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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변증법 세미나(11. 28.) 자료입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는 3회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1회 연장합니다. 그만큼 논쟁적이기 때문입니다.
4 맑스를 위하여08;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3.hwp
4.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잡한 전체
이제 우리는 모든 모순의 특수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아니, 우리는 아직 그것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특수성이 아무래도 좋은 일반성의 특수성, 즉 극단적인 경우에 이데올로기적 일반성의 특수성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일반성III의 특수성, 지식의 특수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순의 이 “특수성”이란 무엇인가?(맑스를335)
변증법은 “사물 자체의 본질 속에 있는 모순을 탐구하는 것이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대립물들의 동일성의 이론”이다. 바로 이를 통해 “변증법의 핵심이 이해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설명과 전개를 필요로 한다”라고 레닌은 말한다. 레닌은 이 텍스트들을^ 인용하고 “설명과 전개로”, 즉 그 “핵심”의 내용으로, 요컨대 모순의 특수성에 대한 정의로 나아간다.(맑스를335-336)
여기서 우리는 갑자기 아주 주목해야 할 세 가지 개념과 만나게 된다. 두 개는 구별 개념이다. ①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들의 구별. ②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의 구별. 끝으로 ③ 모순의 불균등 발전. 이 개념들은 “이렇게 되어 있고”의 양식으로 제시된다. 이 개념들은 맑스주의 변증법에 본질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맑스주의 변증법에 특유한 것이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이런 주장들의 깊은 이론적 근거를 찾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맑스를336)
첫 번째 구별만 검토하더라도, 이 구별은 동일한 한 과정 속에 여러 모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가정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그렇지 않다면 주요 모순을 부차 모순들에 대립시킬 수 없다). 이 구별은 복잡한 과정이 존재함을 함축한다. 그래서 마오는 “단순한 과정에는 한 쌍의 대립물이 있을 뿐이고 복잡한 과정에는 한 쌍을 넘는 대립물이 있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복잡한 과정^은 두 개 이상의 모순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사물의 발전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는 반드시 하나의 주요 모순이 있다.” 두 번째 구별(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은 각각의 모순 속에서 과정의 복잡성을, 즉 그 과정 안에 복수의 모순들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가 지배적임을 반영할 뿐이기 때문에, 고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복잡성이다.(맑스336-337)
따라서 이 근본적 구별들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과정의 복잡성을 발견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맑스주의의 핵심 지점,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 동일한 중심 지점을 건드린다. 마오는 “두 개의 대립물이 있는 단순한 과정”을 제쳐 두는데, 그는 그런 단순한 과정은 그의 대상, 즉 복수의 모순들을 내장하고 있는 사회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상의 이유로 그런 과정을 배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두 개의 대립물이 있는 단순한 과정”의 순수한 가능성을 마련해 두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 두 개의 대립물이 있는 단순한 과정”이 본질적인 기원적 과정이고, 다른 복잡한 과정들은 그것의 복잡화, 즉 그것의 발전된 현상이 아닌지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맑스를337)
