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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nNewsNumb=200912100076 1/10 2009년 12월호 이완용. [추적] ‘親日 賣國奴’ 李完用의 글씨를 찾아서 李完用의 필적, 무덤에서 일어나다
서울 용산역에서 무궁화 열차를 타고 전남 순천으로 향했다. 가을 들녘은 이 세상의 색깔이 아닌 것 같았다. 강마다 구름이 피어 있고 협곡을 휘돌아 나오는 나무의 색깔은 중세 사원을 연 상케 했다. 하지만 마음은 갈수록 무거웠다. 乙巳五賊(을사오적)의 우두머리 李完用(이완용)을 만나러 가 는 길이었다.
천년 고찰인 전남 순천 松廣寺(송광사)에 그가 남 긴 ‘130×30㎝ 半切(반절)’ 글씨가 보관돼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기차는 역사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완용이란 이름과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설렘이 떠나지 않았다. 송광사의 옛 이름은 길상사. 기록에 따르면 지금부터 1200여 년 전인 신라말기 혜린 대사가 석장을 끌며 계림의 적소를 찾다 가 지금의 절터를 발견하고 조계산의 이름을 ‘송광’이라고 불렀 다고 한다.
16명의 고승대덕을 배출한 송광사답게 客(객)은 없 고 스님들만 가득했다. 경내에는 자체 박물관이 있을 만큼 문화재가 많았다. 성보박물관을 둘러보니 전시품 중에 이완용 의 글씨는 어디에도 없었다. 大院君(대원군)의 글씨는 있었지만 친일파의 이름을 찾을 순 없었다. 조계종 종정 효봉스님의 제자이자 송광사 회주인 法興(법흥·78) 큰스님을 뵙고 연유를 캐물었다.
김태완 ⊙ 당대 명필 불구, ‘못되고 고약한 書體’로 비난받아. “친일파라 해서 글씨까지 제한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아” ⊙“서예작품은 인격과 동일시. 글씨 속에서 인격을 읽는다. 명필 이완용의 글씨가 욕을 먹는 이유다.” ⊙
친일 매국노 논란 불구, 李完用 글씨 국민대 박물관 ‘한국 근현대 書畵 100인(2008)’에 포함시켜 ⊙ 송광사 박물관의 ‘지하 수장고’에 李完用의 半切 족자 보관 중 ⊙ 화랑가에서 李完用 작품 헐값에 은밀히 거래돼 23. 8. 22. 오후 3:53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nNewsNumb=200912100076 2/10
이완용의 낙관
이완용이 쓴 무후초려시(왼쪽·순천대박물관 제공)와 괴수득신뢰사오년(오른쪽). 그의 얼굴빛에 난감함이 비쳤다. 스님은 “친일파의 글씨가 송광사 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겠다”면서 말을 아꼈다. 대신 동행한 수도여고 前(전) 교장 김기회 선생과 필자에게 경내를 일일이 소개하며 천년 老松(노송)과 추녀 아래 그림자를 직접 밟게 이끄셨다. 법흥 스님은 “지난 1967년 입적한 효봉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 어 득도의 길을 닦는 이곳이 스님의 자랑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시 큰스님이셨다. 그는 송광사 성보박물관장인 古鏡(고경 ·64) 스님께 직접 청을 했다. 고경 스님 표정이 짧게 흔들렸지만 이 내 온화한 빛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내일 아침 박물관으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지하 수장고에 꼭꼭 숨겨둔 李完用의 글씨
이튿날 새벽 3시. 독경소리에 잠이 깼다. 경내에 울려 퍼 지는 목탁과 경을 읊는 ‘외침’에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오전 6시 ~ 아침식사 전까지 이어졌다. 소리는 산을 돌아가지도, 넘어가지도 않고 산 밑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송광사의 ‘서슬 퍼런’ 정신으로 남았다. 오전 9시 박물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학예사 한 분이 고경 스님의 지시로 지하창고에 보관 중인 이완용의 글씨를 가져왔다. 두루마리를 펼치니 그의 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言者不知知者默(언자부지지자묵·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 하고 아는 사람은 입을 다문다)/ 此語吾聞?老君(차어오문 어노군·이 말을 나는 노자님으로부터 들었는데)/ 若道老君 是知者(약도노군시지자·만약 노자께서 아는 분이라 한다면)/ 緣何自著五千文(연하자저오천문·무엇 때문에 손수 ‘도덕경’ 오천자를 지으셨을까)’ 중국 당나라 시인 白居易(백거이)가 쓴 <讀老子(독노자)> 라는 七言絶句(칠언절구)였다. <독노자>는 불교신자였던 백거이가 道家(도가)의 원조인 노자를 비꼰 詩(시)다.
