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패커 박사는 1926년 영국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퍼시 패커는 그레이트웨스턴 철도회사의 사무원이었으며, 어머니 도로시 메리 패커는 교사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으며 책벌레였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독서와 공부를 좋아했다.
1944년 옥스포드에 있는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라틴어와 그리이스어를 공부하다가 후에 신학으로 바꾸었다. 그는 진학 후 재즈 밴드의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생 기독인 동아리에서 주관하는 복음주의 예배에 참여했다.
그는 17세기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의 저서, 라일 감독의 거룩함에 관한 책, 리차드 백스터의 저서 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48년 경에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매주일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의 설교를 들으며 영향을 받았다.
1952년 26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후 신학에 대한 명쾌한 강사로 활동했다. 1958년에 복음주의에 대한 변증서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펴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60년에는 런던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행한 강연을 모아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탁월한 책을 펴냈다. 이 책은 그를 개혁 신학적 복음주의의 옹호자로서 알려지게 하였다. 1973년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300만 권 이상 팔렸다.
패커 박사는 1979년 영국 브리스톨의 트리니티칼리지에서 현재 가르치고 있는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칼리지로 옮겼다. 그는 지금 반 은퇴하여 비상근으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금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제임스 인넬 패커 박사와의 대담은 2000년 4월 26일 오후 2시에 리젠트칼리지에서 진행되었다. 수개월에 걸친 연락과 기다림 끝에 패커 박사와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 대담은 리젠트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패커 박사에게 배운 바 있으며 그당시 패커 박사의 자택에도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는 1.5세 피터양 목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개인적 삶과 회심 이야기
패커 박사님, 박사님과 인터뷰를 하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먼저 일반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독자들을 위해 박사님 자신과 박사님의 가족에 대해 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영국 태생이지만, 캐나다로 귀화했습니다. 저희는 1979년도에 캐나다로 이주했습니다. 물론 저의 아내도 저와 함께 이곳으로 왔습니다. 제 아내는 웨일즈 혈통입니다. 저희는 1952년에 만나서 1954년에 결혼했습니다.
저희는 세 명의 자녀를 입양했는데, 세 명 모두 지금은 상당히 나이가 들었습니다. 첫째인 룻에게는 두 딸과 두 명의 10대 손자가 있고 영국 브리스톨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 딸인 나오미는 이곳 브리티쉬 콜롬비아(B. C.)의 윌리암즈레이크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 마틴은 메이플리지에 살고 있습니다. 메이플리지는 밴쿠버와 프레이저밸리 중간에 있죠. 마틴은 B. C.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아들의 일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아들은 제가 그 사람들을 다룰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사람들을 잘 다룹니다. 저희 가족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사모님의 성함은 무엇입니까?
킷(Kit)입니다.
종종 키티라고도 부르시죠?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은 아내를 키티라고 부르지만 저는 절대로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한 음절로 ‘킷’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1999년도에 박사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옥스포드에서 거듭난 이야기를 강의 시간 초반부에 학생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예, 맞습니다. 실은, 그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알리스터 E. 맥그래스가 저의 전기를 썼습니다. 제가 맥그래스에게 저의 인생을 이야기했고, 그가 집필했습니다.
그 핵심은 이렇습니다. 열 다섯 살에 저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는 유니테리언 파의 목사들과의 대화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니테리언의 신학으로 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주장의 불합리성을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지만, 유니테리언 주의의 교리는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이 세계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훌륭한 사람에 불과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고 단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불합리성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말씀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유니테리언 파처럼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해보면 유니테리언 파가 자기의 고집을 주장하는 것뿐이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열 다섯 살에 그것을 깨달았고 유니테리언 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참된 기독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아있었고, 저는 독서를 했습니다. 저는 문제가 있을 때 해결책을 찾아 많은 양의 책을 읽는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C.S.루이스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람들의 책을 읽었는데, 그 저자들이 다 복음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가 자란 영국 로스터의 공공 도서관에서 찾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할 때에 저는 정통 신앙을 가진 신자였습니다. 저는 삼위일체, 성육신, 예수님의 부활 등 사도신경에 나타난 정통 교리를 믿었고 옹호했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진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다만 그 당시에 제게 없었던 것은 구원자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였습니다. 그러다가 옥스포드에 입학한 후 2주가 지났을 때 그런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옥스포드 대학 기독인 연합 예배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구원의 간증입니다.
패커 박사의 저서와 그 각각의 배경
「소금과빛」에서 박사님께서 쓰시고 출간하신 여러 책들의 목록을 보내왔는데, 한국의 독자들은 박사님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서, 박사님께서 쓰신 책들과 어떤 동기로 그 책들을 집필하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 이름으로 처음 출간된 책은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입니다. 1959년도에 출간되었죠. 이 책의 영국 판에는 ‘근본주의’에 인용부호가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주의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영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잇달아 다 양무리같이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가며 복음주의적 신앙을 공격하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1956년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소위 영국 근본주의라 부르며 비판했었습니다.
저는 IVF 졸업생들을 위한 한 모임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제가 요청 받은 강의 제목은 ‘좁은 마음인가, 좁은 길인가?’(Narrow Mind, or Narrow Way?)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내용의 강의를 요청 받은 것인지 아시겠죠? 저는 그 제목에 만족했고, 그 제목으로 강의하며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강의를 듣고 좋아했고, IVP에서는 제 강의를 작은 책으로 낼 수 있게 글로 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 제가 깨달은 것은 동료 복음주의자들에게 강의를 했을 때는 상당 부분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강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 기독교계를 대상으로 책을 출판하려면 그것을 기정사실로 전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의할 때는 전제되었기 때문에 생략했던 내용을 책에는 채워 넣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원고의 분량이 증가되어야 했고 실제로 증가되었습니다. 원래 IVP에서는 약 6천 단어 분량의 원고를 예상했지만, 18개월 후 완성된 원고는 6만 단어 분량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존재하는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 책은 1958년도에 출간되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향한 비판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하고 해명하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그 책은 매우 잘 팔렸고 첫 해에만 2만 권이 판매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저는 작가가 되었고, 그 이후로 많은 출판사로부터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책은 1958년 이후 계속 출판되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책의 주제는 두 가지 논쟁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두 가지 논쟁은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논쟁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것입니다. 최대한 간단히 말해서, 소위 ‘영국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는 기독교의 근본 원리인데, 근본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은 사실은, 기독교의 진리를 전혀 모르며 기독교의 진리와 무관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해 논쟁의 흐름을 바꾸어 비판자들이 다시 비판받게 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후 생각해볼 때,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 책임을 다했으며, 저의 주장은 옳았고 그 책은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 책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영국 IVP에서 저의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는데, 「복음증거와 하나님의 주권」(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입니다. 196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1959년에 한 강의를 기록한 것으로, 런던 대학 기독인 연합 예배에서 설교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기독 학생들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학생들에 대한 전도를 계획하다가 복음증거 방법에 있어서 그들 내부의 의견이 매우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인 연합 내의 어떤 리더들은 개혁 신앙의 책을 많이 읽고 있었는데, 그 책들 중에는 특히 영국 진리의 깃발(The Banner of Truth)(역주-개혁 신앙의 작가들과 청교도들의 책을 출판하는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판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영국에서 복음 전도 집회를 할 때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방식인, 복음을 설교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촉구하고 상담 받을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것이 리차드 백스터, 조셉 알렌, 조나단 에드워즈 등 청교도 작가들의 복음 전도 방법보다는 찰스 피니나 D. L. 무디 등의 방법과 훨씬 더 유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체제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 두 가지 측면을 통합할 수 있는 설교를 기독인 연합 모임에서 해달라고 제게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책으로 낸 것이 바로 「복음주의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첫 번째 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본질적으로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는 가서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을 설득하려 노력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믿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으로는 아무도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거나 그 메시지에 응답하지 못하고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변화된 심령이 외적으로 표현되어 믿음과 회개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그 두 가지 진리 모두를 받아들여야한다고 말할 때 논쟁은 끝납니다. 궁극적인 전도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도할 때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은 우리의 복음전도에 도움과 격려가 됩니다. 사람들을 회심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회심시키심을 알 때, 사람들은 더욱 활발히, 더욱 열심히, 그리고 더욱 확신 있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는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즉 양측이 하나가 되었고 저의 논증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 책은 많은 성경 대학과 신학교의 교재가 되어왔습니다. 1961년도부터니까 거의 40년이 되었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고 있고, 특히 신학생들이 많이 구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번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정확한 기록은 모르고 책이 대강 어느 정도 팔렸는지 알고 있지만,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이 50만 권 이상 팔렸고 「복음증거와 하나님의 주권」은 30만 권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God has spoken)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은 두 번에 걸쳐 증보판을 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이곳 리젠트에서 저 자신의 신학 강의의 교재로 사용합니다. 아직 저의 조직신학Ⅰ이나 A를 수강하지 않았다면 제가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은 교재의 형식을 취하여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본적 원리들, 교훈, 권위, 올바른 해석 및 적용 방법, 성경을 올바르게 다루는 방법, 성경과 영적 삶의 경험과의 관계 등이 이 책에 있습니다.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논증으로 전개한 내용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에서는 강해 설교 교재 형식으로 집필했습니다. 이 책도 많이 팔렸습니다. 정확한 부수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2만에서 3만 권 사이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1964년에는 매우 얇은 책이었습니다. 지금은 부록을 포함해 훨씬 더 두꺼운 200쪽입니다. 그것이 세 번째 책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책들의 집필은 요청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항상 출판사에서 어떤 필요한 책을 만들어달라고 제게 요청했습니다.
