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어 | <영화자전>의 번역 | 일본의 번역 | 대한민국의 번역 |
Description | 대개지론(大槪之論) | 개론(槪論) | 서술(敍述) |
Swell | 가증(加增) | 증가(增加) | 증가 |
Close | 폐밀폐(閉密閉) | 밀폐(密閉) | 밀폐 |
Quicklime | 석탄(石灰), 생탄(生灰) | 생석탄(生石灰) | 생석회(生石灰) |
Sponge | 해융(海絨), 수면(水綿) | 해면(海綿) | 해면 |
Inhabitant | 주자(住者), 거민(居民) | 주민(住民) | 주민 |
Cash | 현은(現銀) | 현금(現金) | 현금 |
Museum | 박물원(博物院) | 박물관(博物館) | 박물관 |
English Language | 영화(英話) | 영어(英語) | 영어
|
이와 함께 한자 번역어에 ~적(的), ~성(性), ~식(式), ~학(學) 등의 접미사나 부(不)~, 무(無)~ 등의 접두사가 붙은 어형(語形)을 만들어 중국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모리 아리노리(좌)와 니시무라 시게키(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서양의 단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메이로쿠샤(明六社)'였다. 메이로쿠샤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정치가, 외교관, 히토츠바시대학(一橋大學) 창립, 1847~1889)의 발의와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계몽사상가, 관료, 1828~1902)의 추진으로 탄생했다. 메이지 6년(1873)에 설립됐다는 이유로 메이로쿠샤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학회라고 할 수 있었다. 창립 초기의 메이로쿠샤 멤버는 10명이었다. 사장은 문부대신인 모리 아리노리, 멤버는 니시무라 시게키, 츠다 마미치(津田眞道, 관료, 계몽사상가, 1829~1903), 니시 아마네(西周, 사상가, 1829~1897),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교육자, 1832~1891),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 교육가, 관료, 1836~1916), 미츠쿠리 슈헤이(箕作秋坪, 교육가, 1826~1886),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교육자, 저술가, 게이오기쥬쿠(慶應義塾) 창립, 1835~1901), 스기 코지(杉享二, 계몽사상가, 관료, 1828~1917), 미츠쿠리 린쇼(箕作麟祥, 법학자, 교육가, 1846~1897),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 정치가, 근대 우편제도 도입, 1835~1919)였다.
<메이로쿠잣시> 제10호
메이로쿠샤는 1874년 2월부터 기관지 <메이로쿠잣시(明六雜誌)>를 발행했다. 처음에는 월 2회였으나 후에는 월 3회 발행되었으며 부수는 3000부를 넘었다. 당시 일본 최대의 신문이었던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의 부수가 8000부였던 것을 보면 <메이로쿠잣시>는 크게 환영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메이로쿠잣시>의 논조는 진보적인 자유주의 입장으로서 철학, 과학,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의 문제를 거론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이를 해석했으며 봉건사상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비판했다. 메이로쿠샤는 일본의 새로운 과학 문화 건설의 사상적 기지로서 일본 근대 과학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메이로쿠샤 내부에서는 회원 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창간한지 1년 반 만에 해산, 문부성이 만든 도쿄가쿠시카이인(東京學士會院)에 승계되고 후에 니폰가쿠시인(日本學士院)이 됐다. 비록 메이로쿠샤의 수명은 짧았으나 그 후 여기에 참가한 멤버들의 영향으로 서양의 개념을 토대로 새로운 한자어가 많이 탄생했다.
니시 아마네(좌), 츠보우치 쇼오(가운데)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우)
니시 아마네는 철학 단어를 창출하는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햐쿠이치신론(百一新論, 1874)>에서 'Philosophy'를 '철학(哲學)', <신리가쿠(心理學, 1876)>에서 'Metal Philosophy'를 '심리학(心理學)’, 현재 철학의 기본 용어인 'Phenomenon'을 '현상(現象)', 'Object'를 '객관(客觀)', 'Subject'를 '주관(主觀)', 'Induction'을 '귀납(歸納)', 'Logics'를 '논리학(論理學)', 'Ethicis'를 '윤리학(倫理學)', 'Fine Art'를 '미술(美術)'로 번역했다. 그 밖에도 '과학(科學)', '기술(技術)', '예술(藝術)', '이론(理論)', '긍정(肯定)', '실체(實體)', '산업(産業)', '소비(消費)', '의무(義務)', '문학(文學)', '비평(批評)', '조치(措置)', '관찰(觀察)', '소설(小說)', '전기(傳記)', '희곡(戱曲)', '각색(脚色)', '비유(比喩)' 등의 단어도 그가 만들었다. 츠보우치 쇼요(坪內逍遙, 소설가, 1859~1935)는 '대사(臺詞)', '애가(哀歌)', '문화(文化)', '작자(作者)', '비우(俳優)', '걸작(傑作)', '주인공(主人公)', '비판(批判)', '운명(運命)', '표준(標準)', '남성(男性)', '여성(女性)' 등을,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自由)', '철도(鐵道)', '연설(演說)', '토론(討論)', '가결(可決)', '부결(否決)', '판권(版權)' 등의 한자어를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어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학', '철학', '우편(郵便)', '야구(野球)' 등 한자를 조합해 만든 단어였고, 다른 하나는 '자유', '관념(觀念)', '복지(福祉)', '혁명(革命)', '선거(選擧)', '공화(共和)' 등 중국 고전에 나와 있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언어는 살아 있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말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용된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많은 서적과 함께 외국의 사상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 단어 하나하나가 기존 문화와의 충돌이었으며 문화의 이전이었다.