노자가 <道德經(도덕경)>에서 ‘아는 이는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이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지자불언 언자부지)’면서 5000자나 되는 긴 글을 남긴 것에 백거이가 발끈한 것이다. 백거이는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言者不知)’면서도 노자가 그렇게 도덕경을 썼으니 모르는 게 틀림없다고 꼬집는다. 좌측 상단 干支(간지)를 보니 ‘大正甲子小春(대정갑자소춘)’이라 적혀 있었다. 갑자년이니까 1924 년 어느 봄날, 즉 이완용이 죽기 2년 전에 쓴 글씨다. 어떤 연유로 그의 족자가 송광사에 보관돼 있는 23. 8. 22. 오후 3:53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nNewsNumb=200912100076 3/10 것일까.
안타깝게도 법흥 스님이나 박물관장인 고경 스님도 연유를 모르셨다. 고경 스님은 “아마 이완용이 송광사에 들러 글을 썼거나 과거 주지 스님이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지만 글과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필치는 행서와 초서의 중간쯤으로 물 흐르듯 막힘이 없어 보였다. 외형적 꾸밈이나 필획의 교묘함 같은 기교미가 물씬 풍겼다. 한번에 봐도 잘 쓴 서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흥 스님은 “30년 전 이완용의 글을 딱 한 번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주위에서 친일파 것을 왜 내놓느냐며 시끄럽게 굴어 다시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간 지하 수장고에 보관해 두었지만 지금도 공개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이완용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다. 1917년 ‘불교옹호회’라는 신도 조직을 만들어 회장에 취임했으며 “불교를 널리 보급해 조선의 종교로 삼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을 정도였다. 1907년 6월 내각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중앙)의 모습이 보인다.
李完用과 書畵미술회
1920년대 이완용의 행적을 더듬어 보았다. 그의 생질이 쓴 이완용 일대기인 <一堂紀事>(일당기사· 일당은 그의 호)와 학술논문을 뒤지고 학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친일 賣國奴(매국노)’ 이완용의 또 다른 이면은 서예에 대한 나름의 안목과 재주로 당대 명필 소릴 들었던 인물이란 점이다. 이완용은 1912년 국내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교인 ‘書畵美術會(서화미술 회)’를 사실상 창립하고 주도했다. 昌德宮(창덕궁) 왕실이 후원한 서화미술회는 서화 학도 교육을 명목으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세워졌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서화미술회장을 맡아 서화를 즐기던 귀족과 서화가들을 끌어들였고 후원금을 냈다. 서화미술원의 교수진은 書科(서과)에 강진희 정대유, 畵科(화과)에 안중식·조석진·강필주· 김응원·이도영 등으로 알려진다. 모두 당대의 대표적인 書畵家(서화가)들이었다.
23. 8. 22. 오후 3:53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nNewsNumb=200912100076 4/10
이당 김은호 선생의 서화미술회 졸업증서. ‘서화미술회 백작 이완용’이란 글씨가 보인다.
