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견과 두균, 두 사람이 묵묵히 운공조식을 하자
황보유는 조용히 방 밖으로 물러나왔다.
청상이 밖에 와 있었다.
"나는 곧 가 봐야겠소. 도움에 감사드리오."
청상은 어리둥절했다.
마치 무엇에라도 쫓기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가시면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그녀는 말끝도 채 맺지 못했다.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서러움이 더 짙은 것만 같은 그녀의 떨리는 음성이었다.
황보유는 그녀가 자기를 사모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거짓말로 얼렁뚱땅 넘긴다는 게 어쩐지 싫었다.
"인생이란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나니..
아가씨와 내가 또 언제 만날지는 알 수 없는 일..
작별 인사를 드린다는 게 너무 시간을 지체한 것 같구려."
"공자께서 이 보잘것 없는 계집애에게 베풀어 주신 따스한 정, 영원히 잊지 않겠어요.
부디 어디를 가시든지 몸 성하기를 바라겠어요.."
황보유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나 뜰로 나갔다.
몸을 솟구쳐 뜰을 벗어나니 숨어 있던 여동청과 형용이
어느 새 그를 발견하고 뛰어나왔다.
세 사람은 지체없이 도부(屠府)를 벗어났다.
길을 가는 데도 가로막는 자 없어 그들은 큰길을 택했다.
형용이 급히 황보유 곁으로 바싹 붙어 걸으며 소곤거렸다.
"불초는 배가 고파 견딜 수 없구려. 우선 뭐 먹을 것 좀.."
"하하, 여형도 마찬가지일 거요.
수고스럽지만 길을 좀 안내하시오. 가서 뭘 좀 먹도록 합시다."
잠시 후 그들은 어느 큰 음식점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주린 배를 채우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보유는 일부러 철기대장 포견을 구출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는 얘기 끝에 이르러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두 분은 이 길로 댁에 돌아가시는 게 좋겠소."
이렇게 못을 박았다.
반패왕 형용은 가업(家業)이 있는 몸이라 그렇게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혈혈단신인 여동청은 경우가 달랐다.
막상 헤어진다고 해도 갈 곳도 없는 몸이니 같이 행동하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식사를 마치고 황보유와 여동청은 형용과 헤어져서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망도(望都)에서 묵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여동청이 한 마디 했다.
"우리의 걸음은 결코 빠르지 않소.
아마 내일 모레 날이 미처 새기 전에 철기대장 포견에게 추격을 받게 될 것이오."
"여형의 경험으로 한 말일 테니 틀림이 없을 것이라 보오.
물론 그들이 뒤쫓아 와 귀찮게 구는 것이 싫기는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피곤해서 안 되겠소.
우선 하룻밤 호식하고 나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망도란 곳은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다.
어둠이 찾아들자 온마을이 고요에 휩싸여 버렸다.
황보유는 침상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낮 동안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서였다.
본문의 좌공심법(坐功心法)을 써서 전신의 피를 두루 운행시키기도 했다.
대략 삼경쯤 되었을 때였다.
망아(忘我)의 경지에 몰입한 그는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모았던 진기를 풀고 주의를 기울이자 방 밖에서 한 쌍의 눈동자가
암암리에 자기의 거동을 훔쳐 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이미 천시지청(天視地聽)이란 신묘한 술법을 습득한 터였다.
천 리 밖의 어떤 상황도 능히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이목(耳目)이 민감해진 그였다.
더군다나 운공을 할 무렵의 그는 영태혈(靈台穴)이 아주 맑고 상쾌했다.
몇 리 안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조금 전 뭔가 느낀 후,
잠시 사이를 두고 누군가가 자기를 훔쳐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렇듯 자기에게 아무런 느낌도 못 갖게 하면서 행동을 한 상대방의 공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 듯하면서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자기보다 공력이 더 높은 것만은 분명했다.
