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봉화 9길 : 설성산길(설성 행정 복지 센터 – 청미교 사거리)
봉화 9길을 금당리에서 걸어간다. 금당은 영원한 자유와 진리로 충만한 법당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물결치는 마을, 금당리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마을은 깨끗하고 따사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부처님의 광명에 젖어 면사무소를 출발하여 버스 정류장에 이르기 전 골목길을 따라 걸어간다. 하늘은 푸르고 겨울의 찬바람이 불지만, 방한복을 입어 가는 걸음을 가볍게 하는 춥지도 덮지도 않는 고마운 바람으로 가슴에 닿는다.
구릉 지대를 밭으로 개간하여 마을이 형성된 한적한 길을 걸어가 장수골인 장능1리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봉화길은 마을로 진입하지 않고 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임도로 진입하였다.
비산비야의 지대가 되어 가는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어가는데 봉화길을 알려주는 표지기가 곳곳에 나부끼고 있어 힘들이지 않고 걸어갈 때 가야 할 성호 저수지와 설성산이 눈에 띄고 곧바로 성호 저수지에 이르렀다.
저수지에는 수많은 좌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주인공들은 간곳이 없고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고 있다. 문득 ’차가운 강에서 홀로 낚시를 하는 노인을 그린 ‘寒江獨釣圖’ 란 그림이 떠오른다.
노인은 추운 겨울 속에도 낚싯줄을 강에 드리우고 있지만, 이곳 좌대에는 텅 비어 있으니 그림 속의 노인은 물고기를 잡는데 뜻을 두고 있지 않지만, 이곳의 주인공들은 물고기를 잡는 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호교를 건널 때 설성산이 더욱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한 설성산을 보니 어서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름모를 천의 둑길을 잠시 걷고 자동화 공동 육묘장이 있는 곳을 지나면서 들판 길로 펼쳐졌다. 그렇게 넓은 들판은 아니지만, 마을과 공존하고 있는 삶의 터전인 이 들판을 우리는 발목이 아퍼와도 걷고 싶고 마을 사람들은 든든한 마음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신필리 평야 지대였다. 세필리와 신추동을 병합하여 ‘신필리’가 되었는데 특산물로 연초와 원예라고 한다. 신필2리 마을회관을 지나서 설성산을 오르는 입구에 이르렀다.
금당리에서 여기까지 4km, 50여 분을 걸어와 설성산에 오른다. 높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오르는데 말의 형상을한 설성산의 등산로는 완만한 오르막이었지만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겨울의 찬바람으로 방한복을 입었지만 계속되는 오르막길에서 땀이 몸에 배어 겉옷을 벗고 진행하여 고스락에 올랐다. 팔각정자인 봉화정이 있었고, 정상 표지석에는 280m로 표기하였는데 각종 자료는 290m로 기록하였다.
설성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유래는 ”신라가 성 쌓을 적절한 곳을 찾기 위해 이천지방의 여러 산을 헤매다 설성산에 와서 보니 이상하게도 성이 쌓여질 자리에만 돌아가며 띠를 두른 듯 흰 눈이 쌓여 있으므로 눈의 자취를 따라 성을 쌓고는 이름을 설성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산길은 오를 때의 완만한 길이 아니라 다소 경사가 급해 주의를 하며 진행하여 용주사 말사인 신흥사에 이르렀다. 설성산이 감싸 안은 곳에 자리한 신흥사는 보면 볼수록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동행한 김 총무는 신흥사를 바라볼수록 마음이 편해진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자리에 위치할 수가 있는지 신기할 뿐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金鷄抱卵形局‘이라고 할까?
중생의 세계에서 불심의 세계에 진입하였기에 부처님께 합장의 에를 올리고 법음을 듣고 싶었지만, 스님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리의 향교가 문을 닫고 있듯이 사찰 또한 입을 다물고 있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다. 스님들이 입을 다물고 있지만 부처님께서 말 없는 법문을 들려주셨다.
<극락보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 : 불심은 널리 시방 가운데 두루하고
三世如來一切同 :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하나로 같아라
廣大願雲恒不盡 : 광대한 원력의 구름 항상하여 다함이 없네
洋覺海竗難窮 : 넓고넓은 깨달음의 바다, 신묘하여 다 헤아리기 어려워라
그리고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하산의 발걸음을 서두를 뿐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고나면 천박한 소견만을 드러내어 남는 것은 오직 부끄러움뿐이다.
신흥사를 내려오는데 눈이 쌓여있다. 금당리에 이르렀을 때도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았고 신필리에 이르러도 눈이 녹지 않아 조금은 괴이하게 여겨졌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눈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내렸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설성이란 지명에서 그 원인을 찾아본다. 설성이란 지명이 눈은雪(설), 성은城(성)를 쓰는 것처럼 지명속에 이미 눈이 많은 곳을 담고 있다.
또 이곳이 과거 음죽현이었는데 陰자가 陰氣, 즉 차가운 가운이 많아 다른 지역보다 쉽게 눈이 녹지 않는 곳이 아닐까? 무주의 덕유산 기슭에 소재한 설천리가 일 년 내내 눈이 있어 ‘雪川里’라고 부른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의 지명이 이처럼 그 속에 이차가 담겨 있어 함부로 그 지명을 변경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멸실된 아름다운 우리의 지명이 되찾아지기를 바라면서 진행하여 설성 산성 동문에 이르렀다. 설성산 고스락에 올랐을 때 성의 흔적을 보지 못하고 하산길에서도 성곽의 흔적을 보지 못하여 아쉬웠던 마음을 달랠 수있었다.
”설성산성은 설성산 정상부를 둘러싸며 축조한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은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왕경과의 주요 교통로상에 있는 이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다.“(네이버 지식 백과)라고 하였다.
