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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독교계의 대표적 목회자인 제리 파웰(사진) 목사가 15일(현지시간) 소천했다. 74세.
파웰 목사는 1956년 고향인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토머스 로드 침례교회(TRBC)를 세운 뒤 TV 설교를 통해 복음을 널리
전파했다. 빌리 그레이엄(89), 로버트 H 슐러(81) 목사와 함께 미 교계의 3대 원로 목회자로 꼽힌다.
그는 생전에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지키겠다며 보수 성향의 주장과 행동을 자주 해 논란을 일으켰다. ▶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와의 소송▶남아프리카 공화국 제재 반대▶텔레토비의 동성애 성향 지적 등이 유명한 사례다.
파웰 목사는 '도덕적 다수'운동을 주도하며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강병철 기자
제리파웰이 미국 정치와 기독교에 남긴 유산
Rev. Jerry Falwell
강 원근 목사, Ph.D. , 뉴헤이븐 한인 연합감리교회 ㅣ 작성일 :6-06-2007
지난 5월 15일에는 미국 교계와 정치계에 큰 뉴스가 하나 있었다. 뉴스가 상당히 커서 일반 TV 프로그램중에도 자막으로
뉴스가 보도 되고, 필자가 그날 봤던 ABC 방송국의 저녁 뉴스에서는 두번째로 방영이 되었다. 그 사건은 다름아닌 제리 파웰
목사가 소천한 것이었다. 파웰은 빌리 그레이엄 그리고 수정교회의 라버트 슐러 목사와 아울러 미국 교계의 3대 원로 목회자로
꼽힌다. 그는 그의 모교회였던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2만 명이 훨씬 넘는 교회를
만들어서 한때 미국 최대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리버티 대학교를 설립해서 총장을 연임했으며, TV 설교자, 시사토론회
진행자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파웰이 그 무엇보다도 미국사회에 영향을 끼친 것은 “Moral Majority”라는 복음주의
정치참여단체를 통해서 미국 정치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미국정치학, 특히 선거분석을 위해서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동향을 필히 연구해야 한다. 그만큼
복음주의자들의 현실정치참여가 매우 활발하다는 말이다. 복음주의자라고 하면 성경을 인간의 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을 생의 최고, 최대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을 말한다.
원래 미국은 청교도라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물론 미국의 탄생과 정체성 그리고 청교도가
복음주의로 분류되는 것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나,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16세기때 영국은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의 장점을 살려서 성공회라는 독특한 국교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영국의 개신교도들이였던 청교도들은 영국황실이 만든 성공회가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제도와 의식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성공회를 거부하게 된다. 그결과 그들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고, 청교도들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보다는 그들의 재산을 내팽개치고, 목숨을 걸고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로 피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중 일부가 새로 발견된 미지의 땅이였던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그들이 바로
미국의 기초를 세운 “Pilgrim Fathers”인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은 철저한 개신교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걸고 이주해온 청교도들의 땀과 피에 의해 세워진
국가였다. 그래서 그들의 후손들은 당연히 그들 선조들의 전통을 잇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미국 역사 초반부에는
개신교도들이 크게 득세를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몰려오는 카톨릭 성도들, 그리고 세계각국에서
이민오는 유태인들, 아울러 중국, 일본인들까지 합세하면서 그들 신앙의 전통을 지키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래서 한때 KKK라는
단체를 만들어 카톨릭 성도들과 유태인들을 테러하고 린치했던 역사가 있었다. KKK하면 흔히 흑인탄압 단체를 생각하는데, 원래
KKK는 가톨릭 교인들과 유태인들을 미국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극우파 개신교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몰려드는 수 많은 비개신교도들과 아울러 과학주의, 상업주의의 발달로 미국은 더 이상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점점 주변세력으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를 두고서 고민하게 되었고, 미국을 자기들 신앙으로 움직이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고립되어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그래서 크리스쳔학교를 만들고, 교회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세상의 성문화, 상업주의 문화를 배격하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수 많은 크리스쳔 학교들과 홈스쿨링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탄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고립되어서 고집스럽게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밥 존스 대학교를 중심으로 그들의 주장을 체계화 했고, 신학교들도 크게 근본주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학교들과
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신학교들로 구분이 되게된다. 그리고 교회들도 두 노선을 따라서 갈라졌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Bible
Baptist Church 강한 근본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제리 파웰 목사는 이 Bible Baptist Church
계열에 속한 교회들의 대표적인 리더였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근본주의자들중 일부는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 근본주의의 신학과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특히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했는데, 세상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기독교인들끼리만 담을 쌓고 살면은 우리는 어떻게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의 기본적 신학은 받아들이되, 세상을 사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였고, 이런 주장을 한 댓가로 그는 미국 근본주의자 명단에서 제명이 되는 수모를 당했다.