이완용이 쓴 <독노자>를 보고 있는 법흥스님과 김기회 선생. 수업과정은 서과와 화과로 나뉘었고 초기에는 야학원까지 두었다고 한다. 직업화가 지망생보다는 취미와 교양으로 서화의 기법을 익히려는 명문 집안의 자제들이 많았다. 정식 졸업생으로는 1914년 에 오일영·이용우(1기), 1915년에 김은호(2기), 1916년에 박승무(3기), 1918년에 이상범·노수현·최우석(4기) 등 모두 17명이었다. 以堂(이당) 金殷鎬(김은호·1892~1979) 선생의 서화미술회 졸업증서(사본)를 어렵게 구했다. 이당 선생은 친일화가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白潤文(백윤문)·金基昶(김기창) 등 많은 제자를 길렀고 인물화는 물론 水墨淡彩(수묵담채)의 산수풍경, 文人畵 (문인화) 등 독특한 필력으로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졸업증서에는 1915년을 의미하는 ‘대정 4년’이란 연호가 보였다. 이당 선생은 그해 서화미술회 ‘화과’를 졸업하고 2년 뒤인 1917년 ‘서과’ 과정까지 끝 냈다. 서화미술회 졸업장이 두 개나 되는 셈이다. 졸업증서에 ‘서화미술회장 伯爵(백작) 이완용’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당대 정치적 거목이었던 이완용이 한국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 건립과 운영에 관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鮮展 서예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앙일보 1976년 8월 12일 字(자)를 찾아보았다. 이날 자 신문 5면에는 이당 선생의 서화미술회 회고담이 실려 있다. <서화미술회 사랑방은 매양 손님들로 문전성시였다. 당시의 세도가, 선비, 미술애호가들이 모여서 시회도 열고 바둑도 두었다. 小琳(소림)· 心田(심전) 선생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화평회도 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활약한 권동진·오세창, 서예가 안종원·나수연, 전의 김창유,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우판인쇄소를 경영하던 김석진·박기양씨 등은 매일 나오다시피 했다. 이완용도 심심찮게 사랑방에 나와서 놀다 갔다. 사랑방 손님들은 글줄이나 하는 미술애호가들이어 서 화제는 으레 시화 쪽으로 기울었다. 저녁때가 되면 심전 선생 댁에서 술상을 차려 내왔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서 취흥이 도도해도 주정이라고는 없었다. 술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따금 호탕한 웃음소리가 공부방에까지 들려 올 정도였다….>
이 글에 나오는 심전과 소림은 각각 안중식과 조석진 선생을 말한다. 두 사람 모두 당대 최고의 서 화가들이자 서화미술회 교수로 활약한 인물이다. 이완용은 1922년 3월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鮮展·선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일도 있다. 심사위원 중에는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박영효와 김돈희, 서병오 등 당대 명필들이 참여했다. ‘선전’에서 이당 선생은 그 유명한 ‘미인백무강’으로 동양화부 4등상(1등은 뽑지 않았다)을 탔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해 3년이나 옥고를 치른 오세창 선생은 書部(서부)에서 2등상을 받았다. 이완용은 사망하기 한해 전인 1925년 4회 ‘선전’ 때까지 매년 서예부문 ‘주임’으로 활동했으며 그즈음 ‘千字文(천자문)’을 출판한 일도 있다. 그의 한문과 서예에 대한 조예는 어디에서 얻어진 것일까.
이완용은 25세가 되던 1882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는 특별과거인 ‘증광별시’에 응시, 문과 병과 18등으로 합격했다. 이완용은 이미 6세 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떼고 7세 때 孝經(효경), 8세 때 小學(소학)을 마쳤다. 10세 때인 1867년 같은 牛峰(우봉) 이씨 가문이자 명문가로 꼽히던 李鎬俊(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후 이완용은 전형적인 사대부 교육을 받았는데 14세 때 대학과 논어를 마쳤고 맹자와 중용까지 통달했으며 당대 명필이었던 이용희에게 書法(서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李完用의 다른 필적 추적
이완용이 남긴 다른 흔적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순천대 박물관에 이완용의 글씨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순천대가 故(고) 康耘(강운) 崔昇孝(최승효·1917∼1999) 유족으로부터 기증 받은 총 6000점의 문화재 가운데 이완용이 쓴 ‘武侯草廬詩(무후초려시)’가 있다는 것이었다. 순천대 박물관에 전화를 걸었더니 사실을 확인해 주며 관련 이미지 파일을 보내주었다. 무후초려시는 유비가 제갈량을 三顧草廬(삼고초려)할 때 제갈량이 읊은 시다. 무후는 제갈량의 호다.
