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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저 주머니 속 돌멩이들을 옮기는 것에 그친다는 걸
순수 귀찮음으로 인해서 3달 넘게 유기해놨었던 책책책 글을 오랜만에 올리게 되네요. 오늘 가져온 책은 제가 정말 애정하는 작가 중 하나고 최근들어 전집을 모으고 있는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몰로이'입니다! 사실 이전에 작성했었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이후에 이전에 리뷰글을 썼던 방식으로 카프카의 작품 전체를 조명하고자하는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요즘 그냥 삶이 무료해서 뇌를 굴리는게 싫더라고요. 책읽는게 질린건 아닌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미친듯이 빠져서 이제 8권을 끝냈습니다. 모더니즘 소설을 읽는게 쉽지 않더니 이거 읽고 나서 뇌가 망가져버려서 게으름 상태에 빠져든거 같네요. 카프카... 해야하는데 언젠가는 하겠죠 뭐. 귀찮아서 미룬김에 이번 기수 발제 목록에 고도를 기다리며가 끼어있길래 아주 만족스러워서 이걸 하기도 했습니다. 베케트 3부작 읽고 있는데 역시 베케트는 희곡 보다는 소설이 진국이지를 다시한번 느끼기도 했고요. 이번 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한 인간이 문학적인 글쓰기로서 그것을 얼마나 추구해나가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몰로이를 처음 알게된 계기는 어떠한 이유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나서 베케트에게 빠져든 이후 다른 작품들을 뭐가 있을지 검색하다보니 위크룸 프레스에서 출판되고 있는 베케트 선집을 찾고 나서 입니다. 원래 베케트 소설이라고 하면 3부작을 떠올리는게 보통인데 번역본에 몰로이가 들어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넷에 몰로이를 검색해보니 에그머니나! 처음에는 전신 화상을 입은 소년을 그려놓은 표지에 놀랐었습니다. 워크룸 프레스에서 나온 베케트 선집의 디자인이 워낙에 미형이라서 차이가 더욱 부각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몰로이라는 책은 제 기억속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아마 3부작중 2부작에 해당하는 소설인 '말론 죽다'를 읽어보려고 책을 펼쳤던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모더니즘 내공이 없어서 10페이지도 못넘기고 탈주를 해버렸지만, 이때 몰로이를 읽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앞으로 베케트 3부작도 이렇게 하나씩 하지 않을까 합니다.
줄거리
몰로이는 두가지로 흘러갑니다. 1부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몰로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하고 있는지 한번씩 기억을 더듬는 걸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어머니의 방에서 살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서서히 자신이 어떻게 어머니의 방으로 오게되었는지의 의문,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 기억을 나선형으로 되감는 글쓰기라는 행위와 그 행위에서 연유되는 무의미함, 무료함, 죽음과 또다시 어머니. 멜랑콜리아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이 반복되는 캐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몰로이에서 등장하는 의식의 흐름이란 한정되지 않는 음들의 총체, 끝없는 불협화음과 협응되지 않는 악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고갈되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지나감에, 그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그의 의식이 이끄는 그 모든 곳으로 우리는 따라갑니다. 거친 평원과 산허리를 거닐며 갑작스레 방으로 되돌아와 어머니를 추억하기도 하며 자전거를 타고 가다 루스라는 여자의 강아지를 치어서 죽이고 그 강아지를 루스와 함께 묻고 그녀가 그녀의 집에서 원하는대로 머물러도 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 코트 속 돌멩이를 옮기다가 어느 한 노인을 살해하는 길. 기억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현실인지 환상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몰로이는 글을 쓰며 자신이 행했던 일들에 대한 것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마치 험버트 험버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돌로레스에 대한 불멸의 길로 향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그는 강박적으로 글을 작성하고 끝없이 헤매이고 있습니다.
