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간암공의 '상소문' 계속②]
其一曰修學政夫自古帝王之治每以待士爲重必盡其倍義導迪之方者盖以其維持世道聳動風化爲國家元氣者亶在於此則是乃有國之所不可忽者也試以我朝言之內有國子之官外置訓導之任規率多士囿於風敎者於休盛矣而惟此訓導之法則漸次廢弛式至近日而內則雖有太學庠序之敎外則全廢導養作成之政此所以有識之竊歎人矣而以殿下求治之誠事無大小同不修擧則此乃王政之所先務者而前後絲綸之間一不及於興學校扶士氣之政顧今環東土八域之中士氣之摧沮不振安得不然也抑臣區區以爲目今湖南之日就喪亡亦未必不由於此噫凶荒之荐酷人心之不固莫湖南若也而從又敎迪導養之政蔑蔑焉廢閣故雖其平日粗識砥行之士亦且自抛其身不知讀書則其方來後生將何以講磨義理觀感而興起砥勵哉旣曰士爲國家之元氣則湖南之士是亦湖南一道之元氣也其關係於國家者顧亦不少而今乃澆漓蔑裂無足可觀以至人心漸益壞亂莫可收拾之境則不可以荐飢之餘困悴方甚法廢之久猝難復擧一任因循琓愒也爲今之計莫若修擧學政復置訓導之任以爲敎諭振作之方而第古者訓導之任當初設置之規非不善矣而其不久廢弛者盖亦有由矣是其必得貧困無資之類卑之此任以爲免得飢寒之一窠故爲訓導者亦徒知侵漁學子以自肥而己夫豈知敎導之爲何術所是以儒生輩亦無就受其敎諭者則其所廢弛不行勢固然矣今則宜選其鄕人之能通經史稍知自飭而可爲人師者卑以訓導之責而優以官廩錄其名牒報于監司使其爲訓導者持身自重而每年監司巡考其成績以其能使儒生知尙道學而勤業飭行者爲上績曉解文義能善製述者又次之其上績者馳啓論賞施以調用之典其次績者亦啓其勞別施褒典若其庸鄙自輕無績可考考者或課以殿或治以律使訓導之職爲任甚重則不屑就之士亦有肯爲者矣儒士與選之人則隨其多少或居于鄕校或處于書院量宜分番官給供具使受敎于訓導而若其課學之道則秋冬讀書春夏製述窮理飭行爲上解義善述次之逐日會講每朔都試而如其學行文藝中或有卓異者聞于監司亦卽馳啓褒賞則儒生亦有樂爲受敎者矣夫如是則爲訓導者以飭修敎誨爲事爲儒生者以攻文勤述爲業交相勖勵自成美習不過數年風俗有丕變之効文才有蔚興之休向來自抛者還復砥勵後來向學者知所移向人心自有依着之所而不至壞亂士氣保無摧沮之慮而自就於修飭將見八域之章甫亦且觀感而興起矣豈不美哉是所謂修學政在湖南爲最先急務也
〈해설〉
첫째는 학정(學政)을 닦는 것입니다. 자고로 제왕(帝王)의 정치가 선비를 중하게 여겨 반드시 그 배의(倍義)를 다하는 것입니다. 도적(導廸)의 방법이란 대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다함으로써 풍화(風化)에 용동(聳動)하면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 조정(朝廷)에 적용하면 안으로 국자감(國子監)의 벼슬이 있고 밖으로는 훈도(訓導)의 책임을 두어 법으로 선비를 통솔하게 합니다. 풍교자(風敎者)를 양성하였으니 어희(於戱)가 위대(威大)하였습니다. 하지만 훈도의 법칙이 점차 폐지되고 이완(弛緩)되면서 근일에 이르러서는 안으로 태학(太學)이나 상서(庠序)의 가르침이, 밖으로는 인도하여 육성시키는 정치가 전폐되어 식자들이 탄식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이를 도외시(度外視) 하셨습니다. 전하의 말씀 가운데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의 사기(士氣)를 부양(扶養)해야 한다는 정책(政策)은 언급(言及)한 적이 없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조선팔도(朝鮮八道) 중 호남지역은 가르치는 기관이 없어 사기가 꺾이고 막혀 떨어지고 있습니다.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호남(湖南)이 날로 상망(喪亡)하는 것은 바로 이에 기인(起因)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호남 인심이 좋지 못한 것은 혹독한 흉년이 거듭된 데다 올바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정치가 폐각(廢閣)처럼 없어져서 입니다. 