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이스탄불-앙카라(1)-카파도키아(1)-콘야(1)-안탈랴-파묵깔레(1)-에페소-그리스 히오스-피레우스
-N/FERRY(1) (4인1실)-아테네(1)-이스탄불-기내박(1)-인천
숙소 FIRST CLASS HOTEL (1급 호텔) 쇼핑안내 - 이스탄불 : 가죽제품
식사[호텔식] 아메리칸조식-빵, 우유, 주스, 잼, 버터, 커피, 햄 or 소시지, 씨리얼 등. 환전: 환전은 US달러:유로화=50:50비율로 바꾸고, 카드사용이 가능하므로 VISA나 MASTERCARD로 준비. 수영복 준비
포함사항
* 선착순 10명이 넘을 경우 상품 가격이 인상 됩니다. * 최소출발 20명, 최대 45명까지 행사 가능
* 1억원 여행자 보험 * 항공 TAX(인천공항세+현지공항세+전쟁보험료+관광진흥기금)
** 아래 일정은 현지관광지의 휴관일에 의해 입장이 불가할 경우 다른 관광지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 단, TK091, TK090 편은 항공사 자체 규정으로 출발 7일 전에 발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발권 후 캔슬하실 경우, 패널티 560$이 부과되오니 이점 유념해 주십시오.
불포함사항
**공동경비 : 식당물+식당팁+현지가이드+인솔자+운전자=10유로/하루(인당) 총100유로
**유류할증료 200,000원 (유가 변동시 변동가 반영됩니다)
▷ 유류할증료 인상에 따른 추가비용이 발생했을 경우, 별도 추가 입금해주셔야 합니다.
▣ 환율추가분 포함 본 상품은 ?1 = 1600원까지 환율 추가분을 받지 않습니다.
[독실 사용료] 1박당 30유로
[선택관광] - 인원/일정에 따라 내용/가격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1] 밸리댄스 : (1인 / 60유로)
터키의 전통춤으로 배꼽춤이라고도 불리며, 터키의 다른 민속춤(수피댄스-콘야지방춤)도 함께 보는 재미.
[2] 카파도키아 : 열기구 탑승 (1인 / 160~180유로) - 약 1시간. 아침 일찍 또는 해질 무렵쯤 열기구를 타고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 절경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카파도키아의 아름다움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끽.
★BEST 상품 특전★
1. 터키 직항 2. OZ항공 마일리지 50% 적립
3. 터키의 베르사유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관광 4. 터키의 영광을 느낄 수 있는 톱카프 궁전
5. 동서양의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6. 파묵깔레 온천욕 관광 7. 터키 3대 케밥 증정
★ 관광 도시 ★
이스탄불, 앙카라, 트로이, 에페소, 파묵칼레, 갑바도키아, 안탈랴, 아테네
▣ 터키 관광 명소 ▣
01.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성소피아 사원](내부관광)
02. 터키의 영광을 느낄 수 있는 [톱카프 궁전](보석관 포함)
03. 이스탄불의 명소 전통양식의 건축물로 푸른 타일의 내벽이 아름다운 [블루모스크]
04. 로마시대 대경지장으로 전차 경기가 열렸던 [히포드럼]
05. 아름다운 석회붕과 노천 온천이 가능한 [파묵깔레] 호텔온천욕
06.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지 [가파도키아]
07.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지 [히에라폴리스]
08.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셀수스도서관]
09. 헬레니즘 시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고대유적지 에페소]
10. 터키 최대의 카펫과 귀금속 시장이 집결된 실크로드의 마지막 시장 [그랜드 바자르]
11.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 유산1호 [파르테논 신전]
12. 지중해의 아름다운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에개해 크루즈]
정식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 공화제. 다당제&단원제. 대통령. 정부수반은 총리. 나라꽃 튤립. 도메인 TR 지중해성기후, 흑해성기후. 화폐는 리라화(TRY).
동쪽으로 이란·아르메니아·그루지야,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 북서쪽으로 불가리아·그리스와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 흑해, 남쪽으로 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海)·마르마라해에 면한다.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 전부와 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마르마라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의 발칸 반도, 동(東)트라키아 지방에 걸쳐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적 위치로 인해 역사적으로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연결하는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에게해에서 그리스와 해역·상공·영토에 관련된 분쟁을 벌이고 있고, 1984년부터 쿠르드족(族)이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터키 정부를 상대로 유혈투쟁을 벌여왔다. 행정구역은 81개주(il)로 되어 있다.