제가 순서를 정확하게 기억한다면, 앞의 책들과 비슷하게 요청에 의해 출판된 그 다음 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인데, 믿어지지 않는 부수인 3백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집필은 1964년이나 1965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주의 잡지」(The Evangelical Magazine)라는 한 작은 잡지의 편집장의 요청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잡지사는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어쨌든 그 편집장의 요청은 ‘하나님’에 대한 연재물을 기고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많은 책들 중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책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책들이 신앙심에 대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 편집장이 원한 것은 하나님 자신에 초점을 맞춘 글이었습니다. 5년에 걸쳐 저는 그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1969년경에 저는 ‘아, 이 글들로 책을 만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2년이나 73년까지는 그것을 책으로 출간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내용을 다듬어서 여러 장에서 반복되는 내용이 없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저는 그 책의 출판을 IVP에 제안했지만, 놀랍게도 IVP측에서는 그 책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더 앤드 스터튼(Hodder & Stoughton)에서 그 책을 출판했고, 미국에서는 IVP가 출판했습니다. 이제는 영국 IVP가 그 책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 실수였음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국 IVP에서 제게 그 책을 써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 잡지」에서 요청한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책 역시 필요성을 느낀 사람의 요청에 의해 출간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책은 전체 기독교계에서 양육용 책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습니다. 몇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있고, 한국어판으로도 여전히 판매되고 있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300만 권이 판매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당신이 처음 읽어야 할 책은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합니다.
그 책을 받아서 읽은 사람들이 제게 편지를 많이 보냈는데, 그 책을 읽음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쓴 책이 열매를 맺고 있음을 아는 일은 어떤 책의 저자에게나 큰 힘이 됩니다. 그 책은 1973년에 출간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많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영국 IVP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때, 그 출판부장이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대해 ‘삶과 성령님’이라는 주제로 집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1963년경의 영국 복음주의 계열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은사 운동 스타일의 찬양대, 기타로 반주하는 복음성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사역자라고 강조하는 것이 은사 운동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어딜 가나 그 당시 영국 복음주의계의 특징이었습니다. 영국 전역에서 복음주의자들이 방언으로 말하거나 신유를 행하려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것들이 당시 영국 복음주의의 특징이었고,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성령님에 대해 써 달라고 요청 받았고, 저는 그것을 집필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은사 운동에 대한 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들 중 일부인 존 스토트나 딕 루카스는 오순절 은사 운동에 대해 항상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처럼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순절 은사 운동이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순절 은사 운동에는 잘못된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표적과 은사’가 도를 넘어서서 비성경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곧 방언, 방언의 해석, 신유, 예언 등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의 본질은 지지하면서도 후자에 해당하는 것들은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오순절 은사 운동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제시하기 위해 저는 「성령님을 아는 지식」(Keep in step with the Spirit)를 썼습니다. 영국 IVP에서 그 책을 출판하려 하지 않아 르벨(Revelle)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데, 지금 르벨은 베이커 북 하우스(Baker Book House)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책도 수만 권 팔렸고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 책들을 돌이켜볼 때, 올바른 내용으로 책을 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다음에는 청교도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청교도 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입니다. 제가 아직 대학생이었고 거듭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청교도의 글은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저는 그들의 글에서 영적 권위와 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름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이후 세대의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청교도들의 글을 정기적으로 읽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권합니다. 저의 책 「경건의 추구」(A Quest for Godliness)에서 저는 청교도들에 대해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을 썼습니다. 30권의 책을 썼기 때문에 저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계속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사님께서 언급하신 책들 중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것들이 있는데 박사님의 저서를 읽은 한국의 독자들은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그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니 기쁩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패커 박사를 이끌어준 영적 멘토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영적 지도자인 박사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영적 멘토나 은사가 있었습니까? 그것을 안다면 한국의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에게 멘토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배운 적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저에게 더 많은 지혜를 얻게 해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고 마틴 로이드 존스입니다. 제가 경험한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분이라고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큰 실수도 하셨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은 훌륭한 분이셨고, 훌륭한 설교자이셨습니다.
사역에 대한 그분의 위대한 비전, 성경적인 신학에 대한 확실한 이해는 독보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그렇게 많이 전달하는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설교나 강의를 들으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그분의 설교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증언할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가르칠 때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기름부으심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경외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두 번째 분은 잘 알려진 분은 아닙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는 전혀 새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앨런 앤 스팁스(Stibbs)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전직 CIM(중국내지선교회, China Inland Mission) 선교사이셨는데, 대륙이 봉쇄됨에 따라 초창기에 선교지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을 만났을 당시에는 오킬 신학교의 부총장이셨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함께 일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IVP에서 1950년대 후반에 출간된 「새 성경 주석」(New Bible Commentary)의 저자이자 편집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아마 그것을 통해 그분의 이름을 알고있는 분들이 좀 계실 것입니다. 그분은 세계 최고의 솜씨 있는 작가는 아니셨지만, 그분이 쓰신 글의 내용은 깊이 있게 성경적이었고 성경의 의미 및 적용에 대해 활발한 신학적 사고를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매우 영민하셨고 한편 매우 고요하고 온유한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매우 잘 지냈고 친밀했으며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통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존경하는 친구로 대했습니다. 그분이 저를 멘토링하고 있다고 그분께 말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 그분도 멘토링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분은 제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두 분보다 제게 더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은 칼빈과 청교도들입니다. 청교도 중 가장 위대하다고 제가 생각하는 사람은 존 오웬입니다. 리차드 백스터도 매우 위대한 청교도인데 저의 박사학위 논문이 바로 리차드 백스터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습니다. 이 형제들의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마틴 로이드 존스나 스팁스와의 개인적 우정을 통해 얻은 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패커 박사와 재즈계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
제가 재학중일 때 한 친구의 지도교수님이 패커 박사님이셔서 박사님 댁에 자주 가서 재즈 음악을 즐겁게 듣곤 했습니다.
맞습니다.
박사님은 재즈 음악을 좋아하십니까?
