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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수정한림류별운 / 박상
酬鄭翰林留別韻 朴祥
江城積雨捲層霄(강성적우권층소) 강마을에 장맛비가 하늘에서 걷히니
秋氣泠泠老火消(추기령령로화소) 가을 기운 서늘하여 뜨거운 해 사라졌네
黃膩野秔迷眼發(황니야갱미안발) 누렇게 기름진 들판의 메벼는 눈에 어지럽게 팼고
綠疏溪柳對樽高(녹소계류대준고) 푸릇푸릇 성근 개울의 버들은 술잔을 마주하고 높네
風隨舞袖如相約(풍수무수여상약) 약속이나 한 듯 바람이 춤추는 옷자락을 따르고
山入歌筵不待招(산입가연부대초) 부르지도 않았는데 산이 노래하는 자리에 드네
慙恨至今持斗米(참한지금지두미) 부끄럽고 한스러워라, 지금까지 적은 녹봉 받느라
故園蕪絶負逍遙(고원무절부소요) 고향의 언덕이 묵어도 거닐지 못했음이
〈감상〉
이 시는 정한림이 이별하면서 준 시에 화답한 시로, 인근 고을의 수령이던 정한림이 중앙 관직으로 영전(榮轉)되어 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지은 것이다.
장맛비가 강마을에 내리다 걷히니, 하늘이 높아 성큼 가을이 다가온 듯하다. 서늘한 가을비 덕분에 늦더위도 사라졌다. 누렇게 익은 들판의 곡식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이고, 봄에 무성하던 버들도 가을이 되니 잎이 듬성듬성해져서 높은 곳에서 가지가 휑하다. 영전(榮轉)하는 정한림을 축하하느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바람은 춤추는 옷자락을 따라 날리고, 부르지도 않은 산 그림자는 잔치 자리에까지 내려와 잔치 자리가 파할 때임을 알려 주고 있다. 고향의 언덕을 찾지 못해 묵어 가도 도잠(陶潛)처럼 과감하게 오두미(五斗米)를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고도 한스럽다.
박상은 바쁜 벼슬살이 가운데에도 밤이면 반드시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외우고, 율시(律詩) 1수를 지은 후에라야 잠자리에 들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박상(朴祥)을 포함한 조선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시(詩)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이행(李荇)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충암(冲庵) 김정(金淨)·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란히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조선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정욱(黃廷彧)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달(李達)이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필(權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我朝詩(아조시) 至中廟朝大成(지중묘조대성) 以容齋相倡始(이용재상창시) 而朴訥齋祥(이박눌재상), 申企齋光漢金冲庵淨鄭湖陰士龍(신기재광한김충암정정호음사룡) 竝生一世(병생일세) 炳烺鏗鏘(병랑갱장) 足稱千古也(족칭천고야) 我朝詩(아조시) 至宣廟朝大備(지선묘조대비) 盧蘇齋得杜法(노소재득두법) 而黃芝川代興(이호아지천대흥) 崔白法唐而李益之闡其流(최백법당이이익지천기류) 吾亡兄歌行似太白(오망형가행사태백) 姊氏詩恰入盛唐(자씨시흡입성당) 其後權汝章晩出(기후권여장만출) 力追前賢(역추전현) 可與容齋相肩隨之(가여용재상견수지) 猗歟盛哉(의여성재)).”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박상의 시에 대해,
“허균이 말하기를, ‘젊은 시절에 지천 황정욱을 뵈었다. 그분은 매우 오만한 지론을 가져 고금의 문예를 말씀하실 때 인정하는 작가가 드물었다. 그는 용재 이행은 너무 기름지고, 이달은 모의를 했고, 호음 정사룡과 소재 노수신이 겨우 작가의 법도에 합치된다고 했는데, 오직 눌재만을 최고로 여겨 자기가 마칠 수 없다고 했다.’라 하였다
(許筠嘗云(허균상운) 少見芝川(소견지천) 其持論甚倨(기지론심거) 談古今文藝少所許與(담고금문예소소허여) 如容齋而目爲太腴(여용재이목위태유) 李達而指爲摸擬(이달이지위모의) 湖陰蘇齋稍合作家(호음소재초합작가) 惟最訥齋以爲不可及云(유최눌재이위불가급운)).”