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있는 나라로, 13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이 성립하였고 1922년 술탄제(制)를 폐지하였다. 1923년 10월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였고 1924년 칼리프제(制) 폐지와 함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지리학상으로 동서양의 교차로에 있어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있는 나라. 주민의 약 80%는 13세기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진(西進)해 와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한 터키족이 타민족과 혼혈하여 형성된 터키인이다. 쿠르드인 (20%). 공용어는 터키어이며, 그밖에 쿠르드어·아랍어·그리스어 등도 사용되고 대도시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도 소통된다. 1928년 라틴 문자가 채용되기 전까지 터키어는 아랍 문자를 사용하였다. 터키어는 알타이어계(語系)에 속한다. 종교는 수니파(派) 이슬람교도가 99.8%를 차지하며, 나머지 0.2%정도가 그리스도교도·유대교도를 구성한다. 헌법상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어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에 비해 종교적 색채가 덜하다.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등이 대도시인데, 수도인 앙카라보다 이스탄불이 최대 규모의 도이다. 도시에서 동양적인 풍경이라고 하면 이슬람 사원의 첨탑 정도이다. 금식월(라마단)이 끝나는 날 이후의 3일과 희생절은 종교 축일로서 성대한 행사가 치러진다. 최고봉 아라라트산(5,185m)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이 산 정상에 도착하였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터키 국민은 ‘달과 별’이라는 뜻의 ‘아이 일디즈(ay yildiz)’라는 애칭으로 터키국기를 부른다. BC 4세기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비잔티움(이스탄불)의 성벽 밑을 뚫고 침입하려 했을 때 초승달 빛으로 이를 발견하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전설을 그리고 있다. 그밖에 1398년의 코소보전투가 끝난 후 피바다 속에 나타난 신비로운 달과 별을 가리킨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터키인의 대부분은 스포츠 애호가이며 특히 축구나 농구 등의 프로 스포츠가 인기가 높으며, 레슬링은 전통적인 터키의 스포츠로서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따고 있다.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 수는 스키장이 각지에 있다. 국민 정서, 언어, 관습 등 여러 면에서 우리와 비슷하여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두 나라 국민들간의 유대감이 더욱 확산되었다.
터키인의 손님 접대는 매우 예를 갖추기 때문에, 나쁜 소식이나 문제를 들추는 것은 다른 기회에 하는 것이 좋고 개인적인 질문은 피해야 한다. 터키인을 방문할 경우 사탕이나 과일, 꽃을 선물로 준비하는 것도 좋다. 친구를 만나거나 상대방을 처음 대할 경우 먼저 악수를 청하고 "메르하바(Merhaba : 안녕하세요)"나 "나슬스느즈(Nasilsiniz : 건강 어떠세요)"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례로서 인사를 받은 사람은 "이이임, 테쉐퀴르에데림 (Iyiyim, Teshekurederim : 감사합니다, 건강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대부분의 터키인은 집안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기 때문에 초대를 받았을 경우, 손님은 이와 마찬가지로 문 쪽에 신을 벗어 놓고 슬리퍼를 신으면 된다. 1925년에 전통적인 복장의 상징인 터반과 원통형 모자인 페즈(Fez)의 착용을 금지해서, 양복이 보편화되고 있다. 도시인들은 중절모를 애용하고 있으며 농부들은 앞 챙이 달린 모자나 실로 짠 모자를 쓰고 있다.
터키의 유명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하얀 성≫(1985)≪제브뎃씨와 아들들≫(1982), ≪흑서≫ (1990), ≪새로운 인생≫ (1994), ≪내 이름은 빨강≫ (1998), ≪눈≫ (2002), ≪이스탄불-추억과 도시≫(2003) 등 특유의 개성이 묻어나는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해 왔으며 약 4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1992년 3월 소수민족 쿠르드족(族)의 독립요구를 군이 무력으로 진압, 쿠르드 노동당이 정부에 전면전을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군은 10월 이라크 북부 쿠르드 반군 거점을 장악하고 1000여 명을 사살하였던 역사도 있다. 터키와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이 쇠진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었기 때문에 상호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1921년 우호조약, 1925년 우호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우호불가침조약을 파기함에 따라 터키는 반소·반공적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을 배경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았으며 1948년 이후에는 유럽부흥계획에 의한 경제원조를 받았고, 1952년 2월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반소·반공 군사기구에 의하여 서방측에 밀착하였으며 또한 경제개발을 위한 원조도 전면적으로 서방측에 의존하게 되었다.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의 준회원국으로서 정회원국 가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주변 이슬람권 국가 및 중동구권 국가와도 경제 관계를 긴밀하게 추진 중이다.