예, 저는 재즈 음악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초기 재즈음악을 좋아합니다. 재즈 음악은 그 발생 당시부터 녹음되었는데, 그때가 1920년대입니다. 일렉트릭 녹음이 아니라 어쿠스틱 녹음 방식이었죠. 제가 좋아하는 재즈 음악은 40년대 중반까지 발전되었던 초기 재즈 음악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재즈의 기본 스타일은 1930년대에 완성되었습니다. 30년대 초반에 사람들이 재즈 음악을 스윙 뮤직이라고 하기 시작해서 40년대 말까지 그렇게 불렀습니다. 40년대 말에 이르러 재즈 음악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 언어로부터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 언어로 변화가 일어난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는 악기는 똑같지만 음조가 매우 달라졌듯이, 비슷한 일이 40년대 후반부에 재즈 음악에도 일어났습니다.
그 주요 원인 제공자는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비 등이었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었고 또 그것이 스탠 켄튼 등의 사람에게 전수되었습니다. 그러한 재즈의 발전은 제가 좋아하지 않는 쪽으로의 변화였습니다. 그 이후로 재즈는 지력(知力)으로 감상하는 지적인, 머리의 음악이 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그 이전의 재즈는 소울 뮤직, 곧 영혼의 음악이었습니다. 아직도 재즈를 소울 뮤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곧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저는 고 한스 루크마커와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일생 후반부, 곧 라브리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시기에, 루크마커는 프란시스 쉐퍼의 가까운 동료였습니다.
루크마커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 대학의 미술 교수였습니다. 그의 신학은 저와 마찬가지로 개혁 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즈 음악에 대해 저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재즈에 대한 가치관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재즈에 대해 저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을 때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40년대 중반까지의 재즈에 대해 그가 가치 있게 여긴 것, 그리고 제가 가치 있게 여긴 것은 바하나 하이든, 모차르트의 음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리듬을 즐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리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리드미컬한 음악은 인간의 마음에 긍정적인 효과를 줍니다. 40년대 중반까지의 재즈음악에 사용된 곡조와 화음은 온음계적이고 자연스러운 조의 흐름을 갖습니다.
그런 음악에서는 변화가 간단하고 음조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악풍은 안정감이 있었습니다. 뭐라 할까…, 듣기에 아름다운 음조가 있었습니다. 가끔씩 매운 양념을 치듯이 날카로운 부분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재즈는 즐거운 음악이었고, 그룹 음악이었습니다. 그룹 음악의 목적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만족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부합됩니다. 재즈는 흑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음악이었고, 많은 백인 음악가들도 거기에 합세했습니다. 모든 재즈 음악가들은 존경받지 못했고, 일반인들 중 일부 사람들은 그 음악을 매우 싫어했고, 열등하게 여겼습니다.
재즈 음악가들은 댄서들을 위해 연주하거나 연주를 녹음하여 그 인세를 받아서 생계를 이었습니다. 재즈음악은 일부 사람들에게 열등하게 여겨졌는데, 그것은 1940년대 중반까지 계속 그랬습니다. 재즈 음악가들은 재즈 연주를 즐거워했고, 흑인이나 아프리카 원주민 등 유색인종의 음악가로서 그들이 처한 환경에 만족했습니다. 유색인종들은 이등시민 취급을 받았지만 말입니다.
사실,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호텔 중 대부분에서는 흑인들에게 방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바로 마틴 루터 킹 박사 시대까지도 그랬습니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가지 않는 흑인용 호텔에만 투숙할 수 있었습니다. 기차나 버스에서 백인들이 앉지 않는 자리에만 앉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런 인종차별행위가 사회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 말이 될 때까지 그들의 음악에 그것을 표현한 재즈 음악가는 제가 알기로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40년대가 지난 후에는 많은 재즈음악가들이 사회적 차별에 대한 자신들의 분개를 음악에 표현했고 재즈는 저항 음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그 이후의 재즈음악에 대해 흥미를 잃은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시기의 재즈 음악은 만족의 표현이었고 어깨춤을 들썩이게 하는 즐거운 그룹 음악이었습니다. 루크마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기독교적인 춤의 음악이었습니다. 현재를 받아들이고 만족하려 하고, 어떤 부분보다 그룹 전체를 중요시했습니다. 그 음악은 다양한 소리가 합쳐 조화된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음률이 섞여져서 솔로로 연주할 때보다 더 풍부한 음악이 됩니다.
그것은 매우 기독교적이며 교회 안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재즈는 우선적으로 솔로 음악, 전시 음악이 되어 한 연주자가 자신을 과시하며 연주하면서, 재즈음악의 그룹적 측면은 경시되어 솔로 연주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처음 재즈의 음악의 가치로 볼 때 그것은 퇴보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는 멜로디가 아름답고 온음계적이고 만족을 표현하며 소그룹 음악인 초기 재즈를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멜로디 악기가 있는데, 트럼펫이 선율을 연주하고 클라리넷이 높은 음의 오블리가토를 연주하며 트럼본이 낮은 음으로 화음을 이루어 음악을 끌고 나갔습니다. 리듬 파트 악기로는 피아노, 벤조, 기타, 콘트라베이스, 드럼 등이 있어서 리듬이 주는 에너지를 즐기게 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초기 재즈 음악입니다.
저는 이런 재즈 음악을 좋아하고 루크마커가 말했듯이, 재즈음악을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저는 클래식 음악도 좋아하니까 재즈 음악만 좋아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는 위대한 재즈 음악가는 킹 올리버, 줄리 웰모어, 루이 암스트롱 등입니다.
그들은 1930년대의 사람들인가요?
예, 1920년대에 성장하여 1930년대까지 계속 활동했습니다. 초기의 듀크 엘링턴의 음악도 좋아했지만, 변질된 것이 제게는 안타깝습니다. 재즈 음악에 대해 너무 많이 얘기한 것 같군요.
20년 섬겨온 캐나다 리젠트칼리지에서의 사역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과 같은 신학적 배경을 가진 복음주의 저자들로 존 스토트, 제임스 휴스턴, 유진 피터슨 등이 있습니다. 그 작가들을 이을 다음 세대의 리더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중년의 작가들 중에 신학적 집필에 있어서 이미 명성을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 한 사람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입니다. 저의 전기를 집필했죠. 그 외에도 많은 책을 집필했는데, 그는 훌륭한 신학자이고 20년 이상의 집필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 서적의 부분에 있어서는 존 파이퍼가 있습니다. 또 저보다 젊은 사람으로서 뒤를 이을 사람은 R.C. 스프라울입니다. 그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훌륭한 책들이고, 지난 2, 30년 간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어왔습니다. 더 이상 생각나는 사람이 없군요. 저보다 젊은 사람들 중에 앞으로 누가 명성을 얻게 될지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세 사람의 책이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젠트로 오시기 전에 조직 신학과 역사 신학을 가르치셨고, 영국 브리스톨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에서는 조직 신학을 가르치셨는데, 어떻게 리젠트로 오게 되셨고 리젠트에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볼 때 어떻게 느끼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리젠트로 오게 된 과정을 묘사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그 당시에는 없던 것이지만 말입니다. 즉 저는 헤드헌팅 되었습니다. 저는 트리니티에서 1945년부터 휴스턴 박사님을 알아왔는데 휴스턴 박사님은 리젠트를 설립하고자 1969년에 트리니티를 떠나셨습니다.
