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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예비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인간이 어떤 신념이나 믿음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수많은 인생의 목표가 있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에 ‘목숨을 건다는 것’의 대상은 그만큼 간절하고 극적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낮추어서 어리석은 인간의 원죄를 대신하시고 없애 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음을 믿고 그 믿음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다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부정하는 행위 한가지만을 했어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배교를 하지 않고 용감하게 죽음을 자청한 성인들과 순교자분들의 삶은 믿음이 약하고 나약한 저 같이 부족한 인간은 언감생심(焉敢生心) 흉내도 내지 못 할 일입니다.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올릴 때 마다 온전하게 순명과 복종으로 사셨던 성모마리아님을 묵상하지만 성모님을 공경하고 간구하면서도 성모님 같은 순명과 복종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가장 바라는 올바른 믿음은 어떤 것일까? 항상 고민하지만 순간순간 생기는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조차 실천 못하고 하느님께 실망을 드리고 죄를 짓게 됩니다. 믿음 때문에 순교하신 성인들과 순교 하신 분들을 뒤따라 살진 못하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 구세주임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따를 수 있도록 노력하며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힘쓰는 것만이 주님께 한발 다가서는 삶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 게세마니 동산에 가시어 홀로 땅에 엎드려 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고통의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 기도를 보면 예수님께서 다가올 수난을 결코 자의로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고 결국 그 수난의 길만이 인간들의 죄를 구원할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기꺼이 그 고통과 형극의 길을 가라는 하느님의 뜻을 순종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같은 인간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길을 받아들이시고 실천하셨기에 그 후 수많은 순교자들과 성인들께서 그 길을 기꺼이 따라 가셨음을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는 비록 세상의 눈으로도 죄인이고 하느님의 눈으로도 죄인이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께서 가셨고 지키려고 했던 믿음을 따르고자 하오니 굳건한 마음과 용기를 주시고 저의 남은 생애를 오로지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바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조복현(엘리야) - 「‘교황 요항 바오로 2세’를 읽고」생활성서의 특집 ‘교황 요항 바오로 2세’를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반갑기도 했었고 마음이 편안해 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종교에 대하여 관심도 없었고 천주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때 ‘교황’이라는 사람이 무엇 하는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른 체 ‘그저 크신 분’이라는 느낌하나로 존경하는 분으로 제 마음에 각인된 때문이지도 모릅니다. 1989년에 그분께서 우리나라에 방문을 하셨을 때 TV뉴스와 신문에는 연일 대서특필이 되었고 그분을 뵈려고 연일 구름인파가 몰려든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았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신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방문을 했을 적에도 그렇게 하지도 않았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사람이 어떤, 무엇하는 사람인지 몰라서 직장선배에게 물어보았는데 천주교의 최고 어른이며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큰 분이시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신문 표지 면에 ‘교황, 대한민국 방문하다!’라는 문구를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힘없고 소외되고 고통 받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시고 위로를 하시고 그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는 기사문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부터 그분을 좋아하게 되었고 존경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5년도에 그분께서 선종하신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공허함 ,허탈감을 느꼈고 무언가를 잃어 버린듯한 느낌이었답니다. 어쩌면 제가 천주교를 믿게 된 것도 그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이곳에서 세례, 견진성사를 받았지만 사회에 있을 적에도 천주교교리를 받기는 했었지만 건축업계에 종사했기 때문에 공사여부에 따라 옮겨 다니는 여건으로 인하여 돌고 돌다가 결국에는 이곳 ‘성 마태오 성당’에서 세례, 견진성사를 받고 천주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생활성서 특집 ‘교황 요한 바오로2세’를 읽고는 제가 천주교를 선택하여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저를 택하시어 품에 않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 저의 부모님과 동생을 주님께서 돌보셔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시고 거두어 주소서. 부(父) 조규호, 모(母) 조란지, 제(弟) 조득현, 조석현의 영혼을 거두어 주소서. 아~멘.
조복현(엘리야) - 「나의 수호성인 엘리야를 닮고 싶다.」나의 수호성인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예언자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행동을 하였었고 하느님의 율법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늘에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던 것도 있지만 제가 그분을 닮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과 하느님의 분노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사람들이 행한 잘못과 죄에 대하여 깨우침을 얻고 올바른 삶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언자 엘리야께서는 카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을 하여 하느님의 건재하심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입증을 하여 주님께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당시의 대결에서 바알 예언자들은 450명이나 되었고 바알 숭배자들까지 포함 한다면 수 천, 수 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당당하게 대결을 하여 하느님의 건재함을 입증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과 순종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방인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던 시대였을 텐데도 말입니다. 지금에야 예언자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물리적으로 기적을 만 천하에 보이지는 못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보잘것없는 손이지만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불우한 사람을 위해 저의 기술을 써 볼 계획입니다. 비록 일반인이 꺼려하고 적대시하며 경멸하는 전과자가 되었지만 진실한 노력을 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처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들의 가까이에서 현존하심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고 나의 수호성인 ‘엘리야’를 닮아 가고 싶습니다.
