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리1리 6.25전쟁 이야기
1.변구식(83세) , 연천 현가리 고향
전쟁시 15살이다
북한소년, 잘나고 야망도 있었다~
어느날 전쟁 준비하는 북한군들이 연천역에 탱크 내리는 일을 하는데 함께 도와 주었다
물밀듯이 내려갔는데 인민군이 올라온다
"북쪽 이천으로 3명씩 짝을 지어 피난 가라" 하더라
하지만 시간이 없어 못가고 인근 산에 숨었다
나중에 나와보니 돼지 등 잡아서 먹다가 놓고 도망 가 버려서 대신 잘 먹었다 한다
그러다 11월 말인가 12월인가 현가리에 17연대 본부가 들어왔다(대대본부일수도?) 신탄리역에서 인민군 패잔병의 기습받아 국군이 다수 전사하여 피해가 많았다 함
그래서 인지 신탄리 넘어 용담까지가 전수 지뢰밭이었다
'99년도에 장마이후 개간하면서 뼈가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처리는 모른다
1.4후퇴시 중공군과 함께 집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중공군 1개 분대가 탈영하여 숨어서 지냈다고 한다
먹고 사는 것이 문제인데 연천에 가서 남의 김치같은 것을 훔쳐와 먹고 살았다
51년 4월 초에 미군이 들어오는데 바로 손들고 나가 자수하여 떠나감
아군의 여자 스파이 1명이 어린애 데리고 와서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네의 극렬 분자를 식별하는 임무였다고 한다
국군은 없고 유엔군만 보았다~~~!
2.이현용 할아버지(80)
북한군 3명이 (장교 1명이 병 2명) 밥 해달라 해서 해 주었다
아마도 부상당한 인원들 같았다
볶은 쌀 가루를 내 주면서 끓여 달라 했다
★어디로 떠나면서 "국군이 온다 "3일이내" 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합수리로 피난
정말로 50년 9월말에 국군이 올라 옴
국군이 학교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취조함
누가 극렬분자인지 식별하는 모습~~!
동두천 지행동일대에 1.4후퇴시 이천 평강 사람들이 피난가서 집단을 이루었는데 동두천 지역 청방들이 무차별로 죽였다 함
상리일대는 심하지않아 큰 피해 없다한다
3.현종환 (85세) 9사 30연대 참전용사님
30연대 3대대 11중대 2소대 소속이다
51년도 3월1일 제주도에서 훈련받고 묵호에 배로 도착 , 소총병으로 9사에 보충됨
51년도 5월 현리에서는 포위되어 어디서 누가 전사했는지 기억나지 않음
☞기억나는 것은 어딘가에 모여 인원을 보니 소대에 몇 명 없더라는 것~~
국군 9사는 연천지역 고대산에서 싸우다 캐나다군에 인계하고 김화로 이동하여 미25사로부터 계웅산지역을 51년 6월19일 인수한다
그리고 51.6.28일에 계웅산을 탈환하고 7월말까지 김화지역을 방어하다 8월에 다시 미25사에 지역을 인계하고 육본직할로 포천에서 2개월 훈련 받고 51.10.20일 철원으로 이동하여 미3사 방어지역 인수 한다
계속해서 전초진지 쟁탈전을 하다 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 파편 부상, 제3육군병원 입원했지만 경미하고 인원이 부족하여 다시 백마고지로 올라가 전투 한다
(백마고지전투 : 52.10.6~15)
그런데 지금 상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
이유는 경미하여 후송 기록이 남아있지~~
52년 10월26일 작전지역을 미3사에 인계 하고 사창리로 넘어와 교육 훈련을 실시한다