레닌이 필론 이래로 알려져 있는 “일자의 분열과, 일자의 모순하는 부분들에 대한 인식”이 (레닌의 삽입^절 생략) “변증법의 본질(‘본질적인 것들’ 중의 하나, 유일한 근본 특성 또는 근본 특징은 아닐지라도 근본 특성들 또는 근본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런 방향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두 개의 모순적 부분으로 분할된 이 일자에서 레닌은 모든 모순의 “모델”뿐만 아니라 “모형(母型)”을, 모든 모순이 그 가장 복잡한 형태들 속에서조차 드러내는 기원적 본질을 기술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의 발전이자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대립물이 있는 단순한 과정”, 그 속에서 통일체가 두 개의 모순적 부분들로 분열되는 이 과정은 정확히 바로 헤겔적 모순의 모형이기 때문이다.(맑스를337-338)
물론 마오는 “단순한 과정”을 기억용으로만 언급할 뿐 어떠한 예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마오의 분석에서 우리는 복잡한 과정들, 즉 그 속에서 불균등한 다수의 모순들을 지닌 하나의 구조가 이차적으로가 아니라 시원적으로 개입하는 그런 복잡한 과정들만 상대하게 된다. 어떤 복잡한 과정도 실제 단순한 과정의 발전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따라서 결코 복잡한 것이 단순한 것의 현상으로서 제시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복잡한 과정은 복잡한 과정의 자체의^ 결과로 제시된다. 복잡한 과정들은 따라서 항상 주어진 복잡성들이며, 이 주어진 복잡성들을 기원적 단순성들로 환원하는 것은 사실적으로도 원리적으로도 결코 고려되지 않는다.(맑스를338-339)
그런데 맑스의 1857년 「서설」로 되돌아오면 우리는 비상히 엄밀하게 표현된 동일한 요청을 만나게 된다. 맑스는 그 글에서 정치경제학의 개념들을 고찰하면서, “우리가 생산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사회적 발전 단계에서의 생산, 사회적 개인들의 생산”이므로, 즉 그것은 구조화된 사회적 전체 속에서의 생산이므로, “생산”의 단순한 보편성의 탄생으로, “생산”의 단순한 보편성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이 복잡한 전체 이하의 것으로 거슬러 돌아갈 수 있는 것을 배제한다(이것은 원리적인 배제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금지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생산 자체의 본질, 즉 생산 개념이다). 그는 모든 “단순한 범주”는 사회의 구조화된 전체가 존재함을 전제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분명히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단순성이 기원적이기는커녕, 일정한 조건들 속에서, 하나의 복잡한 과정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오직 그런 것으로서만 단순성은(그것도 하나의 복잡한 전체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단순성으로서, 즉 “단순한” 범주의 실존의 형태로서 존재할 수 있다.(맑스를339-340)
노동 또한 그러하다. “노동은 아주 단순한 범주처럼 보인다. 이런 일반성 속의 노동−노동 일반−에 대한 관념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이런 단순성 속에서 파악될 때 ‘노동’은 이런 단순한 추상을 산출하는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범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8세기의 신화들이 사회의 경제적 발전의 기원에 있다고 상상한 개인적 생산자, 또는 생산의 기본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이 경제적 “코기토”는, 그 “겉모양”에서조차, 발전된 자본주의사회에서만,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가장 발전시킨 사회에서만 등장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단순한 보편성인 교환도 “역사적으로 가장 발전된 사회 상태들에서만 집약적으로 나타났다. (이 범주는) 결코 모든 경제적 관계들에 침투하는 것은 아니다.”(맑스를340)
따라서 단순성은 기원적이지 않다. 반대로. 자신의 의미를 단순한 범주에 부여하는 것은, 또는 긴 과정의 끝에 그리고 예외적인 조건들 속에서 어떤 단순한 범주들의 경제적 실존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조화된 전체이다.(맑스를340)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헤겔로부터 동떨어진 세계에 있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겔은 법철학을 주체의 가장 단순한 법률관계로서의 점유로부터 올바르게 시작한다. 그러나 점유는 훨^씬 더 구체적인 가족 관계들, 지배복종 관계들이 실존하기 전에는 실존하지 않는다.”(맑스를340-341)
1857년 「서설」은 다음과 같은 테제에 대한 긴 논증에 불과하다. 즉, 단순한 것은 복잡한 구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단순한 범주의 보편적 실존은 결코 기원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긴 과정의 끝에, 극단적으로 분화된 사회구조의 산물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단순한 본질이 됐든 단순한 범주가 됐든 간에 단순성의 순수한 실존이 아니라, 복잡하고 구조화된 존재들 및 복잡하고 구조화된 과정들의 “구체성들”의 실존이다. 바로 이런 근본적 원리가 모순의 헤겔적 모형(母型)을 영구히 거부하는 것이다.(맑스를341)