그리스와는 에게해의 영해, 대륙붕 문제, 키프로스 문제, 상대방 국가 거주 자국 소수민족 문제 등으로 상호 불신, 대립·반목 관계 유지하여 왔다. 특히 1999년 2월 PKK, 즉 쿠르드 반군 지도자 압둘라 오칼란(Abdullah Ocalan) 체포 이후 그리스 정부의 오칼란 비호 문제를 둘러싸고 최악의 상태에 있다가 1999년 8~9월 양국의 대지진 발생시 상호지원을 계기로 호전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터키의 군대는 징병제로서 20세 이상의 남자는 병역의 의무를 가지만, 대학생, 석·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자는 본인이 요청할 경우 33세까지 병역소집이 유예된다. 터어키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1950년 10월 19일 1개 여단(241연대) 5,068명이 부산에 상륙하여 참전하였다. 1973년 11월 앙카라시 한국공원에 참전기념비 건립하고 1974년 9월 6일 용인시 마성에 터어키군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참전 연인원14,936명('50.10.-'53.7.27)이며 부산 유엔공원묘지 안치수는 462구이다.
상품작물로는 목화가 곡물 밀, 보리, 옥수수 등 다음의 중요농산물이며 담배도 유명.
터키 역사와 유적은 그리스, 로마, 이집트와 연관이 있고 특히 에페소는 기독교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위치한 이스탄불은 2000년이 훨씬 넘는 그 역사에 걸맞게 아주 자연스럽게 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서 역할을 다하여 왔다. 세계를 지배한 3대 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던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써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쉴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 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 고고학박물관·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 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식품가공·농기구·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하며 매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130척이 넘는다.
성소피아 대성당 - 아야소피아 [Ayasofya]
외관전경, 천장, 모자이크벽화, 술탄의 자리 볼 것.
터키의 이스탄불에 소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잔틴양식의 성당.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호칭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고, 터키 지배 때에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325) 대신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되었다. 안 길이 81m, 너비 70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근년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前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당내에는 대소의 주두(柱頭) 조각으로 대표되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성 소피아 성당 이스탄불의 상징 (성 소피아 박물관)
성 소피아 성당은 마치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현재 성 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 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안벽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1934년 성 소피아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정식 명칭을 바꾸면서 복원작업이 진행되어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성소피아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는 75m X 70m 로 7,570 평방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블루모스크 -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모스크전경, 투구, 칼 볼 것.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에 '블루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우뚝 서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일 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피에로티언덕 - 프랑스작가 피에로티가 사랑한 언덕. 케이블카탑승
돌마바흐체궁전
정원, 분수대, 천장, 샹들리에와 계단, 정원 사자상, 목욕탕. 바다 연결 된 곳 볼 것.
바다를 메워서 간척한 곳에 세웠다. 원래는 술탄 하흐메트 1세가 휴식처로 쓰던 건물이 있었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31대 술탄 압둘 마지드가 1853년에 대리석으로 새로 궁전을 지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지은 유럽풍 건축물이다. 영국빅토리아 여왕에게 선사받은 750개의 전구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황제의 방' 천장에 매달려 있다. 또한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8년 서거할 때까지 사용했던 방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방의 시계는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리기 위하여 지금도 그가 사망한 시각인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
제국의 문 정원, 첨탑, 모자이크 볼 것.
1868년까지 오스만투르크 제국 이슬람 최고 통수권자 술탄의 거주지였던 궁전으로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으며 모자이크로 벽면이 장식되어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언덕에는 과거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토프카프'라는 이름이 유래.('토프'는 '대포', '카프'는 문) 1856년 돌마바흐체 궁전이 새로 지워질 때까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궁전은 세 개의 문과 네 개의 중정(中庭)이 있다. 제1중정에는 비잔티움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이 있다. 이곳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원래 형태로 남겨 두었다. 제3중정에는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하렘이 있는데, 내부의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톱카프 궁전 술탄들의 거주지 (TOPKAPI PALACE)
보스포라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한 7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멧이 이스탄불을 차지하게 되면서 처음 건설되어 그후 4세기 동안 꾸준히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이 곳은 15세기-19세기 초까지의 오투만 건축양식의 변화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원래 오투만 제국 대대로 술탄 군왕들이 거처했던 성으로 한때 이곳에는 술탄과 그 가족 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옛날 요리를 만들었던 곳은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이 되었고 보물고에는 술탄 군왕들이 사용했던 옥좌, 면류관, 무기, 생활용구, 왕비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터키 각지에서 미녀를 모집했던 할무, 신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남자)의 방도 보존되어 있어 그 흥미를 더한다.