라고 말하고 있다.
〈주석〉
〖捲〗 걷다 권, 〖霄〗 하늘 소, 〖老火(로화)〗 뜨거운 해. 〖膩〗 기름지다 니, 〖秔〗 메벼 갱, 〖樽〗 술통 준, 〖袖〗 소매 수, 〖筵〗 대자리 연, 〖斗米(두미)〗 두미(斗米)는 오두미(五斗米)로, 매우 적은 녹봉을 일컬음.
〖蕪絶(무절)〗 거칠어서 끊어짐. 〖負〗 저버리다 부
각주
1 박상(朴祥, 1474, 성종 5~1530, 중종 25): 본관은 충주. 자는 세창(世昌), 호는 눌재(訥齋). 높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시를 잘 써서 조카 박순(朴淳) 그리고 이행(李荇)과 함께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박은(朴誾)과 더불어 후대에 높이 평가되었으며, 16세기 호남시단을 이끈 시인이다.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로 불린다.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등을 지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후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어 종친(宗親)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다시 종묘서령(宗廟署令), 임피현감(臨陂縣監) 등을 지냈고, 3년 만기가 되자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며 지냈다. 1515년(중종 6)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 주장과 박원종(朴元宗) 등 3명의 훈신(勳臣)이 국모(國母)를 내쫓은 죄를 묻기를 청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순천부사 등을 지냈으나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 그만둔 뒤 상주와 충주목사를 지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했으나 병으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차영남루운 / 박상
次嶺南樓韻 朴祥
客到嶺梅初發天(객도령매초발천) 객이 이르니 고개에 매화가 막 피었는데
嘉平之後上元前(가평지후상원전) 12월은 지나고 상원날 되기 전이라네
春生畫鼓雷千面(춘생화고뢰천면) 봄은 우레 같은 천 가지 북소리에 생겨나고
詩會靑山日半邊(시회청산일반변) 시흥(詩興)은 푸른 산으로 지는 해에 모여드네
漁艇載分籠渚月(어정재분롱저월) 고기 잡는 배는 강을 두른 달빛을 나누어 싣는데
官羊踏破羃坡煙(관양답파멱파연) 관청의 염소는 언덕을 덮은 아지랑이를 밟아 부수네
形羸心壯凌淸曠(형리심장릉청광) 몸은 쇠해도 마음은 씩씩하여 맑은 하늘로 올라서
驅使乾坤入醉筵(구사건곤입취연) 천지를 몰아 취한 이 자리에 들게 하노라
〈감상〉
이 시는 경남 밀양에 있는 영남루에 올라 차운한 시로, 시간의 경과가 잘 묘사되어 있다.