그 후 제가 트리니티 대학의 부학장으로 있을 때 휴스턴 박사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리젠트에서 신학 강의를 담당할 수 있을지 물어보셨습니다. 당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할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가 가진 능력이 리젠트에 적합했고 리젠트에서 제안한 내용이 제가 원하는 삶의 양식과 일치했습니다. 즉 강의하고 집필하면서, 트리니티에서처럼 많은 행정 업무 때문에 방해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리젠트칼리지에서는 저를 좀 기다려야 했습니다. 휴스턴 박사님께서 1976년에 제게 제안하셨는데 1979년이 되기 전까지는 리젠트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리젠트로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트리니티의 한 부적응자가 갈 곳을 미리 예비해 놓으셨던 것 같습니다. (웃음)
제가 이곳에 있은지 20년이 되는데 지금은 반 은퇴하여 비상근직으로 있으면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리젠트에서 보낸 20년이 저의 강의와 사역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가르칠 때보다 리젠트에는 더 유능한 학생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리젠트의 동료 교수들은 제가 영국에서 같이 일했던 대부분의 교수님들보다 더 실력 있는 분들 같습니다. 리젠트칼리지는 초교파적이기 때문에 한 교단의 이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감독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영국에서 저는 영국 국교회에 속한 학교에서만 강의를 했는데, 모든 학교는 국교회 이사회의 감독을 받았고 이사회는 항상 번거로움을 초래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려는 일에 늘 간섭하고 우리 교수들이 원하는 대로 학생들을 교육하며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여기 북미에서는 일단 ATS로부터 학교가 인가를 받으면, 교수들이 자신의 강의를 계획할 수 있고, 원하는 주제로 강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교수들이 최선을 다해 계획할 수가 있습니다. ATS는 뒤에 서 있을 뿐이죠. 북미와 영국의 이런 차이는 참 기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이곳 리젠트에서의 생활은 참 좋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들은 분이나 저의 책을 읽은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제 자신이 개혁 복음주의자(reformed evangelist)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신학 및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있어서 개혁 복음주의자의 위치와 관점이 기독교 역사상 주류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프로테스탄트도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혁 복음주의가 기독교의 주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영적 유산을 이어받은 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물려받은 기독교 유산에 대해 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부시대, 2, 3, 4, 5 세기로부터 중세를 지나 스콜라 철학을 거쳐 동방 정교의 유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동방 정교는 약간 다른 점이 있지만, 주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받은 복음주의 유산은 루터, 칼빈, 그 외 서구의 모든 개혁자들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이 여러 가지 운동과 다양하게 등장한 신학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의 개혁 복음주의는 자명합니다. 즉 주류로 이어져온 기독교가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진리로 재조명되고 재부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기독교 내의 다양한 견해들 중 어떤 관점들은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그들이 치우쳤다고 저로부터 비판당한다는 것을 안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입장은 제가 영국 국교도라는 것이지만, 장로교에 속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영국 국교회에서 쫓겨난다면 말입니다(웃음).
그러나 저는 영국 국교회의 유산이야말로 모든 기독교계의 유산 중 가장 풍성한 유산이라고 믿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존 오웬 같은 사람들은 국교도가 아니었지만, 영국 국교회의 유산에 기여했습니다. 조지 휘트필드, 찰스 스펄전 같은 사람은 침례교도였지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도 이 전통에 기여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그가 알았다면 질색했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 국교회에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이고 개혁적인 신학은 저에게도 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저는 리젠트칼리지에서의 저의 위치에 대해 매우 편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측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저의 강의의 관점을 잘 받아들이고 있으며, 동료 교수들도 저의 강의의 관점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리젠트는 초교파적인 학교입니다. 그 의미는 성경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한 모든 관점을 용납하고 다른 성경적인 관점들과 조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젠트의 교수인 저의 입장에서 제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차적인 문제들도 많이 있지만, 리젠트에서 일어나는 큰 흐름은 교수진들의 핵심 논점들 간에 통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 교수들도 리젠트에 대해 저처럼 ‘이곳은 내가 인정받고 용납되고 나 자신을 표현하도록 격려받는 곳이다’라고 느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료 교수들과 저는 진리와 지혜를 말하도록 격려 받습니다. 이것은 매우 행복한 상황이고, 영국에서 제가 경험한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리젠트에서 우리는 분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통합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의견의 불일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의견의 불일치를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차이를 초월하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와 같이 리젠트는 제게 매우 특별한 곳입니다. 대학원이 있는 다른 신학교 중에 상이한 견해에 대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곳을 저는 모릅니다. 이것이 제가 리젠트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고, 저는 제가 은퇴해서 천국으로 돌아간 후에라도 리젠트가 이런 방향으로 계속 나가기를 바랍니다.
아까 언급하신 유진 피터슨은 이곳에서의 교수직을 마쳤고, 휴스턴 박사님은 저처럼 비상근직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휴스턴 박사님이나 저나 영원히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리젠트가 같은 궤도로 계속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즉 모든 신학적 차이에 대해 그런 관점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리젠트에서 섬긴 20년, 거의 21년은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저희 학생들이 리젠트를 좋아하시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온갖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받아들여지니까요.
그렇습니다. 리젠트에 대해 말할 것이 더 있는데, 리젠트는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큽니다. 영적인 신학, 하나님과의 교제, 성별됨, 거룩한 삶 등의 모든 말들은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리젠트에서는 실용적인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큽니다. 그것을 ‘제자의 도’라고 할 수도 있죠. 리젠트는 실제적인 제자의 도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큽니다. 즉 신학적으로 정통적입니다. 사실은 대학교이든, 교회이든 모든 기독교 공동체가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모든 신학교가 그렇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리젠트는 다릅니다. 우리는 한 가지, 한 실체에 대해 관심이 큽니다. 그것이 리젠트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또 다른 한 가지 이유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의 신앙 형성에는 칼빈과 청교도들이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칼빈과 청교도들에게는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정통성과 진리가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 제자의 도가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저의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복음주의 교회의 현재와 미래
20세기 중반까지 기독교 복음주의는 반지성적이고 사회적 이슈에 둔감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 미국의 칼 헨리와 해롤드 오캔거는 복음주의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21세기에 막 들어선 이 시점에서 복음주의는 그 취약점, 즉 반지성적이라는 사회적 인식, 사회적 이슈에 대한 둔감하다는 인식, 해외 선교와 목회만을 가치 있는 부르심으로 여긴다는 인식 등에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주의가 가진 이 모든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복음주의는 타당성을 갖습니까? 현재의 복음주의의 국면을 평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복음주의가 매우 복잡하고 유동적인 실체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즉 복음주의는 광범위한 원천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그 한 극단은 분리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있는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또 반대 쪽 극단에는 저를 비롯해 존 스토트, 해롤드 오캔거 등이 있습니다. 저희는 교회가 물려받은 영적 유산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존재해온 지난 2000년 간의 역사와 우리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가 역사적 교회와 단절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근본주의에는 반대합니다.
