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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씨족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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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원산 위정철 [본문내용- 간암공의 '상소문' 계속②]
야운처사 위이환 추천 0 조회 12 23.07.17 19:53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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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7.17 19:53

    첫댓글 (144-048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48일차에서도 '간암공(위세옥)의 상소문(上疏文)'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1)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제자가 일부 내용에 음을 달거나 단락을 나누었습니다.

    ※ 주2) 47-51일차에는 '간암공의 상소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 무곡

  • 작성자 23.07.17 19:54

    간암공(위세옥)의 상소문 등의 영향으로, 영조는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과 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 산업·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고 합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정책의 영향등으로 조선은 이익(李瀷)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해서 22대왕인 정조때 각 방면에 걸쳐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무곡

  • 작성자 23.07.17 19:55

    ※위두량종친께서 47일차 밴드 댓글에 올려주신 내용과 함께 살펴보시면, 더욱 의미가 클것 같아 같이 첨부합니다. 감사합니다.

    간암공上疏文
    https://m.blog.naver.com/wdr462/222671650323암공上疏文
    https://m.blog.naver.com/wdr462/222671650323

    / 무곡

  • 작성자 23.07.17 19:56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때에 무수리로 등장하는 최씨부인(숙빈 최씨, MBC 드라마상의 '동이' ; 한효주분)과의 사랑이 없었다면 ᆢ
    당연히 영조(영조는 장남이 아닌 차남임)가 없었을 것이고 그 다음 왕인 정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조선시대 문예의 부흥기가 더 늦게 도래되었거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상념에 잠겨 봅니다.

    (MBC 드라마 '동이'에서)/ 무곡

  • 작성자 23.07.17 19:56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때에 무수리로 등장하는 최씨부인(숙빈 최씨, MBC 드라마상의 '동이' ; 한효주분)과의 사랑이 없었다면 ᆢ
    당연히 영조(영조는 장남이 아닌 차남임)가 없었을 것이고 그 다음 왕인 정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조선시대 문예의 부흥기가 더 늦게 도래되었거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상념에 잠겨 봅니다.

    (MBC 드라마 '동이'에서)/ 무곡

  • 작성자 23.07.17 19:57

    간암공께서 밝히신 학정의 실행수단이 바로 훈도의 법칙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네요. 훈도의 책무, 선발규칙, 고과와 포상, 방향과 효과 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상소문에 담았네요./ 벽천

  • 작성자 23.07.17 19:57

    "전하(殿下)께서는 이를 도외시(度外視) 하셨습니다. 전하의 말씀 가운데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의 사기(士氣)를 부양(扶養)해야 한다는 정책(政策)은 언급(言及)한 적이 없었습니다"

    "호남 인심이 좋지 못한 것은 혹독한 흉년이 거듭된 데다 올바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정치가 폐각(廢閣)처럼 없어져서 입니다"

    위 두 구절로만 본다면 선비 간암공의 성품은 "눈처럼 청렴하고 얼음처럼 차갑다"고 봄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당시 간암공의 닉네임은 설빙(雪氷)으로 불렸습니다./ 벽천

  • 작성자 23.07.17 19:58

    위윤기 님!
    사실 이때는 지금의 사립학교격인 서원이 1550년대 소수서원이래 엄청나게 많이 설립되어, 과거에만 올인하고 세금을 면제 받는 등 폐해가 많다는 여론이 비등해 1868년 대원군때 폐지될때까지, 간암공의 상소와는 반대로 과도하게 사학이 운영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ᆢ
    사실 이때는 학문을 장려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산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과거 공부에만 올인한게 도리어 문제인것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영조대왕께서 학정을 장려하지 않은것 같기도 합니다만 ᆢ
    호남지방만 그렇게 장려하지 않은 것인지 ᆢ/ 무곡

  • 작성자 23.07.17 19:58

    茂谷(무곡) 위상환 님
    혼란의 원인이 제도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제도를 운영하는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그 폐해의 이면에 일부 양반의 전유물인 바로 세도정치가 있었죠.- 벽천

  • 작성자 23.07.17 19:58

    김영삼 대통령때 사법시험에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올인(고시낭인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에 문제가 많다는 여론에 따라 3회 응시제한 제도를 마련했지만, 실제로는 3회차 되는 해에 응시제도 제한을 철폐하여 없었던 일이 된 적이 있답니다.
    그후 결국 사법시험제도는 철폐되고
    로스쿨제도로 방향을 틀었죠.
    당시 응시제한횟수를 무위로 돌리고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입에 넣어 삼킨 경우도 있어 수험생들의 절박한 심정은 극에 달했죠./ 무곡