2부는 몰로이의 시선이 아니라 자크 모랑이라는 사설 탐정의 입장에서 전개됩니다. 사라진 몰로이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아들 자크를 데리고 몰로이를 찾으러 떠납니다. 아들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그는 아버지로서의 그는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도 하며 몰로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 사내를 죽이기도 하고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라고 시키기도 하며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오며 일상적인 것에서 이어지는 신학적인 질문과 마치 몰로이와 같이 변하는 것처럼, 또는 그 자신이 사실은 몰로이었는지 그 모든 혼란과 혼돈 속에서 그는 차분히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두가지로 나누어진 몰로이의 구조는 그것을 비교하고 등장하는 공통점에서 드러나는 차이들을 본다면 이해하기 편해집니다. 1부와 2부의 기본적인 골자는 동일할 정도로 서로 닮았습니다. 차이점은 1부에서의 몰로이는 진행되어가는 이야기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나아가는, 일종의 회고의 성격으로 보이는 것이고, 2부에서의 모랑은 이야기와 그의 사고가 같이 따라가는 현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흘러가는 양상을 본다면 길을 잃고 누구가를 죽이는 것처럼 비슷한 구조로 흘러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어져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결국 글을 작성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여타 다른 수많은 부조리 문학이 그러했듯이 언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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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나, 우리는 아주 늙었었고, 어머니가 나를 아주 일찍 낳아서, 우리는 마치 성도 없고, 혈연관계도 없는, 같은 추억, 같은 원한, 같은 기대를 가진 한 쌍의 오랜 친구 같았다. 어머니는 한 번도 나를 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는데, 그랬더라면 나는 참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Dan이라고 불렀다, 내 이름은 단이 아닌데, 단은 아마도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 나는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막Mag이라고 불렀다. 내가 어머니를 막이라고 불렀던 것은 내 생각에,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쥐g자가 마Ma라는 음절을 없애버렸지 때문에, 말하자면 다른 어떤 글자보다도 확실하게 그 음절에 침을 뱉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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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아기의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차지하고 아버지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기는 일종의 상태입니다. 몰로이에게도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지만 약간 변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변형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콤플렉스 속 어머니의 대상은 어머니라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아버지라는 존재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일반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의 생부로서 아버지가 대다수이나 굳이 생부가 아니더라도 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로서 인식되었거나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존재도 포함됩니다. 몰로이의 아버지 같은 경우는 그 영역을 확장하여 단순히 아버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능성을 하는 그 모든 존재를 포괄해서 바라봅니다. 몰로이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끝을 맺는 곳이 바로 어머니의 방이라는 점도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몰로이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이고, 그런만큼 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일종의 목표로서 보입니다. 콤플렉스 속에서도 어머니는 유아기의 아이에게 있어서 욕망의 대상, 성욕의 대상으로만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배우자라는 그 지위까지 넘보는 것이기에 어머니를 무언강에 대한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그 자체가 목표로 받아들입니다.
몰로이에게 아버지라는 존재의 기억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없습니다.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어야함이 분명한 존재에 대한 기억과 묘사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결핍이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는 것과 동일하며, 이는 그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사랑을 하는 방식에서도 짙게 드러납니다.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는 도덕성이라는 영역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는 목표로서 어머니의 배우자라는 지위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배우자로서 선택된 위치에 있다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무언가에 이미 도달한 숭고한 존재로서의 양립적인 감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있는 아이는 경쟁과 숭고라는 그 모순적인 감정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타인을 대할때 그는 극도로 긴장되어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일종의 정신분열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내면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기 중심적인 인물의 양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있어서 크게 죄책감이라던가 거리낌이 없으며 사람을 죽이고 개를 죽이고 자신을 받아준 루스의 집에서 도둑질을 하는 등의 행동을 매우 쉽게합니다. 