‘大夢誰先覺(대몽수선각·큰 꿈을 뉘 먼저 깨리요)/ 平生我自知(평생아자지·평소에 내 삶을 스스로 아노라)/ 草堂春睡足(초당춘수족·초가집에 봄 잠이 넉넉한데)/ 窓外日遲遲(창외일지지·창밖의 해는 더디게도 가는 구나)’
순천대 박물관은 지난해 강운 선생 기증 도록을 펴내며 ‘논란을 무릅쓰고’ 이완용이 쓴 <무후초려시> 곁에다, 조선말 학자로 손꼽히던 玄采(현채) 선생의 <칠언시>와 <8폭 병풍>을 함께 실었다. 현채 선생은 1910년에는 崔南善(최남선)·張志淵(장지연) 등과 함께 光文會(광문회) 편집원으로 활동하며 <越南亡國史(월남망국사)>, <東國史略(동국사략)> 등 고전서를 펴낸 우국지사다. 이 도록 간행에 참여한 한 관계자의 말이다. “기증품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있는 대로 다 실었어요. 기증한 사람의 뜻이 갸륵하고 정성스럽잖아 요. 친일파 작품이라 나쁘고 독립운동가의 작품은 대단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지요. 이완용이 어떤 놈이란 ‘警戒(경계)의 자료’로 전시하는 게 낫지 숨길 필요가 뭐 있나요. 이완용 곁에 현채 선생의 작품을 나란히 넣었습니다. 한쪽은 우국지사고 다른 한쪽은 매국노인데 그냥 독자들이 알아서 보시라고 넣었어요.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죠.”
국민대 박물관은 지난해 10월부터 한 달간 ‘한국 근·현대 서화 100인전’이란 특별기획전을 열면서 서화 100인 가운데 이완용을 포함시켰다. 종이에 먹으로 쓴 57×175.5㎝ 짜리 <著存齋(저존재·‘저서가 있는 서재’라는 뜻)>’라는 현판이었다. 이 현판은 지난해 4월 ‘에이옥션’을 통해 미술품 경매에 올랐던 것과 똑같았으며 대학 측이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별기획전을 마련한 국민대 박물관 관계자의 말이다. “한국 서예사 측면에서 서화미술협회를 이끄는 등 역할을 했고 물심양면 도움을 줬다는 배경도 작용했습니다. 또 당대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고, 많은 현판을 남기기도 했지요. 역사적 평가 때문에 이완용을 100인에 포함시키는 데 고민이 많았지만 어렵게 선정하게 됐습니다. 또 시대상황이 조금은 변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완용을 선정했다고 문제를 삼거나 시비를 걸어오는 이는 없었습니다.”
