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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준비하는 사람입니까? / 마 25:1-13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중에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습니다. 극중 인물들은 ‘고도’란 인물을 기다리는데, 이 인물은 연극이 끝나기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고도가 사람인지 이상향인지, 아니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누군가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이고, 그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 주인공(에스트라공, 블라드미르)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 통하지 않는 말들을 주고받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잊고, 똑 같은 일과 대사들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대사는 “가자, 갈 수 없어,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하는 식의 대화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고도를 기다리며’는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부조리한 인간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정체도 모르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오지도 않을 미래를 기다립니다. 그 일상적인 삶은 기억상실증 걸린 듯, 과거를 기억도 못합니다. 단지 무의미하게 되풀이하며, 시간만 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연극은 인간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것은 기다림입니다. 베케트는 고도가 올 것 인지, 오지 않을 것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건 오지 않건, 이것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희망과 기다림 때문에, 살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베케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 희곡에서 인간이 사는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기다립니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기다립니다. 일의 성공을 기다리고 정상의 자리에 앉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림 자체가 우리 인생이란 말이 맞습니다. 정작 기다리던 목표를 이루었을 때는, 그 기쁨은 잠깐입니다. 또 다른 기다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그 기다림 자체가 좋습니다. 등산에서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오히려 기쁨은 시들해집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더 즐겁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고 맙니다.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기다릴 희망이 사라질 때가 늙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루지 못하여 애달아 할 때가 더 행복합니다. 이 오늘의 행복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더 이상 바랄 것도 기다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우리가 만나야 할 분입니다. 이 분은 고도 씨처럼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지만, 우리의 삶에 대해서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단지 그때가 언제인지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지, 그분 앞에 우리는 반드시 서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재주가 뛰어나셨습니다. 천하의 이야기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들녘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다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진리의 말씀을 쉽게 푸는 재주가 있었고, 추상적인 진리의 말씀을 일상의 비유로 푸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는 극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극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비유의 백미로 꼽히는 말씀입니다. 그 비유가 더욱 극적인 것은, 그게 종말 비유라는데 있습니다. 종말은 다음이 없습니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종말이 아닙니다. 다음 기회가 없다는 말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때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그 때는 종말,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세 비유가 모두 그 때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말씀이 24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25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4장에도 종말 비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있었고, 두 부류의 종의 비유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25장에서 종말 비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의 말씀을 거듭 반복하는 것은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시작 중요합니다.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너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끝입니다. 시작도 잘 해야 하지만, 끝을 잘 맺어야 합니다. 스타트도 잘 해야 하지만, 결승 라인도 잘 통과해야 합니다. 기초 공사도 잘 해야 하지만, 마지막 인테리어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종말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은 종말 비유를 하시며, 시작의 의미가 더 강한 결혼식 비유를 하셨습니다. 결혼은 시작이기도 하지만 종말이기도 한단 말입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불행 시작, 행복 끝으로 여깁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실제 그런 경우도 꽤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결혼식 날은 신랑신부의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날이며,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결혼 예식이 끝나기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를 금식합니다. 그들은 결혼식이 끝남과 동시에, 신랑은 유리컵을 밟아 깨뜨리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유대인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애도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절정의 순간에 민족 최대의 비극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역시 유대인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산산조각난 유리컵은 원상복구가 불가능하듯이, 그들의 결혼도 이제는 되무를 수 없는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곱씹어 볼만한 교훈입니다.