비록 평일에 연마하여 행하려는 선비 또한 스스로를 포기하고 글 읽은 것을 멀리한다면 앞으로 후생(後生)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엇으로 의리를 강마(講磨)하여 보고 느껴서 일어나(興起) 닦고 힘쓰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호남의 선비는 호남의 원기(元氣)입니다. 그 원기는 국가와 관계가 적지 않습니다. 이제 (湖南) 인정은 경박(輕薄)하고 멸열(蔑裂)하여 가히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인심도 더욱 괴란(壞亂)하여 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흉년(凶年)이 계속되면 피곤하고 초췌(憔悴)함이 심하면 법의 권위가 회복되기 어려우니 천거(薦擧)하여 책임을 맡기면 구경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計策)은 학정(學政)을 수거(修擧)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시 훈도의 직책을 두어 교유(敎諭)하고 진작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다만 옛날 훈도도 설치 당시에는 좋았으나 얼마 지나서 폐이(廢弛)된 적이 있습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을 발탁해서 임무를 맡기자 남의 재산을 탐내는 부작용이 야기되어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이로 인해 유생들이 훈도의 교유를 받지 않아 흐지부지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훈도는 향인(鄕人)을 발탁해야 합니다. 훈도로 쓸 인재는 경사(經史)에 통하고 스스로를 단속할 줄 아는 자를 골라야 합니다. 훈도에게는 관급으로 우대하고 그 명단을 감사(監司)에게 맡겨 매년 감사가 순찰하면서 근무성적을 매겨야합니다. 상적(上績)은 유생들이 도덕과 학문을 숭상하게 하며, 학업에 근면하고 행실을 닦은 자로 삼고, 다음은 문의(文義)를 터득하고 제술(製述)을 잘하는 자로 삼아야 합니다.
훈도의 우대는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상적자는 임금에게 아뢰서 논상(論賞)하되 선택하여 등용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차적자도 공로를 따져 포전(褒典)을 시행해야 합니다. 훈도 중 용렬하거나 경솔하여 공적을 고증할 수 없는 자는 하등(下等)을 주고, 혹은 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훈도의 직책을 중요시한다면 지금까지 취임하지 않으려는 선비도 취임하고자 즐비할 것입니다.
인원의 처리방안도 제안합니다. 유사(儒士)나 선임된 훈도는 다소에 따라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에 거처하게 하되 인원을 적당히 배분하고 모든 것을 관에서 지급토록 하며, 훈도에게 수교(受敎)토록 해야 합니다. 교수과정은 가을과 겨울에는 글을 읽고, 봄과 여름에는 글을 짓되 이치(理致)를 연구하게 합니다. 여기서는 행동을 삼가는 자를 으뜸으로 삼고, 뜻을 풀어 글을 잘 지은 자는 다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향교와 서원에서는 날마다 강(講)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매달 초일(初日)에는 시험(試驗)을 보되 학행(學行)과 문예(文藝) 중에서 탁실(卓實)한 자*가 있으면 감사나 임금께 알려 포상(褒賞)케 한다면 유생들도 즐겁게 배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훈도는 수신하여 교회(敎誨)를 일삼을 것이며, 유생들은 글을 읽고 저술함을 업(業)으로 여겨 서로 돕고 격려하여 자연히 아름다운 풍습이 이뤄질 것입니다.