李完用 글씨 인사동에서 헐값에 거래돼
국민대 박물관이 펴낸 도록 말미에는 서예평론가 정충락 선생의 평론이 실렸다. 정충락 선생은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一堂(일당·이완용의 호)도 이 땅의 서예 발전에 나름대로는 끼친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화 미술회를 만들어 서화 인재를 다수 양성했고, 스스로도 당대 으뜸가는 能畵家(능화가)였다.> 이완용의 글씨를 찾기 위해 서울 인사동을 찾았다. A표구사를 찾아 이완용의 글씨를 구입하고 싶다 고 했다. 주인은 모처로 휴대전화를 걸어 통화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당대 명필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취급 안 하려고 해요. 사신다면 구해 드릴 수 있지요. 글 쓴 시기나 작품의 수준으로 보면, 아주 싸게 살 수도 있죠. 글 깨나 쓴다는 요즘 사람들의 작품도 그 이상은 받을 걸요? 간혹 이완용 글을 찾는 사람이 있지만 수집가들이나 찾지, 일반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알면 외면합니다. 누가 이완용의 것을 삽니까.” B화방에 들렀다. 이완용이 썼다는 簡札(간찰·間紙에 쓴 편지) 7편이 두루마리에 붙여져 책상 한편 에 놓여 있었다. 화방 주인이 두루마리를 펼치니 간찰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졌다. 족히 4m는 넘어 보 였다. 100년 전 것치고는 보관 상태가 양호했다. 주인은 “100만원에 내놓았지만, 에누리가 가능하다”고 귀띔하며 말을 덧붙였다. “물량이 거의 없어요. 유통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기가 없으니… 개중에 이완용의 서체가 좋아 사는 분이 간혹 있어요. 하지만 팔려는 사람도, 사려는 사람도 없어서 그런지 보존상태가 좋습니다. 당대 비슷한 시기에 썼던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해요.” 이완용의 글씨가 홀대받고 있지만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작품의 보존상태가 좋다는 말이 역설적 으로 들렸다. 인사동에서도 이완용은 여전히 그 자취를 남기며 세월을 이겨내고 있었다.
때마침 서화 수집가가 화방을 들렀다. 그에게 이완용 글씨를 매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물어보 았다. ―이완용의 다른 글씨를 구할 수 있을까요. “사람 됨됨이를 봐야지, 누가 사겠어.” ―그래도 나중에라도 어떤 가치가 있을지 모르잖아요. “(잠시 머뭇거린 뒤) 솔직히 글씨는 기가 막히지. 하지만 쉬쉬하면서 거래가 이뤄져. 어떤 사람은 이완용의 이름이 적힌 낙관만 싹 지워 버리고 글씨만 내거는 이도 있지. 필체가 워낙 좋잖아.”
이완용의 養父(양부) 이호준의 간찰(왼쪽)과 庶兄(서형)인 이윤용의 간찰.
서울 인사동에 이완용 일가의 글씨가 거래되고 있다. 養父 이호준과 庶兄 李允用의 간찰도 발견 C갤러리에 들렀다. 이완용의 130×30㎝ 반절짜리 글씨가 둘둘 말려 보관돼 있었다. 주인은 “글씨가 너무 좋아 30만원 주고 산 것”이라고 말했다. 글씨를 보니 백거이가 쓴 <愧收得身來巳午年(괴수득신 래사오년)>이란 칠언절구였다. 역시 달필이었다. ‘世事平分衆所知(세사평분중소지·세상사 공평함은 누구나 아는데)/ 何嘗苦樂不相隨(하상고락부 상수·어찌 고락이 서로 따르지를 않겠냐만)/ 唯餘耽酒狂歌客(유여탐주광가객·오직 술을 즐기고 미 친 노래를 부르는 객은)/ 只有樂時無苦時(지유락시무고시·다만 즐거울 땐 있어도 괴로울 땐 없다네)’
그 갤러리에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이완용의 글씨뿐만 아니라 그의 養父(양부)인 이호준과 庶兄(서형)인 李允用(이윤용)의 간찰이 보관돼 있었다. 이호준은 이조판서를 지낸 민응현의 사위였기 에 명성황후와 가깝고 대원군과도 친척지간이었다. 또 이호준의 庶子(서자)이자 이완용의 서형인 이윤용은 나중 대원군의 사위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이완용의 몰락과 함께 이들 집안 역시 매국노란 손가락질 속에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이들이 썼던 간찰이 인사동 시장에서 거래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갤러리 주인의 말이다. “이완용 글씨를 사는 사람 중에는 독립운동가나 친일파를 연구하려는 목적을 가진 분도 있어요.