송기성(스테파노) - 9월이 되면 각 단체에서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순례를 하면서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추스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순교자 하면 아주 먼 옛날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은 그분들의 신앙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는 않고 그분들 묘지에는 봉분은 비와 바람에 쓸려서 반쯤은 사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1785년에 일어난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명례방(지금의 명동 )집주인이었던 김범우 토마스(1751-1787)는 밀양의 단장으로 귀양을 간다. 김범우는 양반은 아니었지만 부유한 중인집안의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784년 겨울부터는 명례방에 있던 자기집을 집회소로 사용하면서 열렬한 신앙 활동을 하던 중 발각되어 형조에 불려간다. 다른 양반집 자제들은 다 풀려나는데 배교하기를 거부하던 그만이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귀향길에 올라야 했다. 귀양지에 가서도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웠다는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2년 후 목숨을 잃었다. 과연 나에게 그때 그 시기가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믿음이 깊고 나의 삶이 안정 되어 있었다면 나의 선택은 김범우순교자처럼 신앙 안에서 살았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도 많은 형제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에 작은 바람에도 뿌리가 뿌리 채 뽑히는 경향이 있는데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인의 의무를 다했으면 좋겠다.
송기성(스테파노) - 날씨가 가을인가 싶더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떠나기 싫은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을 담 안에서 생활 하면서 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고 나의 신앙에 대해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 스스로는 참으로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신앙은 틀에 박힌 신앙이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아주 옛날 선조들께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참 열심히 하셨습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는데도 당신들의 목숨을 버려가며 신앙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면에서 좋은 조건이지만 자기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순교자는 누가 자기를 기억하기를 바라지도 않으셨지만 그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이 그분들의 신앙을 이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앙은 자기 생각과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순교하신 그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명서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달은 순교성월 달이라 순교하신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바로 잡는 신앙의 계기가 되고자합니다.
마상태(안드레아) - “봉분이 반쯤 파여 나간 무덤 옆에 서있는 흰 비석하나”가 담긴 사진 한 장. 깊은 산속이라 산돼지가 와서 봉분을 파헤쳐놓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움 보다는 아리따운 삶을 살다 가신 분의 묘에 산돼지 녀석이라도 와서 킁킁거리며 잔디를 헤치며 뒹굴다 가지 않으면 그 분의 영혼이 외로워 어쩌랴하고 자위해보는 작가의 마음이 짠하게 느껴져 온다. 아버지와 오빠가 천주교 박해로 잡혀가고 혼자된 처녀의 몸으로 집도 없이 방황하다가 최양업신부님이 약 4개월간 머물고 계셨던 언양의 김아가다(24세)는 죽림골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며 최신부를 정성껏 공경하여 모셨으며 오랜 박해의 고통 속에서 병이 들어 죽어 죽림골 아래 간원골 산기슭아래 묻혔다 한다. 그녀의 활동은 크게 부각된 바는 없지만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 중에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 왔으며 항상 마음속으로 신앙 안에서 죽음 맞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에게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가라고 대들었다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박해시대에 태어나 신앙을 알았다면 이러한 용기와 결단으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이름 없는 나이어린 처녀의 굳은 신앙심이 돋보이는 그분의 믿음을 본받는 삶이 되고자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장명철(이냐시오) - “김기량 순교자의 삶” 제주 사람으로서 처음 세례를 받고 재주 신앙의 선조로 우뚝 서 있는 순교자이다. 제주출신의 어부 김기량은 1857년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구조되어 중국까지 가게 되는데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간 그는 그곳애서 천주교에 입교한다. 그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제주에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진 시작이었다. 김기량은 이후 육지를 오가며 성사를 받으며 ‘제주의 사도’가 되어 이웃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제주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가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김기량은 새로 입교한 사람들을 영세시키려고 육지로 나가다가 통영 앞바다에서 체포된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켜 낸 그는 끝내 가슴에 대못이 박히며 장령하게 순교한다. ‘하느님의 종’ 순교자로 선정된 그는 시복시성 대상자 124위에 들어 있고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그의 고향 함적리에는 하얗게 김기량 순교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황사평 성지‘에 있는 순교 현양비에는 그의 참혹한 순교를 상징하는 커다란 대못이 박혀 있어 오늘도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진병일(경환 프란치스코)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윤치중은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살던 명문 양반가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6대조가 윤선도이며 윤두서가 증조부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했던 윤치중은 과거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한 끝에 1783년 봄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1784년 겨울, 서울로 올라온 윤치중은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당시 천주교인들이 자주 모이는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천주실의”와 “칠극”등 천주교 서적을 빌려 연구와 묵상을 거듭하다가 1786년 정약전에게 기본교리를 배운 뒤 이듬해 정약전을 대부로 친척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1791년 음력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윤치중은 장례절차를 고민하다가 상주로서의 예의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윤치중의 제사폐지 행위를 목격한 친척과 친구들은 그를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비난했고, 이 사건은 조정에 까지 알려지게 됐다. 