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의 법을 신봉한 직지사 제산(齊山) 스님은 청정한 지계행과 높은 덕행을 겸비해 제방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제산 스님은 경허 스님이 합천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시봉을 도맡다 시피했다. 당시 400~500명의 대중이 상주하는 대사찰에서 경허 스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경허 스님을 위해 대중 모르게 곡차를 마련하고 안주감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산 스님은 입소문을 막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깊은 밤이면 몰래 절 밖으로 나가 안주를 만들어 경허 스님에게 올렸다.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 제산 스님의 행각은 대중 사이에 알려지고 말았다. 산중은 변고가 난 것처럼 야단이었다. 납자 몇 몇이 모이기만 하면 모두들 경허 스님과 제산 스님을 성토하기 바빴다.
당시 주지 남전(南泉) 스님이 이 소문을 듣고 제산 스님을 찾아 소문의 진위를 물었다. 제산 스님은 태연히 “제가 경허 스님을 위해 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남전 스님으로서는 제산 스님을 만나기 전 낭설이겠거니 하며 물었는데 제산 스님의 당당한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남전 스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남전 스님은 믿기지 않았다. 평소 법력이 높아 추앙받는 선지식 경허 스님, 또 학덕과 율행을 겸비한 것으로 알려진 제산 스님이 아닌가.
남전 스님은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스님의 고민은 경허 스님의 법력에 대한 의구심에까지 이르렀다. 남전 스님은 경허 스님의 법문을 찬찬히 들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감명이 우러나는 것이 아닌가. 남전 스님은 곧바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신심이 발한 남전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남전 스님이 하루는 대중공양을 하는데 발우를 펴며 제산 스님에게 “스님, 이 발우가 안보입니다.”하는 격외 법담을 걸었다.
스님의 높은 경지에 모든 좌중은 크게 놀랐다. 그 후 남전 스님 역시 제산 스님 이상으로 경허 스님을 신봉하게 돼 경허 스님에 대한 소문들을 진정시키는데 앞장섰다. 해인사에서는 어느 날 만공(滿空)ㆍ제산(齊山)ㆍ남전(南泉) 스님이 함께 자리해 경허 스님의 법 따르기를 견주는 기회가 있었다.
제산 스님은 “누가 뭐라해도 경허 스님께 계속 곡차와 닭고기를 바치리다.”하자 남전 스님이 말을 받아 “경허 스님과 같은 어른을 위해서라면 닭이 아니라 소도 잡아 올리기를 조금도 거리낄게 없소”라고 대꾸했다. 이에 만공 스님은 “나는 전쟁이 나 깊은 산중에 모시고 살다가 양식이 떨어져 공양 올릴 것이 없게 된다면 나의 살점을 오려서라도 스님의 생명을 유지케 해 스님이 중생제도 하시게끔 해 드릴 자신이 있소.”라고 말했다.
남전 스님은 경허 선사가 있는 북쪽을 3번 다녀왔는데 경허 선사는 전봉준 장군과 관계를 남전에게는 말하고 북으로 갔음.
출처 : 현대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