독립문 편액도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 이완용은 미우나 고우나 당대 예술계를 이끌던 분 아닌가요? 예술적 재능이 있는 분이었고 단순히 필기 수준으로 쓴 글이 아니라 예술적 수준을 갖췄다고 볼 수 있어요. 이완용의 글이 여러 곳에 산재돼 있는데 몰라서 보존되는 경우는 몰라도, 알게 되면 누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완용은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만큼 적지 않은 반절짜리 족자와 비문, 각종 간찰 등을 남겼다. 그러나 ‘매국노’란 이름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묻히게 됐다. 그의 낙관이나 이름이 적힌 글씨는 어느 것이나 이완용과 동일한 대상으로 취급받았다. 흔히 사람들은 글씨 속에서 그 사람의 품성과 인격을 읽으려고 애쓴다. 이완용의 글씨 역시 매국노 의 품성을 닮은 ‘못되고 고약한’ 글일 수밖에 없다. “명필임은 분명하나 기교에 가깝고 격이 떨어진 다”고 폄훼되기 일쑤였다. 서예 전문가들 역시 아무도 이완용을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취재 중 만난 한 교수는 “이완용 글씨를 연구하면 혼이 난다”고 했다.
전국 곳곳의 현판 글씨 쓰기도
이완용의 글씨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자 감춰 버릴 화근이다. 독립문 편액이나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현판을 두고 이완용이 쓴 것이란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여론이 들끓었다. 어느 것도 확인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로 굳어지면 언제 현판이 내려질지 모른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자 <이완용 평전(도서출판 중심 刊)>의 저자인 윤덕한씨는 “독립문 편액은 이완용이 쓴 것이 100%확실하다”며 “나라의 자주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건축물의 현판을 후세에 매국노로 지탄받는 인물이 썼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이며 아이러니”라고 밝혔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완용은 초대 駐美(주미) 공사관의 외교관으로 워싱턴에서 주재하며 국 제정세의 흐름을 읽은 인물이다. 귀국 후에는 초대 독립협회 위원장과 부회장·회장을 지냈고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창간에 기여했다. 서재필 박사의 자서전에서 독립협회의 창설상황이 이렇게 기술 돼 있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지 7~8개월 후 우리 집에서 ‘독립협회’라는 것을 창설했다. 처음 이 회에 참가한 분들이 이상재, 이완용, 윤치호, 이채연이었고 고문은 나, 회장은 이완용, 서기는 이상재로 이들을 세상에서 정동파라 불렀다.> 이완용은 1896년 덕수궁의 肅穆門(숙목문)의 현판 글씨를 쓸 서사관으로 임명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1904년에는 中和殿(중화전) 上樑文(상량문) 서사관으로 실록에 이름이 올라 있다. 1899년에는 고종이 全州完山碑文(전주완산비문) 서사관으로 그를 직접 지명했다고 한다. 빼어난 글씨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 고종의 國葬(국장) 때는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과 덕행을 칭송하는 시책문도 그가 썼다. 전국의 명승 고적지를 유람하며 글씨를 남겼고, 국보급에 속하는 유명 사찰의 대웅전과 천왕문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필자가 확인한 송광사의 반절짜리 족자도 이완용이 명승지를 방문하며 쓴 것으로 추정된다.
윤덕한씨의 말이다. “독립문 편액이 이완용의 글임을 확신해서 여러 언론사 기자들에게 ‘전문가를 불러 확인해 보고 기사를 쓰라’고 권유했지만 다들 꺼렸어요. 파장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씨를 두고 공식기관에서 다루긴 어려울 것이고, 게다가 긍정적인 측면을 꺼내서도 안되지만 꺼내기도 어려울 겁니다. 불교신자였던 이완용이 여러 사찰에 들러 글을 남겼다는 기록도 있어요. 또 ‘전남 화순군 동복’에 명승지가 있어 그곳에 들렀다가 인근 송광사를 찾았을 가능성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서예는 人格과 등가관계”
서예작품은 다른 예술과 달리 또 하나의 가치평가 기준이 적용된다. 작품과 인격을 동일시하는 기준이다. 그러나 현대 예술에서 작품 자체를 작가의 사람됨과 역사적 과오, 성취 등을 등가선상에 놓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작품과 인격이 멀어져 온 과정을 현대 예술이 걸어온 길처럼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서예만은 다르다. 작품을 인격과 등가관계로 설정한다. 글씨 속에서 인격을 읽으려 ‘애쓰고’ 의미를 부여한다.