조정은 진산군수에게 윤치중과 권상연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고, 진산군수가 그들 대신 윤치중의 숙부를 감금하자 두 사람은 진산관아에 자수했다. 진산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를 버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전주 감영에서 전라감사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부모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짐승보다 못한 짓 이라고 하였고 이는 국가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추궁했다. 윤치중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 했다. 결국 정조 임금은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대신들 뜻을 받아서 이들의 처형을 허락했다. 지금의 우리들은 먼저 가신 순교자님들의 희생으로 아무런 제재도 없이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교회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한국교회의 순교자님들의 피 땀 흘린 순교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순교자 성월 동안 순교자님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서 그분들의 순교가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되게 하옵소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배문효(예비신자) - 순교자 성월 『이양등 베드로』경상도 울산“죽렬 교우촌”회장임. 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함.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온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를 만나 서로 격려함. 2년 뒤 체포됨. 경주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울산으로 옮겨짐. 사형선고를 받고 장대로 끌려 나가 1868년 9월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함. 『김종륜 루카』1819년 양반 집안에서 태어남. 충청도 공주에서 입교함. 병인박해 때 경상도 상주 멍에옥으로 피신. 언양 . 간월을 거쳐 울산 “죽령 교우촌”으로 감. 이양등 베드로 회장,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됨. 장애에서 동료들과 함께 순교함. 49세 였음. 『허인백 야고보』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출생, 언양으로 이주함. 24세 때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함. 아내 박조예와 자식들에게 교리를 가르침. 신앙생활에 전념 고신극기, 겸손 . 인내의 덕을 쌓음.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문초 당함. 풀려나 울산의 죽령으로 이주함. 이 베드로 회장과 김 루카를 만나 신앙생활을 지속함. 1868년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며 가족에게 “나를 위해 기도하여라. 그리고 바르바라 성녀의 순교행각을 기억하도록 하여라.”고 당부함.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옮겨져 온갖 고초를 당함. 1868년 9월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함. 46세였음. 세분의 시신은 허 야고보의 아내가 거두어 비밀리에 안장함. 다른 곳에서 생활 하시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던 세분께서 한 곳에 모여 더욱더 신심을 쌓으시고 신앙을 지속하시다가 관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하시다 숭고하게 순교를 하셨습니다. 세분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며 순교의 힘을 쌓으셨습니다. 순교하는 그 순간 까지 기도하며 신앙을 증언 하셨던 이 세분의 영광스런 순교정신을 본받아서 우리도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서로 격려해 주고 기도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생활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우리의 믿음과 신앙심을 더욱 굳건히 해나가야 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멘.
김한길(시몬) - 「김범우 토마스 (1751 - 1787)」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몡례방(명동)집주인이었으나 밀양의 단잔으로 귀양 감. 1784년 겨울부터 명례방(명동)을 신앙 집회소로 사용하면서 열렬한 신앙 활동을 하던 중 발각되어 추조(형조)에 끌려감. 온갖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음. 고문 후유증으로 2년 후 37세로 순교함. 전라도 윤치중. 유항검과 함께 그를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로 이름 함. 그의 아우인 김현우도 몇 년 뒤 일어난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함. 부유하게 살아가던 중 처음 접한 주님을 보시고 경외하며, 굳은 신심으로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악인들에 맞서 굴하지 않으시고 순교하신 김범우 토마스 순교자님! 지금의 우리 신자들의 형태와 신심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지금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두렵고 두려울 것만 같습니다. 한없이 넓고 따뜻하신 주님의 품안에 계실 우리 한국초대교회의 수많은 성인. 성녀님들, 그분들의 숭고하고 헌신적인 순교가 있었기에 지금껏 우리 교회가 유지되고 번영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더욱 기도와 신앙심을 돈독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채순식(예비신자) - “경향잡지 9월호”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년에 순교하신 하느님의 종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의 믿음과 삶을 읽었습니다. 무장이 되어 늦은 나이에 하느님의 교리를 접하고 교회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오며 공소회장이 되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해 오며 묵상기도와 교리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동래문밖에 살던 좌수 양재현 마르티노는 이정식 요한을 대부로 삼고 교리를 열심히 배우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오다가 1868년 무진년에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서로 만나자 그들은 반갑게 여기며 천주의 은혜가 무궁함이라 하고 찬미했습니다. 대부 이정식 또한 ‘천주의 은혜올시다.’ 하고 찬미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처연하게 주님을 찬미하면서 이정식과 가족, 양재현등 8명은 참수로 순교했습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할까요? 스스로 묻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믿음이 있는가? 요즈음 세상에 조금만 힘들어도 뜻대로 안 된 다고 믿음을 버리는 것이 태반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처연히 주님을 찬미 할 수 있을까요? 제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이제 부터라도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믿음을 확고히 하고 교리를 열심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순교하신 거룩한 분들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 합니다. 주님을 찬미 합니다.