1절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이스라엘 결혼식은 밤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등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리나라도 주 5일제 근무가 시작되고부터, 야간에 결혼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혼식은 낮에 합니다. 생각을 넓히면, 야간결혼식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갑니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여러 의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1절의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닌 신부의 친구들 곧 들러리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때 들러리가 사용하는 등이, 횃불을 말하는지, 등불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랍비들에 의하면, 혼인잔치 때에 사용했던 등은, 긴 막대기 끝에 역청과 헝겊과 기름을 담은 그릇이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랍비의 설명에 의하면, 어찌보면 횃불 같고, 어찌보면 등불 같습니다. 횃불을 들었느냐 등불을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밤새 밝힐 수 있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즘 같이 통신시설이 발달해 있다면, 언제 오는지 확인하면 되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신랑이 올 때까지 등을 밝혀야했고, 여분의 기름이 충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열 사람이 다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2-4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부의 친구들인 것은 맞지만, 다 슬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절반은 슬기로웠지만 절반은 미련했습니다. 차라리 기울면 나은데 반반입니다. 5:5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편이 나눠집니다. 8:2나 9:1이었으면, 2나 1이 8과 9를 따랐을 것입니다. 절묘하게 5:5로 갈리니 의견 조율이 힘듭니다. 슬기로운 다섯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미련한 다섯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래서 여분의 기름이 필요하고, 저래서 여분의 기름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양쪽 다 확신이 있습니다. 자기들 생각에 작은 의심도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얼마든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몸을 구겨서 지하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앞 뒤 옆 사람이 꽉 찼습니다. 이 순간 우리의 마음은 짜증을 부릴 수도 있고, ‘헤헤, 손잡이 잡지 않아도 된다’고 재미있어 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이처럼 반응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알고보면 내 마음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일리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자기가 세상을 더럽히고, 자기가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데, 그걸 모릅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보면 지금의 나와는 별로 상관 없는 거 같은 말씀일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인 저는 설교 본문을 대할 때,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보면 지금의 우리교회와 별로 상관 없는 거 같은 말씀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우리교회에 꼭 필요해서 주신 말씀이라고 믿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말씀은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의 안내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언적인 말씀에는, 약속도 있지만, 경고도 있습니다. 순종할 때는 복의 약속이 되고, 불순종할 때는 심판의 경고가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자기 듣고 싶은 말씀만 듣는 게 문제입니다. 한 주에 예배를 주일예배 한 번만 드리면, 공식적인 설교는 한 주에 한 번밖에 못 듣습니다. 하지만 주일예배, 수요예배, 오후예배까지 드린다면 공식적인 설교만 해도 한 주에 3번이나 듣습니다. 거기에 새벽기도회에서도 설교를 듣습니다. 그럼 말씀이 결코 부족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적인 삶은 아닙니다.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는 말을 듣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로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을 골라 들어서입니다.
뷔페에 가면 음식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아마 옛날 임금들도 그렇게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로 먹을 게 없다고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별로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입니다. 말씀 앞에서도 자기가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말씀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기준이 있어 말씀을 선별하여 받아드립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이면 받아드리고, 그렇지 않은 말씀은 흘려보냅니다. 언젠가 회전 초밥집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초밥이 담긴 작은 접시가 자기 앞을 지나갑니다. 그때 자기가 원하는 초밥 접시가 오면 집어들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초밥 접시가 오면 흘려보냅니다. 말씀 앞에서도 이런 식이니 문제입니다. 말씀의 자리는 지키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양실조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듣는 거 같은데, 영혼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자신한테 맞추려고 하지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게 슬기 있는 자입니다.
5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신랑이 더디 옴으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신랑이 주인공 아닙니까? 그럼 누가 누구에게 맞춰야 합니까? 신랑이 들러리에게 맞춰야 합니까, 아니면 들러리가 신랑에게 맞춰야 합니까? 보면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앉았다 하면,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합니다. 통 바쁜 게 없습니다. 뭘 해도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는 괜찮은데, 옆에서 보는 사람은 속이 터집니다. 오늘 신랑이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랑을 기다리는 들러리는 마냥 기다려야 합니다. 신랑이 오는 거리를 계산하여 ‘아, 언제쯤 오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를 훌쩍 넘겨서 오면 기름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여태껏 기다린 것이 허사가 됩니다. 그래도 신랑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신랑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신랑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해도해도 너무 늦어집니다. 초저녁부터 기다리던 들러리들은 지쳐서 좁니다. 일부는 졸음을 못 이기고,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미련한 자들만 그랬을까, 아니면 슬기로운 자들도 그랬을까입니다. 성경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피곤하면 슬기로운 자도 졸 수 있고, 잠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물론 한 시간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 26:40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순전히 자기 영혼을 위해 ‘한 시간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자기 영혼은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24시간 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 살고 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도 야간에 당직을 서면 다음날 휴식을 줍니다. 들러리들이 초저녁부터 퍼져 잤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밤이 깊어가는 데도 신랑이 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쳐서 잠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다리다가 졸며 잔 것은, 결정적인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6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그렇게 기다리던 신랑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말에, 다들 비상이 걸렸습니다. 반가워 해야 할 신랑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렸던 신랑입니까?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신랑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비상입니다.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정신이 몽롱합니다. 10명이 같은 시간에 잠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른 밤에 잠들었고, 어떤 이는 얼마 전에 잠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깨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도 안 그러겠습니까? ‘내 사모하는 주님, 온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다시 오실 주님을 “내 사모하는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막상 “보라, 주님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릴 때, “아차” 하며 때늦은 후회를 합니다. 끝까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얼마전까지 예수 믿다가 포기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아쉬움이 크겠습니까? 아니 그건 아쉬움 정도가 아니라, 땅을 치며 후회할 일입니다.
