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과 시련의 아픔이 빚어낸 詩들
안락함과 여유로움은 시인에게는 오히려 독(毒)인지라 태평성대에는 큰 시인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걸출한 시인을 수없이 배출하고 빼어난 시들이 엄청 생산되었던 성당(盛唐)시대는 온 나라를 풍지박산 낸 안록산의 난과 뒤이은 현종 아들들의 왕위다툼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던 바로 그 시대였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盛唐시대는 국운이 盛했던 시대가 아니고 詩運이 盛했던 시절이었다고 하는 게 옳을 듯 싶다. 재미있는 건 조선조 唐詩가 시인묵객들의 로망이었을 때, 어떤 이는 어려움을 일부러 만들어 내어 이백이나 두보가 느꼈을 詩心을 끄집어 내려고 애를 쓰기도 하고, 여인들 중엔 비련의 아픔을 느끼려 장막을 치고 어둠속에서 끼니조차 거르기도 했다는데...
우선 안록산의 난과 왕자들의 다툼 속에서 고생이 자심했던 이백과 두보에 대해 알아보자. 두 시인 모두 이 어려운 시기를 힘들게 겪어온 사람이지만 시의 느낌은 아주 다르다. 이백은 성정이 호방하고 낙천적이라 그의 시 어디에서도 역경의 그늘이 잘 느껴지지 않는데 반해, 소심했던 두보의 시에는 어려운 시절의 아픔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이백(李白 701~762)
사실 이백의 시는 대부분 고난과 시련의 산물이라 해야 될 듯 싶다. 서역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으로 중앙 무대에 진출하려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40이 넘어서야 겨우 벼슬길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玄宗)의 향연에 나가 그의 치적을 칭송하는 시나 쓰는 등 뒷치닥거리나 하였으니.. 이도 잠시, 안록산의 난(755~763)으로 피난길에 올라 정처없이 떠돌다가 왕자들의 다툼에 줄(永王 璘)을 잘못 서서 귀양까지 가게 된다. 이런 역경속에 빚어낸 이백의 시는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처음 들어간 것과는 전혀 다른 오색영롱한 빛을 내놓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여기서는 그의 수많은 시중 그래도 고난의 낌새라도 좀 느낄 수 있는 것 몇 수만 골라 본다.
우선 귀양가는 길에 지었다는 ..황학루에서 피리소리 들으며(..聽黃鶴樓上吹笛),
一爲遷客去長沙(일위천객거장사) 한순간에 귀양가는 객이 되어 長沙로 가는데
西望長安不見家(서망장안불견가) 서쪽 장안 방향을 바라봐도 우리집 보이지 않고
黃鶴樓中吹玉笛(황학루중취옥적) 황학루 안에서는 누가 옥피리를 불어대고 있는데
江城五月落梅花(강성오월락매화) 이 江城에서는 5월에도 '매화가 떨어진다'
*5월에 매화가 진다는게 이상한데, 여기서 '매화가 떨어진다(落梅花)'는 피리의 곡명라고 함.
귀양에서 풀려나 장안으로 돌아오며 지은 시, 이른 아침 백제성을 떠나며(早發白帝城),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이른 아침 영롱한 구름에 싸인 白帝城을 떠나
千里江陵一日還(촌리강릉일일환) 천리 江陵길을 하루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불주) 강 양쪽 언덕에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데
輕舟已過萬重山(경주기과만중산) 가벼운 배 어느새 만 겹 산을 지나왔네
이 어른 장강삼협(長江三峽)의 원숭이 소리를 뒤로하고 천리길을 하룻만에 돌아 왔다니 그 기쁘고 급한 심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돌아온 이백을 기다리는 것은 소외와 늙어감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귀양에서 돌아온지 몇해가 지나지 않아 이 詩仙은 그를 지상에 내려 보냈던 하늘로 되돌아 가신다. 말년에 지은 시, 秋浦歌,
白髮三千丈(백발삼천장) 백발이 삼천길이나 자란 것은,
緣愁似箇長(연수사개장) 근심이 많아 그리 된 연유라오
不知明鏡裏(부지명경리) 거울 속 내 모습 알아보지 못하겠네
何處得秋霜(하처득추상) 어디서 가을 서리가 (머리에) 내려 앉았는지
*두보(杜甫;712-770)
그럼, 이백과 느낌이 다른 두보의 시들을 보자. 우선, 그의 유명한 봄을 기다리며(春望) 일부,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망했어도 산과 강은 남아있고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안에는 봄이 와 초목이 우거졌구나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시절을 느낌에 꽃은 눈물을 뿌리게 하고
恨別鳥驚心(한별오경심) 한스런 이별에 새 소리에도 놀랜다