  • 작성자 23.07.17 19:59

    결국제도는 안타깝지만 맹자의 이론과 달리, 사람들의 선의에만 기해서는 곤란하고, 제도설계시 여론과 백성의 민심 그리고 이익 등을 잘 설계하여,
    제도가 사람들의 성향과 미래를 바꿀수 있도록 운영하는 것이 중요할것 같네요.
    문맥으로 볼때 간암공 시절에도 학정을 장려하는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운영이되지 않은 것 같네요.- 무곡

  • 작성자 23.07.17 19:59

    제도와 사람,
    두 축의 수레바퀴죠.
    흥망성쇠의 갈림길은 늘 병존하죠.
    결국 조선의 패망은 제도보다 사람에게 있다고 봐야겠죠./ 벽천

  • 작성자 23.07.17 19:59

    위윤기 님
    사실 지방에서 선비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기능 등은, 과거제도에서 소과라고 하는, 진사와 생원시험에 합격한 분들이 향촌에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조선 후기에는 생원과 진사들이 거덜먹거리기만 하고 간암공처럼 선비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이 지방의 기강과 윤리 그리고 부정이 만연한 이유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향촌에서 문과 등 벼슬이 목적이 아닌 진정한 대쪽 같은 선비나 학자들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다면 백성들이나 관리들도 함부로 기강을 흐트리거나 부정을 못할것인데 말입니다./ 무곡

  • 작성자 23.07.17 20:00

    간암 후손 가계도 입니다
    참고하세요

  • 작성자 23.07.17 20:00

  • 작성자 23.07.17 20:00

  • 작성자 23.07.17 20:00

    위두량 님
    대단합니다.
    아떻게 이렇게까지 작성하셨나요!/ 벽천

  • 작성자 23.07.17 20:00

    (21세)임진왜란 때의 충신 판서공(덕화)에서 시작하여 》 (22세) 심양왕환일기로 유명한 만회재공(정철) 》(23세) 남해군수공(동전) 》 (24세) 임계탄과 상소문의 간암공(세옥)으로 죽 이어지네요. 현재는 35세 이상 까지 ᆢ

    제가 일전에 나라를 세우려면 자손들이 얼마의 공을 세워야 되는지를 살펴본 적이 있었는바, 7대 이상이 덕과 공을 세우면 가능성이 크다는 혼자만의 결론을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상기의 기록에 거의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예전처럼 나라를 세우고 하는것은 아닙니다만 말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절로 존경심이 솟아나는 선조님이십니다.
    ※ 32세 편에 두량 종친 기록도 보입니다./ 무곡

  • 작성자 23.07.17 20:01

    영조 초기인 1732년 과 1733년 무렵 극도의 가뭄과 흉년으로 삼남지방 등에 아사자가 속출했으나,
    ※ 간암공께서 임계탄과 상소문 등으로 당시 상황의 심각성과 개선안을 상부에 알림

    영조는 조선사회의 계몽군주로서
    (1) 가혹한 형벌 폐지 또는 개정
    (2) 신문고 제도 부활
    (3) 금주령으로 사치와 낭비 금지
    (4) 균역법 시행(군포 2>1필)
    (5) 서얼출신도 관리등용 기회제공
    (6) 왕 자신도 소식과 물자절약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음
    (7) 조총을 만드는 등으로 국방정책에도 힘을 기울였음
    상기와 같은 제도를 시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개선한 군주로 실록에 기록됨/ 무곡

  • 작성자 23.07.17 20:01

    茂谷(무곡) 위상환 님
    결국 간암공의 날카로운 상소가 정부정책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봐야겠습니다./ 벽천

  • 작성자 23.07.17 20:01

    그렇게 보이네요.
    고려때는 불교 국가여서 그런 측면도 있었겠지만, 백성들은 물론 공무원들도 근무 시작전이나 업무 협의때 검소하면서도 정신을 가다듬기 에 좋은 차를 주로 마셨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들어와 성리학의 형식중시 풍조 등으로 인해 예산 낭비도 많았고 또한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네요. 그래서 물자 절약과 정신 개조 차원에서 영조께서 금주령을 내렸나 봅니다.
    그외에도 상소문에서 언급된 제도들이 영조때 정책에 많이 녹아든것 같네요. 군대 개혁과 서얼들의 관리등용도 그렇게 봐야 되겠지요./ 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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