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리아 크리스테바
경계를 넘나들고 초과하는, 사랑의 글쓰기
(경계의 공간에서 글쓰고 말하기)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옛 동구권인 불가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학술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어느 곳에도 완전히 귀속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 겪는 경험을 통해 경계를 위반하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의 ‘경계성’을 말하기의 역량으로 삼고, 장르를 넘어 문학, 기호학, 정신분석학 등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모색한다.
(불가리아에서 프랑스로: 지적 여정의 시작)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41년 유대계 부모님에게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태어났다. 소피아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 영어 문헌학을 전공하고 구 사회주의 국가의 정규 과정인 마르크스와 헤겔을 중심으로 철학과 사회학을 교육받았다.
석사 과정에서 프랑스 현대문학과 누보로망에 나타난 인물을 연구했다.
누보로망은 등장인물에 깃든 인간 중심주의와 사실주의 반대하고 전지적 창작자로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적 시, 공간 구축의 서사 방식에서 벗어난다.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쓴 누보로망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중 프랑스로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바흐친, 야콥슨과 같은 구조주의의 모태가 된 러시아 형식주의자의 텍스트를 연구하고,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루마니아 출신 망명가이며 문학이론가인 뤼시앵 골드만의 세미나에 참가하여 누보로망에 대해 계속 연구한다. 아울러 당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던 기호학 연구에 참여한다.
1967년 문학 기호학을 다루고 언어학, 심리학적 방법론을 다루는 잡지 ‘텔켈’에 새로운 혁신을 일으키며 주도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부터 크리스테바는 언어체계를 정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사건이나 과정처럼 역사적인 변화의 면에서 검토하는 작업을 본격화한다.
(경계를 허물고 생산하는 텍스트)
구조주의 관점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작용은 자의적이다.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니고 다른 의미와 연관된다. 이런 기호들의 체계가 언어 구조다. 기호 체계인 언어 구조에서 의미작용은 체계 내부에서만 발생하기에 정태적이나, 크리스테바가 연구한 바흐친의 논의, 곧 텍스트와 텍스트가 만나 새로운 의미가 역동적 창출됨을 보여줌으로써 구조주의 체계의 정태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바흐친의 이런 논의를 소개함으로 학계에 인정을 받게 된다. 아울러 구조의 완결성과 자족성에서 벗어난, 역동적 의미 생산에 대한 탐구를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텍스트의 유일한 소유자이자 창조자인 작가의 위상을 비판하는 개념으로 모든 텍스트가 기존의 개별적 텍스트들 그리고 서술의 규율과 관습에 의존하여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 않다고 본다. ‘모든 텍스트는 인용구들의 모자이크로 구축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킨다.’ 의미는 텍스트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와 함께 작동한다. 텍스트들과의 관계를 통해 언제나 새로운 의미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탈 경계적 텍스트 이해.’
(언어를 창조하는 공간인 코라와 기호계)
크리스테바는 오이디푸스 전에 존재하는 어머니를 복원하기 위해 코라라는 개념을 상정한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코라 개념은 일체 생성의 수용자이며 마치 유모와 같은 저장소, 양성소이다. 코라는 우주를 만들어낸 기원에서 등장하며 혼돈의 상태에서 형태와 질서 잡힌 우주를 만들어낸 그릇이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에게 코라는 저장과 순응의 이미지는 아니고, 생성의 역동성과 운동성을 갖고 있다. 코라는 언어의 의미를 활성화하는 에너지이다.
코라는 아버지의 법 이전에 존재하기에 전언어적이지만, 언어를 창조하는 공간이다. 코라에서 언어 이전에, 언어를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활동한다.
코라라는 공간을 의미 작용의 측면에서 기호계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말하는 존재의 표층 아래서 의미 작용을 일으키는 역량이며, 언어와 육체적 충동의 접면이다. 코라적 기호계는 넘치는 섹슈얼리티와 육체적 충동을 언어로 창출하고 표현하는 에너지이다. 오이디푸스 이전의 충동들로 가득하다. 전언어적 추동력. 내가 나로서 동일시되기 이전, 나와 타자가 구별되기 이전이다.
기호계는 이후에 상징적 언어 단계로 포섭불가능한 중단(interruption), 부조음(dissonance), 리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코라의 기호계가 지닌 파괴적 힘은 상징적 경계를 범람하고 파기하여 ‘사건’으로 출현한다. 기호계의 사건적 출현. 이런 텍스트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누구인지 모를 다수의 목소리로 쓰이고, 웅얼거림이나 외침으로 표현되며, 음악연주로 제시된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시간적이거나 청각적이거나 간에, 상징적, 표상적 체계를 넘어서 직접적인 기호계를 표현하면서 언어 질서를 교란하고 혼란을 야기한다.
코라와 기호계에 대한 설명에 그로츠와 같은 여성주의자들이 비판한다. 기호계와 코라가 어머니의 육체적 공간이 지배하는 단계라면, 결국 이러한 어머니, 여성의 육체는 남성이 상징한 일종의 환상에 복무하고, 코라 공간으로서의 어머니는 여자들이 체험한 모상이 아닌 모성에 대한 남성적 환상이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는 결국 언어를 갖는 상징계로 나아가지 못해 말이 없는 육체 속에 갇히게 된다. 때문에 기호계는 인간이 언어로 말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 거치는 필수 조건이지만, 동시에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결국 희생당한다.