교단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어떤 수십 개의 교단의 경우에는 그 안에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수십 개의 교단은 전체가 다 복음주의입니다. 예를 들어 형제파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항상 복음주의였습니다. 자유주의적 침례교도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침례교는 늘 복음주의였습니다. 기독교 선교사 연맹(Christian Missionary Alliance)은 늘 복음주의였고 다른 것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전세계의 장로교, 전세계의 영국 국교회에서 복음주의자가 소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어떤 작은 장로교 교단들은 완전히 복음주의적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 그룹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주머니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유동적이고 다양한 실체에 대해 일반화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하면서 복음주의에 대해 일반화해 보겠습니다. 저는 복음주의 신학의 지적인 흐름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복음주의 출판사의 도서목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책들을 보면 세상살이의 모든 부분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고, 신구약 성경 전체를 진지하게 학구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중요한 신학적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20세기 중반에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아예 없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칼 헨리 같은 사람이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해롤드 오캔거 역시 복음주의자들이 다시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외쳐왔습니다. 그들은 책을 출판함으로써 많은 지적인 사역을 직접 구현하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이후에 지적인 재능을 가진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곧 1950년대에 복음주의자라는 단어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 모든 다양한 종류의 복음주의자들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근본주의자라는 단어는 모든 교단에 있는 모든 근본주의자를 의미했지만, 복음주의자라는 단어는 다른 단어에 부가되어 복음주의 국교회, 복음주의 장로교, 복음주의 침례교 등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교단 간 복음주의자들의 연합보다 교단 내의 연맹이 더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다른 교단 안에 있는 복음주의자들 간의 협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의 전도 사역이 시작될 당시, 두 번의 대형 집회가 있었는데 그 두 대형 집회는 복음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1950년대에 뉴욕에서 빌리 그래함의 큰 집회가 열렸고, 로스엔젤레스에서도 열렸는데, 두 번에 걸친 빌리 그래함 전도 사역의 성공은 복음주의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이 하나의 사명으로 연합하고 하나의 신학으로 연합하는 것이 각 교단 안에서 일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교단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2, 3억의 사람으로 이뤄진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1960년대 말에 일어났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표준적인 관습과 생각이 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부에는 복음주의 공동체 안에서 지적인 삶이 회복되었고, 복음주의 세계 거의 전체에서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 외에도 고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리젠트에서도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그리스도를 위해 새롭게 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을 무장시킴으로써 그들이 각 영역에 나아가서 언행이 일치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게 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모든 것을 재정의함으로써 새롭게 하려 합니다. 온 세상의 복음주의자들이 점점 더 그런 생각을 가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회 생활의 어떤 측면에서도 어떤 생각의 변화가 확립되려면 50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사고와 관점이 형성되어 굳어진 사람은 예전의 관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60대, 70대, 80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가치가 없다는 옛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시간에 묶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의 시대에 뒤쳐져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20대의 젊은이들의 사고는 아주 다른데, 그것은 저희 리젠트칼리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직업 선교사가 아직도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직업 선교사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텐트 메이커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가 짧은 지역의 교회에서 역사가 오랜 서구 세계로 벌써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20세기 초와는 매우 다른 모습들입니다. 모든 것이 개선되고 있고, 복음주의는 50년, 80년, 100년 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복음주의자들을 수적으로 증가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와 오순절 파의 사람들을 포함시킨다면(당연히 포함시켜야 합니다) 개신교 인구 중에서 복음주의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습니다. 통계적인 면으로 다수라는 것입니다. 즉 5억 이상의 복음주의자들이 있고 자유주의자들은 많아야 2억에 불과합니다. 아마 그보다 적을 것입니다.
캐나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캐나다에 있는 큰 교회들은 거의 모두가 명백하게 자유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시아도 있고, 흑인 거주 지역인 아프리카도 있고, 남미도 있습니다.
저희는 한국 출신입니다.
예, 한국도 그렇지 않죠. 한국에는 자유주의자가 극소수죠.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나머지 복음주의자들 앞에서 꽁무니를 빼고 숨게 되길 바랍니다(웃음).
이 질문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현재 복음주의의 국면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성숙해졌고 50-100년 전에 비해 더 폭 넓어졌고 더 강해졌고 더 지혜로워졌습니다. 개인적 경건에 대한 관심은 감소되지 않은 반면, 편협한 경건주의(pietism)는 더 이상 100년 전처럼 복음주의의 표상이 아닙니다.
경건주의란 삶의 어떤 영역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는 더러운 게임이니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사업도 더러우니 사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소극적인 태도가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성화 노력
오늘날, 여러 교파들 간에 구원과 성화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의 없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죄 용서’를 강조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활기찬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매우 다릅니다.
성화에 있어서도 칼빈파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고 웨슬레파와 가톨릭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 ‘값싼 은혜’에 대한 논쟁이 발생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성화를 추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에 대한 패커 박사님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것에 대해 좀 길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언급하신 차이란 것은 매우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다른 견해의 대표자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나누게 한다면 상대방의 말이 자신의 말만큼이나 진리라는 것에 어렵지 않게 동의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진리의 한 부분일 뿐이며 더 깊고 넓은 중요한 진리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것에 대해 얘기하자면, 죄 용서와 칭의를 얻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의 보혈과 예수님의 부활 두 가지 모두입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을 얻어 주님과 연합됩니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는 함께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구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하는 구원, 두 가지 모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에 대해서 많이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으로 그분과 연합합니다.
칼비니즘의 개혁 신앙가들은 언제나 양자를 모두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양자를 강조하지 않는 것을 품질미달의 칼비니즘입니다. 존 웨슬레의 가르침을 받은 원래의 웨슬레파 역시 양자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양자를 모두 강조하지 않는 웨슬레파는 품질미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값싼 은혜’에 대한 논쟁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내 죄가 사해졌고 내 인격이 의롭다함 받았고 영광에 참여할 자격이 확실히 주어졌으므로, 이제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뿐이며, 신약 성경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루터파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은 그들이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함 받음)만을 강조하고 성화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안 것입니다. 보수적인 루터파는 두 가지 모두를 강조합니다.
웨슬레는 이 세상의 삶에서 사람의 마음의 죄가 완전히 박멸된다는 교리를 믿었지만, 지금 그것을 주장하는 웨슬레파는 거의 없습니다. 실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약속된 것을 웨슬레는 이 땅에서 이뤄진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도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특징들이 더 이상 오늘날의 복음주의 내의 여러 집단들의 특징은 아닙니다. 저의 책 「거룩의 재발견」(Rediscovering Holiness)에서 저는 복음주의 내의 이런 다양한 흐름들 가운데 있는 진리와 지혜를 종합하고자 했습니다. 저만이 그런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저의 의견은 많이 보편화된 것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도 같은 내용의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려 하는 것은 여러 상이한 조류들 가운데서 성경적 가르침의 주된 흐름, 즉 2000년 동안 내려온 지혜의 주류를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전통 내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은 점차 무너지고 좀더 기반이 넓고 성경적으로 종합적인 관점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분명한 진리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복음주의가 하강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복음주의를 강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저의 의견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종합한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리젠트를 좋아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리젠트에서 이러한 종합이 이뤄지며, 이런 것들이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현대인은 청교도를 따르지 않나
박사님께서는 청교도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저희에게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 영적 전투,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영광 등이 청교도들이 다루었던 풍성한 주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늘날 청교도들의 삶을 따르려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능력을 갖기가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청교도들처럼 거룩한 능력을 가지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청교도들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이유는, C.S.루이스가 말한 대로, 단순히 ‘시간적 우월감’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교도들은 3세기 반 전에 살았습니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전에 살았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우리가 배울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북미의 사고방식은 그렇습니다.
즉 과거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과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반 세상사의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에서는 역사에 대한 그런 편견이 없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청교도들에 대해 연구할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더 쉽게 인정하는 편입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에 대한 연구가 미국에서보다 더 많이 이뤄지고 있고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출판사의 출판물 대부분은 영국 내에서 판매됩니다. 미국에서도 판매가 이뤄지지만 부수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진리의 깃발사(www.banneroftruth.co.uk)는 청교도들의 책을 재출판하고 재보급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영국에서보다 과거에 대한 편견이 강하기 때문에 청교도에 대한 연구의 진척이 더 느리고 힘듭니다. 그러나 미국에도 자생적인 청교도 서적 출판사가 있는데 그 이름은 ‘솔리데오글로리아’(Soli Deo Gloria, www.sdgbooks. com)입니다. 이곳은 수십만 권의 청교도 서적을 재출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미의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청교도들의 책에 대한 기호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보여주는 것, 오늘날의 우리를 고무시켜주는 것은 ‘거룩’에 대한 매우 열정적이고 민감한 관심입니다.
순종하는 거룩,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에 순종하는 거룩이 그에 못지 않게 청교도들의 뜨거운 관심사인 사안과 연결되어있는데, 그 사안은 그리스도인의 지적 삶입니다.
청교도들은 광범위하고도 깊이 있게 모든 주제에 뛰어들었는데, 그 주제들은 역사, 철학, 보편적인 문화 등입니다. 청교도들의 책을 읽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을 개발하는 문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주변의 문화에서 착상한 모든 예화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우리의 귀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청교도들 중에는 많은 위인들이 있는데 그 중 몇 명의 이름을 들자면 존 번연, 존 플레이블(Flabel), 리차드 십스(Sibbes), 윌리암 퍼킨스(Perkins) 등입니다. 이 외에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작품이 ‘솔리데오글로리아’에서 재출판되고 있습니다.
