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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론」 이해
1) 「제물론」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
● 「대종사」 ‧ 「지북유」 ‧ 「천지」 등의 글을 통해 ‘도(道)와 기(氣)와 만물(萬物)’의 관계가 어떤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음. 도는 자본자근(自本自根) 즉 자기 원인적 존재이며 내재성과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함. 인간은 물론, 동물 ‧ 식물 ‧ 무기물 속에도 도가 그들의 본성으로 깃들어 있음. 즉 만물은 하나인 도에 근원을 두고 있음. 그 도를 체득할 때 만물 모두를 한가지인 것[평등]으로 볼 수 있는 명(明)의 경지가 열림. 여기에서 자유자재[逍遙遊]한 삶이 가능해진다고 봄.
● 우언 ‧ 중언 ‧ 치언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함. 「우언(寓言)」은 장자 전체의 구성과 취지를 밝히고 있는 글임. 특히 그의 제1절 내용은 「천하」와 더불어 장자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이며, 「우언」 전체의 취지는 주로 「제물론」의 만물제동(萬物齊同) 논리를 부연 설명하는 데 있음. 「우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입 또는 사물에 의탁해서 하는 우언(寓言)이 내 책 전체의 9/10를 차지하고, 옛사람의 말을 빌려 무게를 실은 중언(重言)이 7/10을 차지한다. 이런 가운데 술이 차면 기울고 술이 비면 위를 향해 곧게 서는 둥근 술잔처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임기응변식의 치언(巵言)이 날마다 입으로부터 흘러나와 그치는 일이 없는데, 이는 모든 것을 자연한 입장에서 하나로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언 : 사기 「장자전」에서는 “장자의 10여 만언은 대개 우언으로 되어 있다.”라고 했다. 우언 가운데 중언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고, 중언 가운데 우언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중언 : 이는 장자 당시의 일반인에게 소중히 여겨지던 말, 즉 황제(黃帝) ․ 요(堯) ․ 순(舜) ․ 공자(孔子) ․ 안회(顔回) 등의 입을 빌려서 장자 자신의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을 뜻한다. 장자는 스스로 연출가가 되어 이들을 섭외하지도 않고 이들에게 출연료도 주지 않으면서 이들로 하여금 다채로운 연기를 하도록 만든다. 이는 덕망이 높다고 평해지는 장자(長者)의 권위적인 말을 빌려 논쟁을 제지하는 효과를 꾀하는 것이다. 치언 : ‘巵’(치)는 본래 둥근 술잔을 뜻하는 글자이다. 여기서는 편의에 따라 변하며 어떤 하나를 고집하지 않는 글쓰기 방식을 의미한다. 사람이나 사물, 시간이나 공간에 따라 입론(立論)을 달리 하며 자기의 성견(成見) ․ 주견(主見)을 지니지 않은 채로 행하는 글쓰기를 뜻한다. “무심으로 하는 말이 곧 치언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대기설법이요 방편시설인 것이다. 언(言)과 불언(不言), 가(可)와 불가(不可), 연(然)과 불연(不然)이 대거(對擧)되고, 대립적인 판단이 각자 성립하여 서로 대대(待對)하지만 궁극에는 모든 것이 통일되어 전체적으로 화해를 실현한다. 이럴 수 있는 것은, 각종의 대립과 비대립적 인소(因素)가 화해 ‧ 공존하는 우주 만물의 자연한 평형 활동을 따르는 것이 치언이기 때문이다. ‘화이천예(和以天倪)’가 치언 기능의 관건이다. 장자가 치언과 관련하여 반복해서 ‘화이천예’라고 말한 것은 ‘치언’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추수」에서 제시한 ‘이도관지 물무귀천(以道觀之 物無貴賤)’, ‘이물관지(以物觀之)’, ‘이속관지(以俗觀之)’, ‘이차관지(以差觀之)’, ‘이공관지(以功觀之)’, ‘이취관지(以趣觀之)’들 간의 차이점을 고려해야 함. 또한 「천지」에서 말한 ‘이도관언(以道觀言)’, ‘이도관분(以道觀分)’, ‘이도관능(以道觀能)’, ‘이도범관(以道汎觀)’ / “以道觀之, 何貴何賤, 是謂反衍; … 萬物一齊, 孰短孰長?”도 고려해야 함. 장자가 「제물론」에서 취하고 있는 ‘관점 아닌 관점’은 ‘이물관지’ 이하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도관지’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함.