이 시에 대해, 北宋의 대학자 사마광(司馬光)은 "山河가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나머지는 없는 것이 분명하고, 草木이 우거졌다 하니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꽃과 새는 평시에는 즐길 만 한 것인데 이를 보면 눈물이 나고 그 소리에도 놀랜다 하였으니 그 시절이 어떻했는지 알 수 있겠다." 즉 시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태평성대의 기억은 무참히 사라지고 세상은 어느새 폐허로 변하여 무한한 슬픔에 젖게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돌아가는 기러기(歸雁),
春來萬里客(춘래만리객) 봄은 왔는데 만리 밖에 와 있는 나그네
亂定幾年歸(난정기년귀) 난이 그쳐서 어느 해에나 돌아갈까
腸斷江城雁(장단강성안) 애를 끊으며 (울고) 가는 강성의 기러기는
高高正北飛(고고정북비) 높이 똑바로 북쪽으로 날아 가는구나
여기서 북쪽은 처자식이 있는 집쪽이 아닐까. 두보의 또 다른 시(絶句),
江碧鳥逾白(강벽조유백) 강물이 파랗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산청화욕연) 산이 푸르니 꽃빛 불붙는 듯하다.
今春看又過(금춘간우과) 올 봄도 건듯 또 지나가니,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어느 날이 돌아 갈 해인가
그리고 슬픔의 가을(悲秋),
凉風動萬里(양풍동만리) : 서늘한 바람 만리에 불어오니
群盜尙縱橫(군도상종횡) : 도적의 무리들 오히려 날뛰고
家遠傳書日(가원전서일) : 집이 멀어 편지 전해 오는 날
秋來爲客情(추래위객정) : 가을이 오는 나그네 마음은
愁窺高鳥過(수규고조과) : 수심겨워 높이 나는 새 바라보네
老逐衆人行(노축중인행) : 이몸 늙어서 사람들 좇아
始欲投三峽(시욕투삼협) : 이제 삼협으로 가려 하는데
何由見兩京(하유견양경) : 어찌 서울을 두번 다시 볼 수 있을까
*유종원 (柳宗元 773~819)
이백이나 두보 못지않게 시련속에 살다 간 당나라 유종원의 빼어난 시 한수 붙인다. 유종원은 안록산의 난이 끝난 뒤의 사람으로,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고자 혁명(永貞革新)에 가담했으나 실패하고 주동한 8명 모두 귀양가게 된다. 그는 장안에서 수천리 떨어진 호남성 영주(永州)로 10년 가까이 귀양갔다가 사면되어 돌아 오는 중, 다시 더 먼 광서성의 유주(柳州)로 귀양가 그곳에서 객사한 시인이다. 그의 불우했던 노년을 보는 듯한 시, 강설(江雪)'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엔 날던 새들 사라지고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모든 길위엔 인적이 끊어졌네
孤舟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고조한강설) 홀로 눈발 날리는 차디찬 강에서 낚시한다
영주 유배시절 유종원은 정신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다가 낚시에 마음을 붙이게 된다. 시에서 처럼 주위가 얼어붙은 눈발 날리는 추운 날에도 낚시대를 놓지 못했는데, 이는 혹 자신의 결백과 고결함을 보이려 함은 아니었을까? 시에서는 눈에 띠는 絶,滅,孤,獨 와 같은 글자가 낚시하는 노인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정철(鄭澈, 1536년 ~1593년)
우리나라에도 이백이나 두보 못지 않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시와 문학을 꽃피운 사람이 있었으니, 사미인곡과 관동별곡으로 익히 알려진 송강 정철이다. 그러나 귀양에 관한한 정철은 이백과는 비교도 되지 않고, 宋代의 소동파나 조선시대의 다산 정약용, 그리고 추사 김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그는 철도 채 들기 전에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가는 바람에 같이 따라갔고, 장원급제 후에는 여러 관직에 나아가고 사직하고 다시 돌아오길 계속하다, 정여립의 난 이후 좌의정에 올랐으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진주로 이배되고 다시 북쪽 변방인 강계로 보내진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인의 탄핵으로 파면되고 이후 다시 복귀하였으나, 이번에는 동인들의 모함으로 다시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다 전란이 끝나기 전에 생을 마감한다. 가히 조선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풍운아라 할 수 있는데, 이백처럼 시속에서는 그런 시련의 흔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그의 시 몇수 들여다 보자.