* 탁실한 자 : 특별하게 뛰어난 자
그러면 수년 못되어 풍속(風俗)이 크게 변하는 효과가 있고 문재(文才)가 성할 것입니다. 아울러 후래(後來)의 향학자(向學者)도 달릴 바를 알고 인심(人心)을 향해 의지하고 안착하여 괴란을 막고 사기가 보전돼 꺾이고 막힐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또 팔도의 유생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 떨치고 일어남을 배울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 하리요. 그러므로 학정(學政)은 호남사태를 해결하는 급선무라 할 것입니다.
(144-049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48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48일차에서도 '간암공(위세옥)의 상소문(上疏文)'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1)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제자가 일부 내용에 음을 달거나 단락을 나누었습니다.
※ 주2) 47-51일차에는 '간암공의 상소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 무곡
간암공(위세옥)의 상소문 등의 영향으로, 영조는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과 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 산업·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고 합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정책의 영향등으로 조선은 이익(李瀷)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해서 22대왕인 정조때 각 방면에 걸쳐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무곡
※위두량종친께서 47일차 밴드 댓글에 올려주신 내용과 함께 살펴보시면, 더욱 의미가 클것 같아 같이 첨부합니다. 감사합니다.
간암공上疏文
https://m.blog.naver.com/wdr462/222671650323암공上疏文
https://m.blog.naver.com/wdr462/222671650323
/ 무곡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때에 무수리로 등장하는 최씨부인(숙빈 최씨, MBC 드라마상의 '동이' ; 한효주분)과의 사랑이 없었다면 ᆢ
당연히 영조(영조는 장남이 아닌 차남임)가 없었을 것이고 그 다음 왕인 정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조선시대 문예의 부흥기가 더 늦게 도래되었거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상념에 잠겨 봅니다.
(MBC 드라마 '동이'에서)/ 무곡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때에 무수리로 등장하는 최씨부인(숙빈 최씨, MBC 드라마상의 '동이' ; 한효주분)과의 사랑이 없었다면 ᆢ
당연히 영조(영조는 장남이 아닌 차남임)가 없었을 것이고 그 다음 왕인 정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조선시대 문예의 부흥기가 더 늦게 도래되었거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상념에 잠겨 봅니다.
(MBC 드라마 '동이'에서)/ 무곡
간암공께서 밝히신 학정의 실행수단이 바로 훈도의 법칙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네요. 훈도의 책무, 선발규칙, 고과와 포상, 방향과 효과 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상소문에 담았네요./ 벽천
"전하(殿下)께서는 이를 도외시(度外視) 하셨습니다. 전하의 말씀 가운데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의 사기(士氣)를 부양(扶養)해야 한다는 정책(政策)은 언급(言及)한 적이 없었습니다"
"호남 인심이 좋지 못한 것은 혹독한 흉년이 거듭된 데다 올바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정치가 폐각(廢閣)처럼 없어져서 입니다"
위 두 구절로만 본다면 선비 간암공의 성품은 "눈처럼 청렴하고 얼음처럼 차갑다"고 봄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당시 간암공의 닉네임은 설빙(雪氷)으로 불렸습니다./ 벽천
위윤기 님!
사실 이때는 지금의 사립학교격인 서원이 1550년대 소수서원이래 엄청나게 많이 설립되어, 과거에만 올인하고 세금을 면제 받는 등 폐해가 많다는 여론이 비등해 1868년 대원군때 폐지될때까지, 간암공의 상소와는 반대로 과도하게 사학이 운영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ᆢ
사실 이때는 학문을 장려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산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과거 공부에만 올인한게 도리어 문제인것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영조대왕께서 학정을 장려하지 않은것 같기도 합니다만 ᆢ
호남지방만 그렇게 장려하지 않은 것인지 ᆢ/ 무곡
茂谷(무곡) 위상환 님
혼란의 원인이 제도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제도를 운영하는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그 폐해의 이면에 일부 양반의 전유물인 바로 세도정치가 있었죠.- 벽천
김영삼 대통령때 사법시험에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올인(고시낭인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에 문제가 많다는 여론에 따라 3회 응시제한 제도를 마련했지만, 실제로는 3회차 되는 해에 응시제도 제한을 철폐하여 없었던 일이 된 적이 있답니다.