김동찬(콜베) -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1894년 1월 7일 폴란드 우지근처의 “즈든스카볼리”에서 태어난 성 막시밀리아노스 마리아 콜베 또는 '막스밀리아노'는 ‘라미문두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910년 9월4일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스라는 수도명을 택하였다. 그는 중등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5일에 첫 서약원을 하였으며 1912년 12월에 로마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가 1914년 11월1일에 종신서약을 한 그는 1918년 4월28일 사제품을 받고 1919년에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직후 ‘크라쿠프와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1922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그 후 폴란드내에서 유명해진 성 콜배신부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잡혔다가 곧 풀려났다.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17일 그를 체포하여 바르샤바의 파피악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2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카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과 처벌을 받으면서도 동료 수용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는 한명이 탈출하여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하였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자중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콜배신부는 자원하여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결국 성 콜배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혀 아사 형을 받았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그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하였고 그는 1941년 8월14일 아우슈비츠의 감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성 콜배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방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1948년 그에 대한 시복절차가 시작되어 마침내 1971년 10월17일 교황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10일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자비의 순교자’라는 칭호와 함께 그를 시성하였다. 성 막시밀리아노스 콜베신부는 성모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가장 깊었고 또 성모마리아에게 매우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 순교자 성월을 보내면서 봉헌으로 성 콜배신부님의 순교자 정신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김동만(요한) - 찬미예수님! 모진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선조들의 고귀한 신앙을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다 가신 103위의 순교성인이 계시기에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김범우(토마스) 1751 - 1787』1785년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명례방 집주인이었던 김범우(토마스)는 밀양의 단장으로 귀양을 간다. 김범우는 양반은 아니었지만 역관벼슬을 하던 부유한 중인집안으로 천주교에 입교한다. 1784년 겨울부터는 명례방에 있던 자기 집을 신앙집회소로 사용하면서 열렬한 신앙 활동을 하던 중 발각되어 추조에 끌려간다. 다른 양반집 자제들은 다 풀려났는데 배교하기를 거부하던 그 만이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모진고문을 당하고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귀양지에 가서도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웠다는 그는 고문후유증으로 2년 후 목숨을 잃는다. 나이는 37세 전라도의 윤치중, 유항검과 함께 그를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로 이름 하는 까닭이다. 그의 아우인 현우도 몇년뒤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다.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김석태(바오로) - 찬미 예수님! 순교자들의 안식처를 읽어 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 이지만 하느님의 힘은 대단해서 나 같은 존재를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1801년 한국천주교에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하여 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산골짜기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들은 불안함과 두려움 속에서도 마음속에 꽃피운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갔다 충청도 최초의 공소인 배티를 중심으로 산 너머 이곳 저 곳에 하나 둘 비밀교우촌이 형성됐다. 1976년에 배티 성지에는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 무명 순교자 6인 묘역과 14인 묘역, 최양업신부님 기념성당 등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세례를 받기 전에는 성지가 전국에 이렇게 많이 있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의 합정동에 천주교 성지가 있다고 듣고 언젠가 그곳에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저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늘 하느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윤용석(유스티노) - 103위 순교 “황석두 루카” 다블뤼 주교와 위앵신부 장주기요셉등과 함께 순교한 황석두(루카)순교자 그의 영성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선교회가 있을 만큼 의미가 있으며 우리들에게 친숙하다. 황석두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그를 가르치던 한문 선생의 권고로 또는 우연한 기회에 천주교인을 알게 돼 인연을 맺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그의 가문이 전통적 천주교 가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이야기에 의하면 충정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어느 날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박에서 천주교인을 알게 된다. 교리를 배우다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일찍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화를 냈다. 그렇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한 그는 이에 감동한 아버지와 가족들을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했다. 이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황석두는 1845년 페레놀주교가 입국한 이후에는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 할 것을 허락받았으며 사제가 되기 위해 다블뤼신부에게 몇 년 동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아내가 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사제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공부를 그만두고 서천 산막골로 이사해 1858년 페롱신부의 복사 교우촌의 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 다블뤼주교의 복사로 전교활동을 도왔으며 함께 교회서적을 번역하기도 할 만큼 교회의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황석두 역시 1866년 병인박해가 휘몰아칠 당시 순교했는데 홍주 거더리에서 다블뤼주교와 위앵신부 오매트로신부가 체포되자 자신을 체포하지 않는 포졸들에게 직접주교를 따라가겠다고 당부해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고 전해진다. 