그랜드 바쟈르 (GRAND BAZAR)
세계의 가장 크고 오래된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덮여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파르 차르쉬(Kapar Carsi)시장은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인 대형 실내 시장이다.
현재 60여 개의 미로같은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으며 2개의 주요 통로 끝에 있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모두 20여 개의 입구가 있다. 시장에는 금, 은 세공품을 포함한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형형색색의 도자기와 기념품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히포드럼 (HIPPODROME; 마차경기장)
술탄 아흐메트 사원 바로 앞에 있는 광장으로 로마시대 대경기장 유적. 서기 203년 이곳에서 마차경주가 최초로 열렸다고 하며 당시에는 세계의 각 지역에서 가져온 기둥, 조각상, 오벨리스크 등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들었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479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들여온 뱀 머리의 오벨리스크, 940년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만든 콘스탄티누플 오벨리스크가 남아 있다.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 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곳에는 아주 귀중한 세 개의 기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한 사원에 세워졌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보스포러스유람선 - 보스포러스 해협을 왕복하는 유람선.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다닌다.
앙카라[Ankara]
옛날에는 앙고라고도 불렀다. 소(小)아시아 아나톨리아 고원의 북쪽 기슭에 있으며, 해발고도 800∼1,000m의 사카리아강 상류인 앙카라강 연안에 있다. 아나톨리아 전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통로에 있으므로 도시로서의 기원은 고대 히타이트시대에서부터 비롯된다. BC 25년에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속하고 앙키라라고 불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세워진 신전과 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 뒤 페르시아·아라비아·셀주크투르크·십자군 등에 의하여 점령·지배되었고, 14세기 후반부터는 오스만투르크에 속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상무역(隊商貿易)의 지방적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터키를 재건하기 위하여 케말 아타튀르크(파샤)가 이끄는 국민군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1923년의 공화국 성립과 더불어 수도인 이스탄불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1925년 이후는 신시가의 건설과 함께 근대적 도시로서 크게 발전을 하였다. 앙카라는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어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구시가는 북동부의 앙카라 구릉에 있는 오스만시대의 앙카라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좁고 정비되지 않은 통로와 바자르(시장)를 중심으로 가옥이 밀집해 있으며, 시내에는 많은 사원과 히타이트박물관(고고학박물관)·민속박물관이 있고, 부근에는 선사시대와 고대 또는 비잔틴시대 등의 유적도 풍부하다. 구시가의 남쪽에는 도시계획에 바탕을 둔 정연한 신시가가 자리 잡고 있다.
중앙을 관통하는 아타튀르크 거리 연변에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관공서·은행·오페라하우스 등 근대적 건축이 이어져 있고, 앙카라대학도 있다. 그 밖에 시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릉에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무덤이 있다. 앙카라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공업으로는 시멘트 ·금속 등의 공장이 있다.
한국공원, 한국전 위령탑
1950년 한국의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희생당한 터키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하였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본떠 만든 참전기념탑이 공원의 중심을 이룬다. 기념탑에는 한국전에서 참가한 터키인의 명단이 적혀 있고 한글로 된 추도글도 있다. 여의도에도 앙카라공원이 있다.