밀양 고개로 들어서자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때는 음력 12월이 지나고 1월 15일 전이다. 영남루에 올라 봄을 맞아 잔치가 벌어졌는데, 진동하는 풍악소리와 기생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봄이 오고 있다. 대낮에 벌인 술자리는 어느덧 푸른 산으로 해가 지고 있으니, 저녁이 되었다. 밀양을 돌아 영남루로 흐르는 강에 달이 떴는데 저 멀리 고기잡이배에도 달이 떴다. 고개를 돌려 가까운 산을 보았더니, 낮에 풀어 놓았던 관청의 염소들이 안개를 밟고 부수는 듯이 안개를 뚫고 내려오고 있다. 비록 몸은 쇠했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서 마음이 맑고 광활한 저 하늘로 올라가서 자신의 팔에 온 천지를 담아 술자리로 내려온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서 박상(朴祥)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시는, 근고(近古)에는 이러한 품격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명가(名家) 속에 섞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석주(石洲) 권필(權韠), 눌재(訥齋) 박상(朴祥),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등 여러 문집만은 못하다. 동악(東岳)의 시(詩)는 언뜻 보면 맛이 없지만 다시 보면 좋다. 비유하자면 샘물이 졸졸 솟아 천 리에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스스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읍취헌(挹翠軒)은 정신과 의경(意境)이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음운(音韻)이 청아한 격조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산수 간에 노니는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에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배웠다고 하나 대개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아 당(唐)·송(宋)의 격조를 논할 것 없이 시가(詩家)의 절품(絶品)이라 할 만하다. 눌재(訥齋)는 고상하고 담백하여 스스로 무한한 취미(趣味)가 있으니, 비록 읍취헌과 겨룰 만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석주(石洲)는 비록 웅장함은 부족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있는데 가끔은 깨우침을 주는 것이 있다. 성당(盛唐)의 수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唐)의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면 너무 폄하한 것이다. 소재(蘇齋)는 19년간을 귀양살이하면서 노장(老莊)의 서적을 많이 읽어서 상당히 깨우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음운이 뛰어나게 웅장하다. 옛사람이 이른바 ‘황야(荒野)가 천 리에 펼쳐진 형세’라고 한 것이 참으로 잘 평가한 말이다.
그러나 그 대체는 염락(濂洛)의 기미(氣味)를 잃지 않았으니, 평생 한 학문의 힘은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三淵之詩(삼연지시) 不但近古無此格(불단근고무차격) 雖廁中國名家(수측중국명가) 想或無媿(상혹무괴) 而猶遜於東岳挹翠石洲訥齋蘇齋諸集(이유손어동악읍취석주눌재소재제집) 東岳詩(동악시) 驟看無味(취간무미) 再看却好(재간각호) 譬如源泉渾渾(비여원천혼혼) 一瀉千里(일사천리) 橫看竪看(횡간수간) 自能成章(자능성장) 挹翠神與境造(읍취신여경조) 格以韻淸(격이운청) 令人有登臨送歸之意(영인유등림송귀지의) 世以爲學蘇黃(세이위학소황) 而蓋多自得(이개다자득) 毋論唐調宋格(무론당조송격) 可謂詩家絶品(가위시가절품) 訥齋淸高淡泊(재청고담박) 自有無限趣味(자유무한취미) 雖謂之頡頏挹翠(수위지힐항읍취) 未爲過也(미위과야) 石洲雖欠雄渾(석주수흠웅혼) 一味裊娜(일미뇨나) 往往有警絶處(왕왕유경절처) 謂之盛唐則未也(위지성당칙미야) 而謂之非唐則太貶也(이위지비당칙태폄야) 蘇齋居謫十九年(소재거적십구년) 多讀老莊書(다독로장서) 頗有頓悟處(파유돈오처) 故其韻遠(고기운원) 其格雄(기격웅) 古人所謂荒野千里之勢(고인소위황야천리지세) 眞善評矣(진선평의) 然其大體(연기대체) 則自不失濂洛氣味(칙자불실렴락기미) 平生學力(평생학력) 亦不可誣也(역불가무야)).”
〈주석〉
〖嘉平(가평)〗 12월. 〖上元(상원)〗 1월 15일. 〖半邊(반변)〗 일변(一邊). 〖艇〗 거룻배 정, 〖籠〗 싸다 롱,
〖渚〗 물가 저, 〖踏〗 밟다 답, 〖羃〗 덮다 멱, 〖羸〗 여위다 리, 〖凌〗 건너가다 릉, 〖淸曠(청광)〗 맑고 광활함.
우중유회택지 / 박은
雨中有懷擇之 朴誾
寒雨不宜菊(한우불의국) 찬 비는 국화에 어울리지 않는데
小尊知近人(소준지근인) 작은 술동이는 사람 가까이할 줄 아네
閉門紅葉落(폐문옹엽락) 문을 닫으니 붉은 잎이 떨어지고
得句白頭新(득구백두신) 시구를 얻으니 흰머리가 새롭네
歡憶情親友(환억정친우) 정다운 벗 생각할 때는 즐겁지만
愁添寂寞晨(수첨적막신) 적막한 새벽 되니 시름만 더하네
何當靑眼對(하당청안대) 그 언제나 반가운 눈길로 만나
一笑見陽春(일소견양춘) 한바탕 웃으며 화창한 봄을 보리요?