포도청의 신문과정에서도 황석두는 “대군대부”인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자신의 신앙를 증거 했으며 3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달 30일 충남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돼 목이 잘렸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후 황석두의 형의 아들이자 양자였던 황천일(요한)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본가로 옮겼다가 홍산 삽튀에 장사지냈다고 전해진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돼 현재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이근창(제오르지오) - 하느님의 종 이양등 (베드로), 김종윤 (루카), 허인백 (야고보), 순교자님의 삶을 생각 봅니다. 하느님의 종 이야등(배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의 회장이었다. 근 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이 베드로는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온 허인백(야고보)와 김종윤(루카)를 만나 서로 격려하였다. 2년 귀 포졸들이 교우촌을 찾아냈고 그들은 체포되었다. 그들은 경주 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울산으로 옮겨졌다. 신앙을 한결 같이 증언한 이 베드로는 사형 선고를 받고, ‘장대’로 끌려 나가 1868년 9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순간 이베드로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시신은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가 비밀에 안장하였다. 하느님의 종 김종윤(루카)은 1819년 집안에서 태어나 어리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화목한 성격이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경산도 상주 멍에목으로 피해 있다가 언양 간헐을 거쳐 울산의 죽령 교우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양등 (베드로)회장과 허인백(야고보)를 만나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김종윤(루카)은 ‘장대’에서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게 된다. 순교 때 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그의 시신은 허인백(야고보)은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는 스물네 살 때 천주교에 입문하여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아내 박예조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고신극기(苦身克己)는 물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았으며 아내와 남매처럼 지냈다. 허인백(야고보)은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많이 도와주기도 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문초를 당해지만 박해가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임금의 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울산의 죽령으로 옮겨와 이양등(베드로)회장과 김종윤(루카)를 만나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허인백(야고보)은 나무 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 가면서도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의 듯을 드러내었다. 그러다가 1868년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갔는데. 이때 어 야고보는 가족에게 “나를 위해 기도하여라. 그리고 바르바라 성녀의 순교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여라.“고 당부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옮겨진 그는 한 결 같이 신앙을 증언하다가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1868년 9월 14일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마흔 여섯이었다.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가 거두어 비밀에 안장하였다. 이 베드로와 김종윤(루카)와 허인백(야고보)은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키우고 쌓으며 순교의 대를 기다렸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기도하며 신앙을 증언하였던 이분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우리도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이겨 내도록 서로 격려하자.
홍태구(베드로) - 찬미예수님! 저의 삶은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뵙기 전처럼 어떤 일을 하여도 마음의 안식과 나침반을 찾지도 못하고 허탕을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실패의 두려움과 물질적인 집착, 그리고 그것들에 너무 욕심을 부려서 시몬 베드로 고기잡이에 대한 허탕을 친 것처럼 저도 삶에 대한 물질에서 허탕만 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또 시몬 베드로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고 다른 제자들 보다 더 열심히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하였지만 당시 시몬 베드로도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었기에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 죄를 짓고도 지금은 성인이 되시어 모든 교인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저는 시몬 베드로 성인의 믿음을 본받아 세례를 받은 몸으로 죄를 짓고 지금은 자유가 억류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시몬 베드로 성인처럼 지금 가지의 죄로 얼룩진 삶을 뉘우치고 주님 앞에 좀 더 다가가는 계기로 삼으려합니다. 주님!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그리고 새롭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소서. 아~멘.
전호식(이시도로) -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는 가정 안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준 분이시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지혜롭게 시키며 화목의 중심이 되었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식들을 맡기며 순교의 칼을 받은 모습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놓는 신앙의 본보기가 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본받도록 다짐하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도록 노력하렵니다.
김철관(요셉) - 하느님 아버지 순교자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어 하늘나라에 영원이 함께 하시겠지요. 아버지 하느님 저희들도 말로써 굳센 믿음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작심삼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우리 신부님 시몬 신부님을 닮을 수는 없는 것 인가요. 아버지 하느님 너무나 어려운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비관하는 마음을 버리고 내 이웃의 불행을 보살피며 내 곁에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주시어 언제나 우리 신부님 시몬 신부님을 닮아 갈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순교자님들의 업적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게 하여 주십이요.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
김광민(다미안) - 저에게 순교자에 대한 생각을 불어 보신다면... 현재 자신이 걷고 있는 그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그길,,, 그분의 마음... 얼마나 무거웠을 까요? 때로는 얼마나 외로웠을 까요? 혹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도 해가며... 그 누군가 마음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던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캄캄 했을까요.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의 온갖 고통, 고난을 다 이겨내시면서 끝까지 걸어가시죠. 그곳을 향해,,, 결국은... “바람아, 언제든지 불어오너라. 내 기꺼이 흔들려 줄 테니... 아버지.” 결국 이분 또한 아름답구나...