평소 이백을 흠모하여 그의 명시 '장진주(將進酒)'와 같은 제목의 우리말 시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내놓는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세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는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 묶여 가거나 곱게 꾸민 상여를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울며 따라가거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에 한 번 가기만 하면
누런 해와 흰 달이 뜨고 가랑비와 함박눈이 내리며
회오리바람이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옥에도 티가 있듯이 이 시의 뒷 부분에서 멋을 부리려고 우리나라에는 살지도 않는 원숭이를 등장시킨다. 송강은 시 제목만 이백에게 신세 진 게 아니라, 다른 시(위의 이른 아침 백제성을 떠나며(早發白帝城))에 나오는 원숭이도 빌려온 것이다. 어느 비평가가 말했듯이 '송장메뚜기 뛰놀 때' 정도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율곡 시의 운(韻)을 빌어 중에게 준 시(贈山僧),
流水幾時返(유류기시반) : 흐르는 물은 어느 때에 돌아오고
故人何日來(고인하일래) : 정다운 친구는 어느 날에나 오나
風塵六載淚(풍진육재루) : 풍진세월 여섯 해에 눈물만 흐르고
白首眼難開(백수안난개) : 희어진 머리칼에 눈도 뜨기도 어렵네
나이 들어 술을 끊고 지은 시(止酒謝客),
老杜新停日(로두신정일) : 두보가 늙어 새로운 마음으로 술 끊던 날
親朋載酒時(친붕재주시) : 친한 벗이 술을 싣고 찾아 왔더라네
懽情隨處減(환정수처감) : (나이 들면)기쁨은 가는 데마다 줄어들고
壯志逐年衰(장지축년쇠) : 웅지는 나이 들어가며 쇠하여 진다네
가을날에 짓다(秋日作),
山雨夜鳴竹(산우야명죽) 산에 내리는 비 한밤에 대나무 울리고
草蟲秋近床(유년나가주) 풀벌레는 가을 되자 침상으로 다가오네
流年那可駐(초충추근상) 흘러가는 세월을 어찌 멈추랴
白髮不禁長(백발불금장) 흰 머리 자라는 것도 막지 못하는데
송강은 몸은 궁궐을 향해 있어도 마음은 늘 초야에 유유자적하길 원했지 않았을까.
*이달(李達 1561~1618)
손곡(蓀谷) 이달은 서얼로 테어나 뛰어난 문장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홍랑의 연인인 고죽 최경창과 가사문학의 효시인 옥봉 백광훈과 함께 唐詩에 능해 삼당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문학적 스승이기도 하다. 신라 고구려 그리고 조선을 통털어 최고의 唐詩 작가로 칭송받았으나, 평생을 신분의 질곡속에 시를 지으며 떠돌다가 그의 제자 허균이 반역죄로 참형을 당하던 바로 그 해에 한많은 생을 마친다(방랑시인으로 김삿갓의 선배임^^). 그의 시 가운데 널리 사랑받는 3수 소개 한다
서포 김만중이 조선 최고의 5언절구(五言絶句)라 극찬했던 벗과 이별하며(別李禮長),
桐花夜煙落(동화야연락) 오동나무 꽃잎은 밤안개 속에 지고
海樹春雲空(해수춘은공) 바닷가 나무들 봄 구름 속에 떠있네
芳草一杯別(방초일배별) 향기로운 풀밭에서 한잔 술로 이별하지만
相逢京洛中(상봉경락중) 서울 가는 길목에서 다시 만나리
불일암의 인운(因雲) 스님에게 준 한 폭의 그림같은 시,
寺在白中雲 (사재백중운) 절이 구름 속에 묻혀 있기로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 白雲이라 스님은 쓸지 않네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 바깥 손 와서야 문 열어 보니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로) 온 골짜기 송화꽃 다 쇠었네
7언시, 꽃을 보고 늙음을 탄식하다(對花歎老),
東風亦是無公道(동풍역시무공도) 동풍(봄바람)도 또한 공평하지 못하구나.
萬樹花開人獨老(만수화개인독로) 온갖 나무 꽃피우면서 사람만 유독 늙게 하니
强折花枝揷白頭(강절화지삽백두) 꽃가지 억지로 꺾어 흰 머리에 꽂아 보지만
白頭不與花相好(백두불여화상호) 흰머리와 꽃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구나
문외한이 봐도 참 멋드러진 시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