〈감상〉
이 시는 비 오는 가을날에 택지 이행(李荇)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가을 국화가 피었는데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어 술동이 안고 술을 마시고 있다. 비가 와서 문을 닫으니 곱게 물들었던 단풍이 비에 떨어지고 시를 짓느라 너무 고심을 했는지 20대 젊은이의 머리에 벌써 흰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정다운 벗을 생각하며 보내 준 시를 읽을 때는 기쁘지만 시를 다 읽고 나면 적막한 새벽이 되니 시름이 더해진다. 언제나 반가운 눈길로 마주 보며 크게 한 바탕 웃으며 화창한 봄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맹주인 박은(朴誾)은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 등 중국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선 문단에서 황정견, 진사도 시에 대한 관심은 15세기 후반에 이미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반 성현(成俔)은 조선의 시단을 진단한 「문변(文變)」이라는 글에서, 당시 사람들이 이백(李白)의 시는 지나치게 호탕하고, 두보(杜甫)의 시는 지나치게 깊고, 소식(蘇軾)의 시는 지나치게 웅장하고, 육유(陸游)의 시는 지나치게 호방하므로 오직 본받을 것은 황정견과 진사도(陳師道)라고 여겼다고 적고 있다.
최항(崔恒)은 「산곡정수서(山谷精粹序)」에서,
“내가 이 말(황산곡을 소동파가 칭찬하는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지만, 황산곡의 전집을 볼 수 없어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 그의 시선(詩選)을 보고서 또한 나머지를 짐작할 수 있으니, 과연 청신기괴하여 일가의 법도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읊조리는 사이에 거의 잠자고 먹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었으니, 이른바 구슬과 옥이 곁에 있으면 내 몸의 더러움을 깨닫는다는 말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겠다.
황산곡의 시가 몇 세대 동안 세상에 횡행하다 마침 오늘에 이르러서야 드러났으니, 그 인정받게 된 일이 어찌 스스로 기약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愚之誦此言久矣(우지송차언구의) 恨未得目其全集(한미득목기전집) 今觀是選(금관시선) 亦足反隅(역족반우) 果淸新奇怪(과청신기괴) 成一家格轍(성일가격철) 吟渢之餘(음풍지여) 殆忘寢食(태망침식) 始知所謂珠玉在傍(지소위주옥재방) 覺我形穢者(각아형예자) 不吾欺矣(불오기의) 於虖(어호) 黃詩之行幾世(황시지행기세) 乃竢今日而表章(내사금일이표장) 其知遇豈非自有期乎(기지우개비자유기호))?”
라고 하여, 당시 황산곡의 시가 유행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박은과 절친했던 이행(李荇)이나 정희량, 16세기 시단을 풍미했던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최립(崔岦) 등도 황정견과 진사도의 강서시파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강서시파를 배운 조선 전기의 시인들은 창작 방법의 연구를 통해 낡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다소간 난삽하지만 새로운 시어와 의경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주제의 측면에서는 인생의 비애와 우울한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이종묵, 『우리 한시를 읽다』와 『해동강서시파 연구』 참조).
박은(朴誾)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본조의 시체는 네다섯 번 변했을 뿐만 아니다. 국초에는 고려의 남은 기풍을 이어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성종, 중종 조에 이르렀으니, 오직 이행(李荇)이 대성하였다. 중간에 황산곡(黃山谷)의 시를 참작하여 시를 지었으니, 박은(朴誾)의 재능은 실로 삼백 년 시사(詩史)에서 최고이다. 또 변하여 황산곡과 진사도(陳師道)를 오로지 배웠는데,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솥발처럼 우뚝 일어났다. 또 변하여 당풍(唐風)의 바름으로 돌아갔으니,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이 순정한 이들이다.