루스의 집에서 자신과 이전에 관계를 맺은 인물을 떠올리며 그들의 나이와 누구였는지 혼돈하며 심지어는 그들이 성별마저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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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서, 극도의 불안감에 마음이 멍한 상태로, 다시 안장에 올랐다, 마치 치과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하는 암 환자의 불안감으로. 왜냐하면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길이 내게 옳은 길이 아니었던 적은 드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집에 갈 때에는, 옳은 길은 오직 하나, 그곳에 이르던 그 길, 혹은 모든 길이 그곳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곳에 이르던 여러 길 중의 하나였던 그 길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옳은 길들 중 하나로 접어들었는지 알 수 없었고, 마치 모든 삶으로의 귀환 요청이 그렇듯이,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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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자아와 연결이 됩니다. 자신의 근본으로서 여겨지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과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그 끝이 비록 실패하였도라도 그는 결국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와는 다릅니다. 모호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확실함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 의문으로 연결되며 자신의 목표에 대한 다가감을 잃어버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선택한 길은 옳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정작 중요한 길은 그가 옳게 가는지 확신할수 없습니다. 그는 끝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알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법이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가지고 그것을 던지는 풀리지 않는 궁금증처럼 그는 성숙함이라는 성질 대신 어린아이의 순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들어나가고 성장해나간 시간은 그 앞에서 의미가 퇴색되며 이것은 작금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버립니다. 믿음이 깨어지고 불신이 피어나는 상황, 몰로이는 더이상 몰로이로만 남아있지 않게됩니다.
자아에 대해서
자아를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하나이며 제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작품 속에서 드러난 환경, 그 중에도 공간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자아를 연역하는 것입니다. 공간으로 인물에 대해서 많은 것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을 활용한 작가는 카프카가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공간을 통해서 수많은 여러 각기 다른 인물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카프카의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쉽게 닫힌 공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공간은 시공간적 단면이 뚜렸하게 드러나 당장 내 눈 앞에 그 공간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성격의 공간으로, 쉽게 말해보자면 유리 정육면체가 카프카의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형식으로 비춰집니다. 그의 공간에서 주요하게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닫힌 공간이기에 외부 공간과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변신>의 그레고르의 방, <유형지에서>의 죄수들이 갇혀있는 섬, <소송>에서의 요제프 K의 마을, <시골의사>에서 뜨문뜨문 드러나는 마을의 형상과 그 마을들을 이어주는 잘 닦이지 않는 흐끄무르한 마차의 창문, <굴>에서 굴을 파놓고 그 안에서만 살아가는 생명체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그레고르 잠자의 예시로 이어가자면, 그는 작품의 거의 모든 시간을 홀로이 방안에서 보내지, 외부와의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관계성에서 카프카가 어떻게 공간을 사용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외부 공간에 속해 있는 인물들, 즉 벌레가 되지 않은 그의 가족들이 닫힌 공간에 속한 그레고르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닫혀있는 공간에 속해 있는 카프카의 인물들은 공간을 보여줌으로서 그 인물의 처지와 상태를 보여줍니다. 닫힌 공간은 인물에게 있어서 그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밀려있는지, 고립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외부의 인물은 계속해서 닫힌 공간으로의 침범을 시도하고 그에게 구원을 내밀어주려고 하지만 그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구원받지 않고 구원하지 않으려는 정적의 공간으로 변모한 중첩된 닫힌 공간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그렇게 뚜렷하게 등장하는 공간으로 인해서 그렇지 못한 베케트의 공간이 또다시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단편적인 암시만이 주어지는 그의 글에 뚜렸하게 보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것을 공간에 한정시킬때는 그 극단에 이루게됩니다. 마치 가로등이 꺼진 거리에서 떠내려 앉은 안개가 두 손을 휘감아 그것을 잡으려하면 흘러내려 잡을 수 없는 그런 막막하고 적막한 상황으로 비칩니다.
