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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진이 그림을 그린다. 아니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로 변신했다. 강석진의 변신은 이를테면 스위치 오버(Switch Over)라 할만하다. 완전한 뒤집기라는 뜻이다. 세계적인 대기업 GE(General Electric)의 최장수 CEO(Chief Executive Officer) 즉 최고경영자에서 잭 웰치 회장의 신망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던 한 기업경영인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직을 했다. 그 충격적인 뉴스는 곧 매스컴을 통하여 소시민들의 안방까지 파고 들었다. 또 다른 하나의 신화가 미술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CEO로서의 성공과 자연스럽게 연상결합되고 있다.
사람들은 강석진이 최고경영자에서 화가로 변신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석진은 본업으로 돌아왔다고 믿는다. 그림 속에 인생의 목표가 있다고 믿기에 그 신념은 더욱 확고하다. 물론 세상이 강석진을 화실에 칩거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종이 바뀐, 문자 그대로 스위치를 바꾼 세계가 될 것이다. 이제는 기업에서 화실로 출퇴근하는 형식이 아니라 화실에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현장을 드나들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인, 화가로 변신...”이라는 기사를 처음 접하면 고갱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갱을 소재로 씌어진 서머세트 모음의 달과 육펜스(The Moon and the Six-pence)는 주인공 스트릭랜드(Strickland)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달로 상형화한다. 육펜스는 스트릭랜드가 화업을 위해 버린 세속적인 것이다. 뉴욕 증권거래인으로서의 한 세계를 버린 스트릭랜드는 파리에 가서 화가로서의 또 다른 세계를 꾸려나간다. 그리고 타히티 섬으로 건너가 불세출의 대작을 남긴다.
언뜻 보아 기업에서 화업으로 옮기는 양상은 스트릭랜드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그 스위치 오버의 형상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강석진은 또 하나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그가 몸담았던 세계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화업이 보여주는 방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인 강석진이 그리는 그림은 오히려 이 땅에 사는 이 땅의 주인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방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모든 사람이 공유하기 위한 방향, 그것이 무엇인지 강석진은 안다.
강석진은 이렇게 화업으로 회귀하기까지 많은 시간 한국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겨왔다.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 아름다움 자체가 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므로 많은 미술의 표현양상 중에서 우리가 구상(具象)회화라 일컫는 범주를 고수해왔다. 구상이란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모습을 말한다. 점, 선, 면 그리고 색채 등의 조형요소로만 그려지는 추상회화를 굳이 고사하는 이유는 한국의 산과 물과 땅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처럼 그 속에서 안분자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석진의 풍경에서는 민족정기가 느껴진다. 민족의 원형을 담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세계를 누비며 스케치를 다녀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한국의 풍광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산, 연변, 백두산 등이 직접 민족정서와 연관있는 지역이라면 북미의 인디언, 남미의 인디오들의 사는 곳에서는 먼 선조의 얼이 스며 있다.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 아시아에서 이주한 몽골족의 후예와 그 문화, 그리고 그 원형적 정신이 거기 있는 것이다. 강석진이 즐겨 연주하는 잠포니아, 즉 팬파이프에서는 동네 뒷산 솔밭의 바람소리가 들린다.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즉 인디언들은 먼 조상이 태양신에 빌어 병을 치유했던 위대한 전통을 오늘날 모래그림으로 전승해왔다. 그들은 새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새의 날개짓을 닮은 춤사위로 조상을 뵙는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새와,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태양을 숭배했던 조상의 얼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나서고 그린다는 것은 바로 전통과 문화권 속의 나를 확인하는 것이리라.