아타투르크 기념공원
케말 아타튀르크 [1881.3.12~1938.11.10]
터키 건국의 아버지.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케말 파샤라고도 한다. 터키의 개혁가이자 초대 대통령. 1920년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년간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하여 1차대전 뒤 터키에게 불리한 내용의 세브르조약에 대한 반발로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서 술탄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세부르조약을 폐기하고 연합국과 로잔조약을 체결하였다. 공화제를 선포하고 대통령이 되어 인민공화당을 창설하여 정당정치를 확립하였다. 재임기간동안 개혁과 개방에 몰두했으며, 이슬람의 영향력을 축소하고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1925년에는 이슬람 전통 복장이 폐지되었으며, 남녀의 합동 교육이 실시되었다. 1926년에는 새로운 민법이 제정되어 일부일처제를 비롯한 남녀평등권이 도입되었다. 1928년에는 아랍 문자의 사용이 폐지되고 로마자로 터키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고안되었으며, 1930년에는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그는 신생 터키 공화국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서구식 법치와 민주적 정치제도로 현대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터키 국회는 1934년 무스타파 케말에게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경칭을 수여했다. 파샤는 군사령관·고급관료에게 보내지는 칭호이다. 그는 평생 조국독립과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재임 중이던 1938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카파도키아
‘친절하고 사랑스럽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신비의 땅.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갖이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는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양파모양의 사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카파도키아의 참 매력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원뿔을 엎어 놓은 듯한 용암층 바위 속에 이 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이었으나 차차 속국, 속주로 독립성을 잃어갔다. BC 6세기의 문헌에 의하면 당시 카파도키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카파도키아는 BC 190년 로마가 마그네시아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셀레우스 왕조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이후는 로마에 충성을 바쳤으며 11세기까지 동로마제국의 보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 동서문명의 융합을 도모했던 대상들의 교역로로 크게 융성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 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로마시대 이래 탄압을 피하여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곳에 몰려와 살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시대 이래 종교 탄압을 피해 바위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신앙생활을 했던 수천 개의 기암에 굴을 뚫어 만든 카파도키아동굴수도원이 남아 있다. 약 3백 만 년 전 화산폭발과 대규모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뒤덮고 있으며, 그 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특이한 암석군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우치사르
터키어로 '3개의 요새'라는 뜻을 지닌 곳으로,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수도사들이 비둘기를 길렀다고 하여 '비둘기 골짜기'라고도 부르며 지금도 비둘기들이 많이 살고 있다. 평범한 바위산에 들어선 집들이 예술품처럼 아름다우며 뛰어난 괴레메 골짜기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30여개의 석굴도시
괴레메골짜기, 하멜계곡- 낙타모양, 데린구유-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낸 지하도시
파샤바 계곡- 세 쌍둥이 버섯 모양
송이버섯과 매우 비슷한 버섯바위가 펼쳐져 있는 골짜기이다. 현지 사람들은 버섯바위에 요정들이 살고 있다고 믿어 ‘요정이 춤추는 바위'라고 부른다. 세상을 등지고 속세를 떠나 신앙생활에 몰두할 것을 주장한 고대 수도사가 살았던 바위가 있어 '수도사의 골짜기'라고도 한다. 버섯 모양의 독특한 바위는 이곳 특유의 지층 특징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기념품가게. 수제 봉제인형 사기
콘야 (Konya, 코니아)
지나치는 도시(숙소). 로마시대에는 이코니움(Iconium). 앙카라 남쪽 240km,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고원 남쪽 해발고도 1,027m에 위치. 12∼13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후 한때 쇠퇴하였으나, 아나톨리아 종관(縱貫) 철도의 개통(1895)으로 부흥. 제당·시멘트·식육·융단 등의 공업이 활발하며, 구시가 주변에 신시가가 발달하였다. 사도 바울로의 제1회 전도지이다.
안탈랴 (Antalya)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터키의 도시. 산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안탈리아주의 주도이며 특히 프로 축구 클럽들이 전지훈련을 위해 자주 찾는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따스하고 아늑. 구시가지 골목 마다 가게(기념품, 수제 장신구 등) 구경. 터키아이스크림 사먹기
이울리탑
정면의 푸른 타일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38M 높이 탑
하드리아누스의 문 [Hadrian's Gate]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있는 로마시대의 개선문인데 안탈랴에도 있다. 문이 3개로 되어 있어 The Three Gates라고도 한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서쪽에 있으며, 옛 아테네 거리와 새 아테네 거리의 경계를 이룬다. AD년 지금인 터키 지역인 안탈리아를 방문했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2세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섬세하고 뛰어난 조각들로 3개의아치형 문 3개로 이루어지며 문의 서쪽에는 '이곳은 아테네, 테세우스의 옛 고을', 동쪽에는 '이곳은 하드리아누스의 고을, 이미 테세우스의 고을이 아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파묵깔레(Pamukkale)
안탈랴 - 파묵깔레, 630km 약 8시간 소요. 수로, 맨발로만 입장
터키 남부 네지즐리주에 있는 고대 도시 유적. 200m 높이의 평원이 보이는 절벽으로 방해석과 물이 어우러진 경관을 연출하며 천연 숲과 폭포 등이 한데 모여 있어 유명하다. B.C 2세기경 아탈리드 왕조의 왕들이 열 공급을 위한 설비를 이루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목욕탕, 사원 등이 발달하였다.