대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잘못되면 왕왕 군더더기가 있는데다 진부하여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데서 잘못되면 더욱 비틀고 천착하게 되어 염증을 낼만 하다
(本朝詩體(본조시체) 不啻四五變(불시사오변) 國初承勝國之緖(국초승승국지서) 純學東坡(순학동파) 以迄於宣靖(이흘어선정) 惟容齋稱大成焉(유용재칭대성언) 中間參以豫章(중간삼이예장) 則翠軒之才(칙취헌지재) 實三百年之一人(실삼백년지일인) 又變而專攻黃陳(우변이전공황진) 則湖蘇芝(칙호소지) 鼎足雄峙(정족웅치) 又變而反正於唐(우변이반정어당) 則崔白李(칙최백이) 其粹然者也(기수연자야) 夫學眉山而失之(부학미산이실지) 往往冗陳(왕왕용진) 不滿人意(불만인의) 江西之弊(강서지폐) 尤拗拙可厭(우요졸가염)).”
라고 언급한 것처럼, 박은의 시(詩)는 시사(詩史)의 으뜸이었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박은(朴誾)의 시(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대대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천성(天成)과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침울(沈鬱)함은 모두 성세(盛世)의 국풍(國風), 대아(大雅), 소아(小雅)의 유풍(遺風)을 지니고 있으니, 후대에 사원(詞垣)에서 이름을 떨치는 자들에 비교할 바 아니다.’ 하고, 두 사람의 문집을 간행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我東詩學(아동시학) 世不乏人(세불핍인) 而挹翠軒朴誾之天成(이읍취헌박은지천성) 訥齋朴祥之沈鬱(눌재박상지침울) 皆盛世風雅之遺(개성세풍아지유) 非後來擅名詞垣者之比也(비후래천명사원자지비야) 兩集遂命刊印以進(양집수명간인이진)).”
“읍취헌(挹翠軒)의 시는 무엇보다도 바른 소리를 얻었는데, 책을 펼칠 때마다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보게 된다(挹翠之詩(읍취지시) 最得正聲(최득정성) 每一開卷(매일개권) 想見其爲人(상견기위인)).”
“읍취헌(挹翠軒)의 시는 천기(天機)가 호방하여 성정(性情)을 볼만한 곳이 있고, 눌재(訥齋)의 시는 결구(結構)가 치밀하여 얼핏 보아서는 어려워 이해하기 어렵지만 오랫동안 보면 점차 그 뛰어남을 알게 된다(翠軒詩(취헌시) 天機宕逸(천기탕일) 性情有可見處(성정유가견처) 訥齋詩(눌재시) 結構緻密(결구치밀) 乍看艱晦難知(사간간회난지) 而久看其味漸雋(이구간기미점준)).”
〈주석〉
〖擇之(택지)〗 이행(李荇)의 자(字). 〖尊〗 술그릇 준, 〖靑眼(청안)〗 백안(白眼)의 상대어.
〖見陽春(견양춘)〗 이백(李白)의 「양보음(梁甫吟)」에, “길게 양보음을 부르나니, 어느 때나 양춘을 보리요(장소량보음(長嘯梁甫吟) 하시견양춘(何時見陽春))?” 하여 곤궁한 처지에 놓인 지사(志士)의 울울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양춘(陽春)은 초사(楚辭) 「구변(九辯)」에, “겨울을 날 갖옷이 없으니, 갑자기 죽어 양춘을 보지 못할까 두렵네(무의구이어동혜(無衣裘以御冬兮) 공합사이부득견호양춘(恐溘死而不得見乎陽春)).”에서 온 것으로, ‘임금의 은혜’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문맥으로 볼 때 서로 만나 화기(和氣)가 가득함을 뜻하는 듯함.