조성락(경환프란치스코) - 「부산교구에서 시복을 청원한 하느님의 종 이정식(요한)과 양재현(마르티노)의 삶」1866년 병인박해 때 이정식은 기장으로 울산으로 피해 체포를 면했습니다. 1868년 무진년에는 철저한 수색 때문에 이정식과 양재현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심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양재현은 이정식을 만나자. “대부가 여기 계시오리까? 반갑도다. 천주의 은혜가 무궁함이라”하니 대부 이정식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르티노 만나게 되었으니 이렇게 된 일은 천주의 은혜올시다. 천주께 열심히 기도나 드립시다.’ 이렇게 처형 직전의 대부대자는 자신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많고 천당으로 가는 길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정식과 가족과 양재현 등 8명은 수영 장터에서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고광호(스테파노) -「세워진 풍남문 밖에서 1791년 순교」윤지충의 제사 폐지 행위를 목격한 친척과 친구들은 그를 천륜을 어기는 죄이라 비난했고 이 사건은 조정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은 진산군수에게 윤지충과 권사연을 체포 할 것을 명령했고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산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했다. 진산군수가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두 사람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관에게 자수했다. 1791년 10월 중순께였다 진산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도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여러 차례 실득과 회유에도 그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전주 감영으로 이송했다.
고광호(스테파노) - 흔히 안동교구를 순교자들의 못자리라고 말한다. 교구민들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순교자들의 못자리인 만큼 순교자들의 신앙정신에 대하여 매우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교우촌 순례 길은 크게 상주지역, 봉화지역, 영양, 청송지역등, 4곳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교우촌은 모두가 깊은 산촌에 자리 잡고, 또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박해시대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도보순례를 원하는 분들이라면 안동교구에서 교육자료 집으로 발간한 신앙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도보 성지순례라는 책자를 미리구해서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우촌은 대개가 험준한 골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우촌 근처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도보로 순례하여 신앙선조들이 신앙 때문에 힘들었지만 기쁘게 생활하였던 거룩한 터전들을 직접 밟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들 교우촌에 살다가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은 대구, 서울, 충주, 공주, 전주, 안동, 상주등지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신앙을 증언 하다가 용감히 순교하였다.
이재민(레미지오) -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1811~1868년 프랑스 출생」성인은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신론자였기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제가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성인은 1834년 사제품을 받고 자신이 태어난 그레노블교구 사제가 되었다. 수도생활에 관심이 많던 그는 이후 마리스타회에 입회하고 관구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인은 수도회 명성담당 신부로 활동하며 수도자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도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한편 성체신심이 각별했던 그는 1856년 성체 사제회를 설립해 성체신심을 널리 알리는 데 헌신했다. 특히 더 많은 아이들이 첫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영성체를 자주할 것을 권장했다. 특히 더 많은 아이들이 첫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영성체를 자주할 것을 권장했다. 첫 영성체 시기를 낯 춘 교황 비오10세도 성인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는 1962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 시성됐다.
김광민(다미안) - 저에게 순교자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신다면 현재 자신이 걷고 있는 그 누구도 알아봐 주시 않는 그길... 그분의
마음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때로는 얼마나 외로울까요. 혹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도 해가며 그 누군가에 마음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던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캄캄했을 가요.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 온갖 고통, 고난을 묵묵히 다 이겨내시면서 끝까지 걸어가시죠. 그곳을 향해 ...결국은... 바람아. 언제든지 불어 오너라. 내 기꺼이 흔들려 줄 테니. 이 분 또한 아름답습니다.
김철관 (요셉) - 「성 빈첸시오 부제 순교자」빈첸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성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으로는 사라고사의 성 비첸시오 순교자이다. 그는 교회초기에 있어서 유명한 새 부제 중에서 한사람인데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나 성 라우렌시오와 같이 부르며 스페인 최초의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빈첸시오는 4세기말경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귀족원의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중등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사라고사의 주교이신 성 발레리오의 제자로서 품을 받고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의 우수한 덕과 경쾌한 웅변은 잠깐사이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를 마치 독사와도 같이 미워하던 총독 다치아노는 제일먼저 그를 주목하고 주교와 더불어 이들을 법정에 가두었다. 그때는 마침 디오크레시아노황제의 무서운 대 박해 중이었으므로 그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페인의 총독 다치아노는 더욱 잔인하게 신자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발레리오 주교와 빈첸시오는 철사로 결박되고 사라고사에서 호송되어 발렌시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막상 총독 앞에 끌려 나갔을 때 이미 연로한 주교는 여러 말을 할 수 없어서 젊은 빈첸시오 혼자 응답하며 당당히 그들의 신앙을 선언한 결과 이 두 사람 중 주교는 추방되고 그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총독은 그의 배교를 재촉하기 위해 모든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쇠 칼 퀴로 그의 살점을 떼어 낸 적도 있었고 혹은 쇠 석쇠위에 올려놓은 밑에서 불을 지른 때도 있었다. 또한 벌겋게 달군 쇠판을 살에 대고 거기에 고통을 더 느끼도록 상처에 소금을 바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빈첸시오는 어떠한 형벌을 받아도 결코 배반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설명서를 받쳐라. 