★ 하지만 30연대는 국군 2사에 배속되어 저격 능선 전투에 참여 한다
52.11.25일에 9사가 2사로부터 저격능선을 인수하여 휴전까지 전투했다
★밤새 전투하고 나면 분대중 1~2명 살아남
백마고지에도 저격능선에도 중공군이 엄청 죽었다고 그리고 치우지도 않고 개인호나 토치카에 그냥 묻어 버렸다 한다
국군은 많은 수가 노무자나 유해처리반이 수습해 나갔지만 얼마나 처리된지는 모른다
4.이상봉 (86세 ) 대한청년단, 군속
처음 북한통제 받을 때는 열성당원은 40일씩 근무해야 하고 철도길에 보초를 선다
후퇴시 동두천까지 피난갔다
그곳에서 현지 입대, 6사 2연대로 입대했다 군번은 없고 훈련도 받고 수색중대에 배치됨
★하지만 군번도 못받고 죽도록 전투만 함
중공군에 포위되어 대량 피해를 보면서 서울로 들어와 천호동 방어
한강을 넘어 죽산-백암지역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반격을 개시하여 미제10군단 소속으로 원주 지정면 판대리까지 갔다
그런데 미제10군단의 좌익 국군8사단이 라운드업 작전으로 홍천을 포위 공격(우측은 국군5사, 차후에 국3사가 중앙 삼배리로 끼여 들어옴)하러 51년 2월5일부터 횡성을 공격하다 중공군 2월 공세(51.2.11~12)를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지평리에서는 미 2사단 23연대 전투단이 프랑스대대와 포위된 상태로 51.2.13~16 어간에 고립방어를 성공하여 무려 중공군 5천여명을 사살하고 미군등은 52명전사에 42명이 실종 되는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국군6사단은 19연대는미9군단 미24사단에 배속 되어 남한강 서쪽 양자산일대에서 전투하고 사단(-)은 미9군단에 배속되어 원주 판대리(간현리)까지 진출,미2사 23연대 전투단을 구원 준비하고 좌익에 영27여단이 여주 북내면 주암리(지평 무왕리 남방)으로 진출 했으며 미1기병사단이 남한강 동쪽 하진에 방어진지 편성
미10군단은 미2사가 원주서쪽 섬강, 제187공수연대(국3사18연대배속)는 원주 국3사(-)는 성남리 국5사는 입석리에 편성
국3군단의 7사는 마차리 9사단이 정선 수도사단은 삽당령에 방어진지 편성
51.2.18일경 양평 원주 제천 영월을 연하는 선에서 2월공세 저지
이때 미1군단은 직접적인 영향없이 국1사가 김포반도와 영등포일대 미3사가 한강선따라 경안리일대 미25사는 중공군 한강교두보 서쪽 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일대에서 방어중이었다
이때 제천 북쪽부근에 돌파구가 형성되어 이 적을 섬멸하기 위해 ★ "킬러 작전"계획함
미 8군은 남한강 동쪽의 양평 횡성 평창을 연하는 아리조나선 남쪽에서 철수하는 적을 격멸하기 위해 미9군단이 원주 횡성 홍천도로 따라, 미10군단이 제천 영월 평창도로 따라 공격토록 토록하고 미9군단이 29번도로, 미10군단이 60번도로 각 동쪽 사용
이 작전동안 미1군단과 미9군단 예하 미24사는 한강 남쪽에서 진격 엄호
국3군단은 좌전방 7사단을 60번도로 동쪽의 산악지대로 진출하여 미10군단진출 지원, 주력은 속사리 하진부리 유천리간 도로 방어
안동의 공비소탕작전을 완료한 미해병1사를 미9군단에 배속하고 187공수연대는 서울 탈환시 퇴로차단 위한낙하훈련 위해 대구로
★51.2.21부터 킬러작전 돌입
미9군단은 좌전방 미24사 엄호하에 미1기병 (영27여단배속), 국6사 그리고 주공 미1해병사로 4개사단 병진공격