‘목화의 성’이라는 의미로 경사면을 흐르는 온천수가 빚어낸 장관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석회성분을 다량 함유한 이곳의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 위를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어 마치 하얀 목화로 만든 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 온천수는 섭씨 35도로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치료와 휴식을 위해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하얀 결정체가 대지의 경사면을 온통 뒤덮은 장관을 감상하면서 심신의 치료를 겸할 수 있는 최고의 휴양지였기 때문이다.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도시다.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처음 세워져 로마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번성했다.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그리스어‘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함) 이곳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원형극장은 최대 1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에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과 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었다. 대지진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를 1887년 독일 고고학자가 발견하였고 이후 발굴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유적을 동시에 갖춘 이곳은 1988년 유네스코자연유산 및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에페소 (Ephesos)
파묵깔레-에페소 180km 약 2시간 30분 소요.
이즈미르(터키에서 세 번 째 큰 도시) 부근 유적 도시.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건립된 식민도시 에페소스의 유적으로 에게해에 있는 에페수스는 로마시대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로마 수도 역할을 했던 곳으로 터키에서 로마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예수의 12제자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소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중심 도시로 번영을 누렸고 이 때 유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아르테미스 에페시아 동상은 에페소스 유적 중 하나로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공식화하면서 그리스의 다신교를 박해하고 신전을 모두 닫게 했는데, 당시 종교 주관자들이 이 성상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몰래 숨겨왔다고 한다. 현재는 셀주크의 에페소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진 후 재건.
에페소 유적지(도서관, 박물관, 원형극장, 신전 등)
근원은 신석기 시대(BC6000천년)에 까지 있다. 청동기 시대와 히타이트 시대(초기철기)의 거주지.
원형극장- 헬레니즘시대에 건축되어 2만4천 여 명을 수용.
와인 잔과 뱀이 새겨진 돌은 약국, 삼각형 돌 속에 전쟁의 여신 니케.
사자머리를 들고 있는 남자는 헤라클레스. 분수대. 셀수스 도서관- 에페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하드리아누스 신전 (Temple of Hadrian)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도미티안 신전 이후 두 번째로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A.D 138년에 지어진 이 신전은 에페소스 시민들에 의해 지어져 로마의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로마 14대 황제, 5현제 중 한 사람)에게 바쳐졌다.
최근에 복원된 이 신전은 신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돌담 위에 신과 여신들의 부조가 가득하며 4명의 로마 황제 Diocletianus, Maximianus, Galerius, Chlorus의 상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또한 신전 전면의 4개의 기둥 중 2개의 기둥을 잇는 아치는 에페수스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 전면 아치 가운데에 새겨진 조각상은 운명과 전쟁의 여신 니케이고, 뒷면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다. 신전 문
티탄족(황금시대):우라노스(딸6명 중 테티스:헤라클레스母)-크로노스(지하세계 감금)-제우스(올림푸스시대)
아르테미스 신전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식민지 에페소스에 있던 여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 아폴론이 태양의 신인 데 반하여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상(像)은 가슴에 무수한 유방을 갖고 있는데, 다산의 상징.
BC 8세기경 장대하고 화려하게 세워진 신전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되었다. 2중 주주식(二重周柱式:8柱, 측면 21柱)의 이오니아양식의 신전으로 바닥면이 55.10×115.14m, 기둥 수 127개의 거대한 규모이며, 원주(圓柱) 수십 기의 기부(基部)에는 인물의 부조(浮彫)가 있다.
유럽 남동부 발칸반도 남단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헬레니 공화국. 헬레니즘과 그리스정교를 꽃피웠던 그리스는 1822년 터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1829년 아드리아노플 화약(和約)과 이듬해 런던회의에서 독립이 보장되었다.
국토는 반도와 그 주변에 산재하는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토의 서안은 이오니아해(海), 동안과 북동안은 에게해에 둘러싸여 있다. 북쪽은 연장 800km에 이르는 긴 국경으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 접하고, 동쪽은 마리치강(江)을 사이에 두고 터키와 접한다.
1897년과 1919년 영토 확장을 꾀하려는 투르크와 그리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때 국경선이 획정되었다. 197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81년 유럽공동체(EC, 현재 EU)에 가입하였고, 2001년 12번째 유럽단일통화(EMU) 회원국이 되었다. 행정구역은 51개 현(nomos)과 1개 자치주(autonomous region)로 이루어져 있다.
