홀한 곳은 너무 소홀하여서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좋은 점은 매우 좋아서 우리들이 하기가 어려운 점이었다.”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 말을 명언이라 하였다. -정유일-
선생이 말하기를,
“아무개는 확고하고, 아무개는 예리하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소자가 공경하는 분들이지만, 그 확고함은 고루함에 가깝고, 그 예리함은 건방진 데 가깝습니다.”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정사성(鄭士誠)-
선생이 말하기를,
“김사순(金士純)은 행실이 높고 학문이 정밀하여 내 눈에는 아직 그에게 견줄 만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네가 만일 그와 종유(從遊)하면 필시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 -정사성-
선생은 제자들과 이야기하다가, 그 말이 김지산(金芝山)ㆍ유이현(柳而見)ㆍ이굉중(李宏仲)에 미치자 말하기를,
“김은 바탕이 아름답고 행실이 독실하며, 유는 타고난 재주가 매우 높고, 이는 착실하나 재주가 좀 모자란다.”
하였다. -정사성-
선생이 송사를 좋아하는 요즈음 세상의 폐단을 말하고, 노사신(盧士信)의 일을 들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쉽게 구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와 송사를 일으켰다가 자기가 이기지 못할 것을 알자, 곧 노사신에게 애걸하기를, ‘내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원래 한 될 것이 없지마는, 우리 집에는 생계를 꾸려갈 만한 사람이 없으니, 나는 지금부터 천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은 그 말을 듣고 ‘내 어찌 그대가 그처럼 딱한 줄을 알았겠는가.’ 하고 곧 중단하고 다시 송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하였다. -김명일(金明一)-
그 아들 준에게 준 편지에,
“올 때에 청송(靑松)을 지나오게 되느냐? 청송 부사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 는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내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너는 모름지기 조심해서 찾아뵈어라. 지나는 곳마다 모두 삼가야 하겠지만 이 부(府)는 더욱 조심하라.”
하였다. -집안 편지-
[주-D001] 집전(集傳) :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여 해설한 《서경주해(書經註解)》를 가리킨 것이다.[주-D002] 좌두(莝豆) : 송나라 호방형(胡邦衡)의 호는 담암(澹菴)인데, 간신(姦臣) 진회(秦檜)를 탄핵하고 금(金)나라와 강화(講和)하지 말자고 곧은 글을 올리다가 멀리 귀양 갔다. 뒤에 귀양이 풀려서 돌아오는 중로에, 남의 집에서 술을 먹다가 여천(黎倩)이란 여자와 관계를 하여, ‘말먹이는 여물[莝豆]’을 먹는 욕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주-D003] 한림원(翰林院) : 당(唐)나라 때에 시작된 관청으로 제고(制誥)를 맡은 자가 있는 곳, 즉 학문과 문사(文辭)를 맡은 문사들이 있는 곳이다.[주-D004] 주수(疇數) : 기자(箕子)가 말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수법(數法)을 말한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기자 조선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중국 사신이 이렇게 물은 것이다.[주-D005] 공문십철(孔門十哲) :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주-D006] 창을 …… 치고자 : 정암(靜菴)의 당파 중에서 과격한 사람들이 도리어 정암을 과감(果敢)하지 못하고 이럭저럭한다고 공격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것을, 다른 소인을 치려던 창을 거꾸로 쥐고 한 집안사람을 치려 하였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