7절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열 사람이 잠 들어 있들어 있다가, 신랑이라는 말을 듣고 서둘러 챙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등입니다. 그들은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을 비비며, 등을 준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섞여 있습니다. 평소에는 구분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로 보일 수 있고, 미련한 자가 슬기로운 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로 대우받을 수 있고, 미련한 자가 슬기로운 자로 대우받을 수 있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그렇게 살아갑니다.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어울립니다. 굳이 구별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가자” 하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설교를 통해, 눈에 보이는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줄 필요는 있습니다. 보면 헛똑똑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밥먹고 살고 사회적 지위를 누립니다. 그런데 내세에 대해 무지합니다.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면 헛똑똑이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걸 가지고 누리고 산들, 영생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러면 헛똑똑이인 것입니다. 준비는 미리 하는 것입니다.
8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미련한 자들이 달리 미련한 자들이겠습니까? 때를 모르니 미련한 것입니다. 준비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 고난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 슬기입니다. 고난이 닥쳐서 그때 준비하려고 하면 늦고, 그게 미련입니다. 열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신랑이 오는 거리가 뻔한데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다’고 상반된 의견을 냈습니다. 의견이 5:5로 갈렸습니다. 지금 있는 기름에 더하여 넉넉하게 준비한 사람이 5명, 지금 가진 기름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5명이었습니다. 만일을 위해 기름을 더 준비한 사람들은, ‘굳이 미련하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랑은 도착해 가는데 맞이해야지, 등불은 꺼져가는데 기름은 바닥이지, 그들은 할 수 없이 기름을 넉넉히 준비한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그들은 다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기름을 더 준비하는 그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어리석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 저것 따질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름 좀 나눠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름을 가진 자들로부터 들려온 대답은 거절이었습니다.
9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슬기 있는 자들의 대답이 일리가 있습니다. 기름이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기름을 얻으러 온 자들이 미워서도 아닙니다. 기름을 나눠쓰다가 다 부족하면 낭패가 됩니다. 그래서 기름을 얻으러갔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10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들은 기름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시간에 열려 있는 기름집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 기름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였던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곧 문이 닫혔습니다. 당시 공식적인 연회를 열 경우, 현관 문 입구에는 초대받지 않은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종들이 서서 손님들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초대장과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증명서를 보여야만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손님들이 다 모이면 집주인은 문을 닫았고, 그 후에는 어떤 경우에도 더 이상 손님들을 입장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뒤늦게 달려왔습니다.
11-12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이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 수도 있고, 가다가 말고 돌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절규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크라이 막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허겁지겁 성도, 헐레벌떡 성도’를 보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항상 한 박자 늦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신부의 들러리임을 밝히며,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들려온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그런대로 넘어갑니다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안 통합니다. 여러분,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가 가장 불쌍한 존재입니다.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이 오실 날이 언젠지, 세상 끝 날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늘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잠을 자야 합니다. 연약한 육신을 눕혀 잠을 자되, 영적인 잠을 자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전쟁의 소문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테러의 위협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반대하는 운동들이 쉴 새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다 힘든 때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대 속에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귀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세상이 이렇게 창창한데 종말이 어디에 있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을 늘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있습니다. 평소에 늘 긴장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 신랑으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실 때, 즉각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가 잘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오실 날이 다가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더디 오시지만, 모두 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어, 정결한 처녀들과 같이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깨어있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하늘에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 마 25:14-30
미국 하버드대학의 경영학교수이며,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K. 머튼 박사’는 마 25:29절의 말씀인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본문 말씀을 가지고, ‘Matthew effect’(마태복음 효과)라는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마태복음 효과’는 ‘누적 이득의 효과’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적게 가진 자는 점점 더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효과는 경제뿐만 아니라, 국민소득의 양극화 현상과 빈곤의 악순환, 지식과 교육의 격차, 정보의 격차, 학과목의 실력 격차, 선점기업의 시장 독점, 마케팅의 선점 위치, 선진국과 후진국의 소득 격차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스웨덴의 대중가수로 혼성그룹인 유명한 아바(Abba)가 불러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으며,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불려진 ‘The Winner takes it All(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중에 “승자가 다 갖는 겁니다. 패자는 초라하게 승자 옆에 서 있을 뿐이지요, 그게 운명입니다.”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효과를 잘 설명해주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효과라는 말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지역에서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고 앞서 나가면, 그의 장점과 강점이 점점 더 쌓여지면서, 더 크게 성공하고 발전할 수 있고,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더 큰 성공을 낳는다는 주장입니다.