각주
1 박은(朴誾, 1479, 성종 10~1504, 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성취와 문장이 남달리 뛰어나 4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8세에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15세가 되어서는 널리 명성을 얻어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申用漑)의 사위가 되었다. 17세(1495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인 1496년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성품이 곧아 옳은 소리를 잘했다. 1501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연산군(燕山君)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사사불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실의에 빠져 시와 술만을 즐기며 지냈다. 25세(1503년)에 동갑이던 아내를 잃었다. 이듬해 봄에 지제교로 복직되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음력 6월에 효수되었는데, 성격이 참으로 강직하여 죽음을 앞두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예전에 연산군이 밤늦게 사냥한 일을 여러 신하와 연명 상소한 일의 주동자였다는 것이었고, 죄명은 ‘사충자안 신진모장관(詐忠自安 新進侮長官, 거짓 충성으로 제 안일을 구하고 신진이 상관을 업신여김)’이었다. 연산군은 박은을 너무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에 의금부로 하여금 박은의 친구들을 색출하여 곤장을 치게 하고 그들을 유배 보냈으며, 음력 8월에는 전교를 내려 박은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게 했다.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을 추가하였다. 3년 뒤에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재화택지 / 박은
再和擇之 朴誾
深秋木落葉侵關(심추목락엽침관) 깊은 가을 낙엽이 문을 치고 들어오는데
戶牖全輸一面山(호유전수일면산) 창은 한쪽의 산을 온통 실어 들이네
縱有盃尊誰共對(종유배준수공대) 비록 술잔과 술병이 있은들 누구와 마시리오
已愁風雨欲催寒(이수풍우욕최한) 이미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 것 걱정하노라
天應於我賦窮相(천응어아부궁상) 하늘이 응당 나에게 궁한 팔자 주었으니
菊亦與人無好顏(국역여인무호안) 국화조차도 사람에게 좋은 안색 보이지 않네
撥棄憂懷眞達士(발기우회진달사) 근심을 떨쳐 버려야 참으로 도사이니
莫敎病眼謾長潸(막교병안만장산) 병든 눈 부질없이 늘 눈물 흘리게 하지 말게나
〈감상〉
이 시 역시 이행(李荇)에게 화답하여 준 시이다.
가을이 깊어 떨어진 낙엽이 문으로 바람 따라 들어오는데 창을 여니 남산이 문을 통해 다 보인다. 허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술이 제격인데, 술이 있어도 대작하여 마실 사람이 없다. 더구나 이미 비바람이 겨울을 재촉하고 있어 걱정스럽다. 타고난 팔자를 궁하게 타고난 우리들이라 국화마저도 아름답게 피지 않았다. 하지만 근심 속에 빠져 있어서야 진정한 달사(達士)라 하겠는가? 그러니 더 이상 눈물 흘리지 말자.
보통 시에서는 ‘어(於)’와 ‘여(與)’ 같은 어조사를 잘 쓰지 않는데, 박은은 3연에서 이러한 어조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궁상(窮相)’ 또한 시인이 좋아하는 우아한 표현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강서시파(江西詩派)에서 ‘이속위아(以俗爲雅, 속된 것을 우아(優雅)로 만든다)’라는 이론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선조조(宣祖朝) 이하에 나온 문장은 볼만한 것이 많다. 시와 문을 겸한 이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고, 시로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제일로 친다는 것이 확고한 논평이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 대가(大家)를 이루었으니, 이는 어느 체제이든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화려하여 명가(名家)를 이룬 이는 유하(柳下) 최혜길(崔惠吉)이고 당(唐)을 모방하는 데 고질화된 이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이며,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옛사람의 말만 전용한 것이 많으니 유감스럽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은 염락(濂洛)의 풍미를 띤데다 색향(色香)에 신화(神化)를 이룬 분이고,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시는 정밀한데다 식견이 있고 전아(典雅)하여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宣廟朝以下文章(선묘조이하문장) 多可觀也(다가관야) 詩文幷均者(시문병균자) 其農岩乎(기농암호) 詩推挹翠軒爲第一(시추읍취헌위제일) 是不易之論(시불역지론) 然至淵翁而後(연지연옹이후) 成大家藪(성대가수) 葢無軆不有也(개무체불유야) 纖麗而成名家者(섬려이성명가자) 其柳下乎(기류하호) 痼疾於模唐者(고질어모당자) 其蓀谷乎(기손곡호) 蘭雪(란설) 全用古人語者多(전용고인어자다) 是可恨也(시가한야) 龜峯(구봉) 帶濂洛而神化於色香者(대렴락이신화어색향자) 澤堂之詩(택당지시) 精緻有識且典雅(정치유식차전아) 不可多得也(불가다득야)).”