어찌됐든 빌리 그래함 목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소위 neo-evangelicals, 한국말로 하면
신-복음주의자들이 구성된다. 여기서 신-복음주의라고 명명한 이유는 청교도와 같은 구-복음주의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신”자를 빼고 그냥 복음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신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신학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신학교를
세웠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7년에 세워진 Fuller 신학대학이다. 그리고 신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세상에
알리기위해 “Christianity Today”라는 잡지를 간행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미국의 개신교는 크게 근본주의자, 신복음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자 이렇게 세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1970년대까지
유지가 된다. 그리고 이 세개의 그룹중 자유주의자들이 크게 득세를 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인간의
이성적 이해를 중요시 해서 과학적인 성경연구를 추구하는 기독인들을 말한다.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지배하는
하버드신학대학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그래서 예일신학대학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예일에서도 밀려나게 되어서, 급기야 프린스턴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모였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자, 그들은 1929년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을 만들어 그곳으로 모이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때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흐름의 이면에는 미국 정신의 근본을 흔드는 큰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8세기후반,
19세기 전반에 미국 최대의 갑부였던 강철왕 카네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오늘날의 갑부
빌게이츠를 능가했던 카네기는 그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하고 어떻게 하면 돈을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사실
그는 독실한 기독인은 아니였고, 영리한 사업가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돈을 종교단체보다는 당시 MIT 대학의 총장이였던
프리체트(Pritchett)박사에게 가져간다. 그리고 “교육발전을 위한 카네기 재단 (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을 1905년에 만들고, 미국의 대학들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당시 미국대학의 학문수준은 독일이나 영국 그리고 프랑스 대학의 학문수준에 크게 미달되어 있었는데, 프리체트는 그 이유가
기독교 때문이라고 결론내린다. 당시 하버드, 예일을 비롯한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대부분 개신교도들에 의해서 설립이 되었고, 학교의
재단이사회는 상당부분 성직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학교의 분위기는 이성을 사용하여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보다는 신앙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가 충만했다.
이에 프리체트는 이러한 학풍이 학문의 발달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카네기 재단의 지원을 원하는 대학은
재단이사회에서 성직자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는 조건을 걸게된다. 당시 그 지원금액은 엄청난 금액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들은
돈을 받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학교내에서 점 점 힘을 잃어가고 있던 성직자들을 모두 내보내게 된다. 그래서 예일,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기독교정신보다는 과학정신으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주도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1961년에는 천주교도인 John F. Kennedy가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짧은 재임기간중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법을 통과시킨다. 이에 근본주의자들과 신복음주의자들은 분개했지만
그것을 철회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와 아울러 미국은 역사상 전무했던 최고의 경제적 부와 군사적 힘을 누리면서, 미국전체는
American Dream에 사로잡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가 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자들에게 한가지 다행스런 사건이 생겼는데, 그것은 독실한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Jimmy Carter가
대통령 선거에 나선 것이다. 사실 카터는 당시 미국 최대의 재벌이였던 록펠러 쥬니어가 원했던 세계화 정책을 현실에 옮기기 위해,
당시 컬럼비아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로서 1970년대부터 이미 세계화를 예측했던 브래진스키의 건의에 의해 픽업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태생자체가 그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미국정치 현실에서 실현하기에는 많은 제약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신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날이갈수록 세속화되는 미국을 건지고자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그에게 몰표를 주었다.