오래전의 영화인데 ‘빠삐용’을 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 빠삐용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악명높은 남미 기아나에 있는 프랑스 령의 악마의 섬 유형지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앙리 샤리에르의 ‘Papillon’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극 중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던 빠삐용은, 탈출에 대한 징벌로 장기간 빛이 들지 않는 독방에 수감되어, 육체와 정신이 쇠약해 집니다. 그때 빠삐용은 꿈을 꿉니다. 빠삐용은 꿈 속에서 재판관과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이때 빠삐용의 꿈 속의 재판관은, 빠삐용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최악의 죄를 저질렀다고 단죄합니다. 그것은 인생을 허비한 죄입니다. 빠삐용은 자신의 유죄를 시인하고 꿈은 끝납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작가는 중요한 인생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최악의 죄는 살인이 아니라, 인생을 허비한 죄라는 것입니다. 빠삐용은 그 꿈에서 깨어난 후부터, 절망에서 벗어나 바퀴벌레도 잡아먹고, 팔굽혀펴기 하면서, 체력을 보강하기 시작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자유를 갈망하기 이전의 세상에서도 인생을 낭비 했었는데, 감옥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또 낭비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나가서 뭔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인생을 낭비하여 크게 책망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일명 달란트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세 개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열처녀의 비유에 이어진 두 번째 비유입니다. 주제 역시 열처녀의 비유와 다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같은 주제를 입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듣는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해 이보다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논리적인 설명도 좋지만,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고 기억에도 오래 남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힘듭니다. 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내 이야기를 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 변화된 내 삶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두 번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14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어내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시에 상업을 하던 부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역을 위해 먼 나라로 가서 오랫 동안 집을 비우곤 했습니다. 그들이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했더라면, 부호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무역에 눈을 떴고, 그래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타국으로 훌쩍 떠날 수 없는 법입니다. 먼저 자기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맡겨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시기 전, 제자들을 불러놓고 복음을 위탁한 것을 연상시킵니다. 마 28: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믿음의 식구이자 제자공동체인 교회가, 예수님이 맡겨주신 복음을 위탁받았습니다. 교회의 지체인 우리는 교인 수준을 넘어 복음을 맡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맡은 복음을 가지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시계는 종말을 향하여 바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저 고개 너머 동구밖에 오고 계십니다. 아직은 주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어 준비할 시간이, 아직은 좀 남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기한이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부자가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모든 종들에게 똑같은 양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차이가 났습니다. 그 기준이 뭐였습니까? “각각 그 재능대로” 누가 봐도 모든 종들이 같은 양의 달란트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입니다. 우리 역시 각자가 받은 달란트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달란트가 능력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혜와 지식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육체적인 건강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처한 환경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재물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리더십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날 때부터 불공평한 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그 불공평을 따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끝까지 불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맡길 때의 기준이 있었듯이, 달란트를 결산할 때도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보면 공평합니다. 우리는 맡겨진 달란트 양을 보고 불평할 게 아니라, 그 달란트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창조주이십니다. 곧 우리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조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는만큼, 우리가 잘 활용할 수 있는 만큼의 달란트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곤 합니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 많이만 달라고 하는 게 과대평가입니다. 그것도 감당하기 힘드니 제발 그만 달라고 하는 게 과소평가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모릅니다. 우리의 설계자이신 하나님이 정확히 아십니다. 그걸 인정하는 표가 하나님이 맡기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달란트 욕심 부려서는 안 됩니다. 남들이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을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건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게 뭐냐?’며 시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의 달란트를 받았든지, 주인이 그것에 대해 책임을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16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섯 달란트를, 그냥 용돈으로 준 것이 아니고, 보관만 하고 있으라고 준 것이 아님을 알기에, 상당한 부담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그는 꾸물거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가서 받은 다섯 달란트로 장사를 했습니다. 자신을 믿고 다섯 달란트를 맡겨준 주인에 대한 감사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아울러 자기가 맡은 다섯 달란트에 대한 책임감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책임감을 강하게 느낀다면서,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법입니다. 감사와 책임감은 종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달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 나오는 종들은 종이기보다 청지기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킨대로만 하면 됩니다. 종에게는 재량권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는 것은, 종의 신분으로는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맘에 있으면 굼뜨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목표, 곧 마음에 무언가가 분명한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엉뚱한 곳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헛된 일에 빠지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물쭈물’하다가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망설이고 내일로 미룬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나이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우물쭈물하다가 보낸 시간들이 너무 아쉽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였던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목표없이 주춤거리는 시간들은 낭비되는 시간입니다. 리처드 에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그것이 너무 빨리 끝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인생을 시작하기까지 너무 오래 주춤거린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왜 말씀에 순종하는데 굼뜹니까? 왜 말씀에 순종하는 걸, “잠시만요” 하며 차일피일 미룹니까? 맘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멘은 하는데 맘에는 없는 것입니다. 진짜 맘에 있으면 즉시 순종이 됩니다. 진짜 맘에 있으면 자발적인 순종이 됩니다.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를 잘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장사를 잘하여 갑절의 이익을 창출했다는 의미보다는, 100% 충성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기대한 것은, 자기의 주어진 여건 안에서 100% 충성하는 거였습니다. 100% 충성, 이게 최선입니다. 각 사람은 재능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서로 간의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100%를 쏟아붓지 않은 것은 문제입니다. 토요일 한국이 포르투갈을 2:1로 이겼습니다. 포르투갈과는 2번 경기 했는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승리하고, 20년 만에 다시 승리를 한 것입니다. 프로 축구 선수들이 하는 말이 “90분이 지나면 걸어다니는 것도 힘든 그런 축구”를 해야 이긴다고 했습니다. 이게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선수가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100%면 됩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17절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두 달란트 받은 자 역시 그같이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같이 하여”는, 16절의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는 비록 두 달라트를 받았지만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였습니다.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 비해, 자신의 재능을 낮게 평가받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가서 100% 충성했습니다. 만약 그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여, 그가 자기보다 어떤 재능이 낫냐며 주인에게 따지고 대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두 달란트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 달란트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혜로웠습니다. 그리고 100% 충성했습니다.