역사평론가 李德一(이덕일)씨의 말이다.
“이완용은 당대 명필로 이름이 났었고 국가에서 현판 같은 글을 많이 쓴 것으로 기록돼 있지요. 독립협회 초대 회장으로 독립문 현판을 썼다는 주장이 있는데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 없어요. 나라가 망한 뒤 집중적으로 미움의 대상이 된 뒤로 이완용과 관련된 어떤 것도 죄스러운 것이 됐지요. 또 필체만으로 그의 글씨를 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書藝(서예), 書道(서도)라고 하듯 글씨는 그 사람의 사상과 맞물려 들여다봐야 합니다.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두고도 귀양살이 전과 후를 두고 달라지듯이 조선의 명필 계보를 더듬으면, 그 사람의 인생과 철학이 녹아있기 마련인데, 이완용이 글씨를 좀 썼다고 해서 평가를 달리하기는 어려운 것이죠.” 미술사가인 黃正洙(황정수)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림은 잘 그리는 것만으로도 특징이 될 수 있지만 글씨는 다릅니다. 글 재주만이 아니라 수없이 책을 읽고 삶이 배어 들어가야만 그 사람의 정신이 글씨에 담깁니다. 글씨는 그 사람의 정신으로 봐야 해요. 일제강점기 최고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惺堂 金敦熙(성당 김돈희) 선생을 꼽습니다. 그는 당대 서화계를 주름잡은 인물로,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제자를 길렀지요. 그 제자들이 이후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됐습니다. 하지만 한일합방 조약문을 썼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예술의전당’에서 한 번도 단독 전시회를 갖지 못했어요. 그러니 글씨와 삶을 떼어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성당 김돈희(1871~1936)는 이완용 뒤를 이어 서화미술회 회장을 지냈고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 됐을 때 서부의 심사를 맡았었다. 중인 계급이어서 서울 북촌에 사는 士族(사족)들은 그를 높이 평가 하지 않았지만 “필력만은 당대 제일”이란 소리를 듣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書法(서법) 연구기관(尙書會·상서회)을 설치해 후진 지도에 힘썼지만, 친일인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의 강권에 못 이겨 한일합방문을 썼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글씨까지 제한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李完雨(이완우) 교수는 “이완용이 글씨를 잘 쓰긴 했는데 당대 서예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완용의 서체와 비슷하다는 것이 지금은 수치라고 생각하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분의 서예도 이완용과 비슷하거나 거의 같을 정도예요. 이완용 글씨가 그만의 독특한 것이라 할 수도 없고 당대 그런 유의 글씨를 쓴 사람이 많았다고 볼 수 있지요. 조심스런 얘기지만, 글씨를 보면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는 고전적인 사고 때문에 이완용은 나쁜 놈이니까 글씨도 나쁘다고 단정합니다. 정치적 상황에 맞춰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나라를 판 죄목은 무섭고 무겁게 다뤄야 하지만, 어렸을 때 배워 몸에 익은 글씨까지 제한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 조상들은 당파싸움할 때도 예술로는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사에 회포를 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시를 쓰고 글씨를 주고받으며 그림을 감상하는 것 아니었나요? 이완용 이란 이유로 모든 흔적을 묻어버리고 얘기조차 안 하며 쉬쉬하고 뭉개버려야 하는지 고민스럽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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