한 쌍의 눈동자는 줄곧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보유는 감각으로 판단할 때,
상대방은 자기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수차례나 눈을 번쩍 떠 버릴까 하다가 꾹 눌러 참았다.
만약 상대가 귀의 향공도이거나 혹은 소림 삼로 중의 한 명인 무의대사라면
곧장 손을 써서 자신을 헤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아니라고 단정을 내린다면 의심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누가 이처럼 공력이 뛰어나며 또 자기와 반드시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 궁리에 잠겨 있을 때 언뜻 이십 장 안으로 한 사람이 침입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르기가 마치 몰아대는 질풍과도 같았다.
그 자의 출현 역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신법의 빠르기는 기겁을 할 만큼 놀라운 것이어서 자칫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거리를 완전히 좁힐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황보유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민한 감각은 마치 두 사람의 거동을 보고 있기라도 하듯 알 수 있었다.
먼저 왔던 사람이 별안간 그의 감각권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뒤에 나타난 사람을 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먼저 온 사람의 공력이 더 강할 것 같았다.
이때 뒤에 나타난 사람이 어느 결에 방문 바깥에 이르러 방 안을 훔쳐 보기 시작했다.
황보유는 아주 자리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그의 동태를 감지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돌연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두 쌍의 눈동자가 자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에게서 또 한 사람이 갈라져 나온 셈이었다.
결국 자기가 누워 있는 방을 둘러싸고
세 사람이 자기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게 아닌가.
황보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몸을 벌떡 일으켜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방문 밖의 두 쌍의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네 개의 별빛 같은 눈동자가 번쩍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황보유는 정신을 집중하여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싹! 싹!
웃자락이 바람을 스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종내 가서는 아주 끊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보니 그들의 무공은 먼저 왔던 자보다 낮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 주의를 게을리했던 탓으로
자기가 무공이 약할 거라는 추측을 하도록 했던 모양이었다.
처음 출현한 사람의 종적이 묘연해졌다.
나중의 두 사람에게 신경을 쏟다 보니
그만 감각권 내에서 사라져 버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황보유는 잠시 이들 세 사람의 내력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우선 한 패거리는 아닐 거라는 짐작이 갔다.
그러나 무공은 너나없이 고강한 자들이었다.
그렇듯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무림에 출현하기만 하면
무림은 크게 혼란을 일으킬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밤 그러한 사람들이 셋이나 한꺼번에 출현을 했다.
그렇다고 그들 세 사람을 일황삼공 중의 삼공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듣기에 삼공은 항시 행동을 같이 하지 따로 떨어져 개인 행동을 취하는 법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첫 번째 사나이가 두 번째 사나이들로 인해 몸을 숨겨 버리는 것으로 보아
삼공(三公)이 아니라는 점은 거의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일단 생각을 했다 하면 기어코 그 어떤 윤곽이라도 잡고야 마는 끈질긴 성미였다.
이 무렵 이십여 장 바깥의 가도에서는
두 개의 사람 형체가 남쪽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두 형체의 뒤로 또 다른 형체 하나가 멀찌감치 간격을 두고 추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략 일 리 정도 갔을 때 뒤쪽의 검은 형체가
돌연 몸을 되돌려 왔던 길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검은 형체는 황보유가 묶고 있는 방 밖에 이르렀다.
방 안에 불빛이 환했다.
검은 형체는 문 틈에다 눈길을 두고 안의 동정을 살폈다.
황보유는 한 손에 촛불을, 또 한 손에는 베개를 들고 있었다.
촛불 아래서 그의 준미(俊美)한 얼굴이 빠짐없이 드러났다.
심지어는 양 눈썹 속에 있는 두 개의 사마귀까지도 확연히 알아 볼 수 있었다.
문 밖의 흑의인(黑衣人)은 아무래도 그의 얼굴을 처음 본 듯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황보유는 단추를 잠그지 않은 잠옷을 걸치고서
한쪽에 있는 탁자 곁의 높다란 의자 옆으로 걸어갔다.