영적 전투의 핵심은 무엇인가
영적 전투에 있어서, 어떤 오순절 주의자들은 영적 전쟁과 지역 영들에 대항하는 기도 등을 함께 강조해왔습니다. 영적 전투의 핵심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효과적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영적 전쟁의 원리는 17세기의 청교도들이 매우 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알았던 것을 다시 배우는 것이지,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영적 전쟁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시면, 제가 지역 영의 개념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짐작될 것입니다. 마귀 또는 사탄의 세력이 때로는 어떤 장소에 고착된다는 논란에 대해 저는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마귀에 붙잡히거나 괴롭힘 당하는 사례가 발견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고, 우리 무질서한 인간들은 마귀가 들리지 않았어도 정서적 불안정을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경우에는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마귀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드문 경우입니다. 청교도들과 그 계승자들이 깨달았고, 우리도 깨달아야하는 것은 에베소서 6장 10-20절에 있는 영적 원리입니다.
윌리암 거널이 그것을 본문으로 방대한 양의 영적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책,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1-4」(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ur)을 썼습니다. 작은 글씨로 8, 900쪽이나 됩니다. 윌리암 거널이 그 책을 집필하는 데 2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거기에 영적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이 있는데, 그 기본 개념은 C.S.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서 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영적인 강건함을 유지하는 대신 마귀에게 집중하는 것은 영적 견지에서 볼 때 건전하지 못합니다.
마귀와 그 무리는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 문화, 곧 세상을 교묘히 조작하고 우리의 기질, 본성, 곧 육을 교묘히 조작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경외하는 대신 방종한 삶을 살게 합니다. 마귀와 그 졸개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섬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려는 것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로 삼지 않게 하려고 어떤 짓이든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길을 따르라는 권고를 받을 때, 자기부인보다 방종에 빠지게 하는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을 성경에 의해 판단하고 분별하며 마귀가 개입한 것이 아닌지 감지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와 그 졸개들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에서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분별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냐?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너도 먹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너를 따르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건 사탄의 음성이로구나”하고 깨달으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네가 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건 마귀의 말이로구나” 하고 다시 한 번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성부 하나님을 꼬이게 하려는 마귀의 수작이었습니다.
즉, 자랑하고 과시하게 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요청하게 하여, 하나님께 사랑과 경배가 돌려짐이 없이 단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주목받으며 어떤 사람에게 영적 유익이 없는 헛된 기적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 말대로 하기만 하면 천하 만국을 네게 주고 네가 큰 왕국을 얻도록 도와 주겠다”라고 마귀가 제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말을 인식하실 때마다 마귀에게 대응하셨고 마귀를 대적하실 때마다 마귀의 제안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귀를 영적으로 대적할 때, 마귀가 제안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혹자 마귀의 음흉한 계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동하라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제안 등이 있을 때는 그것을 성경으로써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때로는 그것이 사탄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확고한 순종 가운데 서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또 마귀를 쫓아 버려야 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고 말하면 됩니다. 마귀는 이미 패배한 자이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부여된 힘으로 “사탄아, 떠나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마귀는 우리로부터 도망갑니다. 마귀를 대적하면 우리로부터 도망갑니다. 이것이 개혁자들이 알았던 영적 전쟁이고, 또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머지, 즉 오늘날에야 알려졌고 이전에는 잘 몰랐던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은 오류입니다. 지역의 영들이란 개념은 단지 한 구절, 다니엘서 9장에 근거를 두는데 저는 그 개념이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의 이야기로는 좋을 수 있겠지만,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영적 위험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깨어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서 은사의 인정과 사용에 대해
한국은 매우 동질적인 사회입니다. 매우 작고 인구 밀도가 높으며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서울의 인구 중 40%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 중 영적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목사님과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은사를 매우 수동적으로 숨기면서 사용합니다. 목사님께 알려지면 정죄되거나 비판당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영적 은사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며 기존 교회 내에서 어떻게 은사들을 사용해야 합니까?
제가 판단하기로, 성경에서는 이런 은사들이 회수되었다거나 모든 세대의 교회에 이런 은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 사도시대에 오순절 날 풍성한 은사를 주셨듯이, 현재에도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적이 있는 일은 다시 행하실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들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들의 삶과 교회에 기적이 재연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면밀히 평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면서 그것이 성경이 일치하는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방언의 경우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보아야할 질문은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방언을 말할 때 덕이 세워지는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징후가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방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방언을 말하기 때문에 대단하고 특별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세워지는 대신, 점점 더 교만에 사로잡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방언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방언 해석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한 사람의 해석 내용이 올바른 믿음 안에 있는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또 여러 사람이 한 가지 방언을 다르게 해석했다면, 상식적으로 볼 때 그것은 해석이 아닙니다. 또 자신에게 방언 해석의 은사가 있다고 교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세워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유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늘 의사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치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때로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신약 성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적적인 치료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아플 때,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병자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신약 성경 시대에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항상 치료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를 요청하여 받는 환자나, 기도하는 사람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례의 병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기도로나, 다른 어떤 것으로든 즉시 치료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가시란 육체적 질병을 말하는 것이 분명함을 성경 주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치료를 위해 기도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위해 함께 기도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분명한 응답은 “내가 너의 기도를 거절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의 연약함 가운데 내 은혜가 족하다. 너 바울에 대한 나(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선의 판단은 네가 그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의 사역에 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계속 역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 때문에 사역에 지장이 있을까봐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의 사역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나의 능력으로 너의 사역을 지속시키겠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대로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그 후 주님께서 바울을 치료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주님의 능력 안에서 그 병을 지니고 사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방법에 통달했기 때문에 그 가시, 즉 그가 가진 문제에 대해 다시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기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자신의 사역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괴로움, 문제 등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아까 질문하실 때, 어떤 종류의 사역을 매우 수동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목사님이 원할 때에만 사역을 행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주 사역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자주 행하지 못하고, 목회자가 없는 곳에서만 사역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하나님께서 정기적으로 신유를 행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는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편입니다. 그런 은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비해 실제로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은 훨씬 적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예언의 은사의 핵심은 성경을 넘어선 메시지나 정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적인 예언이란 기록된 성경의 본문, 또는 신약 성경의 경우에는, 장차 성경에 기록될 것이지만 아직은 성경으로 기록되지 않았던 사도들의 진리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예언의 핵심은 진리를 적용시키는 것이지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셔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일은 특별하고 드물고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회중 가운데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제게 이러저러하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저를 포함해서, 오늘 우리 교회에 성경의 원리가 이러저러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든 진정한 설교는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성경의 본문을 당신 자신을 통해 대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고, 둘째로, 그것은 적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일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 당시의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의 상태에 적용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서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 말씀을 거역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했습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선지자들은 율법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들에게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이 주어진 것은 특별한 경우였고, 그것은 선지자들의 일상적인 사역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날의 설교가 예언 사역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든 어디에서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보로 예언사역을 하려 하거나, 하나님께서 신유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치유의 사역을 행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들은 스스로 속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즉 사실은 그들에게 없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실 이런 주제는 매우 민감하게 말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요11: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같은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말합니다. 제가 수업 시간에 이것에 대해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의 첫 번째 뜻은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영광을 본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것이 찬양(praise)입니다. 따라서 영광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입니다. 영광이란 단어는 조직신학적으로 이렇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각각의 역할은
삼위일체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혼동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정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때에 어느 이름을 불러야 할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간단명료하고 지혜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는 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님도 온전한 신성을 갖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약성경에 근거하는데, 세 위격이 상호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지만, 보통 우리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그렇게 합니다. 주 예수님께 기도 드리는 것에는 신약 성경의 여러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우리를 치료해 주시고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분께 간청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께 기도하지만, 그것은 성경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어떤 은사나 축복을 간구할 때만입니다. 치료를 예로 들자면,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을 때 주님께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분은 주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치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치료 사역을 행하실 때 바울을 사용하셨고, 또 바울은 그 동일한 예수님께 자신의 치료에 대해서도 간구했습니다. 치료에 있어서,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만, 예수님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삶에 관해서는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 매우 적합합니다. 신약 성경에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예는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논리는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성령님은 특별히 내면의 축복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영적 삶의 성장, 인격, 예수님의 형상으로 영적으로 변화되기, 나쁜 습관과 죄에 대항할 능력 등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해서 잘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그 위격의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좋은 영적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각 분과 개별적으로 교제하며 구체적으로 삼위 중 한 분께 기도해야 한다”는 청교도 존 오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세 분이시며 그 세 분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할 수 있습니다. 세 분의 신성은 동일하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는 위계질서, 즉 사역의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학적인 삼위일체입니다.