‘이도관지 물무귀천(以道觀之 物無貴賤)’ -장자가 제물론을 통해 타파하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지적(知的) 활동과 명예심이 일으키는 갖가지 폐해이다. 그 폐해들 가운데서도 당시의 통치구조와 관련해서는 귀천 관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는 귀천 관념이 없다. 그러면 문화와 문명의 세계에서 과연 누가[무엇] 귀한 존재이고 누가 천한 존재일 것인가? 누가 통치자이고 누가 피통치자일 것인가? 천자 뿐 아니라 나도 똑같이 자연에서 나온 존재라는 점에서는 차이나 차별이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하다. 그 자연한 평등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들은 화해를 이룰 수 있다. 장자가 「제물론」을 통해 사물의 상대화를 극단적으로 몰아간 까닭은 자신이 상대주의자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라, 그의 궁극적 목표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장자를 ‘상대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일 수 없다.
2) ‘제물론’이란
장자의 제2편인 「제물론」은 장자철학의 방법론 내지 인식론[수양론]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인 글이다. 그러므로 「제물론」의 핵심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장자 전체의 내용을 대하는 관점이 결정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거의 주석가들은 ‘제물론’을 각기 다른 방식과 관점으로 이해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장자 전체도 그렇거니와 「제물론」의 글이 어떤 결론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진 것이 아니라, 우언 ‧ 중언 ‧ 치언을 통해 문제를 제기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중요한 것은 「제물론」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32편의 내용을 전제해야 하며, 나머지 32편 각각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제물론」의 요지를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제물론(齊物論)’ 세 글자에 대한 역대 학자들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齊’는 가지런함을 뜻하는 글자로서 등(等 즉 고름 ‧ 동등)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이는 본래적으로 평등한 만물을 평등한 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정신상의 작업을 뜻하는 글자라고 할 수 있다.
① ‘物을 齊하는 것에 관한 論’이라고 보는 견해. -사물을 가지런하게 하기 위한 논의;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관점을 펼쳐 논의하는 것.’ ② ‘物論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사물에 관한 여러 논의들 즉 衆論을 가지런하게 함. ‘세상의 온갖 物論들을 齊一[和諧]시키는 것’, 또는 ‘人 ․ 物에 관한 모든 논의들을 평등하게 보는 것.’ ③ 앞의 두 견해를 합친 제3의 견해. -物 즉 물질문명의 이기만이 아니라, 論 즉 정신문화도 양면성을 갖는다는 견해에서 출발. 인간 세상의 시비 다툼 뿐 아니라 ‘천하 만물에 대한 분별 ․ 차별까지도 평등의 경계로 되돌리는 것.’ 어쨌든 제물론은 인위적인 문화로 형성된 관념적 속박과 주관적 자아로 인해 일어난 대립 ․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곧 인간 세상의 고통과 속박에서 초월 ․ 해탈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해됨.
(1) 物을 齊하는 것에 관해 논함[‘齊物’論]이라고 해석하는 경우
① ‘아(我)’라는 고정 관념 즉 아집을 없애버리면 사물들은 가지런하게 됨[無我則物齊]. “여기에서의 ‘물(物)’은 천지 ․ 만물을 포괄한다. 제물편의 서두에 등장하는 ‘오상아(吾喪我)’라는 개념이 글 전체의 요지이다. 무릇 物에 대해 말할 때는 피차 ․ 시비 ․ 대소 ․ 이해(利害) ‧ 수요(壽夭) ․ 생사(死生) 등을 언급하지만, 이것들은 物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차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物이 가지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物을 대하는 내가 ‘我’라는 관점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상아’란 나의 입장에서 본 일체의 것들을 하나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곧 사물들은 평등해진다.” ② 사물은 본래 저절로 평등함[物本自齊]. “천하의 모든 사물들을 가지런하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물들이 시작되지 않았던 처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럴 때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평등해지는 것이지, 내가 사물들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사물들을 가지런하게 하려고 든다면, 사물들은 끝내 균등해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 제물편의 요점이다.”