국기는 하양과 파랑의 9개 가로줄이 서로 교대로 배치되었고 깃대 쪽 상단에는 파랑 직사각형에 하양 십자가 있다. 파랑과 하양은 이 나라가 맞아들여 왕이 되었던 바바리아공(公)의 오토가문(家紋)에서 유래하였다. 파랑은 바다와 하늘을 나타내고, 십자는 이슬람·터키에 대한 그리스도교국인 그리스 독립의 상징이었다. 9개의 줄은 1821년 시작된 독립전쟁 때 '자유냐 죽음이냐(Eleutheria e Thanatos)'라는 그리스어(語) 투쟁구호의 9음절을 나타내며, 또 독립전쟁이 9년 동안 계속되었음도 뜻한다.
히오스 - 야간 페리호를 타기 위해 들르는 그리스령의 섬
피레우스 [ Pireus ]
고대명은 페이라이에우스(Peiraieus)이며 피레에우스라고도 표기됨. 그리스의 살로니카 만에 열린 아테네의 외항도시. 미케네 시대부터 항도였으며, 특히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B.C.528~B.C.462년경)가 이 항구를 확장 정리하여 아테네의 사이를 장벽으로 연결, 군항으로 만들었다. 페르시아 전쟁 종료 후 상업항으로서 발전, 그 이래로 오늘날까지 그리스 제일의 항구로서 번영하고 있다. 1959~60년에 발견된 B.C.6세기의 아폴로 상, B.C.4세기의 아테나 상, 아르테미스 상은 몇 안 되는 등신(等身) 이상의 청동상으로서 귀중하다(모두 아테네 국립고고미술관). 피레우스의 미술관에는 아름다운 B.C.5세기~B.C.4세기의 묘비, 신아티카파의 부조 등이 있다.
N/FERRY - 그리스 피레우스에 아침 6:30 도착
고린도 - 코린트(Corinth)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로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으며,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
아폴론신전 [The Temple of Apollo in Ancient Delphi]
그리스 중부 포키스 지방, 코린트만 인근에 있었던 고대도시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델포이의 유적 입구에서 꺾어져 성스러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위치해 있다. 현재는 기둥만 남아 있다. 아폴론 신전으로 가기 위한 성스러운 길에는 3,000개에 이르는 조각상들과 봉헌물들을 보관하는 보물창고가 늘어서 있다. BC 6세기 무렵 처음으로 아폴론 신전이 세워진 후 아폴론의 신앙과 신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BC 4세기의 것. 신전은 길이 60m, 폭 23m로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전실, 내실, 후실을 둘러싸고 있다. 전실의 지하에는 현재 델포이 박물관에 보관된 옴파로스(대지의 배꼽)라는 돌이 있었고 내실에는 아폴론상이 놓여 있다. 아폴론 신전 뒤에는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유적지에서 나온 공예품을 소장한 [박물관]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았던 [광장]
로마시대 시민생활의 중심인 [아고라], [극장터]
고린도 운하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의 지협부를 흐르는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 길이는 6.3km. 프랑스 자본으로 1882∼93년에 굴착되었다.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 수위(水位)가 일정하여 갑문이 없으나 약간의 조류에도 항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이 있었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도 6,000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운하의 수면 위 60m에 길이 33m의 다리를 놓았으나 철도교는 폐쇄하였다. 쓰시마 만제키바시(만관교) 비교
에게해 크루즈. 에기나 섬
아테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아티카 지방의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도시국가) 중에서 아테네는 특히 유력한 폴리스였다. 시 안에는 아크로폴리스(해발고도 156m)를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언덕이 있는데, 아크로폴리스의 북동부가 시의 중심부이며, 왕궁·의사당·관청·대학 등이 있다. 이곳에 '헌법광장(신타그마토스)'과 '오모니아광장'이 있으며, 이들을 잇는 2개의 병행하는 거리, 즉 '스타디온거리'와 '대학거리(또는 베니젤로스거리)'를 따라 큰 호텔과 상점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북서부는 상업의 중심지이며, 길들이 뒤얽혀 있다. 시는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새 시가와 주거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고대에는 아크로폴리스 주변, 특히 북쪽이 시의 중심이었는데, 고대 그리스시대의 도시국가의 중심에 있는 광장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의 북서쪽 기슭에 있었다. 시는 정치와 소비의 중심지인 동시에 항공·항해 등 교통망의 기점이기도 하며, 근대적 신흥도시로서 활기가 있다. 외항인 그리스 제일의 항구 피레우스와 함께 그리스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직물·피혁제품·기계·화학약품·포도주·브랜디·가구 등을 생산하며, 그리스 공업생산액의 60∼70%를 차지한다. 시중에는 고대 유적이 많고 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관광도시로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아크로폴리스 [acropolis]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대부분은 중심지에 약간 높은 언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을 폴리스라 불렀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도시국가가 폴리스로 불리게 되어 본래 폴리스였던 작은 언덕은 ‘akros(높은)’라는 형용사를 붙여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수비하기 알맞은 곳이 선정되고 거기에는 성벽을 쌓았다.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폴리스의 수호신 등을 모시는 여러 신전(神殿)이 세워져 도시국가의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각 폴리스에는 원칙적으로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지만 오늘날 아크로폴리스라고 할 때에는 아테네시를 가리킨다.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는 동서 약 270 m, 남북 약 150 m로 서쪽의 올라가는 입구를 제외하고 다른 3방향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다시 성벽을 쌓고 인공을 가해 방비의 거점으로 삼았다. 198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되었다.