라 하여, 박은(朴誾)의 시(詩)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주석〉
〖牖〗 창 유, 〖輸〗 나르다 수, 〖尊〗 술통 준, 〖催〗 재촉하다 최, 〖賦〗 주다 부, 〖撥〗 없애다 발,
〖敎〗 =사(使), 〖謾〗 부질없이 만, 〖潸〗 눈물 흐르다 산
복령사 / 박은
福靈寺 朴誾
伽藍却是新羅舊(가람각시신라구) 절은 도리어 옛날 신라 때 것이고
千佛皆從西竺來(천불개종서축래) 천 개의 불상은 모두 인도에서 온 것이다
終古神人迷大隗(종고신인미대외) 옛날에 신인도 대외에서 길을 잃었나니
至今福地似天台(지금복지사천태) 지금의 복스러운 땅은 천태산과 흡사하여라
春陰欲雨鳥相語(춘음욕우조상어) 스산한 봄기운에 비 내릴 듯 새가 우는데
老樹無情風自哀(노수무정풍자애) 늙은 나무 정이 없어 바람이 절로 슬프다
萬事不堪供一笑(만사불감공일소) 만사는 한 번 웃음거리도 못 되나니
靑山閱世只浮埃(청산열세지부애) 푸른 산에서 세상을 보니 먼지만 떠 있구나
〈감상〉
이 시는 박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개성 천마산에 있는 복령사에 들러 지은 시이다.
복령사는 신라 때 지은 절이요, 천 개의 불상(佛像)은 모두 인도에서 왔다. 황제도 길을 잃을 정도로 복령사를 찾아가는 길이 험하고, 유신과 완조가 천태산에서 선계(仙界)의 여인들과 좋은 경치를 즐겼듯 복령사는 그와 버금가는 별천지(別天地)이다. 복령사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니, 봄기운이 청명(淸明)한 것이 아니라 스산하여 비가 올 것 같은지 새도 울어 대는데, 오래된 나무는 무정하여 부는 바람이 절로 슬프다(이 3연은 젊은 나이에 지은 것인데, 죽음의 느낌을 준다. 그래서 후대 시화(詩話)에서 이 구절을 예로 들어 박은이 26세에 죽은 것을 예견했다는 시참(詩讖)이 되었다). 인간 만사란 한바탕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는데, 복령사가 있는 천마산에 올라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진세(塵世)의 상징인 진애(塵埃)로 가득 차 있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서 박은(朴誾)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시는, 근고(近古)에는 이러한 품격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명가(名家) 속에 섞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석주(石洲) 권필(權韠), 눌재(訥齋) 박상(朴祥),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등 여러 문집만은 못하다. 동악(東岳)의 시(詩)는 언뜻 보면 맛이 없지만 다시 보면 좋다. 비유하자면 샘물이 졸졸 솟아 천 리에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스스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읍취헌(挹翠軒)은 정신과 의경(意境)이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음운(音韻)이 청아한 격조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산수 간에 노니는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에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배웠다고 하나 대개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아 당(唐)·송(宋)의 격조를 논할 것 없이 시가(詩家)의 절품(絶品)이라 할 만하다.