★기상이변, 고온다습, 2.24일 미9군단장 무어중장 한강 탁류에 핼기추락으로 순직
★전투지경선 조정, 우전방 해병5연대 지역을 미10군단에 인계(국3사 23연대가 인수) 하고 국6사 지역을 미7해병연대가 인수, 사단의 좌 전방으로 투입 되었다
★3월4일 홍천 점령
☞이때 미10군단은 국군3사단이 좌부대로 강림 -안흥- 봉화산 방향으로 공격개시
점령후 3월7일부로 미2사23연대에 인계후 국3군단으로 복귀, 마차리-정선일대로 철수
☞국3군단은 오대산을 중심으로 동쪽이 수도사단 서쪽이 7사단, 9사 예비(송계리)
폭설로 수도사 기갑연대의 속사리 설한지 작전(5일간 폭설), 3월6일 횡성 평창선 진출
국군과 유엔군은 3월초 한강남안 횡성 강릉 선까지 진출, 서울 탈환위해 "절단작전(리퍼)
미1군단:국1사 미3사 미25사(터키여단)가 한강을 따라 강 남쪽의 김포반도 노령진 잠실 수청리 점령중
미9군단:국6사 미24사 미1기병(영27여단) 마1해병사가 양평 용두리 풍수원 횡성 점령
미10군단:국5사 미2사 미7사로 추동 안흥 하송빈 점령
국3군단:국7사(국해병1연대 배속)가 형제봉 박지산 용산리 점령
국1군단:9사 수도사로 간평리 차항리 강릉선
이에따라 미8군이 미9군단이 주축으로 공격 "아이다호선*서울 동쪽 덕소 가평 춘천북방 한계선 점령위한 통제선 설정
(알바니선 버팔로선 카이로선)
☞알바니:양수리 양덕원리 노천리 태기산 속사리선으로 홍천부근 통제
☞버팔로:미금 진벌 홍천북쪽 한계리선으로
미1,9군단에만 부여
☞카이로:미9군단에 한정하여 가평 춘천북쪽 한계북쪽 연결선으로 최종 목표선
이에따라
1)주공 미9군단은 29번도로 따라서 홍천 춘천을 목표로
2)조공인 미10군단은 풍암리 태기산 운두령을 공격
3)미1군단은 고착견제하다 예봉산 천마산 공격하여 주공 좌측방 엄호및 서울 포위준비
4)국3군단은 운두령 황병산공격
5)국1군단은 이미 아이다호선 진출, 방어진지 강화
미8군은 51.3.7에 리퍼작전 개시, 이를 위해 미10군재속되었던 국3사가 국3군단, 국1군단 국9사를 국1군단, 홍천 공격에서 많은 피해를 받은 국5사를 정비하여 미10군단에 배속 시킴
★미9군단은 주공으로 4개사단 병진 공격
1)★좌전방 미24(국6사★19연대배속 : 3월13일 6사로 복귀)가 용문산으로
2)중앙 미1기병(영27배속)과 국6(-)이 29번도로 서쪽 홍천강 남쪽의 산악지대
3)우전방 미해병1사가 홍천으로 공격
# 국해병1연대가 18일 미1해병사에 배속되어 24일 홍천 북방 가리산 확보
☞3월15일 미24사는 청평호에 국6사는 홍천강 남쪽 고지군 확보
그러다 사창리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51년 4월공세로 광덕산 일원에서 포위 되어 탈출에 성공, 가평까지 왔는데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국군이 밥을 해놓고 도망가 아무 생각없이 있던 것을 먹다 중공군에 포로
방공호 속에서 죽어 나가면 어디다 묻는지 모른다
금화에 갔는데 7연대 부연대장도 잡혀왔다
강동탄광 평양시내 모란봉 지하터널공사,
마지막이 중강진~~
포로 교환시 ★딘소장과 53년9월3일 자유의 다리 건너옴
이때도 군번도 없는 노무자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전후에 웃기는 이야기로 징집영장이 나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건강이 나빠서 불합격 됨
지금은 제대로 처리되어 군속으로 6.25 전쟁 참전자로 처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