장자에게서 ‘물(物)’이란 눈앞에 존재하는 여러 사물 즉 만사 ․ 만물을 의미한다. 이것은 장자가 유기물에서 무기물에 이르기까지의 만사 ․ 만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말한다. 장자는 이렇게 만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천지 ․ 만물이 그 자신의 규율에 따라 존재하고 발전하며, 物과 物 사이에는 고하(高下) ․ 귀천(貴賤) ․ 지우(智愚) ․ 시비(是非) ․ 선악(善惡) 등과 같은 구분 ․ 차별이라는 것이 없으며 모두가 평등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자철학의 사회적 연원은, 한편으로는 현실 인간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탐구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 사회에 대한 추구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의 ‘만물제일(萬物齊一)’과 ‘소요이유(逍遙以遊)’ 관념은 서로 표리 관계를 이룬다. 만물 각자에게는 고유한 규율이 있으며, 각자는 자기의 규율에 따라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재하고 자기를 전개한다. 따라서 각자의 사이에는 고하 ․ 귀천 ․ 시비 등과 같은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물제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이 편견에서 해방되어 ‘소요유’할 수 있게 되면, 인간과 만물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제일’과 ‘소요’는 장자철학의 기본 개념이다.
(2) 物論을 가지런히 함[齊‘物論’]이라고 해석하는 경우
① 여러 가지 논의들[物論 즉 衆論]을 가지런하게 함. “‘物論’이란 인간과 사물에 관한 논의들을 뜻한다. 즉 衆論을 말하는 것이다. ‘齊’란 가지런하게 하여 하나로 함[齊一]을 뜻하는 말이니, 이는 곧 여러 잡다한 논의들을 하나로 정리함을 뜻한다. 전국시대에는 여러 학파들이 서로 시비를 다투었는데, 장자는 서로 시비를 다투는 것이 ‘是와 非를 함께 잊고[兩忘]’ 자연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여 「제물론」을 지었던 것이다.” “「제물론」의 글은 사물들을 가지런하게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관한 논의들’을 가지런하게 하기가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사물들에 대한 시비 ․ 훼예(毁譽)를 모두 物에 맡겨두고, 내가 그것들에 관여하지 않게 되면 사물들에 관한 논의는 가지런해진다.” “장자는 ‘저것이다’ ․ ‘이것이다’라고 하면서 다투는 논의가 끝이 없어 物論이 가지런해 지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그러한 논의들을 모두 천뢰(天籟)에 의탁해 버린다.” “사물은 각자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가지런하게 할 수는 없다. 가지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물에 관한 논의[物論]’일 뿐이다.” ② 여러 가지 논의들은 본래 가지런함[衆論本齊]. “어떤 사람은 장자가 ‘物論을 가지런하게 하였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논의들은 가지런하게 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가지런해지지 못한다. 다만 다른 物論을 바라보는 자기의 관점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관점을 가지런하게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면 다른 物論에 관여할 게 없어진다.”
(3) ‘사물들과 논의들 모두를 가지런하게 함[齊‘物 ․ 論’]’이라고 해석하는 경우
“사물에는 彼와 我가 있고, 논의에는 是와 非가 있다. 나를 버리고 物로 化하며, 道의 차원에서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道通爲一]이 바로 ‘齊’의 의미이다.” “천하의 모든 사물들과 논의들을 하나로 가지런히 하여 볼 수 있다. 따라서 변론할 필요가 없고 다만 道를 지킬 뿐인 것이다.”
3) 「제물론」의 대의(大義)
이 세계에는 갖가지 차이가 있다. 자연계의 사물들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도 갖가지 차이가 있고 차별이 있다. 민족과 국가와 종교들 간의 차이가 있고, 언어와 지식과 이념과 사상들 간의 차이가 있으며, 체제와 제도와 도덕들 간의 차이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들만이 있고 공통점 ․ 동일성은 없는 것일까? 다름 속에서 같음을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일까? 분열과 대립을 지양하고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춘추전국 시대에 등장한 제자백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갖가지 방안을 제기하였다. 그 가운데는 힘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부국강병의 방안을 제안한 학파가 있었는가 하면, 대화와 변론으로써 해결을 추구한 학파가 있었고, 겸애(兼愛)와 같은 동등한 사랑이나 인의(仁義)와 같은 도덕성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학파도 있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런 방법들로써는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언어는 세계를 분할시키며, 사랑은 한 편으로 치우칠 수도 있는 것이고, 인의와 같은 윤리 도덕은 오히려 사람의 소박한 본성을 잃게 할 수도[虛禮虛飾]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의 해결책은 저들의 생각과는 판연히 다른 것이었다.