(‘나’라는 경계를 구성하는 아브젝시옹, 비체)
크리스테바의 연구가 1960-70년대에는 기호학과 언어에 맞추어져 있었다면, 말하는 주체의 생산과 변화의 과정을 정신분석적 경험에 맞추어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공포의 권력’이라는 저서에서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비체로 번역되는 아브젝시옹은 언어 상징계가 요구하는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비체는 코라 기호계와 관련한다. 주체가 언어적 상징계에 도달할 때, 코라의 기호계에서 빠져 나오면서 버린 코라적 에너지가 비체다. 비체는 자아 정체성의 도달에 필수적인 것이다.
‘내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맹렬한 구토물과 오열과 더불어 자아를 낳는다.’ 자아가 구성될 때, 언어화되지 못한 잔여물이 남는다.
이 언어화되지 못한 것, 언어화 이전에 존재하는 것에 기반한 비체가 모호한 나의 경계를 창출한다. 비체는 주로 혐오감과 거부감으로 등장하지만, 이러한 비체가 내 삶의 조건이자 한계이며, 그 한계는 살아있는 내 육체에서 발산된다. 비체는 억압하거나 대상화할 수 없고, 경계 구성체이며 언제나 우리의 삶과 함께 한다.
주체를 이루는 경계면에 존재하고, 견뎌낼 수 없는 것으로 갑자기 나타난다. 언어를 잃어버린 상태로, 부정적 감정과 대상화될 수 없는 공포로 등장한다. 공포를 야기하는 비체의 출현은 비체가 주체의 경계임을 일깨우며 경계를 마비시킨다. 비체에 점령되고 마비된 존재는 경계를 잃고 방황한다. ‘아브젝트에 점령당한 사람은 스스로를 인식하거나 욕망하거나 어딘가에 속한다기 보다는 밀려나고 분리되고 방황하는 존재에 더 가깝다.’
비체는 주체와 대척점에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내가 나로서 정체성을 확증할 때에 나에 속하지 않는 것이 비체로 버려지는데, 버려진 비체는 나를 둘러싸는 경계에 머물러 있다. 비체의 출현과 점령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위기’를 야기한다.
그녀는 비체를 통하여 사람이 나와 다른 타인, 이방인들에게 매혹되면서 동시에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한다. 모호한 경계를 가진 존재에게 끊임없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질문하고, 같은 편이면 포섭, 다르면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체는 언제나 경계 근처에 있고 동질의 내부로 결코 들어올 수 없기에 이것이 동질성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면 내집단에게 곧장 극단적 혐오와 박해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활동, 언어 활동)
언어 활동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탐구 여정은 (1)언어 이전의 기호계와 (2)경계에 머물면서 공포로 출현하는 비체를 거쳐 (3)사랑의 활동으로 향한다.
(1)의미를 지니지 않는 흔적과 (2)동일한 의미로 포섭할 수 없는 이질성은 공포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3)글쓰기를 일으키는 거대한 역량이다.
글쓰기이자 활동으로서의 사랑은 나를 계속 타자와 만나게 하고 나라는 허구성인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게 하고 언어의 의미를 새롭게 생산한다. 사랑이 일으키는 복합적인 말들은 열정 앞에서 불처럼 타오르면서 말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사랑의 언어 활동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나는 나’라고 하는 동일화의 영역을 넘어선다. 나를 무너뜨리는 사랑 활동을 언어 활동의 창조성과 관련시킨다. ‘사랑에 있어서 나(je)는 타자’였음을 의미한다. 크리스테바는 최초의 정신활동인 언어활동이 결코 의미를 붙잡을 수 없는, 이질성들 그리고 타자들로 가득 찬 에너지의 추동력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한다. 정신 현상은 타자와 연결된 열린 체계이므로 정신 활동은 이런 조건 아래서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근대적 주체라는 심리적 자아의 이상에서 벗어나서, 크리스테바는 말하는 주체를 말하게끔 하는 주체의 무의식적 경험을 탐색하고, 언어 체계를 다른 사회구조들의 압력과 함께 역동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결국 사랑의 활동으로서 언어 활동은 ‘경계인으로서 사는 공간에 머물기’이다. 사랑의 활동은 경계인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정신의 공간을 만들고 사랑의 활동으로서 언어 활동은 의미화를 작동시키는 타자성을 인정하고 실현시킨다(동일성을 향한 완고한 애착탈피). 이러한 언어 활동은 일상에서 등장하는 이질성, 경계성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다름과 함께 작동하고 작용한다. 결국 언어 활동이 사랑의 활동이 될 때, 타자를 두려워한 나머지 혐오하거나 그들의 입을 막지 않을 수 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질성을 승인하고 스스로 혐오에서 빠져나오는 윤리적인 활동이다.
(소감)
경계에 머물면서도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낸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학자에 감탄하지만 나는 상호텍스트성에 대하여 코라에 대하여 비체에 대하여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전언어적, 강력한 창조의 에너지를 간직한 코라-기호계와 비체 개념을 통하여 언어와 문학에서보다 오히려 자신, 타인, 사회와의 윤리적인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 것은 그녀의 평생 연구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인지, 한참 벗어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나의 경계에서 머물러 있는 비체는 무엇인가 생각하며 읽었다. 정말 나인지 누구도 정확하게 대답해 줄 수 없는 내가 되기 위해 내가 버린 것이 무엇인가. 나를 타자로 확인하는 사랑의 활동은 뭘 말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정리를 마칩니다. (우은희-끝)