그후 결국 사법시험제도는 철폐되고
로스쿨제도로 방향을 틀었죠.
당시 응시제한횟수를 무위로 돌리고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입에 넣어 삼킨 경우도 있어 수험생들의 절박한 심정은 극에 달했죠./ 무곡
결국제도는 안타깝지만 맹자의 이론과 달리, 사람들의 선의에만 기해서는 곤란하고, 제도설계시 여론과 백성의 민심 그리고 이익 등을 잘 설계하여,
제도가 사람들의 성향과 미래를 바꿀수 있도록 운영하는 것이 중요할것 같네요.
문맥으로 볼때 간암공 시절에도 학정을 장려하는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운영이되지 않은 것 같네요.- 무곡
제도와 사람,
두 축의 수레바퀴죠.
흥망성쇠의 갈림길은 늘 병존하죠.
결국 조선의 패망은 제도보다 사람에게 있다고 봐야겠죠./ 벽천
위윤기 님
사실 지방에서 선비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기능 등은, 과거제도에서 소과라고 하는, 진사와 생원시험에 합격한 분들이 향촌에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조선 후기에는 생원과 진사들이 거덜먹거리기만 하고 간암공처럼 선비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이 지방의 기강과 윤리 그리고 부정이 만연한 이유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향촌에서 문과 등 벼슬이 목적이 아닌 진정한 대쪽 같은 선비나 학자들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다면 백성들이나 관리들도 함부로 기강을 흐트리거나 부정을 못할것인데 말입니다./ 무곡
간암 후손 가계도 입니다
참고하세요
위두량 님
대단합니다.
아떻게 이렇게까지 작성하셨나요!/ 벽천
(21세)임진왜란 때의 충신 판서공(덕화)에서 시작하여 》 (22세) 심양왕환일기로 유명한 만회재공(정철) 》(23세) 남해군수공(동전) 》 (24세) 임계탄과 상소문의 간암공(세옥)으로 죽 이어지네요. 현재는 35세 이상 까지 ᆢ
제가 일전에 나라를 세우려면 자손들이 얼마의 공을 세워야 되는지를 살펴본 적이 있었는바, 7대 이상이 덕과 공을 세우면 가능성이 크다는 혼자만의 결론을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상기의 기록에 거의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예전처럼 나라를 세우고 하는것은 아닙니다만 말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절로 존경심이 솟아나는 선조님이십니다.
※ 32세 편에 두량 종친 기록도 보입니다./ 무곡
영조 초기인 1732년 과 1733년 무렵 극도의 가뭄과 흉년으로 삼남지방 등에 아사자가 속출했으나,
※ 간암공께서 임계탄과 상소문 등으로 당시 상황의 심각성과 개선안을 상부에 알림
영조는 조선사회의 계몽군주로서
(1) 가혹한 형벌 폐지 또는 개정
(2) 신문고 제도 부활
(3) 금주령으로 사치와 낭비 금지
(4) 균역법 시행(군포 2>1필)
(5) 서얼출신도 관리등용 기회제공
(6) 왕 자신도 소식과 물자절약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음
(7) 조총을 만드는 등으로 국방정책에도 힘을 기울였음
상기와 같은 제도를 시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개선한 군주로 실록에 기록됨/ 무곡
茂谷(무곡) 위상환 님
결국 간암공의 날카로운 상소가 정부정책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봐야겠습니다./ 벽천
그렇게 보이네요.
고려때는 불교 국가여서 그런 측면도 있었겠지만, 백성들은 물론 공무원들도 근무 시작전이나 업무 협의때 검소하면서도 정신을 가다듬기 에 좋은 차를 주로 마셨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들어와 성리학의 형식중시 풍조 등으로 인해 예산 낭비도 많았고 또한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네요. 그래서 물자 절약과 정신 개조 차원에서 영조께서 금주령을 내렸나 봅니다.
그외에도 상소문에서 언급된 제도들이 영조때 정책에 많이 녹아든것 같네요. 군대 개혁과 서얼들의 관리등용도 그렇게 봐야 되겠지요./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