카프카에 대항하는, 또다른 공간을 베케트는 들고 나와서 그것을 그 자신의 인물에게 집어넣습니다. 카프카의 공간이 앞서 말헀던 것처럼 선명하게 경계지어진 공간이라면 베케트의 경우 그 경계가 극도로 모호하고 애매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카프카의 경우 우리는 그가 무엇을 묘사하려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물이 지금 당장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며 우리가 그 공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케트의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몰로이의 경우 시작하는 것이 그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째서 왜 지금 있는 장소에 오게되었는지부터 출발합니다. '어찌 됐든, 내가 어머니의 방을 쓰고 있다. 어머니의 침대에서 자고, 어머니의 변기에서 일을 본다. 내가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했다.' 초반에 드러나는 짧은 묘사의 경우 카프카와는 는 다르게 우리의 상상력이 들어갈 여지가 너무나도 많이 보입니다. 어머니의 방, 침대, 변기라는 단편적인 정보들만이 우리에게 주어질뿐 그가 행하고 있는 글쓰기라는 직업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방은 얼마나 좁은지, 창문은 있는 것인지, 그에게 주어진 것은 일반적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몰로이에서 몰로이는 도착적인 사고의 흐름을 보이기에 덩달아 우리도 그것에 따라서 강박적인 읽기를 시도하며, 빨라지며 느려지는 글의 속도에 일정하지 않은 공간성이 우리를 보이지 않게 가둬놓습니다.
베케트의 작품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시간은 흐르지만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몰로이의 경우에는 시간은 분명하게 흐르는 것으로 보이지만, 공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몰로이는 자신이 집 안에서 어머니에게 했던 행동들, 밖으로 나가서 어느 사람을 죽이고 루스의 개를 죽여 함께 묻고 이리저리 거늘며 다니는 것을 통하여 공간적 변화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회상 속에 머물기만 하고 있습니다. 몰로이는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원래있었던 장소, 즉 어머니의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로 가만히 있습니다.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 또한 무언가 계속하고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지만 그들이 머무는 장소는 나무 옆이라는 점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마치 무언가가 그들을 계속해서 한 장소에만 붙들여 놓는 것처럼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움직일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세계는 그들과 구분되고 그들이 하는 행동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인지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분열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게됩니다.
이런 베케트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몰로이 속 인물들의 자아는 일종의 실패한 성장형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몰로이가 만일 일반적인 소설의 골자를 따라간다면 몰로이는 성장소설로서 구분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1장의 몰로이에게 분명한 목표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으러 나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고, 2장의 자크 모랑의 목표는 사라진 몰로이를 찾아 떠나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그 자신이 찾으려하는 대상을 찾는다면 무언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베케트의 공간 속에 깊히 물들어 있다는 동일함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몰로이의 경우 바로 위에서 말했듯이, 일정한 공간 속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자크 모랑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그의 주택에 살고 있으며, 그의 아들 또한 방이 있고 몰로이와는 다르게 밖으로 직접 나가는 모습까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크 모랑도 몰로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 이유는 비록 여정의 과정에서 그는 분명히 외부 세계로 보이는 곳을 지나치지만 무언가 뻥 뚤려있는 느낌이 아니라 꽉 막혀있는 비좁은 통로를 걸어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은 자전거를 사러 마을로 나아가긴 했지만 자크 몰랑의 경우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길만을 계속해서 걸어나아가는, 마치 몰로이가 이전에 걸어갔고,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듯이, 마치 순환통로를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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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분명 봄이었던 것 같다, 어느 봄날 아침. 새소리, 아마도 종달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새소리를 듣지 않은 지 오래였다. 어떻게 해서 난 숲속에서 새소리를 듣지 못했던가? 보지도 못했고. 그때까지는 그 점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 점이 이상하게 보였다. 내가 새소리를 바닷가에서는 들었던가? 갈매기를? 나는 기억 할 수 없었다. 뜸부기 소리는 기억났다. 