파르테논신전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치는 것으로 세움, 도리스식 신전(간소하고 기단(基壇)에 직접 원주(圓柱)가 세워졌으며, 위로 갈수록 굵기가 줄어든다. 기둥은 완만한 곡선형 배불림(entasis)이 있고, 기둥에 얕은 세로줄 홈이 패어 있다. 그리스의 신전형식은 그 기둥의 양식(樣式)의 차이로 도리스식(Doric 式), 이오니아식(Ionic 式), 코린트식(Corinthian 式)으로 분류)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 설계는 익티노스, 공사는 칼리크라테스의 손으로 진행되어 BC 447년에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하였다.
플랜은 정면 8주식(柱式)의 직사각형 주주당(周柱堂:30.87×69.51m)이며, 내부는 동서로 나뉘어 동쪽에 전면 6주의 프로나오스[前室]를 두고 3면을 열주로 둘러싼 나오스[本殿]가 있고, 서쪽에는 오피스토도모스[後室]에 이어져 파르테논(처녀의 실)이라 부르는 보고(寶庫)가 있다. 본전에는 페이디아스가 금과 상아로 만든 높이 12 m에 이르는 본존(本尊)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상이 안치되어 있다. 신전의 장식 조각에는 동 ·서 양박공(兩牔栱)에 여신 아테나를 칭송하는 대군상조각을 배치하고 상부 4면 외벽에는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의 싸움’을 비롯하여, 네 가지 신화에 의한 태고(太古)의 전쟁이 도합 92면의 메토프(작은 벽)에 부조되어 있다. 또한 본전 외벽 상부 4면에는 길이 163 m에 이르는 도리스식 대(大)프리즈 장식(현존 130 m)이 있다. 이 프리즈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장대한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것이며, 인물은 신들을 합쳐 총수 360여 명, 말 219필을 헤아린다. 그 귀중한 잔존부분 가운데 아직도 건축에 남아 있는 일부와 아크로폴리스미술관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조각은 영국의 수집가인 토마스 엘긴경이 수집하여 '엘긴마블스'라는 컬렉션으로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신전의 안정된 비례와 장중함은 고전시대 그리스 정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1호
소크라테스 감옥
디오니소스극장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진 원형 극장. 디오니소스 축제 동안 연극이 상연되었던 곳으로 원래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졌던 건물을 리쿠르고스가 석조 건물로 재건축하였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남동쪽의 벼랑 밑에 펼쳐진 이 극장은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야외극장으로, 관람객 수용 인원은 1만 4000명 정도이다.
신타그마(토스) 광장
아테네 중심이 되는 곳으로 아테네에서 그리스 각지로 뻗는 거리는 이곳을 기점으로 삼는다. 신타그마는 '헌법광장' 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었기 때문에 지어졌다. 일대는 관청가, 비즈니스가, 쇼핑가로서 호텔, 항공회사, 관광여행사도 많다. 광장에는 불리 빌딩에 자리 잡은 그리스 의회, 국회의사당과 무명 용사의 묘가 있다. 광장에서 뻗어나간 거리들은 대표적인 쇼핑가이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빈다. 광장에는 옥외 찻집인 카페니온이 늘어서 있어 커피나 스낵을 먹으면서 담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첫댓글 샘들~ 겨우 다 만들었어요. 그냥 프린트 하지 마시고요, 첨부화일에 있는 걸로 다운로드 받아서 복사하세요. ^^
와!~~ 잘 하셨네요. 인터파크에도 들어가 봤어요.노포동에서 인천공항까지 바로가는 고속버스있는데 불편합니까?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