사실, 우리가 헤겔적 모델을 은유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엄밀한 본질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이 모델이 “두 개의 대립물이 있는 단순한 과정”, 즉 레닌의 인용에서 여전히 언급되는, 두 대립물로 분열되는 단순한 기원적 통일체를 요청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두 대립물의 분열된 통일체를 구성하는 것은 이 기원적 통일체인데, 이 기원적 통일체는 두 대립물의 분열된 통일체 속에서 소외되고, 자기로 남아 있으면서 타자가 된다. 이 두 대립물은 동일한 통일체이지만 이중성 속의 통일체이며, 동일한 내부성이지만 외부성 속의 내부성이다. 이 때문에 이 대립물들 각자는 상대^에 대해 모순물이고 추상이며, 각자는 자신이 상대의 추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즉 즉자 상태에서, 상대의 추상일 뿐이다. 이 대립물들은 자신들의 기원적인 통일성을 회복하기 전에, 그러나 기원적 통일성의 분열, 소외를 통해 풍부해지면서, 자신들의 이전의 통일성을 부정한 이 추상의 부정 속에서, 이중성 속의 통일성이고 외부성 속의 내부성이다. 이어서 이 대립물들은, 과거의 자기 부정의 노동으로 풍부해진 새로운 단순한 “통일성”, 부정의 부정을 통해 생산된 총체성의 새로운 단순한 통일성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기에, 다시금 일자가 될 것이다.(맑스를341-342)
우리는 이런 헤겔의 모델의 억제 불가능한 논리가 단순성, 본질, 동일성, 통일성, 부정, 분열, 소외, 대립물, 추상, 부정의 부정, 지양, 총체성, 단순성 등등의 개념들을 정확하게 상호 연결하는 것을 본다. 헤겔 변증법의 전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헤겔 변증법 전체가, 자기 자신 속에서 부정성의 힘에 의해 전개되며, 그 발전 속에서, 매번 더욱 “구체적인” 총체성 속에서, 이 기원적인 통일성 및 단순성만을 영구히 회복하는, 단순한 기원적인 통일성이라는 이 근원적 전제에 매달려 있다.(맑스를342)
맑스주의자들은 이 모델을 지름길로 가기 위해, 상징적 방식으로, 부주의에 의해서든 의도적으로든, 원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파악된 맑스주의의 이론적 실천은 이 모델을 배제한다.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정치적 실천도 마찬가지이다. 맑스주의가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헤겔의 모델의 이론적 전제인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이라는 전제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가 거부하는 것은 “근원적 기원”과 완벽히 일치하겠다는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자만이다. 그 근원적 기원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과정의 제로 지점인 백지상태, 자연 상태, 예컨대 헤겔의 경우에는 무와 직접적으로 동일한 존재인 시작 개념, 역시 헤겔의 경우에 모든 과정이 그것을 통해 무한히 [재]시작하는, 자신의 기원을 회복하는 단순성 등), 맑스주의는 또한, (과정의 각 계기에서 재생산되는) 이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 자기 발전을 통해 과정의 모든 복잡성을 생산하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코 자신을 상실하지 않고 자신의 단순성도 자신의 통일성도 결코 상실하지 않는(이는 다양성과 복잡성은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 자체의 본질을 드러낼 책임이 있는,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의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을 설정하는, 헤겔의 철학적 자만을 거부한다.(맑스를343)
그런 전제를 배제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유감이지만, 그 전제를 “전도”하는 것으로 귀결하지 않는다. 그 전제는 “전도”된 것이 아니라 폐기되었다. 그것은 완전히 폐기되었고(폐기한 것을 “보존하는” 지양이라는 의미에서 폐기된 것이 아니라, 진짜로 폐기되었다!), 그 전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완전히 다른 이론적 전제로 대체되었다. 기원의 철학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신화와 이 철학의 유기적 개념들을 대신해, 맑스주의는 모든 구체적 “대상”의 복잡한 구조라는, 즉 대상의 발전을 지휘하고 동시에 대상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이론적 실천의 발전을 지휘하는 그런 구조라는 주어진 것에 대한 인지를 원리적으로 확립한다.(맑스를344)
