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
타자 존중과 겸손의 화법
신 재 기
(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1.
수필의 전언은 글을 읽는 독자보다 글을 쓰는 수필가 자신에게 향할 때가 많다. 물론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수필도 있다. 독자의 의식이나 행동 변화를 의도하는 것은 글쓰기의 보편적인 출발이므로 글의 운동 방향이 필자에서 독자로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백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수필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전달하는 내용과 울림의 종착지가 작가의 내면이라는 말이다.
수필을 자기성찰 혹은 자기고백의 문학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러한 화법에 근거한다.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내용을 전하거나 독자의 행동 변화를 의도하기보다는 자기를 고백하고 성찰하는 데 무게를 두는 것이 수필 쓰기의 일반적 경향이다. 다양한 방법이나 유형의 수필이 창작되고 있으나 그 주류는 작가 내면을 지향하는 자기성찰의 목소리다. 작가 밖의 사실이나 사물에 관한 이야기도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투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자기고백이나 자기성찰은 윤리적 태도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 삶을 구성하는 일상은 의도된 절차나 규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물 흐르듯이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그 진행 과정에는 개인의 욕망이 예고 없이 돌출하고, 그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주기도 하고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나거나 품격을 잃을 수도 있다. 수필은 인간 삶의 이 같은 윤리의 상실과 흔들림을 바로잡고자 하는 반성적 글쓰기다. 이런 점에서 윤리성은 수필의 숙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윤리성이 수필의 본성이면서도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덕성을 가장하는 가식적 태도나 독자를 계도 하는 교훈적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많은 수필이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실성 위에 이루어지는 자기성찰은 충분히 문학으로서 심미성을 얻는다. 심미성을 발휘하기 위한 그 어떤 기교와 방법도 진실성을 능가할 수 없다. 진실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수필은 작가 개인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것이다.
전상준은 중견 수필가다. 세 권의 수필집을 펴냈다. 그의 수필은 일관되게 자기성찰의 내면적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수필의 일반적 경향을 모범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의 수필은 화려하지 않다. 새로운 시험을 특별하게 시도하여 남의 이목을 끌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도덕성을 의도적으로 앞세우지 않는다. 세상의 보편적 원리를 내세워 어떤 주장을 독자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일상의 삶에 녹아있는 인간 삶의 진실성을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가 차분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최대한 절제하고 사실이나 대상을 그 색깔과 부피만큼 말하려고 한다. 관념적 해석보다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상준 수필 쓰기의 기조이다. 이러한 특징이 그의 수필이 주는 진실함의 근원지다. 진실 어린 자기성찰, 이는 모든 수필가가 지향하는 방향이지만 어느 수준에 도달하기는 수월치 않다. 진실함이란 글로 드러나기 전에 삶 자체에 녹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상준 수필의 남다른 진실함과 신뢰감은 글과 실제 삶의 일치에서 오는 것이다.
2.
이번의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은 전상준의 세 번째 수필집이다. 앞의 두 수필집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 즐거운 삶》의 표제에도 모두 ‘행복한 삶’이란 말이 들어 있다. 물론 그의 수필집에 수록된 모든 작품이 표제의 주제를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삶을 기록하고 성찰하는 수필집에서 그 표제로 ‘행복한 삶’을 반복해서 사용한 점은 이것이 자기 삶이 지향하는 중심 가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수필집 전체의 주제라기보다는 작가의 인생관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누구나 자기 삶에서 행복을 소망한다. ‘행복한 삶’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가치이다. 하지만 ‘행복한 삶’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 같은 조건과 상황일지라도 개인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극단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행복한 삶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행복’은 그만큼 개인적이다. 나의 행복은 타인과 무관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는 말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행복으로 한정되면, 그 결과는 이기적인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일상에서 자주 말하는 행복은 대부분 뚜렷한 삶의 가치라기보다는 막연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필가 전상준이 일관되게 말하는 ‘행복한 삶’은 어떤 차원에 있는가. 개인적으로 육신의 불편함 없이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는 주관적 상태가 행복의 사전적 의미이다. 그가 작품에서 ‘행복’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작품 곳곳에 녹아있는 그의 삶의 태도와 생각의 파편을 통해서 짐작할 따름이다. 그만큼 행복한 삶은 개념적 설명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뜻이다.
굳이 그의 행복론을 정리한다면, ‘자기 사랑’이다. 이는 이기적인 자기애가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을 말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자기애다. 욕망의 높이를 낮추고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 이처럼 자기애는 행복한 삶을 키워가는 원동력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타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전상준이 말하는 행복론의 요체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 나아가서 자연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인식은 행복한 삶을 가꾸는 실천적 방법이다.
전상준 수필은 무엇을 말하기보다 말하고 싶은 것을 뒤로 미루고 대상과 상황을 보여준다. 추상적 설명과 주장이 자기를 알리는 화법이라면, 대상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에 대한 존중과 자기 겸손의 화법이다. 삶의 행복은 어떤 개념으로 설명되거나 어떤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을 통해 가꾸어 가는 구체적인 가치임을 말해 준다. 그의 작품에는 특정 상황이나 풍경 묘사, 다양한 식물의 이름, 역사적 장소나 문화유산 등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이러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행복론을 따라 걷는 길은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