장자는 「제물론」 첫머리에서 오상아(吾喪我)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상아(喪我)는 곧 상기우(喪其𦔊)이다. ‘상기우’란 자아가 그의 짝을 잃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자아가 그의 짝을 잃는다는 것은 공명심(功名心)을 없앤다는 것 뿐 아니라, 자기(自己)라는 의식조차도 없애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와 나 아닌 것 간의 대립을 넘어설 뿐 아니라, 나의 정신과 나의 몸의 구별조차 넘어선 망아(忘我)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 그러면 ‘상아’란 제물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나와 남, 심지어 나의 정신과 몸을 구별하는 분별심(分別心)을 버려야 제물(齊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장자는 이어서 성심(成心)이 온갖 시비의 원천임을 밝히면서, 이 세계에는 진군(眞君) ․ 진제(眞帝)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였다. 이러한 진군 ․ 진제를 자아 안에서 찾아낸다면 물질과 육신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장자는 도추(道樞)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다. 도추란 그의 짝이 될 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서 시(是) ․ 비(非)와 피(彼) ․ 차(此)를 넘어선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일체 사물의 중심 관절에 해당하는 도추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아야 제물(齊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관점[以道觀之]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두고 ‘이명(以明)’이라고 하였다.
장자는 이어서 형상면(形狀面)에서 볼 때 사물에는 갖가지 차이가 있으나, 그들의 본성은 도(道)로부터 얻어진 것이므로 도에 의하여 통(通)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장자의 제물에 관한 기본 관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으로 장자는 천하 사람들의 시 ‧ 비에 맡기어 시비를 떠나지 아니하고서도 시비가 없어지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양행(兩行)’이란 것을 제기하였다. 이어서 장자는 고지인(古之人)에 의탁하여 是/非와 彼/此와 物/我의 대립을 넘어선 정신세계를 제기하였다. 이로써 보면 장자가 「제물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도(愼到)처럼 단순히 시비 관념을 버릴 것을 주장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物)과 아(我)가 혼연히 일체(一體)로 되는 정신세계에서 만물을 제일(齊一)하게 보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에서 장자의 그러한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자는 여기서 천지 만물이 나와 함께 살고 하나가 되는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상아(喪我)’의 귀착지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장자는 ‘지지기소부지(知止其所不知)’ 즉 자기가 모르는 것에서 그칠 줄 아는 성인(聖人)의 지혜에 관해 언급하고, 이어서 제물(齊物)이 힘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성향(性向)에 맡길 수 있는 덕(德)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보다 구체적인 것은 「덕충부」의 내용을 참조).
다음으로 장자는 사물마다 성질이 같지 아니하여 그들이 편의(便宜)하게 여기는 것과 시비 판단의 기준이 다르므로, 이해(利害)와 시비(是非) 관념을 버리고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표현하였다. 이어서 장자는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를 제시할 수 있느냐는 점에 대해 회의하였다. 그렇다고 좌절할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道)의 관점에서 사태를 관조할 수 있는 성인은 시(是)와 비(非)는 물론 생(生)과 사(死)조차도 초탈할 수 있는 드높은 정신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장자는, 표면적으로 보면 사물들은 서로 의존하여 있는 것 같으나 심층적으로 보면 사물들은 제각기 스스로 생겨나서 스스로 변화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였다. 마지막으로 장자는 ‘물화(物化)’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시(是)와 비(非), 화(禍)와 복(福), 몽(夢)과 교(覺), 물(物)과 아(我), 생(生)과 사(死) 등의 갖가지 현상은 표면적으로 보면 각기 서로 다르나 본체면(本體面)에서 보면 공통점이 있으니, 이들은 모두 도의 물화(物化)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인식면(認識面)에서 그들 사이의 대립 관계를 타파하고 자연한 변화에 따라 살다가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보건대 제물론은 단순히 갖가지 이론 즉 물론(物論; 衆論)을 제일(齊一)시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제일(齊一)하게 볼 수 있는 이치를 정밀하게 논하고 있는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강수 ․ 이권 역, 장자Ⅰ, pp.86-166 참조).
「제물론」의 주제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화(化)하기 위해서는 대립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 즉 실재(實在)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고 보는 데 있다. 즉 사물의 한 면만을 바라보는 인간의 상식적 ․ 분석적 ․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眞相)을 전체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體得)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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