더 이상 기원적인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식이 자신의 과거 속으로 아무리 멀리 거슬러 올라갈지라도, 항상-이미-주어진 것만이 존재한다. 더 이상 단순한 통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 대신에 구조화된 복잡한 통일성이라는 항상-이미-주어진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헤겔 변증법의 “모형”이 추방된 것이 분명하고, 헤겔 변증법의 유기적 범주들이, 그것들이 특수성을 지니고 있고 실증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한, 이론적 지위를 지니면서 계속 존속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데, 이는 기원인 단순한 통일성이라는 주제를 “팔아먹던” 범주들, 즉 일자의 “분^열”, 소외, 대립물들을 통일하는 (헤겔적 의미의) 추상, 부정의 부정, 지양 등과 같은 범주들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사정이 이러하니만큼 맑스의 1857년의 「서설」에서도 마오의 1937년의 [모순론]에서도 유기적으로 헤겔적인 범주들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맑스를344-345)
물론 이데올로기적 투쟁(예컨대 뒤링에 대한 투쟁) 속에서, 또는 주어진 결과들의 의미를 예시하기 위한 일반론적 설명 속에서 이런 범주들 중의 몇몇을 원용할 수도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투쟁 또는 설명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이런 범주들은, 이데올로기적 실천(투쟁)에서, 하나의 이해에 대한 일반적 설명에서 사용될 수 있고, 매우 현실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마지막 “설명”(이런저런 예들을 통한 변증법의 법칙들의 예시)은 이론적 실천의 재가를 받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체로서는 새로운 지식들을 생산하는 진정한 이론적 실천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맑스를345)
이와 반대로, 맑스와 레닌 등의 이론적 또는 정치적 실천과 같이 자신의 대상을 실제로 전화시키고 참된 결과들(지식들, 혁명…)을 산출하는 참된 실천에서는 그런 범주들에 대한 이론적 관용의 여지가 사라진다. 이런 범주들 자체가 사라진다. 진정한 실천, 즉 유기적 효과를 낳지 않는 단순한 적용, 자신의 대상에(예컨대 물리학의 실천에), 자신의 현실적 발전에 전혀 변화를 초래하지 못하는 적용이 아니라, 수년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구성되고 발전된 진정한 실천에서는, 참된 실천에 진정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의 실천, 하나의 과학^을 구성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진력하는 과학자와 계급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하는 정치가의 실천에서는, 대상에 [정확하지 않은] 근사치적인 범주들을 부과하는 것조차도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범주들은 침묵하거나 침묵 속에 빠져든다. 그래서 오직 현실적으로 구성된 맑스주의적 실천들 속에서만 헤겔의 범주들이 오래전에 소멸했다. 거기서 그것들은 “찾아낼 수 없는” 범주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지난 시기의 특이한 성유골들에 바치기에 합당한 무한이 정성스러운 신심으로, 만천하에 드러내 놓기 위해, [프랑스어판] 팔절본 2,500쪽짜리 [자본] 전권에서 단 두 문장을 거둔다.(맑스를346)
주54) 한 문장은 부정의 부정에 대한 매우 은유적인 문장이다. 내가 나중에 이야기할 다른 한 문장은 양질 상호 전화에 관한 것이다. 엥겔스는 반뒤링 제1편 제12장과 제13장에서 이 두 텍스트를 인용하고 주석을 단다. [엥겔스는 제12장에서 [자본] 제1권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나오는 양질 상호 전화에 대한 맑스의 언급을 인용하고 주석하며, 제13장에서 [자본] 제1권 제7편 제24장에 나오는 “수탈자의 수탈”, “개인적 소유의 복원”으로서의 “부정의 부정”에 대한 맑스의 언급을 인용하고 주석한다]. “부정의 부정”에 대해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오늘날 부정의 부정을 “변증법의 법칙들”에서 기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교조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해 헤겔로부터 갈라섰다는 이유로 스탈린을 비난하는 것이 공식적 합의가 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헤겔로의 모종의 복귀가 유익하리라는 의견을 쉽사리 제시한다. 이런 선언들은 아마도 어느 날엔가 논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영역에서 “부정의 부정”을 제거한 것이 그 저술자의 현실적인 이론적 분별력을 증언해 주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리라 생각한다.(맑스를346)
오직 진정으로 구성된 맑스주의적 실천들 속에서만 헤겔적 범주들은 사용되지 않고 작동하지 않는다. 거기서 사용되고 작동되는 것은 다른 범주들, 맑스주의적 실천 속에서 작동하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범주들이다.(맑스를347)
첫댓글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변증법에는 변증법의 엑기스가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짓고 싶어집니다. 알튀세르, 들뢰즈 등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유물변증법 전반에 대한 주제별 세부논의는 다음 기(12월 둘째 화요일 시작 예정) 유물변증법 세미나에서 6개월 정도에 걸쳐 진행할까 합니다. 동참하실 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