보다 직접적인 민족정서는 천산과 백두산에서 만날 수 있다. 천산은 하늘 산이다. 현지 이름은 칸텡그리이다. 칸은 임금이고 텡그리는 단군과 같은 뜻이다. 하늘산 혹은 하느님의 산이라는 뜻이다. 백두산은 백산이다. 밝산이다. 한국어로 뜻풀이하면 태양산이 된다. 태양산 중에서도 제일 큰 태양산이 태백산이다. 그 아래 환웅이 내려 신시를 열고 환검을 낳아 이 나라 기틀이 열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천산이나 백산 혹은 백두산을 찾아 그리는 작업은 마치 신명을 바쳐 국조 단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 다니는 순례를 연상케 한다.
백두산에는 천지가 있다. 한 순간 다른 세계가 열리는 천지의 신비로움, 여간해서 그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 짙은 에메랄드색 물빛에서 강석진은 신화를 본다. 한민족의 감동으로 천지를 본다. 그 벅찬 가슴으로 화면을 채운다. 대상과의 영적 교류와 그 표현으로 캔버스를 메운다.
그러나 그 영적 교류는 신비화한 의식을 통하여 보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화면에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보는 사람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은밀한 것이다. 마치 화실의 여기 저기에 세워지고 놓여진 나무토막처럼 그것은 아무런 정서적 해석없이 위치를 차지하면서 은밀한 사밀언어를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해준다.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강석진을 나무들이 불러세웠다. “서초구청에서 나를 짤랐어요. 우면산의 나무들을 바꾸려나봐요. 이제 아침 산책에서 나와 대화할 수 없을 거예요.” 강석진은 다시 돌아가 산책길의 오랜 친구들을 화실로 날랐다. 사람들은 수근거렸을 것이다. “정원이 넓은가봐.” “아냐, 벽난로가 있을꺼야.”
그렇게 수근거리는 사람들은 그가 세계적인 기업의 한국 최고경영자라거나 화가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또 하나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강석진의 화실에는 그 나무들이 강석진과 행복한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사실이다.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마음의 눈으로 보고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비단 강석진과 나무만의 관계일 것인가.
영혼의 눈으로 보고 정신의 진동을 화포에 옮기는 작업이 어찌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 머물랴. 이를테면 동양화의 화업에서 형사(形似)를 넘어 신사(神似)에 이르는 미의 역정을 실천하는 구도자같은 자세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진동을 전한다는 뜻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낡아 빠진 배가 어찌 갯벌을 어지럽히는 공해일까. 강석진에게 낡은 배는 언젠가 바다를 누비다가 이제는 포구에 영원히 닻을 내린 늙은 뱃사람같은 이야기꾼이다. 배위에 앉아 귀를 기울여보라. 낡은 배는 우직한 뱃사람들의 신나는 모험담을 소근거려줄 것이다.
그처럼 강석진이 그리는 캔버스에는 낯익은 우리의 산하, 하늘이 비치는 물논, 그 속에서 일하는 아낙네같은 우리의 정감이 담긴다.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통할 것같은 구불구불한 길도 넣었다. 정선 아라리같은 구성진 한국인의 심성에 푸욱 빠진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파묻히어 노닐었던 신록이 거기 있었다. 꾸미지 않은 편한 느낌이 화면 위에 그렇게 자리잡았다. 부드러운 선과 나긋나긋한 색채로 이 땅의 사람들마냥 모나지 않은 산하를 강석진은 위에서 부감하여 그린다. 마치 위대한 창조주의 시각을 그대로 화면 위에 옮기려는 듯하다.
홍수에 잠긴 두 도시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는 경기도 문산, 또 하나는 유럽 도시의 풍경이다. 강석진은 지붕만 보이는 황량한 풍경에서 한국의 물논을 본다. 그것은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다. 또한 강석진에게 그것은 창조주가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이었다. 빛과 물과 색채가 만든 최고의 회화적 질서였다. 화면에 질서를 부여하는 화가의 권능이기도 했다.
“스티그마타(Stigmata)” 즉 성흔(聖痕)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하느님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집에 계시지 않는다. 나무를 쪼개면 그 속에 있고, 돌을 들치면 그 아래 있다’는 어느 복음서의 구절을 극적으로 영화한한다. 이를테면 일체유심조라,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불교의 교리를 생각게하는 이 사상은 화엄경의 중심교리이기도 하다.