성벽은 복원되었으나 동문과 문루가 복원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안고 내려서니 선읍리 불상이 서계셨다.
”선읍리 불상은 불상 전체를 1석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대좌, 불신, 불두, 보개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1석으로 조성한 후 연결시켜 안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각 부분이 선읍리 마을 앞 시냇가와 그 옆 논바닥에 흩어져 묻혀 있었는데 1978년 여름에 장마로 흙이 씻겨 내려가면서 밖으로 드러나게 되자 마을 앞 광장에 두었다가 신흥사 주지 월선 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봉안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지 스님의 공덕은 다리를 놓으면서 입과 뜻으로 10악을 범치 않는 십선교로 이름한 데서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함을 알 수 있었다. 십선교를 건너 설성천을 오른쪽에 두고 선읍리 들판을 걸어간다.
(참고)
십선 : 不殺生, 不偸盜. 不邪婬. 不妄語, 不兩舌, 不惡口, 不綺語. 不貪欲. 不嗔恚, 不邪見
땅의 두터운 기운을 흠뻑 마시며 걸어가니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봉화 8길에서 양화천을 기준으로 좌, 우에 평야 지대가 펼쳐진 것처럼 이곳에서는 설성천을 중심으로 선읍리 평야가 펼쳐지는 것이다. 선읍리 평야를 더욱 풍부하고 기름지게 하는 생명수인 “설성천은 경기도 이천시의 남쪽에 있는 설성산의 동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 원하삼거리 앞에서 풍계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설성산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백과)
설성천이 청미천과 합류하는 지점까지 둑길을 따라 걸어가고 싶었지만 봉화길은 설성천과 헤어지고 院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는 ’원하리‘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원하 삼거리에 이르렀다.
선읍1리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이곳은 경충대로였고 여기서 종착지인 청미교 사거리까지 6.2km였다. 경충대로를 100여m를 진행하여 횡단보도를 건너 풍계리입구 삼거리에서 풍계리로 진입하여 풍계 새마을교를 건너 둑길을 따라 풍계천을 왼쪽에 두고 걸어간다.
KTX 중부내륙선 철도가 눈에 띠이고 풍계교에 이를 때 종착지인 청미교 사거리 3.4km를 알린다. 14시 10분에 출발하는 동서울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자 했기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평야 지대로 일자로 뻗어간 지기가 풍만한 평평한 땅, 무엇을 주저하랴 걷고 싶은 데로 마음껏 발걸음을 내디딘다. 농로에서[ 노탑리에 진입하여 마을회관을 지나 여주, 장호원을 오가는 37번 국도에 이르렀다.
버스 정류장의 도로를 건너니 노탑 1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곧바로 나아가 청미천을 만났다. 여강길과 경기 둘레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청미천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여강길을 걸으면서 자연하천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던 청미천을 왼쪽에 두고 걸어가는데 KTX 중부 내륙선 철로를 눈앞에 두고 왼쪽으로는 충뷱 음성군 감곡면 건물들이 즐비하고, 오른쪽으로는 이천 장홍원의 건물들이 즐비하여 서로서로 뽐을 내고 있는 듯 하였다.
중부 내륙선 철도를 지나니 감곡의 산들이 모습을 들어냈다. 뾰쪽하고 우뚝솟 은 것이 아니라 둥구스란 형상으로 그 무엇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넉넉함이 넘치는 형상을 보니 충청도 산의 특색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같았다..
청미천을 따라 청미교 사거리에 이르렀다. 다리의 명칭은 장호원교인데 도로명은 청미교 사거리로 부르고 있어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청미천을 경계로 감곡과 장호원으로 나뉘어 도시가 형성된 곳, 장호원과 감곡의 차이는 무엇일까?
감곡 장호원은 충북 음성군이나 이천 장호원은 경기도 이천시이고, 얼마전까지 감곡 장호원은 통행금지가 없었지만, 이천 장호원은 통행금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가 마주 보며 철도 역사 이름도 감곡 장호원이라고 한 것처럼 서로 하나가 되어 은혜를 베풀면서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남 검단산역에서 출발하였던 경기 옛길 봉화 9길이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시계를 보니 13시 40분이 되어 14시 10분에 동서울 가는 시외버스를 무난히 탈 수가 있었다.
길을 걷는 것은 즐거운 놀이다. 그리하여 길을 걸을뗜 환희심이 일지만 어떤 때는 두 주먹 불끈취며 울분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그 울분이 기쁨과 설렘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 길을 걷는 묘미이다.
즐거움과 설렘으로 걸어온 길이 백두대간 680km를 종주하였고, 경기 둘레길 860km를 완주하였고, 경기 옛길 677km를 걸었다. 하지만 아직 걸어야 할 길은 너무도 많다.
4대강 걷기, 코리아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주 올레길 등 반듯이 걸어야 하는 길이지만, 이내 다리가 너무너무 짧아 이룰 수없어 일엽편주에 이 마음 띄우고 웃음 한번 크게 웃자고 흥얼 거리며 장호원 터미널로 향했다.
● 일 시 :2024년 12월 10일 화요일, 맑음
● 동 행 : 김헌영 총무님
● 동 선
- 10시11분 : 설성면 행정 복지 센타
- 10시50분 : 신필2리 마을회관
- 11시00분 : 설성산 입구
- 11시25분 : 설성산 고스락
- 11시35분 : 신흥사
- 12시30분 : 선읍1리 표지석. 원하삼거리
- 13시10분 : 청미천
- 13시40분 : 청미천 사거리.
● 총거리 및 소요시간
총거리 : 16km.
소요시간; 3시간 2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