눌재(訥齋)는 고상하고 담백하여 스스로 무한한 취미(趣味)가 있으니, 비록 읍취헌과 겨룰 만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석주(石洲)는 비록 웅장함은 부족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있는데 가끔은 깨우침을 주는 곳이 있다. 성당(盛唐)의 수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唐)의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면 너무 폄하한 것이다. 소재(蘇齋)는 19년간을 귀양살이하면서 노장(老莊)의 서적을 많이 읽어서 상당히 깨우친 곳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음운이 뛰어나게 웅장하다. 옛사람이 이른바 ‘황야(荒野)가 천 리에 펼쳐진 형세’라고 한 것이 참으로 잘 평가한 말이다.
그러나 그 대체는 염락(濂洛)의 기미(氣味)를 잃지 않았으니, 평생 한 학문의 힘은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三淵之詩(삼연지시) 不但近古無此格(부단근고무차격) 雖廁中國名家(수측중국명가) 想或無媿(상혹무괴) 而猶遜於東岳挹翠石洲訥齋蘇齋諸集(이유손어동악읍취석주눌재소재제집) 東岳詩(동악시) 驟看無味(취간무미) 再看却好(재간각호) 譬如源泉渾渾(비여원천혼혼) 一瀉千里(일사천리) 橫看竪看(횡간수간) 自能成章(자능성장) 挹翠神與境造(읍취신여경조) 格以韻淸(격이운청) 令人有登臨送歸之意(영인유등림송귀지의) 世以爲學蘇黃而蓋多自得(세이위학소황이개다자득) 毋論唐調宋格(무론당조송격) 可謂詩家絶品(가위시가절품) 訥齋淸高淡泊(눌재청고담박) 自有無限趣味(자유무한취미) 雖謂之頡頏挹翠(수위지힐항읍취) 未爲過也(미위과야) 石洲雖欠雄渾(석주수흠웅혼) 一味裊娜(일미뇨나) 往往有警絶處(왕왕유경절처) 謂之盛唐則未也(위지성당칙미야) 而謂之非唐則太貶也(이위지비당칙태폄야) 蘇齋居謫十九年(소재거적십구년) 多讀老莊書(다독로장서) 頗有頓悟處(파유돈오처) 故其韻遠(고기운원) 其格雄(기격웅) 古人所謂荒野千里之勢(고인소위황야천리지세) 眞善評矣(진선평의) 然其大體(연기대체) 則自不失濂洛氣味(칙자불실렴락기미) 平生學力(평생학력) 亦不可誣也(역불가무야)).”
〈주석〉
〖福靈士(복령사)〗 개성 천마산에 있는 절. 〖伽藍(가람)〗 절. 〖西竺(서축)〗 인도. 〖終古(종고)〗 예부터.
〖神人米大隗(신인미대외)〗 황제(黃帝)가 대외(大隗)를 만나러 구자산(具茨山)으로 가는데, 방명(方明)이 수레를 몰고, 창우(昌㝢)가 수레 우측에 타고, 장야(張若)과 습붕(謵朋)이 앞에서 말을 인도하고, 곤혼(昆閽)과 골계(滑稽)가 뒤에서 수레를 호위하여 가서 양성(襄城)의 들판에 이르자, 이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어 길을 물을 데가 없었다. 우연히 말을 먹이는 동자를 만나 물으니 길을 알려 주었다(『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 대외(大隗)는 신 이름으로, 대도(大道)를 가리킴). 여기서는 복령사를 찾기 어려움을 뜻함.
〖福地似天台(복지사천태)〗 천태는 중국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신선인 마고할미가 사는 곳이라 한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 사람인 유신(劉晨)이 완조(阮肇)와 함께 천태산에서 약을 캐다가 길을 잃고 선계(仙界)의 여인들을 만나 반년을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수백 년 세월이 흘러 자기 7대손(代孫)이 살고 있어 다시 천태산으로 갔다 한다(『태평어람(太平御覽)』 권(卷)41). 손작(孫綽)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도사를 단구에서 방문하여, 불사의 복지를 찾노라(방우인어단구(訪羽人於丹丘) 심불사지복정(尋不死之福庭)).” 하였음.
〖供〗 베풀다 공, 〖閱〗 자세히 살피다 열, 〖埃〗 먼지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