화엄경의 수미게찬품에서는 “일체법을 깨닫게 되면 자성이 무소유임을 알 것이다. 이같이 법성을 요해하면 즉시 노사나불을 볼 것이다”라 했다. 그런데 노사나불은 누구인가. 내가 나라고 주장하는 자아야말로 인연에 따라 물질계와 정신계가 일시 모여 생각이나 행동, 혹은 인식을 지어내는 것이니, 그것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를 보리라 했다. 그렇다면 노사나불 즉, 부처야말로 바로 그 깨달음의 주체인 자신이 아닌가.
역광 역시 위대한 창조주가 강석진에게 베풀어주는 섬세하고 화사한 색면이었다. 오월의 물논이나 홍수에 잠긴 도시에 비친 하늘은 하늘의 섭리가 반영되는 오직 그 시간만의 그 장면이었다. 그 뿐이랴. 한국의 구릉을 배경으로 새벽 안개가 서린 밭이랑과 미지의 차원으로 통하는 길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 2년간이나 강화도를 드나든 일도 있었다. 야생마처럼 걷잡을 수 없었던 풍광도 결국 강석진의 캔버스에 고분고분 길들여졌다. 어쩌겠는가.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니까 열번이나 찍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현장의 시각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현장정신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하르빈의 731부대를 그린 그림은 오늘날 빈민촌으로 변한 현장에서 그렸다. 거기에는 중국인 빈민들의 거센 항의와 해명을 통해 환대를 받았던 과정- 프로세스가 그림에 담겨 있다. 731부대는 마루타라는 암호명으로 불리웠던 악명높은 일본군의 생체실험현장이었다. 역사적 현실을 담는다는 한국인의 의지가 그 고통을 감내해왔던 중국인들을 설득시킨 현장의 기록은 시각적, 구조적 현실이기 전에 가슴 뭉클한 감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비닐하우스 역시 농촌의 역사적 현장과 그 현실을 기록한다는 현장정신의 생기로 접수된다. 비닐하우스는 구상화가들이 즐겨 그리지 않는 소재이다. 주위의 자연과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화면을 면분할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석진에게 비닐하우스는 눈덮힌 산하와 마찬가지로 자연이 베풀어주는 하나의 구조적 조형이다. 굳이 있는 자연을 구조조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조정되는 자연의 구조로 강석진은 느낀다. 몇 십년 후에는 비닐하우스도 몇 십년 전의 초가처럼 향수의 대상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한국농촌의 오늘을 기록할 것인가.
구조조정에 의한 화면질서의 재구축은 이러한 추구의 필연적인 귀결로 보인다. 화면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기하적으로 패턴화한 유기적인 자연의 질서가 자리잡는다. 밭을 매는 아낙네들은 한골씩 밭이랑을 타고 앉은 바위처럼 듬직하게 화면에 각인된다. 끝없이 펼쳐진 러시아의 해바라기밭 사이의 길에는 트랙터가 외롭게 가고 있고 해바라기들은 마치 바둑판위의 바둑알처럼 배열되어 있다. 화면에서 그려지는 대상들은 이미 자연의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눈 자체로 몰입하는 강석진의 화면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조직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인간경영철학이 자율적이면서도 구조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한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화면은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행복한 영혼의 대화를 나누면서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화면을 만들되 철저한 화면경영으로 마무리짓는 강석진의 화면이 새로운 경영측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마치 스케치여행 중에 부하직원에게 최고경영자의 권한을 대행하게 하는 이른바 부재경영이라는 이름의 인간경영처럼 강석진의 화면은 그렇게 스스로 경영되고, 그리고 성장하고 있다.
20030310
이미지:
http://www.artistkang.com/
에서 발췌
#강석진 #Kang_Sukjean_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