그 두 명의 여행자가 기억에 되살아났고, 한 사람은 곤봉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잊고 있었다. 암양들도 다시 떠올랐다. 여하튼 이 말은 지금 하는 말이다. 나는 걱정하지 않았고, 내 삶의 다른 장면들이 내게 떠올랐다. 번갈아서 비가 왔고, 해가 떴던 것같다. 진짜 봄 날씨였다. 난 숲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오, 진짜 욕구는 아니었다. 몰로이는 자신이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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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원에서 살았다. 나는 나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말하던 한 목소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시기에 그 목소리와 조금씩 일치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어린 모랑이 배웠고, 또 차례로 그 자신이 그의 어린 아들에게 가르쳤던 말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그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또 이해한다, 아마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보고서를 쓰라고 말한 것도 그 목소리이다. 이는 내가 지금은 더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잘 모르겠다. 난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썼다, 자정이다. 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아니었다. 비가 오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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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몰로이와 자크 모랑이 작성한 마지막 문단 중 일부 입니다. 서로 다른 인물이며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완전 똑같지는 않은 두 사람이 비슷비슷한 글을 썼다는 것은, 마지막에 와서 이 두사람이 과연 절대적으로 다른 개별적인 두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이들이 동시에 성장하는데 실패한 인간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실패했으며, 스스로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알고 있습니다. 몰로이라는 존재는 후에 언어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기술하겠지만, 이름 붙여진,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하는 점에서 실패해나가고 있는 몰로이는 서서히 쇠학해나가고 있는 모든 인물과 사상의 표상입니다. 몰로이는 베케트가 실패했다고 일컫는 언어의 살아있는 비유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 이후에는 우리가 말할 수도 지칭할 수도 없는 무언가로 변해갈 것으로서 몰로이-말론 죽다-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라는 하나의 도식을 만들게 됩니다.
코트속 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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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불완전했다고 할지라도, 내 방식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은 데 대해 나는 만족한 편이었다. 그렇다, 꽤 만족했다. 비록 내 해결책이 처음 발견의 열기 속에서 내가 생각했던 만큼은 견실하지 못했지만, 그 품위 없는 점은 그대로였다. 그것은 특히, 내 생각엔, 돌의 불균형적인 분배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다는 점에서 품위가 없었다. 각 회전의 초기에서, 어떤 주어진 순간에, 즉 세번째 빨고 네번째 바로 전에, 일종의 균형이 잡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돌의 무게가 나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균형을 포기하면서, 내가 포기했던 것은 하나의 원칙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것이었는데, 그것은 육체적 필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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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이의 1장, 그의 회상이 진행되어가는 도중, 그는 자신이 입고있는 코트에 들어있는 돌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배열하기 위해서 주머니 속에서 주머니속으로 옮기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주변에 있는 물결과 파도를 바라보며, 모래를 들어 손가락 사이에 흘러내려가게 내버려두며 자신은 모래 속이 천성에 맞다고 하며 모래 속에서 뒹굴며 그것을 하늘로 던지기도 하며 노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어느날 갔던 소풍을 떠올렸다가 자신이 빨아먹는 돌을 장만한 것을 기억해냅니다. 그는 열여섯 개의 돌을 가지고 그것을 네 개의 주머니 속, 두 개의 바지 주머니, 두 개의 외투 주머니 속에 넣습니다. 그렇게 주머니에 있는 돌들 중 하나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 그것을 빱니다. 한번 입으로 빨고 나면 그는 원래있던 주머니가 아니라 다른 주머니에 넣음으로써 되도록 다른 돌을 빨수 있도록 하는데, 이 방식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빨면서 움직이는 돌은 단 네 개일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그는 주머니 속의 돌들을 휘적이기도하고, 돌을 하나씩 옮기기보다 네 개씩 옮기기도 하고, 여러 방식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시도한 모든 방식들은 초기의 방식과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주머니의 돌들을 저부 빼놓고 분노에 가득찬 채로 돌들을 바라봅니다.