순간, 촛불이 꺼져 버렸다.
방 안이 온통 어둠에 싸였다.
다음 순간, 의자 뒤에 서 있는 황보유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때 흑의인은 무엇을 느꼈는지 벽에 기댄 채
번개같이 위로 날아올라 단번에 지붕 처마를 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마당에서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은 지붕 위에서 서로 삼 장의 간격을 두고 마주 내려섰다.
흑의인과 마주 서 있는 사람이 먼저 웃었다.
아주 부드럽고 낭랑한 웃음소리였다.
"귀하는 이 황보유에게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겠지요?
하하하, 이번 초식은 금선탈각(金蟬脫殼)과 만천과해(瞞天過海)
두 가지를 섞어서 만든 것이오.
내 생각에 귀하는 눈빛이 번개같이 흑야(黑夜)에도 능히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 같소.
그러나 촛불이 갑자기 꺼질 때,
잠옷을 벗어 베개에다 세워 놓고 밖으로 뛰어나온 나를 보지는 못했소.
귀하가 비로소 그 의자 위에 있는 것이 베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바로 전의 일이었소."
그는 추호도 숨김없이 자기가 썼던 계략을 낱낱이 고했다.
그리고 나서는 흑의인을 꿰뚫어 보았다.
보통 사람보다 약간 작은 키에 온몸을 널따란 흑포(黑袍)로 두르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체격이 강장(强壯)하고 섬세해 보였다.
머리는 두 눈만 말똥말똥 남겨 놓고 완전히 흑두건으로 가려 버렸다.
황보유는 여전히 상대방이 입을 열지 않자,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색다른 기질을 발견했다.
"가시오.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르지 않겠소."
비로소 흑의인이 입을 열어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는 당신이 세속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느껴지오.
당신의 심중은 나의 성명이나 내력 따위를 알고 싶어하지 않소.
따라서 내가 여러 소리를 늘어놓으면 당신은 분명히 화를 낼 것이오."
흑의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보유를 한동안 눈여겨 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황보유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황보유는 오랫동안 넋없이 그 흑의인이 사라져 간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살며시 지붕에서 내려섰다.
의인의 한 마디가 영원히 머리에서 지워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날이 밝았다.
하룻밤 사이 다른 어느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여동청과 같이 노정(路程)에 접어든 그는 간밤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한 사람에게 국한된 일이라 여겨졌다.
공연히 그에게 알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레째가 되어 그들은 기경을 벗어났다.
그 동안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여동청은 오랫동안 강호를 편력하여 무림에 대해서는 노련한 인물이었다.
한 지방을 경과할 때마다 그는 강호상의 일,
호협(豪俠)들의 본받을 만한 점 등을 요령있게 들려 주었다.
따라서 황보유는 날이 갈수록 여동청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가 제아무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다 해도 강남고객 여동청이 없었더라면
알 수 있는 것은 겨우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는 날이 갈수록 신의가 두터워져
마치 한 사람의 형체에 하나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여드레째가 되는 날은 이미 오경(吳境)의 탕산 땅에 접어들었다.
중심가로 들어서니 행인들의 발걸음이 상당히 잦고 번화한 곳 같았다.
마침 그들이 도착한 시간은 황혼 무렵이라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그 지방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여동청이 앞장서서 안내를 했다.
뒤를 따르던 황보유는 시가지 구경에 정신이 팔려
그와의 간격이 칠팔 보나 떨어지게 되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여동청을 찾고 있던 중
갑자기 옆구리로 몰아치는 한풍(寒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풍이 점점 더 몸에 접근해 오지 않는가.
황보유는 크게 당황했다.
일이 진행되어 가는 사태로 봐서는 몸을 날려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길 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결과가 되어
일이 적지 않게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그는 최후의 방법으로 호신강기를 운용하여 막기로 했다.
혈기가 끓어오르니 얼굴과 손발이 모두 담홍색으로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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