18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앞의 두 종과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땅을 파서 돈을 감추어 두는 것은, 당시 돈을 보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장사라고 하는 모험 대신, 땅에 묻는 안전을 선택했습니다. ‘굳이 장사하느라 고생할 필요가 뭐 있나? 땅에 묻어두면 심신이 두루 편안한데.’ 또 곱씹어 생각할수록, 주인에게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아니 나한텐 왜 한 달란트밖에 안 맡기셨을까? 내 재능이 그들의 재능보다 모자란 것도 없을 거 같은데.’ 그럼 한 달란트가 작은 돈입니까?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300데나리온이 노동자 1년 품삯이었음을 감안할 때,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약 20년 동안 받는 품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주인이 한 달란트를 맡겨놓고, 다섯 달란트를 남기라고, 또는 두 달란트를 남기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도 100% 충성이면 되었습니다.
19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주인이 갑작스럽게 귀국했습니다. 종들은 생각지도 않은 날,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불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인이 제 집에 왔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오는 때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왔을 때, 겉으로는 모든 종이 환영했습니다. “주인님, 안녕하셨습니까?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 같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과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은근히 결산에 기대를 걸었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야, 이거 큰일났네’ 싶었습니다
20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종들을 모아 놓고는, “이제 한 사람씩 결산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그의 손에 다른 다섯 달란트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렇게 말하는데 스스로에 대해 뿌듯해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주인도 적잖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칭찬의 내용입니다. “오, 다섯 달란트나 남기다니, 너는 아주 사업가 기질이 뛰어나구나!” 이런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수치상 결과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인품을 칭찬했습니다. 충성스런 인품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영국의 소설가 키플링은 충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성을 다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내가 학생이라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내가 군인이라면 배치된 부대에서 훈련받는 것이 충성입니다. 내가 직장인이라면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더 큰 일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미국 미시건 주의 성 요셉 고아원에 불쌍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타미라고 불리는 아이는 원생들과 싸움만 일삼은 문제아였지만, 베라다 선생님은 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고, 결국 그는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너를 무척 사랑하신단다. 큰 꿈을 갖도록 하렴”이라며, 늘 자신을 격려해준 베라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냈고, 피자가게에 취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배워, 피자 한 판을 11초에 반죽하는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그는 1960년에 그의 동생 지미와 함께, 500달러를 가지고 작은 피자 가게를 차렸습니다. 이 가게는 큰 성공을 거뒀고, 전 세계에 7000여 개의 점포를 소유한 ‘도미노 피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Thomas Monaghan(토마스 모너건)입니다. 그는 자기가 차린 작은 피자가게가, 그렇게 세계적인 회사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작은 일에 충성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충성했더니, 하나님께서 큰 일에 충성할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22절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이어서 두 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살짝 긴장이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대단한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종이 주인한테 이보다 더한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았던 두 달란트와 장사하여, 남긴 두 달란트를 주인에게 내보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활짝 웃는 게 아닙니까?
23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세상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과 칭찬이 동일합니다. 큰 의미는 없지만, 그 칭찬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도, 중요한 것은 그가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충성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려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충성할 때, 두 달란트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려고 하면, 편법이나 불법이 동원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충성이 아닌 것입니다.
24-25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는 앞의 두 사람에게 한 칭찬을 듣고 긴장이 됐습니다. 벌써 등어리가 식은 땀으로 축축해졌습니다. 그는 사실 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왜 그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는지를 이실직고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신이 주인의 뜻과 지시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이유가, 자신이 아니라 주인에게 있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성실함과 신실하지 못하고, 안일한 삶의 모습들에 대해 핑계하고 변명하면서, 그 이유를 주인의 성품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는 말 속에 담긴 그의 생각은, “나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했다면 멋진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나는 자신이 있었고, 그런 능력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이었다. 주인이 큰 욕심이 있는 사람이고 결과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으로 알았기에, 나는 그런 주인이 무서워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눅 19장과 마 25장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인이 그런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단서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26-27절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 들려온 것은 주인의 호된 책망이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하고”의 원어 ‘포노스’가 무가치하다는 뜻이고, “게으른”의 원어 ‘오크네오’가 지체하다는 뜻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를 자기 안일에 빠져 주인에게 무가치한 종이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충성된”의 상대어로 “게으른”이 사용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으름이 곧 불충성이란 말입니다.