어느날 섬광처럼 떠오른 해결책이란,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여섯 개의 돌을 넣고, 바지 오른쪽과 왼쪽 주머니에는 다섯 개 씩 넣고 남은 외투 주머니를 비워두고 시작합니다. 그가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서 돌을 빨면 비어있는 외투 왼쪽 주머니에 그것을 넣고, 그렇게 외투 오른쪽 주머니의 돌들이 빌때까지 그것을 빨고 왼쪽 주머니에 넣습니다. 외투 오른쪽 주머니가 빈다면 바지 오른쪽 주머니 속의 돌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옮기고, 바지 오른쪽 주머니가 빈다면 바지 왼쪽 주머니의 돌들을 오른쪽으로 옮깁니다. 그렇게 모든 돌들을 동시에 같이 빠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개별적으로 빠는 동시에 각각의 돌들이 매번 새로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그것을 보며 그는 만족을 느끼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만족을 느끼지 않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불만족을 느낍니다. 돌들을 그 자신만의 회전으로 빠는 것을 좋았지만, 그 균형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가 만든 돌을 빠는 순환의 최소한 시작과 끝 부분에서는 그는 주머니 하나가 무저건 비어져 있어야하기 때문에, 왼쪽이나 오른쪽 방향의 무게가 동일하지 않아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그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도했던 것은 이성의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것인데,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니 그것은 또다른 문제를 예기하는 원인으로서 나타납니다. 돌을 빨기 이전에도, 돌을 빨고난 이후에도,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도,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도, 그에게는 두 개의 개별적인 육체적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각각 돌을 빨아야하는 육체적 필요, 몸의 균형을 유지해야하는 육체적 필요가 그것입니다. 매번 색다른 돌을 빤다는 것은 새로운 돌을 빠는 순환적인 체계를 만든 이유 그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에게 내가 매번 같은 네 개의 돌만을 빠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은 그에게 절대적인 사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구심이라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었고, 그도 스스로 말하는 듯이 '또한 매번 다른 돌을 빨든 영원토록 항상 같은 돌을 빨든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돌의 맛은 모두가 정확히 똑같았으니까.'이기 때문입니다.
몰로이가 자신의 주머니들에서 돌을 어느 곳으로, 어떤 방식으로 옮기는지 고민해나가는 기나긴 독백의 장면은 베케트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하는 요소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이야기로서 보입니다. 전혀 생뚱맞게 보이는 장면들이 그의 작품에 가끔씩 들어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점이 베케트가 각기다른 책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담아낸 경우가 왕왕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럭키의 기나긴 독백이 이에 대한 하나의 예시로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우리에게 단번에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나긴 나열로도 보이는 럭키의 말은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며 우리에게 보여주는 언어의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몰로이의 돌멩이는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몰로이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주머니에서 주머니로 돌을 옮기는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매번 새로운 돌을 빨고 싶다, 효율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만 한다라고. 그러나 그것의 해결책을 내놓는 순간 그것은 또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제 1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외압에 의해서인가 또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그 자신 스스로가 이전의 자신을 부정하고 무의미하다고 일축해버립니다. 이성의 방식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방식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방법론과 그 모든 체계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개중 하나는 언어입니다.