그렇게 하면 용서해 주리라. 형벌을 하다못해 총독은 갑자기 방법을 달리해 자비심을 베푸는 것 같이 했으나 성스러운 부제는 그 말에도 복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고 서적이 적었던 그 당시로서는 특히 귀중한 종교서적을 박해자에게 내놓는 다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과 같이 죄였기 때문이었다. 신앙서적을 모두 태워 그리스도교의 근절을 도모하려던 총독의 계획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의 굳은 결심을 꺽을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은 형벌을 주는 것을 중지하고 빈첸시오를 철의 파편이 흩어져있는 감옥에 쳐 넣었다. 성 빈첸시오가 받은 고통은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하는 것처럼 자연계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참아 이긴 것은 확실히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 빈첸시오의 수난이라고 이름 붙인 순교록을 보면 그의 감옥에 아름다운 광채가 충만히 비치고 그와 동시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위로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약속했다 한다. 그리고 이것을 목격한 간수는 무서움에 못 이겨 마침내 개심하여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형벌을 가하는 것을 단념한 총독은 갑자기 수단을 바꾸어 이번에는 쾌락으로써 유인하려고 성인을 아주 기분 좋은 침대에 눕게 하고 간곡히 위로 했으나 빈첸시오는 그 씩씩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때는 304년 1월22일이었다. 총독은 이 거룩한 순교자를 욕되게 하기위해 그 유해를 바다에 던졌지만 파도로 인해 육지로 휩쓸려 온 것을 신자들이 발견하고 찬미 속에 정중히 매장했다고 한다. 앞으로의 행동이나 생활에 지침이 될 만한 가르침은 성 빈첸시오는 듣기 만해도 전율을 금치 못할 무서운 형벌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고통을 잘 참을 수 있도록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 주셨다. 그리고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는 천사를 보내어 그를 위로 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힘에 넘치는 시련을 보내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후 신앙을 위해 어떠한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경솔히 겁내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께서도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어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 알려주겠다. 그분은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이다. 그렇다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할 분이다.’(루가12.4 ~5)하고 말씀하셨다.
박재영(예비자) - 「성녀 쟌 쥬강」쟌 쥬강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자신의 삶을 봉헌하며 가난의 영성을 살던 성인입니다. 프랑스의 작은 어촌에서 태어난 성녀는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습니다. 부잣집에서 식모살이를 하여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틈만 나면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당신도구로 써주실 것을 확신하고 매일 기도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쯤 한 청년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나를 쓰실 것이라며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성녀는 성 요한 에우데우스 영성을 따르는 ‘탄복하올 성모의 3회’에 입회해 하느님 부르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성녀가 47살이 됐을 때 이뤄졌습니다. 성녀는 1839년 겨울 어느 날 거리에 버려진 반신불수의 맹인 할머니를 목격하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성녀는 할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드렸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활동의 시초입니다. 며칠 뒤 갈 곳 없는 어르신을 집으로 또 모셔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의 집은 어르신들로 넘쳐났습니다. 성녀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젊은 여성들과 함께 어르신들을 돌보며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성녀는 어르신들을 돕기 위해 매일 거리로 나가 모금활동을 벌였습니다. 구걸하러 다니는 자신을 문전박대하는 이들에게도 늘 환한 미소로 대했고 빵 한조각도 감사히 여겼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는 지금도 여전히 발품을 파는 모금활동 등으로 수도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가난한 이들을 주님으로 여기며 돌봤던 성녀는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조성락 (경환프란치스코) - 「손소벽 막달레나성녀. 결혼반지를 손에 쥔 최영희 바르바나성녀」손소벽 막달레나 성녀는 11남매를 낳았으나 그 가운데 9남매가 죽고 맙니다. 그나마 장녀였던 최영희 바르바나 성녀마저 순교했으니 혈육이라고는 막내딸 하나만을 남기고 순교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을 알고 아파본 사람이 다른 이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의사가 될 수 있는것”처럼 성녀에게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관장하는 분으로 각인 됩니다. 또한 따님인 최영희 바르바나 성녀는 양반출신이었음에도 문벌과 나이의 차이는 많이 나지만 신앙심이 깊고 도리에 밝은 조신철 가를로 성인을 택하여 결혼함으로써 독실하게 수계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의 행복한 결혼을 바라는 부모는 ‘원앙을 타고 하늘에 오른’ 이 성녀께 기도를 청 할 수 있습니다.
김한길(시몬) - 매년 맞이하는 구월달의 신성한 성월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발현하여 사회에서 불순세력으로 오인되어 고문당하고 참형 당하신 수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누구의 강요나 협박 없이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 묵묵히 받아들이고 순교하신 성인. 성녀님들. 지금의 우리 신자들로써는 도저히 따를 수도, 넘을 수도 없는 고귀하고 영화로운 희생들이셨습니다. 많은 책과 잡지류, 등에서 많이 보고 많이 듣고 하였습니다. 이즈음에 다시 그분들을 생각하고 그분들을 위해 우리가 모여 기도 드리고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간구도 드리며 이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위대하시고 존경하옵는 순교자님들. 그분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천주교가 백년을 넘어서서 계속 이어지고 발전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신자들도 배출되어 신부님, 수녀님을 비롯한 많은 수도 인들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부족하고 못난 저 자신 이즈음에 미력한 몸이지만 이 땅에서 순교하신 모든 성인. 성녀님들을 위해 이번 달 9월이나마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이 시기를 보내도록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하느님아버지! 숭고하고 장엄한 아름다운 순교자님들을 위한 저희의 작은 기도들을 위하여 힘을 보내주시고 큰 격려와 위로를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구 드립니다.