28-30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한 달란트 받았던 자, 곧 악하고 게으른 종은 두 번 죽게 됩니다. 한 달란트를 주인이 가져가는 거야 당연하지만, 자기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건 그를 두 번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인의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다시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바깥 어두운 데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할, 더없이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는 시간, 곧 하나님의 평가 앞에 반드시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평가가 이 세상에서의 평가와 다른 점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자기 자신의 평가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왜곡되고 자기 입장에서의 공정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다르게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평가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게 될 때, 어떤 점수, 어떤 결과를 기대합니까?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광의 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의 몸된 교회에 직분자로 사역자로 부름 받은 여러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광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사람, 가정, 일터, 건강, 환경 등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양에 관계없이, 이것들이 주인되신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으로 운영되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게 하옵소서. 운명을 따라 살아가므로 멸망 받을 자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 다시 오시는 주님이 흡족해 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유익이 되는 종이 되기 위해, 방법을 구하며 사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변함없는 믿음, 한결같은 믿음으로, 맡은 달란트에 충성을 다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게 될까요? / 마 25:31-46
지구의 종말이 있을까요? 과학자들은 태양은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나중에는 적색거성으로 변하면서, 지구 온도는 700도까지 올라가 바다도 사라지고,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지구의 서식 수명이라고 합니다. 어떤 천체물리학자들은 40억년가량 남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17억년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기 1년 전인 2017년,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노르웨이에서 열린 천체우주과학축제인 스타무스 페스티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행성 충돌과 인구 증가, 기후변화 등으로 인간이 더 이상 지구에 살 수 없게 될 겁니다. 30년 안에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 “지구가 사람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는 건 시간문제”라며 “화성과 달에 식민지를 세우고, 그곳에 노아의 방주처럼 보관 시설을 세워, 지구 동식물의 종(種)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근대 물리학과 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작 뉴턴은 2060년 세계 종말을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5장 역시 24장에 이어진 주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24장에서는 주의 재림과 종말의 징조를 언급했습니다. 25장에서는 주의 재림과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를, 비유 세 개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라서 어떤 논리적 설명보다 귀에 쏙 들어옵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혼인잔치에 못들어 간 다섯처녀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그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갔던 다섯처녀와 똑같은 고생을 했습니다. 신랑을 맞기 위해 기다리다 지쳐 잠든 것도 똑같았습니다. 다른 점이라고는 딱 하나,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계산으로 신랑이 언제쯤 오니까, 이 정도 기름이면 충분할 거다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늦은 시각에 왔습니다. 결국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다섯처녀는, 고생하며 기다린 보람도 없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등을 교회 다니는 것으로, 기름을 믿음으로 해석입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믿음을 등으로 행함을 기름으로 해석입니다. 엉뚱한 해석은 아니라고 봅니다. 실제로 믿음이 없어도 교회는 열심히 다닐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과 무관한 삶을 사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가 있습니다. 예수 믿을 기회가 언제까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믿음은, 어떤 식으로는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다른 말로 주인 바꾸기입니다. 내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예수님이 주인인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주인이 바뀐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방식이, 절대로 같을 리가 없습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한번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고후 13: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두 번째 비유에서, 각 자가 받은 바를 어떻게 선용해야 하는지, 자기가 맡은 것에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다섯 달란트냐 두 달란트냐 한 달란트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 달란트의 가치가 노동자 6,000일 곧 20년 품삯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한 달란트를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기분대로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기준에 따라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장사하여 갑절을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뒀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주인은 돌아와 결산을 하면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했고, 한 달란트 밭았던 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꾸중을 했습니다.
