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숙명(宿命)의 부자(父子)
영조 자신이 굴욕 속에서 태어나 굴욕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에 자격지심이 생긴 탓인지는 몰라도 40대에 얻은 귀중한 동궁 사도세자를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지 못하고 냉대와 멸시로 일관한 그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사도세자가 태어 난지 겨우 백일이 지나자 그 생모 영빈의 몸에서 떼어 저승전(儲承殿) 외 딴 곳에 두고 보모상궁 두 여자의 손에 맡겨 기르게 하였다. 이 저승전의 위치가 벌써 꺼림칙한 곳이었다. 질투와 온갖 말썽의 진앙지였던 장희빈의 처소 바로 이웃이였다. 그리고 보모상궁 두 여자 또한 이 저승전의 위치 못지않게 꺼림칙한 인물들이였다. 그들은 장희빈의 아들 경종왕의 상궁과 그 왕후 어씨 궁의 나인들이었다.
그들은 장희빈의 사건을 다 겪었고, 경종의 후사 문제로 노론 소론파들의 당쟁의 중심부에서 영조의 왕위등극을 않 좋은 시각으로 봤던 인물로 어대비가 죽은 뒤에 영조왕은 경종의 대전나인들과 어씨 왕후의 내전나인, 상궁 할 것 없이 모두 내쫒았던 것이다. 쫒겨난 이들은 당연히 영조왕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영조왕은 하필 자신에게 쫒겨나 원한을 가진 나인과 상궁에게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양육을 맡긴다. 이 이상스런 조치가 혹시 무죄했던 나인들을 내쫒은 자신의 잘못을 회오하는 마음에서 관용을 베푼다는 뜻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위험하고 불행한 조치임에 틀림없었다.
두 보모상궁들은 성격이 정 반대였다.
하나는 왈패에다 능글능글하기가 구렁이 같았고, 다른 한 상궁은 앙큼하고 간교하였다. 이렇게 성격이 정반대인 두 상궁의 틈바구니 속에서 천진난만한 동궁의 어린시절을 송두리째 맡겼으니 장차 동궁의 앞날이 암담할 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동궁이 7,8세가 되었을 때 왈패상궁은 매일 양제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시키고 동궁을 독불장군으로 만들었다.
동궁이 나이 들수록 전쟁놀이 습관은 더욱 심해져서 동궁 저택 뒤 울 안에 진짜 칼과 창, 갑옷과 투구를 숨겨두고 칼로 집단 같은 것을 베는 연습을 하면서 “나는 언제까지 동궁으로 있어야하나?” “언제 용상에 올라 앉아보나?” “너는 칼로 치면 안 죽나?” 하면서 부왕에 대해 역적행위를 하였다고 나경언은 과장하여 영조에게 고발하게 된다.
한편 앙큼하고 간교한 상궁은 동궁에게 옛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 열심 하였다.
장희빈의 참혹한 죽음, 경종의 생식기와 오줌 싼 이야기, 영조왕의 생모 무수리와 장희빈의 질투와 싸움, 이런 이야기들은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동궁에게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사춘기가 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중적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영조는 이런 동궁의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매일 꾸중으로 일관했고 미움속에서 자라난 동궁은 가끔 우발적인 사고를 내며 궁중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빠지기도 하며, 때로는 궁중 액정들과 나인들에게 매질과 폭력을 행사하였다.
다음 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첫댓글 한주 빼먹어서 죄송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