후타바테이 시메이(좌)와 나카무라 마사나오(우)
일본 근대문학의 개척자인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 1864~1909)는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의 소설 <아샤(Asya, 1858)>를 번역, <짝사랑(片愛, 1896)>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는 과정에서 'I love you'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가 '죽어도 좋다'라고 번역했다. 그 후 소설 <우키구모(浮雲, 1887)> 속에서는 'love'라는 단어를 영어 그대로 '라브'로 표기하고 나중에 가서야 '사랑(愛)'이라는 말로 바꿨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 1875)>에서 'Society'라는 단어를 그대로 '소사이어티'로 표기하고 뒤에 '인간교제(人間交際)'라고 번역했으나 어쩐지 어색해 마지막으로 '사회'라는 단어로 바꾸었다.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영국의 철학자인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저서인 <On Liberty(1859)>를 번역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그는 'Liberty'를 '자유', 'Individual'을 '개인', 'Nature'를 '자연'으로 번역하고 책의 제목을 <자유지리(自由之理)>라고 정했다.
아베 타이조(阿部泰蔵, 1849~1924)는 미국의 교육자인 프란시스 웨이랜드(Francis Wayland, 1796~1865)의 저서인 <the Elements of Moral Science(1835)> 속에서 처음으로 '품성(品性)'이라는 단어를 도입했다. '품성'이란 원래 중국어에도 일본어에도 없는 단어로서 후에 중요한 도덕적 의미를 갖는 말이 되기도 했다. 그는 'Character'란 단어를 '도덕의 정도', '도덕성의 의미'라는 뜻이 함축된 '품격'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이를 계기로 윤리도덕을 나타내는 '품위(品位)', '품행(品行)', '덕성(德性)' 등의 단어가 파생됐다. 품성이란 단어는 그 후 100년 이상 사용됐으며 심리학의 발전에 따라 단순한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람의 인격, 성격, 특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모리 오가이
현재 많이 사용되는 'Information'이라는 단어를 '정보'라고 번역한 사람은 모리 오가이(森鷗外, 소설가, 번역가, 1862~1922)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가 문필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1876년에 이미 '정보'라는 단어가 존재했었으며 1870년대 후반에는 '상보(狀報)'라는 단어와 병행해 사용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번역한 단어가 나타내는 뜻이나 개념이 처음부터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됐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국민들이 이들 단어를 충분히 소화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일본의 한자어는 메이지 시대 계몽기에 변용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양은 증가했다. 당시 대표적인 사전인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커티스 헵번(James Curtis Hepburn, 1815~1911)의 <영화어림집성(英話語林集成, 1867>은 20년 동안 증보하는 과정에서 1만 4846개의 단어로 증가했다.
제임스 커티스 헵번
중국(청)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이 충격적인 패배로 끝나자 중국은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양무파(洋務派) 지식인들은 서양의 문명을 도입, 소화한 일본을 배우기로 했다(자강운동, 양무운동). 이때부터 많은 일본 서적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 당시 양무파의 중심인물인 양계초(梁啓超, 1873~1895)는 이렇게 주장했다.
양계초
“
서양의 정치, 경제, 철학 등에 관한 서적을 읽으려면 적어도 5~6년이 필요하다. 깊이 연구하려면 다시 10년이 걸린다. 그러나 일본어의 경우 수개월이면 기초를 배울 수 있어 일본어 서적의 번역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
청일전쟁이 끝난 뒤 청나라 조정은 주일대사를 임명하면서 국비장학생 13명을 선발해 일본에 보냈다. 이에 대해 양무파 관료인 장지동(張之洞, 1837~1909)은 <권학편(勸學篇, 1898>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의 본질에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임)'의 필요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일본에 유학생을 보내야 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장지동
“
일본은 가깝기 때문에 여비를 절약할 수 있어 많은 유학생을 보낼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한자를 쓰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고 일본의 풍속은 중국과 비슷해 모방하기 쉬워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서양의 학문을 깊이 배우고 싶으면 그때 가서 다시 서양에 보내면 된다.
”
청나라 조정도 그의 의견에 따라 1903년에 <유학졸업생장려규정(留學卒業生獎勵規定)>을 제정하자 이로부터 일본 유학 붐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05년에는 8000명, 1906년에는 1만 3000명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한문으로 번역된 많은 서양의 단어가 중국으로 전해졌다.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일본 서적의 번역본은 서양 서적의 번역본을 크게 상회해 1902~1904년에 번역된 533권의 서적 가운데 60% 이상인 321권이 일본어 번역본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번역한 많은 새로운 단어, 예를 들면 '의식(意識)', '우익(右翼)', '운동(運動)', '계급(階級)', '공산주의(共産主義)', '공화(共和)', '좌익(左翼)', '실연(失戀)', '진화(進化)', '유물론(唯物論)' 등이 중국인 유학생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졌다. 서양의 단어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 일본인들의 최대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옌푸
수나라에서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일본으로 많은 한자어가 전해졌으나 20세기 초에는 새로운 한자어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류한 것이다. 현대 중국어 가운데 사회과학에 관련된 한자어의 60%는 일본인이 만든 한자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 중국으로 문화가 역류한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옌푸(嚴復, 1854~1921)은 일본인이 만든 한자어를 받아들이기보다 중국의 고전에서 영어 단어에 상응하는 한자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경제학(經濟學)'을 '계학(計學)'으로, '물리학(物理學)'을 '격치학(格致學)'으로, '사회학(社會學)'을 '군학(群學)'으로, '형이상학(形而上學)'을 '현학(玄學)'으로 고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인이 서양 문명을 도입하면서 만든 많은 한자어는 동아시아 한문 문화권인 우리나라, 타이완, 베트남 등의 공통 자산이 되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기본 단어로 사용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