달란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우리 인생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같을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다르고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흉내를 내지 말고,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충성입니다. 인생에 결산할 때가 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인생 결산을 해야할 때가 옵니다. 그때 주님의 결산 기준은, 성과(업적)가 아닌 충성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모두가, 그 날 주님 앞에서 이런 인생 결산을 하면 좋겠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비유로 일명 양과 염소로 비유입니다. 세 번째 비유 역시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염소와 양을 등장시켜, 선명한 흑백효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회색이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얀색으로 상징된 양은 영생으로, 검은색으로 상징된 염소는 영벌로, 명확하게 구분될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3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재림 주님은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결코 초림 때의 초라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 분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지만 말이 안 됩니다. 별을 연구하던 동방박사들이 찾은 곳은, 예루살렘 왕궁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니 베들레헴에서 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목자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 예언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탄생한 곳이 사람의 방이 아닌 짐승 밥통은 이해불가입니다. 자라신 곳도 이스라엘 저 북쪽 변방 나사렛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다른 말로 촌뜨기 예수란 말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하지만 재림 때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광 중에 오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끝까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놀랄 것입니다. 겁 없이 예수님과 교회를 박해하고 조롱하던 나라와 사람들이, 그 분 앞에 기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 정도로 대단한 분인지 몰랐다며 놀라워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가 위축되고, 그리스도인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우리가 기를 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묵묵히 우리 길을 가면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미국 하바드 대학의 바우라 교수가, 전 세계의 저항시를 다 모아 정리를 했는데, 그 중에 으뜸으로 꼽은 시가 바로 심훈의 ‘그 날이 오면’입니다. 그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그 날을 기대했기에 일제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친일한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일제에 저항해 봤자 소용없고, 그 저항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으니까, 체념하여 친일로 돌아섰습니다. 마지막 시대 마지막 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항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한계를 느껴서 체념이 되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맙니다. 세상과 적당하게 주고받기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이 왔지만,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다수가, 고난과 가난으로 몰렸습니다. 그 날이 왔지만, 단죄 돼야 할 친일 부역자들이 그대로 잘 먹고 잘 살았고, 그 후손들 중에는 대통령도 나왔고, 국회의원들도 제법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심판주로 오실 그 날은 다릅니다.
32-33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날에 세상 모든 민족이 그 분 앞에 섭니다. 모든 민족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날에는 양과 염소가 분명히 구분됩니다. 양이 염소 대열에 합류할 수 없고, 염소가 양 편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 날의 심판이 있기 전에는, 양과 염소가 뒤섞여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이 섞여 살듯이, 교회 안에도 거듭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이, 주인에게 황급히 말했습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습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그러자 종들이 재촉하듯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추수 때까지는, 곡식가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함께 있지는 못합니다. 그 날이 오면, 분리됩니다. 그 날이 오면,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모아 불사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심판자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자기가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참고 계십니다. 그 분도 아직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먼저 자기 영혼을 신경써야 합니다. 타인의 영혼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영혼이 자기 영혼보다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늘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자기 신앙 챙기기도 벅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용감해도 보통 용감한 게 아닙니다. 주인이 종더러 내 자리에 앉으라고 강권해도, 종은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며, 극구 사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물며 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종이 그 자리를 엿본다면 날잡아서 크게 혼날 일입니다. 우리는 ‘심판’하면 혼내는 것, 경고하는 것, 퇴장시키는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건 잘못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기에 잘한 사람은 그 날 복을 받습니다.
34절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여기서 상을 수여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임금입니다. 31절에 나오는 “인자”와 동일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날의 심판주임을 말해줍니다. 이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신앙고백하는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 고백 중에 하나만 부인해도, 예수 안 믿는 것입니다. 보면 예수를 희한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나도 예수 믿는다”고 할 때, 무턱대고 “우리는 영적 가족이다”라고 하면,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확인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어떤 예수를 믿느냐?”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 “당신이 믿는 예수에 대해 한 번 말해보라.”
상받을 자들이 이미 오른편에 있습니다. 재판장이 한 명 한 명에게 주문을 날리며, “너는 천국, 너는 지옥” 그렇게 판결할 거 같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오른쪽으로 가고, 알아서 왼쪽으로 갈 거 같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이 한 호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우리말 성경에서는 미래형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원어를 살피면 완료 분사형으로 나옵니다. 곧 복의 연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대에 서기 전부터 복 받은 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 이 땅에서 이미 복 받은 자로 살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복 받은 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심판대 앞에 서기 전부터 우리는 복 받은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인이 잘 죽었을 때의 상을 호상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잘 죽은 사람입니까? 예수 잘 믿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인이 예수 잘 믿다가 죽었으면, 꼭 90까지 못 살았어도 무조건 호상인 것입니다. 예수 믿은 것 자체가 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이미 복 받은 자입니다.” “당신은 영원히 복 받을 자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받는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는 것입니다. 예비된 나라는 하나님나라, 천국을 가리킵니다.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입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를 위하여,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엡 1: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신 결정적인 이유는,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비된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상속자란 물려받을 만한 법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서 이 천국을 빼앗아 갈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롬 8:31-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시시한 것 가지고, 하나님을 테스트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즉각적인 응답을 하실 때 뿐만 아니라, 응답을 지연시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응답의 때를 조절하시는 거지, 응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내주신 분이, 우리에게 그 무엇이 아까워서 못 주겠습니까?