진병일 (경환 프란치스코) - ‘순교자성월’ 먼저 가신 순교자님들의 뜻을 기리며,,,그 분들의 순교정신이 없다면 이 땅에 복음이 늦게 전파 되었을 것이고 또 우리는 영원한 죄악에서 헤어나지 못 한 채 아직까지도 하느님을 알지 못 한 채 자신의 영욕과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사는 불쌍한 인생이 되지 않았나 생각하여봅니다. 비록 이곳 담장 안이지만 9월 한 달 동안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서 신앙생활, 교회참여, 각종 종교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싶습니다. 과연 나는 얼마나 주님을 믿고 또 얼마나 형제들을 사랑하였는지 다시 한 번 더.,,비록 저희들은 순례를 할 수 없지만 마음은 그분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에 동참하여서 한 달,매일 묵주기도로서 대신할까 합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그 분들과 함께 또 주님과 함께 하기를 갈망합니다. 이곳 마태오성당 형제들도 함께하여 이번 9월 달은 경건한 마음으로 먼저가신 순교자 분들의 뜻을 잊지 말고 우리도 항상 순교의 자세를 갖고 산다면 조금이나마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윤금철(예비신자) - 온갖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평등사상을 펼치다 돌아가신 순교자들의 영광이 있었기에 이 땅에도 주님의 사랑에 뿌리가 내리고 우리들이 지금 이 시간 마음 편하게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옛날 우리 앞에 하느님사랑 하나만으로 환란과 역경을 헤치시며 신앙의 뿌리를 내려주신 많은 순교성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마음속에 담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비록 세상 속에 버려진 죄인의 몸이었지만 주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주님의 거룩하신 보혈로 피를 씻으며 거듭난 삶을 살고자 예비자 교리 반에서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기초교리지식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례도 받고 나면 주님의 참사랑을 전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 속에 버려진 제가 모두들 손가락질 할 때 주님께서는 따스한 손길로 저를 보듬어주시며 천국의 길로 이끌어 주셨기에 날마다 기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영광과 기쁨을 저 혼자 담고 살기에는 벅차기에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 입만으로 주님을 부르짖다가 실족한 형제들 모두에게 진실한 신앙생활 속에서 찾아오는 이 기쁨을 꼭 전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느끼는 평안과 기쁨을 그 옛날 순교성인들께서도 느꼈기에 목숨까지도 내어놓고 주님의 사랑을 전한 것 같습니다. 정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기쁨을 나이 60에 느끼면서 속죄의 눈물도 흐르고 기쁨의 눈물도 흐를 때 마음속에는 뜨거운 희열이 일어나면 구름위에 떠있는 것 같은 육신의 포근함 그 자체입니다. 세상 것을 찾기보다 이제는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다 맡기고 그분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아버지하느님께서 삶을 주관 하시기에 영육 간에 모든 것들이 간단하게 이뤄짐을 느꼈습니다.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신앙의 선배이신 순교성인들의 노력 덕분임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신앙의 순교성인을 본받듯 앞으로 제 신앙생활도 뒤에 따라오는 예비자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주 안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이 되고자 합니다. 알렐루야!
김정경 (대건안드레아) - 「이정식을 본받아 성가정을 만들자」도보순례는 시복시성을 위한 것도 있지만 성가정운동의 일화이기도 합니다. 이정식은 본인은 물론 아들, 며느리, 조카도 함께 순교했습니다. 교회역사에서 부모가 순교를 하여 집안이 거의 몰락하고, 고향을 떠나 산골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았지만 그 자식들도 순교한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전해 받은 신앙 덕분에 모진박해와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순교자들의 참된 성가정을 보면서 오늘날의 우리를 생각해 봅니다. 교회에는 여전히 많은 냉담교우들, 경쟁에 지쳐 신앙을 멀리하는 학생들,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미사조차 거르는 젊은이들, 이 밖의 많은 신자들이 순교자의 피와 땀을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무엇보다도 참된 순교신앙이 부모로 부터 시작하여 자녀들에게 뿌리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더 깊어집니다. 덮거나 춥거나 비와 눈이 오더라도 계속되는 도보순례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하루빨리 순교자들이 복자반열에 오르고 성가정이 넘쳐나기를 기원 합니다. 아~멘. 순교자 성월을 맞은 9월 하느님의 크신 광명을 주소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외에도 많은 형제들께서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여 봉헌하고 계십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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