강의 시간에 박사님께서 한 비유로 삼위일체를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다. 성부는 장군이고, 성자는 장군의 명령이 잘 수행되게 하는 대령이고, 성령은 임무를 직접 수행하는 하사라는 예화였죠. 그러나 요즘은 이 예화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화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오리건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 신성과 특성에 있어서 성부가 성자보다 위대하고, 성자가 성령보다 위대하다는 개념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 박사님께서는 한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이 예화가 어린이들에게 알맞다고 생각한다면, 처음에는 이 예화를 사용한 후 차차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이 세상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데올로기가 늘 있어왔습니다. 현 세대의 선도적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이며, 그 키워드는 경쟁과 효율성입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의 키워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과 봉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 교회는 이 세상의 원리를 따르고 있으며 효과적으로 조직된 경영 기법을 사용하여 성공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한국 교회의 실상입니다.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교회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됨에 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패커 박사님, 자본주의 사회가 기독교 공동체에 주는 악영향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질문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지배적인 최고 사역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강한 계급적 구조와 자본주의는 다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는 하나의 재정 구조로서, 돈이 노동에 투입되어 더 많은 돈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돈은 회사나 경제 단체 등의 노동에 투입되는데, 그 회사나 단체는 자연 자원을 사용하며, 자연 자원은 부를 창출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계의 목적은 부의 창출입니다. 부는 구매력을 의미합니다. 구매력은 자본주의가 운영됨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됩니다. 마르크스나 기타의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사실, 그들이 한 일은 인정이 메마른 냉담한 자본주의를 수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창출한 모든 돈과 부를 독점했고, 궁핍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제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희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캐나다인들의 삶에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하지 못한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것을 나누어줄 구조를 입법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 내의 모든 사람, 모든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듯이, 사회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 관리 체제를 갖추어주어 최고의 국가 의료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니, 이건 사회주의잖아”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료보장을 사회주의라고 보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미국에는 국가 교육 체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 의료 체계와 똑같은 원리로서, 어린이들에게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부를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 캐나다에서는 의료 체계가 국영화되어 있다면, 미국에서는 교육 체계가 국영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 이것은 이웃 사랑이 사회 내의 최대한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하는 미국인들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방법은 단지 형제애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돕는 것뿐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우연히 알게 된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난한 자를 돕는 사회 구조를 갖는 것은 금기시합니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국인들의 가치관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 말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첫 번째로, 저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이웃의 물질적 필요를 채울 우리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저는 자본을 성공적으로 관리하여 돈을 많이 벌면, 그 사람의 심령이 많은 유혹을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가난하거나, 최소한 부유하지 않았을 때는 영적 일에 우선적 관심을 두기가 쉽지만, 부유하게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가 사람의 생각을 어떻게 곤고하게 하는지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저의 두 번째 생각입니다. 즉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고통과 힘든 유혹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원칙에 대해 말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차이에 대해 말한 것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즉 캐나다가 미국보다 더 좋다거나, 미국이 캐나다보다 좋다거나, 한국이 그 둘보다 좋거나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지지하지만, 그것은 창출된 부가 기독교적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을 전제해서입니다. 서구의 캐나다나 한국을 살펴보면 어디나 온갖 결점, 단점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질문은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점점 더 부유해지지만, 그 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많은 교인들의 경우에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에 대한 고전적인 해답을 존 웨슬레가 제시했습니다. 그는 모든 평신도 지도자들을 비롯해 감리교의 모든 교인들에게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당신이 벌 수 있는 모든 것을 벌어서, 당신이 저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하고, 당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라”는 것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교훈입니다.
우리의 교회에는 돈을 번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저축도 많이 하지만, 주지는 않습니다. 웨슬레의 말은 돈을 벌고 저축하는 것만큼이나 주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재정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자녀가 장애아라면, 당신은 그 장애아가 생존하는 향후 60년 동안 그에게 특별한 치료와 돌봄과 간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에 필요한 돈을 따로 떼어두어서 필요한 특수 치료비를 지불할 수 있게 하려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반면에, 당신의 자녀들이 장성하여 독립한 후 잘 생활하고 있고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만이 남았는데도 돈을 더욱 더 많이 벌면서 쌓아두기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마치 존 D. 록펠러처럼 말입니다. 그는 미국 최대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록펠러에게, “인생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록펠러는 싱긋 웃더니,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웃음).
이미 그렇게 부자여서 재정적인 문제가 전혀 없는데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자신과 배우자를 위해 더 이상 돈을 모아둘 필요가 없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제 좀더 큰 규모로 물질을 헌금하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양육하며 부양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당신이 벌 수 있는 모든 것을 벌어서, 당신이 저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하고, 당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십시오.” 우리는 주는 것을 새로이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자기가 번 돈을 과시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를 원하고, 부자로서 존경받기를 요구한다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부자를 존경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과 같은 내용의 말을 거듭해서 수십 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부는 안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자입니다.
다원주의 시대, 어린 그리스도인의 비상 식량
세계는 다원주의적 사회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군부 독재 체제가 와해된 이후 사회의 균질성이나 통일성이 사라졌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1990년 이후 사회가 급속히 다원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지금까지 교회의 중요한 일부였던 교리 교육을 더이상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내용의 복음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할 복음의 내용을 새 신자에게 상담해 주시는 것처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슬픈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영어권 서구 교회의 전철을 한국 교회가 밟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에서 교리 공부가 기독교 교육의 기반으로 존속되기를 바랍니다. 서구 교회에서는 교리 공부가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은 손실은 매우 크고 통탄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교육하고 훈련할 때 먼저 강조할 사항은 유일하신 하나님, 삼위일체의 진리,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대한 진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 등입니다.
두 번째로 강조할 사항은 죄로 말미암은 인간 본성의 타락입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치료할 능력 있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분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위치에 계시는지가 철저히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성육신, 대속의 죽음, 부활과 승천, 현재 성부의 우편에서의 통치 등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 장소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인데, 그곳은 고대 페르시아의 법정에서 수상이 앉는 자리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반 왕정 시대에 실제 통치자가 앉는 자리였습니다. 그것은 대학교를 경영하는 부총장(역주: vice
-chancellor는 주로 영국의 대학 부총장으로 종종 실질적 최고 책임자)과 비슷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편이라는 말은 그런 내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기독교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야합니다. 제자들, 곧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무엇이고, 회개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계속 그들에게 상기시켜주어야 합니다.
루터, 칼빈, 세례 요한 등은 “회개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죄로부터 돌아서는 삶을 말합니다. 또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그 부활의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뤄졌다는 근본적인 증거는 그리스도인의 심령이 새로워진 것이고, 심령이 새로워졌다는 의미는 이제 다른 무엇보다도 주 예수님의 행동과 일치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 순종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존귀하게 하고 높이고 영화롭게 하고, 또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새로워진 심령의 사람이 다른 무엇보다도 행하기를 원하는 것들입니다.