35-36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상받는 이유가 나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의 선행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선행은 일반 선행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의 표지로서의 선행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로서의 선행입니다. 그 선행의 대상이 누구인가? 주님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주님께 그런 선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선행의 내용은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입니다. 필요중심적 선행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필요로 한 선행이었습니다. 내 중심의 선행이 아닌, 타인 중심의 선행이었습니다. 자기 의를 위한 선행이 아닌, 하나님 사랑 실천으로서의 선행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선행을 의식하지 않고 했다는 것입니다.
37-39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각 절마다 “어느 때에”가 나옵니다. 선행 자체를 의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선행 후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이런 선행을 하면, 주님이 내게 이런 칭찬과 상급을 주시겠지’ 하는, 계산된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에 따른 순수하고 자연스런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행이 주님께 한 것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게 진짜 선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렇게 대답하는 오른편 사람들을 향해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우리에게 변장하고 찾아오신 그리스도로 보고 그렇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게 곧 그리스도께 한 것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한 마을에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깊은 영성 때문에, 그 마을뿐 아니라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그 수도원은 늘 붐볐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수도원의 분위기가 점점 시들면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횟수도 줄고, 또 세상을 향한 수도원의 영향력도 줄어들었습니다. 수도원의 쇠락을 안타깝게 여긴 수도원장은, 멘토와도 같은 산 속의 수도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울어가는 수도원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혜로운 수도사는 한참 기도한 후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수도원은 지금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수도원에는 그리스도께서 변장하고 함께 계시는데, 여러분이 그 변장한 그리스도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깨달은 수도원장은, 수도원으로 돌아와 수도사들을 모아 놓고 지혜로운 수도사의 말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수도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혹시 이 사람이 변장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서로에게 그리스도께 대하듯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수도원의 영성은 점차로 살아났고, 다시 영향력 있는 수도원으로 부흥하였습니다.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심판주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이 땅에서도 악담을 들으면 기분이 몹시 나쁩니다. 저주를 듣고도 태연하게 있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아무리 저주를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나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저주를 한 사람에게 저주가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심판주 앞에서의 저주는 다릅니다. 꼼짝 없이 받아야 합니다. 저주를 선언한 즉시 그 저주가 임합니다. 한번 내려진 저주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축복으로 뒤바뀌지도 않습니다.
42-43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재판장이 무턱대고 저주를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기분에 따라 고무줄 재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명백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 기준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적용했습니다. 그들 역시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따져물었습니다.
44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사실 그들은 억울해 할 법도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주리고 목마르셨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헐벗었거나 옥에 갇히셨다면, 그들이 모른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충분히 억울함을 하소연 할 만합니다.
45-46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들의 하소연을 듣고는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변장하고 찾아오신 그리스도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잠시 노숙자가 된 목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이름은 예레미야 스티펙(J. Steepek)입니다. 그는 많은 성도가 모이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던 주일 아침에, 노숙자로 변장하고, 30분간 교회에 들어오는 성도들 앞에서 서성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성도들 중 단 3명이 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사먹게 동전을 요구하자, 아무도 동전을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교회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자, 안내로부터 뒤에 가서 앉아 달라는 요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고, 그 중에는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광고를 마친 다음, 한 장로님이 일어나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을 소개했습니다. “예레미야 스티펙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성도들은 기대에 넘쳐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앉아 있던, 그 노숙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박수는 멈추고 모든 눈이 그를 주시했습니다. 장로님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스티펙 목사는, 그날 본문 말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성도들 중엔 흐느끼면서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군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나서, 스티펙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으로, 이웃과 함께, 그리고 그들 옆에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점은, 의인으로 불린 사람이나 악인으로 불린 사람이나, 모두 자기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의인이라 불린 이들은 실상 자기가 구원받게 된 이유를 모릅니다. 자기들은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작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대단하거나 위대한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는 착한 마음을 원할 뿐입니다. 도움의 손길이 올 때 외면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 의인들은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름도 없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악인으로 판명된 사람들 또한 자기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은 눈앞에 있는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것이 이토록 큰 잘못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작은 자를 돕는 것은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큰 일만을 꿈꾸었던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 눈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충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악을 행해서 영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살아서는 주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많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주셨고, 여러 가지 달란트와 기회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많이 주셨기 때문에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했던 열매가 나오지 않고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그것을 땅에 묻어 버리면 주님께서는 실망하실 것입니다. 이런 실망감 때문에 주님은 더 강경하게 염소의 무리로 분별된 자들에게 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 앞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그때가 닥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도둑처럼 언제 갑자기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때에 주님으로부터 칭찬받고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영생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속으로 믿는 바를 겉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는 세상 종말에 예수님 앞에서 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양이 되어서 오른편에 서고,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하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지극히 작은 소자를 대접하는 사랑이 있게 하옵소서. 그들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에, 그들을 돌보고 대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낮고 천한 자리로 찾아오신, 우리 주님을 만나 뵈옵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로, 하나님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