그런데 카터는 대통령이 되고 얼마되지 않아서 낙태 문제로 정치적인 시험을 받게 된다. 정통적으로 민주당은 낙태를 찬성해
왔는데, 그는 낙태를 금지하는 남침례교 출신이였던 것이다. 의회가 낙태문제로 심각하게 다투고 있던 어느 날,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적 목사님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한다. 당시 미국 최대의 침례교 목사였던 제리 파웰, 미국 최대 장로교 목사였던 디 제임스
케네디, 그리고 미국 오순절 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랄 로버츠 등 실질적으로 미국 보수 기독인들을 이끄는 여러
명의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한 것이다. 초대받은 목사님들은 카터가 아마도 그의 신앙신조에 따라 낙태를 반대하기 위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자신들을 초대한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카터는 초청된 목사님들에게 낙태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한다.
이에 목사님들은 크게 놀라며,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미국이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나와 따로 모임을 갖고서 회의를 한 결과, Moral Majoirty라는 기독교 정치운동 단체를 만든
것이다. 이 단체의 대표가 바로 이번에 소천하신 제리 파웰 목사였는데, 그를 비롯한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신복음주의 그리고
근본주의 목사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그것은 개신교 나라인 미국이 더 이상 세속화되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고 창조론을 가르쳐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진화론을 배우면서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고치기 위해서는 법을 고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의회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Moral Majority는 미국 전역의 복음주의적
교회에 사람들을 파견해서 우리가 찍어야 할 대통령후보와 상하원 의원 후보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정치참여를 하게 된다.
이런 Moral Majority의 적극적 활동 덕택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 바로 Reagan이다. 레이건은 그의 약속을
성실히 지켜서 성경의 날을 제정하고,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자신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현실정치에서 충실하게 실천한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날 Moral Majoirty는 해체되고 그 대신 Pet Robertson 목사님이 주도하는 Christian Coalition이
복음주의자들을 대표해서 기독교 현실정치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은 상당해서 사실 미국의 공화당은 Christian
Coalition의 도움이 없이는 대통령을 당선시킬 수 없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필자가 제리파웰의 죽음을 화두로 해서 거창하게 미국기독교의 역사와 동향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오늘날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이 너무 작은 시야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순종하는 순한 양떼들만을 배출하는 곳은 아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기독인을 군사와 경기자 그리고 농부로 비유했다. 그만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땀흘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역동적이면서도 세속적 문화와 가치관을 거스르는 기독인 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은 하나님과 아울러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피가 묻은 생명의 복음을 전해서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 세상이 성경적인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감시하고
개조해가는 열심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전파와 사회, 정치참여는 같이 굴러가는 양 수레바퀴인 것이다.
제리 파웰 목사가 정치 참여를 해서 미국을 기독교의 나라로 온전히 유지시켜야 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짐이 되었던 것은
로마서 13장 말씀이었다. 로마서 13장에는 우리 기독인들이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 권위에는 물론
정치지도자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파웰 목사는 지난 몇 십년간 성도들에게 권위에 그저 순종하는 순한 양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하지만 성경을 다시 공부하면서 프란시스 쉐펴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는 모든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권위에게만 순종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자신이 잘못 설교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교회가 깨질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진리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처럼 제리 파웰 목사는 용기가 있는 목사였다.
우리가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고자 할때 가장 먼저 도전 받는 것은 용기이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용기, 불의를 목격했을때 개인적인 불이익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맞서는 용기,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과감히 바꿀 수 있는 용기, 바로 이런 용기가 겸손하고 깨끗한 기독인을 만드는 것이다. 용기의 근원은 진리이다. 진리라는
단어 자체가 철저하게 헤체되어 버리고, 결론 없는 무수한 담론만이 횡횡하는 오늘날 파웰은 자신이 믿는 진리대로 행동했던 목사였다.
그는 목사들이 추구할 수 있는 또 다른 한 삶의 양태를 보여준 사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