언어
흔히 베케트의 언어관을 실패한 언어, 또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조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언어를 일종의 실패한 무언가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이오네스코의 경우에는 언어를 실패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일종의 권력구조로서 바라봅니다. 그는 언어라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아주 깁숙히 녹여져 있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거나 거부하려는 개인들에 적대적으로 작용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권력의 작용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언어의 존재자체는 문제점은 있을지언정 인정하는 편에 속합니다. 그와 같은 부조리 문학을 다뤘음에도, 베케트와 이오네스코의 언어에 대한 관점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는 언어를 거부하는 편에 속하며 위에서 인용된 고도를 기다리며 속 럭키의 대화와 같이 시뿐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이러한 문장들을 차용함으로서 그것의 한계점을 드러냅니다. 그의 언어관이 독특하다고 느껴지는 점은, 언어에 대해 실망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언어의 존재 자체나 그것에 대해 무언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수 있다는데, 베케트의 경우에는 쉽게 말해서 언어는 답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서 그것을 파헤치고 나아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20세기 초중반에는 이전까지 인간 사회에 있어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무너지는 시대였습니다. 신이라는 믿음의 대상은 이전부터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지만, 그때 쯔음 완전히 몰락해서 더이상 절대적인 상징으로서 남아있지 않았고, 체제에 대한 의문이 끝도 없이 등장해 그것을 변화하기 위한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삶의 기준과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에 대한 극복의 시도로 부조리주의나 실존주의와 같은 철학 사조가 등장하기도 했던바, 그러한 흐름에 문학이 동떨어져서 홀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요원한 시도일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베케트를 포함한 수많은 부조리 문학가들도 문학이라는 요소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고, 그렇게 수많은 작가들은 언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베케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그는 언어를 위에서 처럼 실패한 무언가로 바라보았고, 말하지 않는 상태인 침묵을 사용함으로서 오히려 말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어쨋서나 문학이라는 글쓰기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은 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문자를 사용하려는 의도, 즉, 의사소통과 전달이라는 목적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해체를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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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어조로) 프앙송과 와트만의 최근 공동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까까 흰 수염이 달린 까까까까 인격신은 공간과 시간의 밖에 존재하고 있어 하늘의 무감각과 무공포와 침묵 위 높은 곳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사랑하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곧 알게 될 터이고 하늘의 미랑다의 본을 따와 고뇌와 불 속을 헤메는 자들과 함께 그 고통을 겪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는 귀를 귀울인다. 포조는 낙담과 혐오의 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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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인 예시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의 인용에서처럼 드러납니다. 우리가 문자 또는 언어를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한다면 전달에 그 목적이 있을 것인데, 베케트의 언어란 결과적으로 그러한 목적에 실패를 맞이해버린 언어를 뜻합니다. 처음의 대사로 미루어보았을때 분명히 어느 연구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 거대한 독백은 인격신과 하늘과 인체와 오물과 스포츠와 원소 등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계속해서 나열되며 그 자신이 하고자하는 바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몰로이>에서도 이것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의식의 흐름을 극단적으로 사용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초반부터 자신의 방에서 출발한 작은 연상의 기억은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와있는지,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며 돈을 주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그렇게 집밖으로 나가서 여러 길들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다시 되돌아오는 그 짧은 줄거리는 몰로이의 작은 기억들이 타오르기 시작하며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의식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언어로 내뱉지 않는 대상들을 대상화하여 글로 옮긴 방법입니다. 가령 물통을 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물에 대한 추억을 상기한다거나 물병의 색을 보고 다른 물체의 색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그러한 사고의 방식일 겁니다. 당연히 이걸 일반적인 대화에 끼어넣는다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죠. 문학에서 의식의 흐름을 그렇기에 더 주요한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다른 매체에서는 표현할수 없는 아직까지는 문학만의 표현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보고 뚜렸하게 이해되지 않기에 언어의 한계점을 지정하는 역할로서 사용되며 언어의 죽음과 동시에 언어가 살아나갈 수 있는 갈림길의 기준이 됩니다.
몰로이와 모랑의 여정은 원점 회귀적인, 익숙하게는 수미상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종국에 드러나는 모랑의 글쓰기와 몰로이의 글쓰기에서는 새소리와 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몰로이는 종달새 소리를 들은것 같다는 말로 사작해 새소리를 듣지 않은지 시간이 꽤 지났다고 말하며 그것이 종달새였는지 다른 새였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모랑은 비가 내리는 자정과 비가 내리지 않는 자정 이 두가지를 같은 문단 내에 집어넣음으로써 무엇이 옳은지 우리가 알지 못하게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서사는 모두 허구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분명 처음 시작한 공간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가 내리고 내리지 않는 다른 공간으로도 보이고, 새소리가 들리다가 들리지 않다가 또다른 새소리가 들리는 시간이 다른 공간으로도 보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이전까지 절대적이었던 순환형에서 벗어나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분명이 언어와 문자로 되어있는 그들의 글을 읽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그 어떤것도 읽어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달하고자했으나 그것이 실패한 상황, 그들의 서사는 그렇게 허구가 되어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그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언어가 실패하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모든 이야기는 불확실함으로 떨어집니다. 작 중 몰로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은 때는 너무 적게 말했고 너무 적게 말한 것 같은 때는 너무 많이 말했다. 애매모호함 속에 과소와 과대가 섞여들여 언어는 그들의 세계를, 즉 진실을 재현하는데 실패합니다. 언어이자 일종의 사회적 이성적 사고방식의 폐해는 돌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몰로이는 결국 동일한 돌을 동시에 빨지 않기 위한 여러 방법을 만들어내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최선의 방법은 현실에 반영되는데 있어 부적절했습니다. 이성을 추구했지만 자신의 몸이 불편하다는 결과를 내놓게 된것, 언어도 이와 동일합니다. 언어는 언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현실인지 아닌지 우리가 알 수 없지에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는데 부적절합니다.