진정한 제자는 이미 이런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세속적 사회와 다르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진 생명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무슨 일인가가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 능력을 베푸시는 성령의 사역들을 알기를 바랍니다.
즉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의 믿음을 유지시키 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확신을 주시고, 우리에게 은사를 나눠주셔서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봉사할 수 있는 은사를 다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역자입니다.
그것과 함께, 무엇이라 부르든, 가족, 몸, 또는 교회의 교리를 알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가까이해야 할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단독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혼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역 교회에 참여하며 공동체 안에서 제자의 삶을 살아야하며,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지원 받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제가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그 요점은 신약 성경이 가르치듯이 이 세상 이후의 삶이 훨씬 더 영광스럽고 풍성하고 기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앞으로 다가올 삶을 고대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힘들고 고단할 때, 그 힘들 일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측면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역경, 고통, 고뇌, 슬픔, 괴로움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을 하나님께서 부모로서 훈련하시는 기회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 가운데 인내할 때,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목이 강건해집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의 영광을 소망하지 않으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라고 질문하며 그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지 않는다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써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참예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어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의 강의안입니다. 비상 식량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교리를 잘 가르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좋은 교리 안에 이미 다 들어있는 것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 하이델베르그 신조 등 말입니다.
21세기 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성경 묵상, 기도생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봉사, 복음증거, 신문 읽기 등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박사님의 경험에 비추어 간단히 말씀해주십시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묵상의 기본 개념은 성경에서 발견한 것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훈, 성경 본문, 구절, 주제 등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성경이 당신에게 말씀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당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자연히 기도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생각한 후에는,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엄숙합니다. 묵상은 기도로 연결되고, 묵상은 기도를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세속적인 묵상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선택하여 그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전형적인 묵상의 방법이 아닌,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언어의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잠잠하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계획한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났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잠잠하고 들어보아라. 네가 말한 것을 묵상해보고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아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이고 분명한 응답이 이뤄진 것이고, 당신은 기도가 양방향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임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당신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즉 우리가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기도를 시작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청교도들이 말한 ‘가슴을 터놓는 친구’(Bosom Friend)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윗과 요나단처럼, 서로 간에 정말로 친밀한 사람입니다. 친밀함의 증거는 정기적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또 정기적으로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 친구와 교제할 수 있는 우리의 여력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적어도 한 명의 그런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런 친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슴을 터놓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해도 그것은 비극이 아닙니다. 다만 서로가 결혼 관계 외에, 가슴을 터놓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질문하셨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청교도의 지혜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유용할 것입니다.
봉사와 전도와 신문 읽기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그리스도인의 좋은 훈련은 매일 주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신문이나 TV에서 뉴스를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를 매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기회를 찾고, 그런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그런 기회를 찾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섬김의 본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는 섬김에 대한 교훈은,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섬김은 그래야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은 방언, 신유, 예언 등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섬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과시할 기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매일 질문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당신의 말씀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겠으니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하루 일정에 대해 생각할 때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깨닫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21세기는 지식 정보 시대입니다.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우리 사회는 디지털 혁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교회는 어떤 사회적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까? 많은 교회들이 내적으로는 공동체 개념을 강조하여 소그룹 운동을 시작하고 있고, 외적으로는 열린 예배를 시작하며, 교회 교육에 있어서 멀티미디어를 도입하여 새로운 영역의 사명에 더 잘 접근하려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세상을 이용하되 오용하지 마십시오. 즉 세상이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현대의 의사소통 자원들을 통해 우리가 진리를 더 잘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단지 그런 것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많은 현대의 의사소통 수단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화면만 바라보게 하며,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피상성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저는 소그룹 사역의 유용성을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 집단에서보다 소그룹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서로에게 많은 사역이 행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작아야 하느냐 하면, 열두 명을 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는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두 명이었습니다. 두 명에서 열두 명 사이이면 적당할 것입니다.
소그룹의 유용성은 세상적인 면으로 측정될 수 없습니다. 소그룹 안의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 가운데 어떤 유익을 얻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즉 소그룹의 효용성이 얼마나 잘 성취되느냐에 있습니다.
열린 예배(Open Worship)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열린 예배가 무엇이지요?
열린 예배에서는 예를 들어 찬송가를 덜 부르고, 전통적이지 않고 현대적인 경배와 찬양을 더 많이 부릅니다.
음악은 예배의 시녀이며, 예배가 음악에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음악을 연결 고리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구세군의 윌리암 부스는 왜 마귀가 음악을 점령해야 하는지에 의문을 갖고 세속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곡조에 다시 가사를 붙여 찬송가로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은 노래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오기 원한다면 찬양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한쪽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를 들어 찬송가보다 현대적인 찬양을 좋아한다면, 융통성을 가지고 두 가지의 가치를 다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호나 가치가 다른 형제자매들과도 함께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교회에 대해 아십니까?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한국 교회에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의 사회적 변화 때문에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단절되지 말고 계속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고, 공부하고, 묵상하십시오. 신앙 교리를 유지하십시오. 훈련을 계속하십시오.
주변의 사회가 어떻게 되든, 거룩을 계속해서 추구하십시오. 포스트 기독교적 흐름이 한국 교회의 특징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것에 대항하고, 싸우고, 이기십시오. 요한계시록 2, 3장에는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들이 있습니다.
「소금과빛」은 복음주의 문서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주요한 그리스도인 잡지입니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역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지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우기 위한 잡지입니다. 또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평신도들을 세우고, 평신도 지도자들을 인도하는 교역자들을 세우기 위한 잡지입니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가 주요 초점입니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지는 복음을 현대적으로 적용하여 독자들의 사고를 형성시키고, 성경의 진리로 그들의 생각을 가르치며, 이 세상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겪는 시련과 문제, 때로는 재난에 대한 현대적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의 품격을 향상시키기를 추구합니다. 「소금과빛」도 같은 일을 하고있다면, 하나님께서 「소금과빛」을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소금과빛」은 매우 합당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시 매거진」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안의 소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성을 위한 잡지, 부모를 위한 잡지,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잡지, 대학생들을 위한 잡지 등이 있습니다.
「소금과빛」이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처럼 리더가 될 가능성이 있거나 리더인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저는 그런 사역이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여생 동안 박사님의 목표와 계획은 무엇입니까? 또 개인적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있어서는, 지난 수십 년 간 해왔듯이, 글을 쓰는 것이 최우선순위입니다. 강연 사역도 지속할 것이지만, 강연 사역이 어떤 방법으로든 집필 사역을 도울 경우에만 할 것입니다. 저는 컨퍼런스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거기서 강의하거나 가르치거나 설교하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겠다니 감사합니다. 저는 더욱 많은 시간을 건강하게 보내며 사고기능이 예전처럼 잘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쓰고 싶어해 온 상당히 많은 책들을 집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책으로 쓰려는 갈망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 리젠트에서 매우 즐겁게 강의하고 있습니다. 강의의 경험은 집필을 잘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곳에서 오랫동안 강의하고, 계속 높은 수준으로 강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노인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를 원하죠.
귀한 말씀을 통해 큰 격려를 받았고, 장시간 인터뷰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도 인터뷰를 하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대담을 마치고
「소금과빛」의 요청으로 제임스 패커 박사님과 인터뷰한 것은 제게 매우 영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내내 패커 박사님의 깊은 영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패커 박사님은 질문 하나하나에 주저 없이 진지함과 열정을 다해 임해주셔서 더욱 감사한 인터뷰였습니다.
대담과 사진/ 피터양.
피터양 목사는 1.5세로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으며,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미국 시애틀 에수전도단으로 출근하며 한국 예수전도단 설립자 오대원 목사(존 로스)의 사역을 돕고 있다. 침례교에서 목사가 되었으나 목사라는 명칭보다 간사라는 명칭으로 불러주기를 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