이 지점에서 몰로이의 존재의의가 드러납니다. 앞으로 이어질 3부작의 초석으로서, 그리고 그가 그려나갈 언어의 생의 과정을 그리는 첫 붓질로서, 몰로이는 그 위치를 견고히 합니다. 몰로이는 천천히, 그리고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죽어나가고 있는 언어를, 침몰해나가고 있는 그것을 표현해나가고 있습니다. 앞에서 몰로이는 살아있는 언어의 생체적인 현현과도 같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언어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몰로이라는 겉을 벗어던지고 살가죽을 뜯어내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몰로이라는 존재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동시에 죽음과도 매우 가깝다라고 느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몰로이가 기억을 더듬으며 언덕을 올라가다 만나는 어떤 농부를 죽인 것처럼, 정상적인 발화를 구사하는 존재를 말살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을 채워넣습니다. 여정의 끝맞침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점은 자기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행위는 의미가 없었다는 것으로 이어지며 묘사된바와 같이 늙어버리고 온전치 않은 그 몸뚱아리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몰로이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루스라는 여성의 개를 치어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녀는 몰로이를 탓하지 않지만 그를 데려와서 자신과 함께 살자고 이야기하며 개를 같이 묻는 행위를 행합니다. 그도 군말없이 개를 묻으며 이렇게 스쳐지나가듯이 생각합니다. 그 무덤은 개의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것이라고.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듯이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놓고 자신의 묫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정부분의 그는 죽어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베케트에게 언어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을 뿐이고 우리가 진정으로 전달하고자하는 것들을 말로서가, 언어로서가 아니라 침묵의 길을 걸어야한다는 것으로.
항상 절대적이라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의심하는 태도를 견지해야한다는 생각이 요즘들어 계속해서 들고있습니다. 절대성이라는 영역을 파괴하는 그 희열도 분명 존재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상이나 아이디어에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분명히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짜고짜 언어는 실패했다 라는 말을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무언가의 시작은 언어로부터 시작해야함이 분명하니까. 그래서 지금도 이런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관념에 대해서나 제가 선호하는 어떤 이론에 대해서이던간에. 세상의 모든 것이 변증법만을 따라서 발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새로운 어떤 것, 고유한 어떤 속성들은 어느 기준에 대항하는 안티테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방향성을 지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의문을 던지는 것에서 자신의 무언가를 발전시켜나가고 그것이 흔히 말하는 생각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뭐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얘기를 써놓긴 했는데, 몰로이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사실 이전에 있던 대머리여가수와 앞으로 쓸 말론 죽다의 내용을 상당부분 가져다가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썩 좋지는 않네요. 슬슬 이제 더 새로운 무언갈 써야하지 않을까하는 강박이 생기는거 같은데 모더니즘을 손을 좀 놔야할지… 관념만 다루는게 아니라 살짝 짜치기는 하지만 선과 악이나 형이하학쪽을 다루어보는건 어떤지… 하지만 다음 예정돤 책은 죽음의 한 연구인지라 그건 또 소원한 길로만 보입니다.
첫댓글 우
오
아
와~
아오
우
왕
~
아우
와.. 죽은 혼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허허허 감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